‘리틀 시카고’<br>정한아 지음, 문학동네, 233쪽, 1만2000원
나는 뒤를 돌아 골목을 바라본다. 부대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두꺼운 침묵이 깔린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순간이 두려워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도망치듯 골목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줄곧 이때를 기다려왔다. 끝에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이제 나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일 테니까. - 정한아, ‘리틀 시카고’ 중에서
나는 소설의 본류는 인간학임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따라서 소설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 중 핵심은 인간(인물·캐릭터)이다. 소설은 이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죽는 사건, 곧 인생의 어느 한 때, 정확하게는 문제적인 한 시기를 그리는 것인데, 이 시기 이 인간이 처한 장소, 곧 공간(환경) 또한 소설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한다. 소설에서의 공간은 영화에서의 장면(scene·스크린)보다 선행한다. 영화가 발명되기 전 독자들은 소설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장면들을 경험했고, 소설가는 영화감독 이전에 미장센(mise en scene·작가가 연극이나 영화에 부여하는 시각적인 요소, 통칭 ‘연출’)을 소설에 적용했다. 선두 그룹에 19세기 소설가 발자크가 있고, 가장 후발 그룹에 21세기 소설가 정한아가 있는 셈이다.
독자를 관객으로 만드는 문장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세상은 흑백의 풍경이다. 시신경이 활성화된 생후 4개월까지, 아기들은 묽디묽은 무채색의 세상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은 점차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맨 처음 나뭇잎이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순간, 병아리의 솜털이 노랗게 변한 순간, 하늘이 석양의 붉은빛으로 물든 순간, 아기들은 놀라서 소리를 지른다. 그 빛은 우리 생에 잠시 머물렀다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다들 뒤늦게 이마를 치는 것이다. 좀 더 봐둘걸, 좀 더 머물러서 봐둘걸.
내가 태어나 자란 골목은 ‘리틀 시카고’라 불렸다. -정한아, 앞의 책 중에서
골목에서 시작해 골목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분류하자면, 골목담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가는, 삶의 어두운 이면에 가려져 있다가 세상에 나온 공간들 -집, 골목, 거리, 광장, 언덕- 은 소설가에 의해 세상(소설)에 호명되면 끊임없이 형상을 만들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공간, 곧 장면이 살아 있는 소설은 독자를 관객으로 변화시킨다.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은 스크린이 되고 독자는 관객처럼 스크린 속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한다. 밀란 쿤데라는 영화감독이 출현하기 이전 독자를 관객으로 만든 작가로 발자크를 꼽는다.
어느 지방의 몇몇 도시에는 겉모습에서 아주 음침한 수도원이나 지독히 쓸쓸한 황야, 아니면 말할 수 없이 서글픈 폐허가 연상되는 그런 우울함이 느껴지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틀림없이 수도원의 침묵과 황야의 쓸쓸함 그리고 해골이 나뒹구는 폐허의 분위기를 풍길 것이다. 그곳에선 삶의 움직임이 하도 고요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에게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우며, 군데군데 외진 곳이 있어 지금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그 오르막길은 늘 깨끗하고 건조한 좁은 자갈길의 돌 부딪치는 소리, 꼬불꼬불한 길의 비좁음, 구시가지에 속해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집들의 고요함 등으로 명성이 나 있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조명원 옮김, 지만지고전천줄, ‘외제니 그랑데’ 중에서
이것은 20세기 영화 연출자들에게 유용한 참고가 돼온 발자크 소설의 일단이다. 독자들은 스크린에서처럼 문장과 행간 사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발자크에서 출발한 이러한 스크린(scene) 기술 또는 전통은 플로베르(‘감정교육’의 파리)를 거쳐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즈’의 더블린), 버지니아 울프(‘댈러웨이 부인’의 런던) 등 20세기 현대 작가들에 이른다. 그리고 1930년대 모던 보이 박태원(‘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경성)이 있고,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21세기 정한아(‘리틀 시카고’의 기지촌 골목)가 있는 것이다.
미군들이 지은 그 이름은 마피아와 갱단이 활약하던 범죄의 도시 시카고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 … 그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 꼭 무지개가 뜨는 것 같았다. 그 골목은 갖가지 색깔을 품고서 오십 년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골목 한가운데서 레스토랑을 했다. -정한아, ‘리틀 시카고’ 중에서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는 미군부대 기지촌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무대 삼아 3대에 걸쳐 골목 레스토랑 안팎에서 벌어진 골목담의 이모저모를 펼쳐 보이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화자가 12세 선희라는 것이다. 골목담이되, 열두 살 소녀의 눈에 비친 제한적인 풍경이다.
원체험 불모 세대의 소설적 탐구
골목 사람들의 얼굴은 항상 미군부대 쪽을 향하고 있었다. … 미군들이 골목을 떠날 때마다 샬롬하우스의 아이들이 늘어났다. … 토니 아저씨는 골목 안에서 제일 유쾌한 미국인이었다. 미군으로 이 골목에 들어온 아저씨는 부대 내 현지 직원이었던 한국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곧 그녀와 결혼해서 미카를 낳았다. 아저씨는 뉴올리언스 출신이었다. 나는 그 도시의 안개와 유령, 루이 암스트롱에 대해서 질리도록 들었다. -위의 책 중에서
소설은 이야기, 그것도 특별한 이야기를 토대로 짜인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기가 모두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는 어떤 의미에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나 박완서의 ‘나목’의 고유한 장면을 환기시키며 동류항의 면모를 보인다.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려지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 길 양켠은 가건물인 상점들을 빼고는 거의 빈터였다. 드문드문 포격에 무너진 건물의 형해가 썩은 이빨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 오정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유년의 뜰’ 중 ‘중국인 거리’ 중에서
부옇게 흐린 날씨에 정전까지 겹쳐 네 명의 환쟁이들은 능률을 못 내고 있었다. … 환쟁이들이 밥벌이로 하고 있는 이 초상화 그리기가 이만치라도 바쁜 것은 고작해야 미군들 봉급날인 월말을 전후해서 일주일쯤이지 그 밖의 날은 그저 심심풀이나 면할 정도였다. … 갑자기 환한 조명 속에 건너편 미국 물품 매장 쪽을 나는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설레는, 좀 황홀하기조차 하는 기분으로 바라봤다. - 박완서 지음, 세계사, ‘나목’ 중에서
전쟁 중 폐허가 된 수도 서울의 PX 초상화부를 무대로 예술과 사랑을 향한 스무 살 여성의 불안한 심리와 동경을 그린 ‘나목’(1970), 전후 인천 중국인 거리의 불안정하고 야릇한 이국 장면에 열세 살 초경 무렵 소녀의 흔들리는 심리를 제한시점으로 투영한 ‘중국인 거리’(1979). 그리고 전쟁은 끝났으나 50년째 이어져온 미군 기지촌 레스토랑을 무대로 전해지는 인생유전을 전쟁 체험 세대인 할아버지의 어린 손녀의 눈으로 관찰한 ‘리틀 시카고’(2012). 이들은 작가 개인의 유년 체험이지만, 역사의 특별한 시기, 특별한 공간과 맞물리면서 체험이 소설로 발전한 경우들이다. 이때 체험은 전쟁이나 가난, 불구 등 특수한 시기, 특수한 사건에 뿌리를 둔 창작의 동력으로 원체험이라고 부른다. 박완서, 오정희의 유년의 삽화가 전쟁 체험 세대의 원체험에서 기인한다면, 정한아의 경우 원체험 취약 또는 불모 세대의 소설적 탐구라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세상(소재)은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주제에 치중한 미성숙한(거창한) 주장도 소재에 함몰된 과잉(자의식) 묘사도 아닌, 서른한 살 작가 정한아가 선택한 골목담, 과도하지 않은 소소함과 리듬감이 돋보인다.
미군들이 이 골목을 떠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솟아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혼비백산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땅은 어둠과 고요 속에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 제대로 된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정한아, ‘리틀 시카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