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 ‘강남스타일’은 유튜브에서 4억 건 넘는 조회 수를 올리고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하며 올해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등극했다. 단순하면서도 재미있는 말 춤과 중독성 강한 멜로디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강남스타일’의 인기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베벌리힐스 강남과 국가 브랜드 가치도 덩달아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 어디 그뿐인가. 싸이의 일거수일투족과 그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 한국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접수한 싸이 열풍을 진단한다.
음악계에서도 싸이의 빌보드 정복은 일대 센세이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가수의 노래가, 그것도 한국어로 부른 노래가 일본의 오리콘 차트도 아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빌보드 차트 정상을 목전에 뒀다는 소식에 음악관계자들조차 경기(驚氣) 들린 듯 얼떨떨한 표정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싸이의 오랜 노력과 내공을 인정하면서도 ‘천운’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B급 이미지로 친근감 폭발
세계적 대박을 터뜨린 음악적 이유는 충분하다. 역사적으로 집단의 흥분과 히스테리 측면에서 어떤 장르보다도 강점을 발휘해온 댄스음악의 전형인데다 대세인 전자음악(일렉트로니카) 사운드 중에서도 황홀경을 뜻하는 트랜스(Trance)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트랜스는 과하면 천속한 느낌을 주고 덜하면 재미가 없다는 점에서 ‘강남스타일’은 절묘하게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한다는 평이다. 이건 싸이의 재능일 것이다.
게다가 이 곡이 취하고 있는 셔플리듬은 빌보드 1위를 점령한 일렉트로니카 2인조 엘엠에프에이오(LMFAO)의 ‘Party rock anthem’이 야기한 셔플 열풍에 살짝 기댄 측면이 있다. 미국인들은 이로 인해 ‘강남스타일’이 알아듣지 못할 한국말임에도 이국적이거나 생경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근래의 트렌드와 아주 유리되어 있거나 지나치게 한국적이었다면 반응은 그처럼 빠르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우리 입장에서는 노랫말이 먹혔다. 23년 전인 1989년 변진섭의 ‘희망사항’ 이래 가장 재미나고 발랄한 남녀상열지사라는 말이 나온다. 특히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이때다 싶으면 묶었던 머리를 푸는 여자!’‘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 대목은 압권이다. 입에 딱딱 달라붙는 재미를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복 터진 것은 ‘강남스타일’ 제목 그 자체다.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고, 춤을 따라 추는 상태를 넘어 제목과 가사를 바꿔 ‘태릉스타일’‘뉴욕스타일’‘마산스타일’‘변태스타일’등 얼마든지 자기 식으로 변용(變用)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인기의 무궁한 확산에 힘을 보탰다. 대박의 조건은 다 구비한 셈이다.
메시지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메시지는 표면화된 게 아니라 그 밑에 숨어있다. 뮤직비디오에서 열연하고 있는 싸이는 정장에 선글라스로 폼을 내지만 말춤을 추는 모습은 뭔가 부족해 보이고 망가진 것 같은 모양새다. 품위와 격조가 없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싸이는 “미국인들이 나를 유쾌하고 약간은 엽기적인 캐릭터인 오스틴 파워 닮았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운 광대요, 피에로 이미지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B급이자 조연이요, 등수로 치면 한 20등 정도나 될까. 그런데 그가 ‘한국의 베벌리 힐스’ 강남스타일이라고 떠든다. 사실 우기는 꼴이다.
그런 역설이 바로 재미를 잉태하고 대중적 파괴력을 발한다. 만약 잘생긴 장동건이나 강동원이 강남스타일이라고 하면서 정통과 우아함을 드러냈다면 호감은커녕 반감을 불렀을 것이다. A급 아닌 B급, 일류 아닌 이류 삼류, 주연 아닌 조연, 상위가 아닌 하위가 갖는 친근감의 폭발이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잘난 사람들과 1등, 1%가 지배하는 세상, 쿨(Cool)함과 고품격이 압도하는 사회에 대한 은근하고도 유쾌한 린치를 읽는다.
돌풍 밑거름 ‘케이팝 인기’
일각에서는 싸이의 빌보드 대첩을 한국 혹은 케이팝(K-Pop)과 연관짓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다. 어디까지나 싸이의 개인적인 성공일 뿐이지 그것을 한국 대중문화의 글로벌 도약이라거나 케이팝의 새로운 기회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이다.
싸이 자신도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냥 아티스트일 뿐이다. 운동선수처럼 국가를 대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월드가수 아닌 국제가수로 불러달라”는 말도 유사한 맥락이다. 그가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르자 언론이 일제히 그의 성공을 넘어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인정, 한국의 자부심과 긍지 쪽으로 해석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하지만 ‘케이팝이 세계로 간다(K-Pop goes to global)’는 타이틀의 특집기사가 쏟아져 나온 직후에 아시아, 유럽, 남미 유수의 언론은 물론 ‘타임’마저 싸이 돌풍을 굳이 케이팝과 떼어내 다룬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싸이가 이 정도의 월드스타덤을 수확한 데는 분명 ‘비’‘원더걸스’‘소녀시대’와 같은 이전 케이팝 가수들이 최소 7~8년간 꾸준히 미국시장을 두드린 노고가 밑거름이 된 게 사실이다. 어느 정도는 한류의 누적된 내공에 따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전 가수들이 성실하게 문을 두드렸고 싸이는 그 문을 활짝 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한 장면
‘강남스타일’의 인기는 한국에서 발발해 미국으로 번져간 것이 아니라 미국이 나서서 인기몰이를 유도한 셈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 한국 노래 하나에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쓸 만한 한국 노래 하나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서 나타난 ‘강남스타일’의 가공할 인기를 받아들였다기보다는 미국이 ‘강남스타일’을 뽑아 그 인기를 다른 나라들에 확산시켰음을 뜻한다(마침 싸이가 버클리 음대 출신에 영어가 능숙하다는 사실은 싸이 본인에게는 유리하게, 미국 음악계에 금상첨화로 작용했다).
선택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곡이 가진 세계적 호응의 가능성 때문이다. 거기에 미국의 탄탄한 월드시장 마케팅을 동원해서 얻을 수 있는 산업적 파괴력을 감안한 것이다. 즉 널리 팔 수 있어서였고 그렇게 되면 미국 음악계는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된다. 글로벌 시장에서 엄청난 수익이 생기는데 한국 가수면 어떻고 태국 가수면 어떠한가. 동양의 문화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로 신비화하는 것 같으면서 실은 타자(他者)로 만들어버린 일은 과거지사다. 이제 옛날처럼 동양에 배타적이면 곤란해진다.
美 음악계 마케팅 탁월
메이저리그에 더 이상 앵글로색슨계를 고집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라틴과 아시아 선수들이 득시글거리게 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LA 다저스 팀이 박찬호를 데려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박지성을 불렀듯 미국 음악계가 싸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강남스타일’을 요청한 것이다. 철저한 상업적 시각이다. ‘강남스타일’이 떠오르자 이곳저곳에서 1995년 로스 델 리오(Los Del Rio)의 ‘마카레나’에 비유하거나 견준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이 오십을 앞둔 두 스페인 아저씨가 부른 이 곡도 미국 음악계의 판단과 선택으로, 빌보드 차트에서 14주간 1위를 기록하는 세계적 대박을 터뜨렸다. 둘 다 재미있는 댄스음악이지만 유사한 히트 경로를 밟은 셈이다. 미국이 음악자본을 굴려 음악을 유통하고 매출을 거둬들이는 데 미국 가수든 스페인 가수든 한국 가수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걸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도쿄돔에서 공연하는 등 최고 인기를 누리는 ‘카라’가 돈을 번다면 일본이 버는 것이지 한국이 버는 게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가수 얼굴만 달라질 뿐 어차피 일본의 음악자본을 돌리는 것이다. 연예인은 국적 불문이다. 물론 싸이도 수입이 늘어날 것이고 소속사 YG도 일정 수익을 챙길 것이다. 그것은 미국 입장에서 응당 지불해야 할 기본비용이다. 큰 매출과 수익 그래프를 그리는 주체는 미국의 음악계다.
이러한 미국의 상업적 산업적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강남스타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남스타일’에 이어 우리가 열망하는, 싸이를 포함한 케이팝 가수들의 또 다른 빌보드 히트곡이 쉬 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강남스타일’의 재미와 세계적 흥행 잠재력이지 결코 싸이나 케이팝 가수 나아가 케이팝 장르는 아니다.
지구촌 전체에 그토록 거대한 열풍을 일으킨 ‘마카레나’ 이후 ‘로스 델 리오’의 두 번째 히트곡은 없었고 스페인 출신 가수들이 약진하지도 않았다. ‘마카레나’ 하나로 모든 게 소비되면서 ‘로스 델 리오’에 대한 수요는 끝나버린 꼴이다.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케이팝의 새 기회로 직결시키는 것은 자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싸이만 해도 ‘강남스타일’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에 매진하겠지만 그러한 열풍의 재현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본인도 음악관계자들도 안다.
인기 후속타 쉽지 않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칼럼을 게재했다. ‘랩 아티스트 싸이에 의한 ‘강남스타일’ 비디오의 가공할 성공은 한국의 성장에 대한 기괴한 암시다. 이 뮤직비디오는 한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놀라운 경제성장이 낳은 벼락부자, 성형수술의 라이프스타일을 부드럽게 비꼬고 있다. (독점 엘리트에 의해 왜곡된 경제 속에) 더 많은 한국인은 과도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느끼며, 사회적인 압박에 의해 짓눌려 있다고 느낀다.’
한 명의 코믹 광대가 엘리트가 독점하는 불평등한 세상을 비아냥거리고 있다고 할까. ‘강남스타일’의 광대한 흡수력은 신나는 댄스와 함께 이러한 은근한 카운터펀치의 메시지에 기인한다. 또한 2002년 데뷔 때의 ‘새’를 거쳐 ‘챔피언’‘낙원’‘연예인’‘라잇 나우’로 이어진 히트곡들 속에서 싸이는 언제나 자신을 불태울 듯 몸 바쳐 춤을 춘다. 광대가 보여주는 그 댄스에 대한 열정적 헌신에 사람들은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열정과 헌신이라는 도덕과 멀어져 있다.
정말로 간만에 신나고 의미가 도사린 대중가요에 지구촌 전체가 포박을 당했다. 광대의 몸짓과 언어에 즐거움을 만끽하고 동시에 삶의 페이소스를 맛보듯이 우리는 ‘강남스타일’에 마구 춤추고 이어서 그 속에 도사린 조롱의 의미에 살짝 쾌감을 느낀다. 그것으로도 충분한데 미국이 불러 주조해낸 글로벌 성공이라는 거대한 전리품, 싸이 말로는 덤을 챙기고 있다. 국가주의에 찌든 해석이든 뭐든 간에 한국 문화의 또 다른 전기가 될 것이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