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강원 영월 흥교리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입력2012-10-23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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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고금을 통해 운명을 탓하는 영웅은 부지기수다. 중국 대륙에서는 항우가 죽기 전 말고삐를 부여잡고 우희와 더불어 운명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음을 한탄했다.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시뻘건 불 아궁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며 “적은 혼노지에 있었다”고 했다.

    후삼국 말기의 궁예도 비슷한 경우다. 한반도 통일을 꿈꾸었던 그도 시대가 따라주지 않음을 개탄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강원 영월군 영월읍 흥교리 일대는 궁예의 피눈물이 서린 곳이다. 일찍이 세네카가 말하지 않았던가. 운명에 순응하는 자, 운명의 신이 황금수레에 태워 고이 모셔 간다. 운명을 거역하는 자, 수레바퀴 뒤편에 묶어 끌고 간다.

    영월에 위치한 세달사지(址)는 행정구역으로 영월읍 흥교리에 속한다. 영월읍에서 남으로 난 길을 타고 서강을 건너면 버스 종점이 나온다. 여기서 ㄹ자 좁은 도로를 타고 굽이굽이 한참 올라가다보면 놀랍게도 탁 트인 벌판을 만나게 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기루 같은 일이다. 마을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고갯길을 돌면 어느 순간 널따란 들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질학적으로 말하자면 플래토(plateau), 즉 해발 500m 선상의 넓은 고원이다.

    게다가 들판은 평지처럼 완만해 산 정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치 무릉도원처럼 숨어 있다 ‘짠’하고 등장하는 마을이 바로 흥교리다. 마을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마치 대나무 소쿠리처럼 동네를 푸욱 감싸 안고 있다. 영월초등학교 흥교 분교는 마을 중앙에 자리한다. 깊은 산속이어서 그렇겠지만 너무나 고요하고 적막해 세상의 어떤 소란함도, 무서운 전쟁도 비껴갈 것 같은 안온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궁예가 이곳에서 통일의 꿈을 키운 것일까.

    그러나 이 천혜의 땅에서 웅지를 키우던 궁예도 결국은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셈이니 나는 자꾸만 산세와 마을 전체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게 됐다. 굳이 그 이유를 붙여본다면 흥교를 빙 둘러싼 채 방패 역할을 해주는 산 기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것밖에 모르는 아마추어 풍수가의 무모함이라고나 할까. 얄팍한 내 내공으로는 짐작도 못하겠지만 흥교 땅이 워낙 근사해 보인 탓에 궁예의 파란만장한 삶과 견주어보고 싶었다.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폐교된 영월초등학교 흥교 분교.

    강원의 무릉도원

    지금은 폐교된 영월초등학교 흥교 분교는 화전민이 넘치던 그 옛날에는 학생수가 150명이 넘는, 강원도에서 제법 규모가 큰 분교였다. 화전 경작이 금지된 이후 시름시름 학생이 줄어 지난 1998년 폐교되고 남루하게 버려졌다. 여름 한철 누군가가 임차해 사용했다는 분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단풍나무 한 그루가 가을볕에 제 몸을 스스로 붉게 불태우고 있다. 뒤편 공터에는 여름밤을 취하게 했던 수많은 소주병과 고기를 구워 먹던 이글대던 불판들이 낙엽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가운데로 살이 오른 갈색 뱀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여행의 목적이 각기 다르고 감회 또한 다르지만 폐교를 둘러보는 일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깊은 산골 출신인 나는 한순간 야릇한 비애를 느끼게 된다. 삶이 결코 행복하지도 풍요롭지도 않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묘한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절대 오지가 최근 들어 주목을 받는 것은 어느 날 귀한 기왓장들이 발굴되면서부터다. 이곳이 바로 궁예가 도를 닦던 세달사지로 확인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인 흥교마을에는 열두 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고랭지 채소를 가꾸는 토박이는 몇 안 된다. 이른바 산자수명한 곳을 찾아온 대처 사람들이 사는 그림 같은 집들이 서너 채 풍경 속에 잡힌다.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담배건조장.



    계곡 건너면 단양, 산 넘으면 봉화

    눈앞 계곡을 건너면 충북 단양이고 건너편 산을 넘으면 백두대간의 절대 오지라는 경북 봉화 땅이다. 그래서 궁예가 뒷일을 모도하기 위해 신라 관도를 따라 숨어든 곳이 바로 이곳 흥교리였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폐사찰인 흥교사(興敎寺) 절터 뒤로는 등산인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태화산이 우뚝 서 있다. 흥교사는 681년에 세달사로 창건됐다. 궁예는 여기서 청·장년기를 보냈다. 이후 고려시대에 흥교사로 개칭됐다.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에는 영월 태화산 서쪽에 흥교사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한때 열두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사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든 절터만 남아 있다. 바로 1999년 폐교된 흥교 분교 자리가 절터다. 1984년 운동장에 뛰놀던 아이들은 석가여래입상과 영월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기와를 찾아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해발 500m에 위치한 마을이다보니 물이 귀하다. 논농사는 어렵고 주로 밭작물로 생업을 이어간다. 이 인적이 뜸한 곳의 단골손님은 현대판 박물장수 1t 트럭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트럭에는 생선, 휴지, 플라스틱 그릇 등 산간오지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트럭이 오는 날 장이 열리는 셈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흥교마을 들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검은빛 수숫대다. 널찍한 들판에 수수가 일렁인다. 어른 키보다 큰 수숫대는 바람에 ‘쏴아’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수숫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상상하는 사람이 지금은 몇이나 될까? 나 역시 박정만의 ‘헤매는 벌판’이라는 시를 알기 전에는 수숫대를 상상하지 못했다. 수숫대에 이는 바람소리는 박정만의 시와 많이 닮아 있다.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고구마를 수확하는 모습.

    누이여, 벌판에서는 새소리 들리고

    수수밭 머리에서는

    아직도 바람소리 끝나지 않았다

    바람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너는 너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철새마저 다 떠나가고 말면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 벌판을 흔드랴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 시인은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숨져갔다. 그 외에 내가 아는 것은 검은 수숫대로도 이렇게 비감 어린 시를 쓸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비극적인 삶을 살아갔음에도 그의 시에 나타나는 토속적인 시골 풍경은 정겹고 안온하다.

    2m가 넘게 자란 수수밭 속에서 사람은 상대적으로 아담하다. 잘 익은 수수 머리를 연신 잘라 담는 유봉열(74)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가을볕이 영글었다. 영월중학교 교사인 아들 내외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는 끝이 없다. 아마 사람이 몹시도 귀했나보다. 수수가 익어가는 가을 들판에 서면 누구나 옛날 생각이 엉킨다는 할아버지는 그래도 건강해 보였다.

    수수밭 속 인생이야기

    마을 사람 대부분은 이곳이 고향이다. 살기가 힘들어 외지로 떠났다가 이제 늙어 여윈 몸으로 돌아와 새로운 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고향을 찾는 데 제격이다. 이름 없는 골짜기에 정착한 사람마다 저마다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있다. 장년 세대에게는 “돌아가리로다/ 전원이 장차 거칠겠으니/ 어이 돌아가지 않으리까?”로 시작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있다. 7080세대에게는 대학가요제의 ‘귀거래사’가 먹힌다. “하늘아래 땅이 있고 그 위에 내가 있으니/ 어디인들 이내 몸 둘 곳이야 없으리/ 하루해가 저문다고 울 터이냐 그리도 내가 작더냐/ 별이 지는 저 산 너머 내 그리 쉬어가리라.” 똑같이 귀향을 그리는 노래도 세대에 따라 갈라지고 달리 이해된다.

    깊어가는 가을, 바람은 늘 골짜기 낮은 곳에서부터 불어와 산을 넘어 사라진다. 가을은 늘 안타깝게도 짧기만 하다.

    영웅 궁예의 슬픔이 녹아든 땅

    마을 주민이 수수 머리를 잘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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