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을 죽이면 살인범이지만 1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 전쟁의 승자는 ‘술 취한 것 같은 기쁨’으로 약탈, 살인을 일삼는다.
- 카르타고를 절멸시킨 로마의 살인자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뭘까?
카르타고는 군사력을 갖춘 해상대국이었으나 로마라는 라이벌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불우한 강국’이었다. 자코포 아미고니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한니발’
해골로 피라미드 쌓은 티무르
고대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리브는 바빌론을 함락시킨 뒤 모든 사람을 죽였다. 바빌론 시가지는 시체로 가득 찼다. 집과 사원, 성벽 등 건물을 천장부터 바닥까지 부수고 불을 질렀다. 또 바빌론 한복판에 운하를 파고 그곳의 물을 도시로 넘치게 해서 홍수를 일으켰다.
14세기 말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티무르는 이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직접 정벌에 나서 주민 7만 명을 죽이고 성 밖에 해골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티무르는 인도 정벌에서 델리를 점령한 뒤 10만 명이나 되던 포로를 모두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범이지만 1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한 명을 죽이건 1만 명을 죽이건 정당한 이유 없는 살인은 범죄에 불과하다. 전쟁은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잔인하고 참혹하다. 그럼에도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거나 필요악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전쟁론’으로 유명한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밝혔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외교는 말로 하는 전쟁이고 전쟁은 총으로 하는 외교다.” 클라우제비츠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흔히 인용되는 “외교라는 부드러운 벨벳 장갑 속에는 언제나 전쟁이라는 주먹이 숨어 있다”는 말 역시 전쟁의 필요악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아돌프 히틀러
전쟁에 대해 ‘필요악’ ‘불가피한 선택’ 심지어 ‘기쁨’과 ‘즐거움’으로 표현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살인이나 절도, 강도를 두고 불가피한 선택이니, 필요악이니 하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모든 범죄는 탐욕의 결과다. 국가가 벌이는 전쟁도 마찬가지다. 일반 범죄와 전쟁 범죄의 동기는 같다. 저지른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도 비슷하다. 전쟁 범죄는 특히 합리화가 심하다. 내 탓이 아니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패망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제 국가의 군주는 결정은 내리되 책임은 지지 않는다. 반면에 신하는 결정권은 없지만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기독교 국가의 군주는 신의 뜻을 받아 그 지위에 오른 존재이고, 그 군주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곧 신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상 군주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로마의 겁탈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독일인이 자신들의 총통, 국민,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은 히틀러와 같은 전쟁 범죄자들을 위해 나가 싸우고 비참한 결말을 맞은 것에 불과했다. 대다수 독일인의 비극은, 전쟁이 끝나서야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심지어 핵심 전범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독일 전범 상당수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은 군인 또는 독일 국민으로서 독일 법을 준수하고 조국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고대에는 전쟁이 범죄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살육과 약탈, 파괴는 승자의 전유물일 뿐 죄가 될 수 없었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끝나고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국제법이란 게 나타났다. 그러나 국제법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은 근대 이후에도 대량 학살과 약탈은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법 자체가 자연법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법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전쟁을 통해 죄 없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이며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인류 문명의 공적(公敵)인 전쟁을 범죄로서 분석하는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은 매우 놀랍다. 전쟁에 대한 연구는 웬만한 도서관을 가득 채울 만큼 넘쳐나지만, 전쟁을 범죄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분석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범죄학 역시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인류에게 해를 끼치고 인류문명에 위협이 되는 전쟁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개인 사이의 범죄에만 신경을 써왔다.
전쟁으로 인한 학살, 약탈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카르타고를 흔적도 없이 파괴한 로마도 살육과 약탈, 파괴의 아픔을 여러 차례 겪어야 했다. ‘로마의 겁탈(Sack of Rome)’로 불리는 사건들은 전쟁의 잔혹함과 함께 범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로마를 점령하고 유린한 최초의 사건은 기원전 390년에 벌어진 켈트족의 침략이었다.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로마는 귀족과 평민이 기득권을 놓고 심한 대립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평민들이 로마를 떠나 대거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평민들이 빠진 로마는 방어능력을 상실했고 그 틈을 타서 프랑스에서 켈트족이 들이닥쳤다. 로마는 약 7개월에 걸쳐 폐허로 변했다. 집과 거리는 시체로 넘쳐났고, 전염병이 로마 전역을 삼켰다. 켈트족이 더 이상 매력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도시를 버리고 떠났을 만큼 로마는 철저하게 망가졌다.
두 번째 겁탈은 로마제국이 서서히 종말로 접어들던 410년에 일어났다. 로마제국의 힘이 빠지자 게르만족은 수시로 로마의 북부와 동부를 침공했다. 로마의 명장 스틸리코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때로는 회유로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았으나 스틸리코가 게르만족과 내통해 로마를 손에 넣으려 한다는 그릇된 제보에 속아 로마황제는 스틸리코를 처형했다. 스틸리코가 억울하게 죽자 그를 따르던 로마 병사들도 게르만족 편으로 넘어갔다. 이 기회를 틈타 게르만족 가운데 서고트족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로마에 쳐들어왔다. 두 번에 걸친 포위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몰래 성 밖으로 탈출하는 로마 시민의 숫자가 늘어났다. 서고트 왕 알라리크는 성안의 내통자를 통해 성문을 은밀히 열게 했다. 로마 안으로 들어온 서고트족은 6일 동안 교회만 빼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약탈하고, 파괴했다. 수녀를 포함한 여자들이 능욕을 당했다.
두 번째 로마 약탈이 일어난 지 40여 년 뒤인 455년 이번에는 반달족(Vandals)이 로마에 쳐들어온다. 반달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에서 살다가 독일, 프랑스, 스페인을 거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 북아프리카에 독립왕국을 건설한 반달족은 지중해를 건너 로마를 약탈했다. 남의 물건이나 공공시설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라는 뜻의 반달리즘(Vandalism)이란 말은 프랑스 주교 앙리 그레과르(1750~1831)가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당이 자행한 파괴 활동을 반달족이 저지른 범죄행위와 비교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반달리즘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은 누구를 위해 싸운 것일까.
설사 이래서는 안 된다고 느낀 장군이나 병사가 있더라도 이들 역시 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느꼈을 리 만무하다. 조직범죄와 같은 집단 범죄가 더 잔인할 수 있는 것은 조직원이 책임이 자기한테만 있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른바 책임의 분산 효과다.
뉴욕에서 일어난 ‘키티 제노비스 사건’이 책임의 분산효과를 제대로 설명해준다. 1964년 3월 13일 저녁 뉴욕 시 퀸스의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35분에 걸쳐 잔인하게 살해됐다. 문제는 여자가 주택가에서 참혹하게 죽었다는 게 아니라 여자가 죽어가면서 살려달라고 계속 외쳤는데 동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이 여자가 당하는 상황을 내다보기만 했을 뿐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38명이나 됐지만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중 단 한 명만이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누군가 도와주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나만 본 게 아닌데’라는 책임의 분산 효과가 막을 수 있었던 살인을 방조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전쟁은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합리화와 정당화가 용이하다. 범죄학의 중화(neutralization)이론이 쉽게 적용된다. 중화이론이란 범죄는 범죄 행위의 합리화, 정당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모든 범죄는 합리화를 통해 발생한다.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칠 때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명백하게 자각하면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 부모를 모욕했으니까, 우리 집을 망하게 했으니까 등 피해자를 죽일 만한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낸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못사는 거니까 잘사는 사람의 돈이나 물건을 훔쳐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중화이론은 크게 책임 부인(denial of responsibility), 손상 부인(denial of injury), 피해자 부인(denial of victim), 비난자에 대한 비난(condemnation of condemners), 충성심에 대한 호소(appeal to higher loyalties) 의 5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로마의 술수에 넘어간 카르타고
시곗바늘을 서두에 언급한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되돌려 로마군이 왜 카르타고를 그리 잔혹하게 파괴했는지를 중화이론을 통해 살펴보자. 로마군의 전쟁 범죄는 다른 요소보다 피해자 부인, 충성심에 대한 호소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피해자 부인이란 자신이 해를 입힌 사실은 인정하지만 피해자가 입은 해는 마땅히 당해야 하는 일종의 정의로운 응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2)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히스파니아의 영토를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50년간 물어야 했다. 그럼에도 로마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없애버렸어야 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원로원의 실력자 대(大) 카토는 카르타고가 해상무역이 활발해 국력이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는 점을 들면서 카르타고 타도를 외쳤다. 실제로 카르타고는 50년 동안 막대한 배상금을 모두 지불할 정도로 경제회복의 속도가 빨랐다.
불안해진 로마는 카르타고가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을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다. 카르타고가 국력이 세지면 언젠가는 로마를 위태롭게 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침공 결심을 굳히고 침입 명분을 만들고자 카르타고의 이웃 나라인 누미디아를 끌어들인다. 카르타고의 선박과 영토를 마음대로 약탈하라고 누미디아를 부추기면서 뒤를 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카르타고의 모든 영토 분쟁은 원로원의 중재를 받아야 한다고 못 박아놓았기 때문에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영토 분쟁이 일어나면 원로원이 개입할 수 있었다.
누미디아의 계속된 침입에 카르타고는 조약에 따라 로마에 누미디아를 제재할 것을 청했지만 원로원은 누미디아 편만 들었다. 기원전 151년부터 시작된 누미디아의 카르타고 영토 침입과 해상 약탈은 2년 가까이 계속됐고 그로 인해 카르타고의 경제적 손실은 매우 컸다.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부탁을 외면만 하는 로마에 지치고 화가 난 카르타고는 더 이상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침입을 힘으로 직접 해결하고자 6만여 명의 용병을 모았다. 누미디아가 침공하자 용병을 주축으로 삼아 누미디아 영토로 쳐들어갔다. 로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약 위반이라고 카르타고를 비난한 후 조사단을 파견했다. 원로원에서도 카토를 중심으로 카르타고 타도를 외치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리스에서 로마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난 터라 분위기는 더욱 강경해졌다.
카르타고 역시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 문제로 대립했다. 강경파는 국력이 상당 부분 회복됐기 때문에 로마와 전면전을 해도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온건파는 누미디아의 침입과 약탈로 경제적 타격이 적지 않아서 로마와의 전쟁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화친을 결정했고 누미디아 공격에 나선 장군을 처형하는 한편 로마에 사죄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아예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인 로마는 카르타고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꺾고 로마에 승리를 가져다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대장으로 하는 군대를 아프리카로 보내 카르타고를 포위했다.
승자가 얻는 보너스, 살육
로마가 카르타고에 내건 협상 조건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먼저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를 로마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카르타고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두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모든 주민이 해안에서 15㎞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카르타고는 전쟁 외엔 대안이 없었다. 화평을 주장하는 사람을 모두 처형하고 결사항전의 자세를 굳혔다. 단기간에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로마는 육지와 바다로 통하는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카르타고를 옥죄어들어갔지만 카르타고의 필사적인 응전에 성을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카르타고는 성안의 모든 것을 무기로 활용했다. 성벽을 일부 헐어 투석용 돌로 이용했고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활의 줄로 사용했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면서 침공과 파괴 행위를 합리화했다. 피해자 부인인 셈이다. 이미 두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도 드러났듯 로마는 카르타고와는 공존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해상무역 능력은 탁월했고, 경제력 성장은 로마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미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의 심기를 건드린 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한 죄 등이 카르타고를 흔적도 없이 파괴한 구실이 됐다.
충성심에 대한 호소 역시 로마의 카르타고 침공의 구실로 작용했다. 로마 병사들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닌 ‘위대한 로마’를 위해 카르타고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했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은 어떤 범죄 행위도 서슴지 않게 하는 추진력이 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전쟁은 피해자 부인과 충성심에 대한 호소라는 요소를 갖고 있다. “쳐들어가서 미안해”라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경우는 없다. 궁색해도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서 침공을 합리화한다. 정의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식의 합리화를 통해 끔찍한 전쟁은 시작되고 숱한 무고한 생명은 스러져 간다. 그러나 어떤 합리화와 정당성 부여도 결국 궁색한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전쟁 범죄는 박수이론(clap theory)을 통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모든 범죄는 잘못된 코딩(coding)과 기회의 결합에 의해 발생한다. 코딩과 기회는 범죄의 필수요소다. 둘 중 어느 하나만 없어도 범죄는 발생하지 않는다. 전쟁 범죄를 포함해서 말이다.
코딩이란 학습에 의해 머리에 각인되는 것을 말한다. 전쟁은 범죄가 아니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코딩의 결과다. 전쟁은 필요악이라거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합리화 역시 잘못된 코딩의 결과다. 전쟁을 이끄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살육과 약탈, 강간, 파괴를 묵인하고 때로는 부추긴다. 이처럼 살육과 약탈, 파괴를 승자가 얻는 보너스로 인식하는 그릇된 생각이 전쟁 범죄를 더욱 잔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행위를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잘못된 코딩의 결과가 인류 문명에 미친 해악은 너무나도 크다. 국제법과 협약으로 불필요한 살상과 파괴를 금지한 이후에도 이러한 대량 학살과 약탈, 파괴는 끊이지 않고 있다.
알렉산더, 시저, 한니발, 진시황, 칭기즈 칸을 비롯해 우리가 영웅이라고 호칭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전쟁 범죄자다. 죄 없는 사람 수십만, 수백만 명을 죽였건만 정복한 땅의 넓이만큼 이들은 높이 칭송된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전쟁에 대한 착각을 낳게 하고 또 다른 전쟁의 씨앗으로 작용한다. 침략을 통한 살인과 강도를 국익(사실은 왕이나 실력자 개인의 이익)이라는 그럴싸한 용어로 그릇되게 코딩한 것이다.
모든 범죄는 기회가 주어졌기에 발생한다. 범죄 기회는 범죄 대상이 ‘매력적이면서 취약할 때’주어진다. 강도는 세 살짜리 아이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취약하지만, 돈을 갖고 있지 않아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도에게 매력이란 돈이고, 취약성이란 허점과 빈틈을 의미한다. 은행 강도는 돈이 많은 곳을 노리지만 그렇다고 한국은행을 털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한국은행은 매우 매력적인 범죄 대상이지만, 취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도 범죄 기회가 주어질 때 일어난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침공한 것은 카르타고가 매력적이면서 취약했기 때문이다. 모든 침략자는 승리의 열매가 달콤하면서 만만한 상대를 대상으로 고른다. 때로는 전력이 열세인 것처럼 보이는 나라가 상대적으로 힘이 센 것처럼 보이는 나라를 쳐들어가 예상 밖의 결과를 거둘 때도 있지만 그때도 취약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을 공략해 승리한 것이다. 도둑이나 강도가 빈틈이 많고 허술한 대상을 고르듯이 말이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로마의 격언은 지금껏 설명한 범죄 기회라는 측면에서 실로 적절한 표현이다.
범죄 기회는 피해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피해자가 취약하고 빈틈이 많더라도 능력 있는 보호자가 존재한다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좋은 먹잇감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경찰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강도나 다른 죄를 저지르기는 쉽지 않다. 전쟁 범죄가 되풀이되는 것은 경찰처럼 법 집행을 담당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상호방위조약 등으로 동맹을 맺어 보호 장치를 견고하게 하는 방식을 수천 년간 사용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미소 냉전시대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은 그 성격이 똑같다.
우리가 살인하지 않는 까닭
경찰이란 조직이 없던 고대와 중세 국가에서는 이웃끼리 연대해 도둑이나 강도에 대비했다. 어느 한 집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면(hue and cry), 다른 이웃들은 의무적으로 달려나와 도와줘야만 했다. 고대 영국에서는 타이딩(Tything)이라고 열 집을 한 단위로 묶어 범죄에 대비하는 시스템이 존재했고 우리나라 역시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서로 돕고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실시한 바 있다.
국가에는 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아들여 처벌할 수 있는 조직과 시스템이 있지만 국가 사이에는 이러한 조직과 시스템이 없다. 범죄의 억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처벌의 확실성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 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확실성이 존재한다면 죄를 저지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을 저지르면 이로 인한 대가를 치르고 처벌을 받는다는 확실성이 있어야 전쟁이 억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의 확실성은 전쟁 범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어쩌다 운 좋게 전범을 처벌한 적이 몇 차례 있었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를 비롯해 숱한 나라가 전쟁이라는 죄를 저질렀으나 전쟁에서 승리하면 처벌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공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거듭 얘기하거니와 정당한 근거 없는 전쟁이란 대규모 살인이고 절도고 강도고 사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전쟁에 대한 범죄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살인이나 절도를 저지르지 않는가. 양심과 도덕, 윤리 덕분에 그럴 수도 있고, 처벌의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처벌의 두려움도 잡히면 중형을 받을까봐 겁이 나서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경우도 있을 테고, 범죄예방이나 보안시스템이 잘돼 있어 범행 성공이 어렵다는 판단 때문일 수도 있다.
살인, 절도와 같은 미시 범죄에 적용되는 원리를 전쟁과 같은 거시 범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전쟁을 막지 못하는 것은 전쟁을 심각한 범죄로 여기지 않는 잘못된 코딩과 저질러도 처벌하기 어려운 시스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