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아 최강의 해군국은 From the Sea 전략을 구사하는 미국이다. 이에 전수방위라는 이름으로 On the Sea 전략을 구사하는 일본이 적극 협조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비슷한 시기 遠海로 나가자는 To the Sea 전략을 구사했으나 지금은 중국이 월등히 앞서나가고 있다. 미일중 세 나라의 치열한 전략 싸움을 살펴보며 그 틈바구니에 있는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한국은 일본과 독도 영유권을 놓고 갈등하고 있으니, 중국과 대일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 필리핀과는 스카보로(중국명 황옌다오·黃巖島)섬, 베트남 등과는 쯔엉사(난사·南沙)-호앙사(시사·西沙)군도 영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어 과연 중국을 믿어도 될지 의구심이 든다.
2003년 정부는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는 작은 암초 ‘이어도’근처에 종합해양과학기지를 세웠다. 그때 가만히 있던 중국이 최근 ‘한국이 중국의 EEZ 안에 과학기지를 세웠다’고 비난하며, 이어도 바로 곁의 한 암초를 ‘쑤옌쟈오(蘇巖礁)’로 명명하고 경제주권을 주장했다. 여차하면 이어도 바다에서 한중 EEZ 경계 다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서해 대륙붕 경계 획정 문제도 숨어 있는 한중 갈등의 불씨다.
中, 35년 지나 영유권 주장
인접한 나라는 언제든 영토 문제로 다툴 수 있는 만큼 경계를 확실히 한 후 외교를 맺는 평화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1952년부터 갈등을 빚어온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 결론을 내지 않고 국교 등을 회복하는 기본조약을 맺었다. 이후 일본은 계속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나, 한국은 영유권 확보의 중요 단서가 되는 실효 지배를 이어왔다.
중국과 일본은 1937~1945년 전쟁을 벌였다. 교전국 간 대결은 상호 평화체제로 들어간다는 조약을 맺고 국교를 회복해야 끝이 난다. 중국과 일본은 순서를 바꿨다. 1972년 먼저 국교를 회복하고, 1978년 평화우호조약을 맺은 것. 이때 센카쿠 영유권이 문제가 됐다.
당시 실질적인 중국 지도자이던 덩샤오핑(鄧小平) 부총리가 “센카쿠 귀속 문제는 다음 세대에 해결을 맡기자”고 함으로써 양국은 쉽게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일본이 센카쿠에 대한 실효 지배를 이어간 것인데, 35년이 지나 다음 세대가 등장한 지금 중국은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거세게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발표한 제1도련과 제2도련
영해기선에서부터 12해리까지인 영해(領海)를 제외한 모든 바다는 공해(公海)다. 배타적경제수역(EEZ)은, 연안국이 영해기선으로부터 200해리까지에 대해서는 어업권 등 경제권만 갖는다는 뜻이다. 경제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못하니 EEZ도 공해다. 주인 없는 공해를 자기 바다처럼 이용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함정을 위협하는 큰 적은 악천후다. 악천후를 뚫고 나갈 배가 없으면 12해리 영해도 지키기 어렵다. 미국은 어떠한 악천후도 뚫고 나가 작전할 수 있는 함정을 만들었다. 10만t인 니미츠급 항공모함이 대표인데, 미 해군은 이 항모를 12척 갖고 있다. 이 항모는 1개 비행단을 싣고 다니기 때문에 미 해군은 12개 전투비행단을 작전에 투입할 수 있다.
“미 해군 항공 상대는 미 공군뿐”
한국 공군은 12개의 비행단을 갖고 있다. 미 해군 항공 전투기의 평균 전투력은 한국 공군기보다 우수하니 미 해군 항공력은 중견 강국인 한국 공군보다 더 세다고 할 수 있다. “미 해군 항공력을 이길 수 있는 공군은 미국 공군뿐”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미 해군력은 막강하다. 미국 해군은 3개 군단 규모의 해병대를 언제라도 상륙시킬 수 있도록 세 개의 상륙준비단을 편성해놓고 있다. 이러한 힘으로 세계 바다를 누비고 있기에 미 해군은 유일무이하게 ‘세계해군’ 칭호를 듣고 있다.
1945년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을 때 미국은 지금보다 큰 해군을 갖고 있었다. 일본을 점령해 군정을 펼치게 된 미국은 1946년 1월 최고사령관 지령 677호를 통해 일본의 통치·행정 한계선을 발표했다. 이 선이 독도 동쪽에 그어졌기에, 광복을 한 한국은 바로 독도를 영유할 수 있었다.
1952년 미국 군정에서 벗어난 일본은 ‘그 지령은 임시적인 것’이라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은 6·25전쟁을 통해 미국과 가까워졌고 공산주의를 막는 최일선 국가가 되었기에 일본은 미국을 거역해가며 한국을 자극할 수 없었다.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라고 하자,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1965년 한국과 기본조약을 맺었다.
이 지령은 오키나와와 센카쿠도 일본의 통치·행정권 바깥으로 규정했다. 미 해군과 해병대는 오키나와를 동북아의 거점 기지로 만들었다. 그때 중국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댜오위다오가 미국 지배에 들어간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해군력이 약해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일본은 1972년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반환받으면서 센카쿠도 함께 돌려받았다. 그해 중국은 일본과 수교하고, 6년 뒤(1978) 센카쿠 영유권을 사실상 포기한 채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맺었다. 당시 중국이 그렇게 한 것은 미국이 구축해놓은 체제를 흔들 자신이 없었던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 시절 미국 해군은 악천후가 몰아쳐도 버틸 수 있는 함대를 소련 인근 바다에 띄워놓고 소련을 감시·봉쇄하는 ‘바다 위에서(On the Sea)’ 전략을 수행했다. 1991년 숙적 소련이 무너지자 미 해군은 ‘미국에 대드는 나라는 해군 항공력과 해병대를 투사해 공격할 수 있다’며, 1992년 9월 지금도 미 해군의 모토인 ‘바다로부터(From the Sea)’ 전략을 발표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반영해 1994년엔 ‘바다로부터 더욱 앞으로…’로 번역할 수 있는 ‘Forward… From the Sea’ 전략을 내놓았다.
9·11테러 이후 동맹 강조한 미국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무리 강한 힘을 가져도 허점은 있기 마련이다. 소련 붕괴 10년 뒤 미국은 9·11테러를 당했다. 그제야 미 해군은 핵전쟁 같은 ‘큰 위협’뿐만 아니라 작지만 충격적인 테러전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빈틈을 찾아 메우는 ‘해양력 21(Sea Power 21)’ 전략을 내놓았다. 테러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정보 입수가 중요하다. 미국은 테러 정보를 얻기 위해 동맹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2007년 미국 해군은 ‘1000척 해군(1000 Navy)’ 전략을 내놓았다. 300여 척인 미 해군 함정과 동맹국이 보유한 700여 척의 함정으로 바다의 안보를 꾀하겠다고 한 것이다. 테러는 해적이 횡행 하면 발생하기 쉽기에, 미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소말리아 해적퇴치작전을 펼쳤다. 미 해군은 이를 ‘21세기를 위한 협력 전략(A Cooperative Strategy for 21st Century)’으로 정하고 동맹국과의 연합을 강조했다.
미국은 이라크 자유작전은 조기에 끝냈으나, 이라크 안정화작전에서 발목이 잡혀 지난해 말에야 이라크전을 종료했다. 미국이 이라크 안정화작전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릴 때 중국이 급속히 성장해 G-2국가로 올라섰다. 중국은 해군력도 빠르게 성장시켜, 센카쿠와 스카보로-쯔엉사-호엉사-이어도에서 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이를 의식해 올해 초 ‘재조정(Re-balance)’ 전략을 발표했다.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으로 중동(이라크)에 집중했던 해군력을 거둬 60%를 서태평양(중국쪽)에 투입하는 것이 골자다. 그리고 서태평양의 강력한 우방국인 한국과 일본을 묶기 위해 두 나라에 정보교류협정 체결을 권유했다.
일본과 이명박 정부는 동의했으나, 새누리당을 비롯한 한국의 정당들이 반대해 이 협정 체결은 무산됐다. 그 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거론하자 한국은 일본과의 협력에 거리를 두고 중국과 보조를 맞추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을 참여시키는 것은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일본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일본은 미국에 적극 협조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방위전략은 평화헌법 정신에 따라 오로지 방위만 하는 ‘전수(專守)방위(Only Defense)’로 규정됐다. 일본은 섬나라여서 위협은 바다를 통해 들어온다. 해군력이 강하면 일본은 주인 없는 바다인 공해에서 위협을 막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영해기선으로부터 얼마큼 떨어져 있는 공해에서 전수방위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됐다.
이 문제는 일본이 어느 나라를 가상적으로 보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1970년대까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북방 4개 섬을 차지한 소련을 가장 위협적인 가상적으로 보았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소련은 베트남의 캄란만에 기지를 건설하고, 함정들로 하여금 캄란만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훈련을 시켰다. 소련 함정들이 대한해협과 동해를 오가게 된 것이다.
전수방위의 범위와 성격 강화
이것이 오키나와의 미군과 일본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일본은 일본 영해기점에서 200해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소련 함정을 감시하겠다며 ‘200 해리 전수방위’ 개념을 내놓았다. 일본은 200해리 전수방위를 하기 위한 능력을 갖춰나갔다. 4000t이 넘는 구축함과 2000t급 잠수함을 건조하기 시작한 것. 그러나 항모는 공격 무기라는 이유로 건조하지 않았다.
1981년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대(對) 아세안 협력회의에 참석한 한 스즈키 총리는 이를 발전시켜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로를 지키는‘1000해리 전수방위’ 개념을 제시했다. 유사시 일본의 생명줄은 원유 수송로 확보다. 일본은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하는데, 유조선들은 싱가포르 인근의 말라카해협-대만과 중국 사이의 대만해협을 지나 일본으로 온다. 일본은 인도양에서 말라카 해협-대만해협까지는 미국 해군이 지키지만, 대만해협에서 일본으로 이어지는 1000해리는 해상자위대가 지키겠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이를 나카소네 총리가 더 발전시켰다. 유조선이 많이 다니는 남서 항로뿐만 아니라 미국과 무역하는 태평양 항로 등에도 1000해리 전수방위 개념을 적용한 것. 나카소네 총리는 ‘일본열도 불침(不沈)항모론’을 내세웠다. 유사시 소련의 태평양함대가 소야(宗谷)-쓰가루(津輕)-쓰시마(對馬島) 등 일본 주변의 해협을 통해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1000해리 전수방위를 전 방위로 확장시켰다.
1000해리 전수방위 전략은 1991년 소련이 무너짐으로써 존폐의 기로에 섰다. 일본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북한을 새로운 가상적으로 보고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핵탄두를 단 북한 미사일은 아주 빠르게 날아오기에 미국과 공동으로 MD(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하기로 하고, 북한이 미사일을 기립시키면 일본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이는 방어를 위한 공격이기에 평화헌법 정신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2004년 일본은 ‘신방위대강(大綱)’을 통해 이 개념을 ‘적극적 전수방위’로 정리했다. 1000해리라는 거리를 없애고 ‘적극적’이라는 단어를 넣어, 일본을 위협하는 세력은 1000해리가 넘는 곳에 있어도 선제공격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2010년 일본은, 그때까지의 방위전략은 상대의 행동이 있을 때 대응하는 소극적인 것이었다며, ‘동적(動的)방위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동적방위를 하려면 상대의 의도를 미리 파악해 대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감시-정찰 자산과 초정밀 유도무기가 있어야 한다. 일본은 이지스함과 E-767 경보기 등을 도입했다.
그리고 센카쿠 문제가 발생하자, 이 전력을 중국 쪽으로 돌리고 있다. 중국의 의도를 파악해 중국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예측해가며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센카쿠 영유권 다툼에서 일본은 기세가 꺾인 것 같지만, 강력한 맹방 미국이 버텨주기 때문에 끄떡도 하지 않고 있다.
류화칭의 적극적 방어
오랫동안 중국 해군은 지상군으로 편성된 인민해방군의 일부로 있었기에 보잘것없었다. 대륙 석권 후에도 중국 공산당은 내부 통일에 주력했기에, 해군은 외부 세력이 중국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연안방어 전략만 펼쳤다. 이는 육상에 설치한 포와 미사일로 접근해오는 적 함정을 공격해 쫓아버리는 것이라, 중국 해군은 함대를 만들어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중국 해군은 작은 잠수정과 유도탄정, 어뢰정 등을 도입해 접근해온 적 함대를 게릴라식으로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마오쩌뚱에 이어 집권한 덩샤오핑은 제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며 ‘세계대전 불발생론(不發生論)’을 주장했다. 당분간 초강대국들이 싸우는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작은 전쟁만 일어날 것이므로 핵전쟁에 대한 과도한 대비를 줄이고 국지전에 신경 쓰라고 한 것이다. 1979년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은 통일 후 화교(華僑)를 쫓아내며 반중(反中)의식을 드러낸 베트남을 공격하는 ‘징월(懲越)전쟁’을 감행했다.
개전과 동시에 중국군은 베트남 영내진입에 성공했으나 대대적인 역습을 당해 패퇴했다. 그러자 중국은 ‘어쨌든 베트남을 징벌했다’는 말로 패배를 미화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중국군의 무기가 크게 낙후돼 있고 국지전에서도 승리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때인 1982년 5월 류화칭(劉華淸)이 해군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해군사령원에 취임했다. 류화칭은 ‘해양을 통해 들어오는 위협은 육지가 아닌 해양에서 막아야 한다. 앞으로는 해양 이익을 놓고 각국이 충돌할 것이므로 중국 해군은 큰 함정을 갖춰야 한다’며 중국 해군도 바다로 나가자는 ‘To the Sea’, 중국판 대양해군 전략인 ‘근해방어전략’을 내놓았다.
함재기 없는 중국 항모
1986년 류화칭은 중국 앞바다에 있는 섬들의 체인을 중국 해군이 지켜야 할 방어선으로 삼아야 한다며, ‘도련(島鍊·Island Chain)’ 전략을 내놓았다. 일본열도-난세이열도-필리핀을 잇는 선은 제일 먼저 지켜내야 할 제1도련, 사이판-괌-팔라우 군도를 제2도련, 하와이 근처 날짜 변경선쯤을 제3도련으로 선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근해방어전략도 버리고 원해(遠海)방어를 해야 한다며, ‘적극적 방어전략’을 내놓았다.
도련을 지키려면 악천후에도 굴하지 않는 대형 함정을 먼 바다에 항상 띄워놓는 ‘On the Sea’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은 러시아판 이지스함인 ‘소브레멘니’급 구축함 두 척을 도입하고, 핵무기를 탑재하는 ‘샤(夏)’급 전략핵추진잠수함 한 척을 건조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구소련이 건조하다 중단한 바랴그 항모(6만7500t)를 구입해, 추가 건조한 후 지난 9월 ‘랴오닝(遼寧)함’으로 명명해 진수했다.
그러나 중국의 On the Sea 전략은 너무 서둘렀기에 허점이 많다. 함재기를 마련하지 않고 랴오닝 항모를 진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러시아의 수호이-33을 참고해 J-15 함재기를 개발하기로 했으나, J-15는 이제 시제기가 나온듯 하다. 2005년 진수한 한국의 독도함은 탑재할 헬기가 없어 지금도 빈 배로 다니는데, 랴오닝함도 같은 꼴이 된 것이다.
도련 전략을 펼치려면 도련 선상의 섬을 영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도련상의 섬은 전부 다른 나라의 영토이니, 중국은 조금이라도 영유권을 주장할 틈이 있으면 파고들어가 중국 섬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센카구-스카보로-쯔엉사-호앙사-이어도 다툼을 일으킨 것이다.
‘중동이냐 중국이냐’, 미국의 고민
미국은 중국 해군의 도련 전략을, 미국 함대가 중국 연안으로 접근해오는 것을 도련에서 막겠다는 ‘반(反)접근/지역거부(Anti Access/Area Denial)’로 보고, 줄여서 A2/AD로 명명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후 한미 해군이 서해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하려고 했을 때, 중국이 격렬히 반대해 무산시킨 것을, 미국은 중국이 A2/AD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본다.
미국은 그에 대한 대비에 나섰다. 1991년 미국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밀어내는 걸프전을 치르면서 ‘공지(空地)전투’를 선보인 바 있다. 이전의 전쟁은 ‘육군 주도-공군 보조’였는데, 걸프전에서는 공군이 육군과 대등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이 전략을 발전시켜 항공력과 미사일로 적국을 초토화한 후 육군을 투입하는 ‘공지작전’ 개념을 만들어, 2003년 이라크전에서 쾌승을 거뒀다. 미 해군은 이를 받아들여 해전도 해군 항공력과 미사일 전력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공해전투’ 개념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중국 해군이 도련 안쪽으로 들어오는 적 함정은 핵탄두를 단 ‘동풍(東風)-21’ 대함탄도미사일로 쓸어버리겠다고 하자, 미 해군은 올해 1월 공해전투를 한 단계 발전시킨 JOAC(‘조악’으로 발음)을 내놓았다. JOAC은 ‘Joint Operational Access Concept의 약어로‘합동작전접근개념’으로 번역된다. JOAC은 3단계로 구성된다.
첫째는 중국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원해에서는 공해전투를 벌여 중국 함대를 궤멸시킨다. 둘째, 그리고 중국 연안으로 접근해, 함대함미사일과 함재기로 남아 있는 중국 해군을 부수는 ‘연안작전’을 구사한다. 셋째, 이로써 제해권과 제공권이 확보되면 From the Sea 전략에 따라 중국 영토 안으로 미사일과 항공력을 투사하고 해병대와 육군을 투입하는 ‘진입작전’을 펼친다. 해병대와 육군은 타격목표를 격파하고 빠져나와 철수한다.
이때 일본 해상자위대가 적극 보조한다. 독도함은 최대 16대의 헬기를 탑재할 수 있지만, 자체 무장력은 매우 약하다. 전투함과 잠수함이 따라다니며 보호해줘야 한다. 한국이 독도함을 건조할 때 일본은 독도함과 비슷한 크기(1만4000t)의 ‘휴가급’ 구축함 두 척을 건조했다. 휴가급은 최대 11대의 헬기를 탑재하면서도 이지스함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갖는다. 일본은 한발 나아가 2015년, 2만t급 헬기 탑재 구축함 두 척을 진수하려 한다.
6척인 이지스함은 조만간 8척으로 늘릴 계획이다. 여기에 항모와 해병대를 붙이면 일본은 바로 From the Sea를 전략을 펼 수 있는 ‘리틀 USA’가 된다. 그러나 헌법정신을 어기지 않겠다며 항모와 해병대는 애써 갖지 않는다. On the Sea만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력을 미일 방위조약에 따라 제공해주는 것이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전투력과 정보력은 막강해서, 전문가들은 미 해군이 빠져도 중국 해군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센카쿠 분쟁은 제2의 청일전쟁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국 민간인들은 센카쿠에 상륙해도 중국 함정은 센카쿠에 접근하지 않는다. 해양경찰에 해당하는 해양감시선만 접속수역 바깥인 24해리쯤에 접근해,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대치하는 정도다.
남북한은 조약이 아닌 합의(남북기본합의서)로 상호 불가침을 약속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은 양국 의회의 동의를 받은 우호조약을 맺었으니, 센카쿠 문제로 중국 해군이 일본 해상자위대를 공격하면 중국은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전력도 열세이지만 명분에서도 중국은 밀리는 것이다.
제1 도련은 중국 처지에서 보면 미국이 우방국을 동원해 중국을 봉쇄하고 있는 강력한 ‘쇠그물’이다. 그렇다면 센카쿠 문제를 일으켜 이 그물을 찢어버려야 한다. 이 그물을 뚫고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해 2, 3도련을 설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1도련 안쪽은 다른 나라 함정이 들어오지 않는 중국의 내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중국 봉쇄에 주력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남창희 인하대 교수(정치학)는 “미국은 동북아보다는 중동에 더 큰 이익이 걸려 있다. 중동이 시끄러워지면 주 전력을 다시 걸프만과 지중해로 돌릴 수밖에 없으니 중국은 그때까지 버티면 제1도련으로 구축한 미국의 대중 봉쇄망을 찢을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것같다”고 했다. 중국은 미국의 힘이 빠질 때까지 계속 분쟁을 일으키며 기다린다는 것이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한국
미중일 해군의 대전략에 대해 독도-이어도 다툼을 안고 있는 한국 해군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한국 해군은 오랫동안 연안해군력을 갖고 공작선 침투를 주로 하는 북한에 대응하는 위주로 운영돼오다, 안병태 총장 시절인 1995년 대양해군 기치를 내걸었다. 한국 해군도 한반도 수역에서는 미국 해군에 맡겨놓은 제해권을 행사하겠다며 함정을 대형화하는 To the Sea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덕분에 3척의 이지스함과 1척의 대형상륙함(독도함), 6척의 일반 구축함, 12척의 잠수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을 당하자 “연안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대양해군이냐”란 비난이 높아져, 대양화를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양해군을 추진할 때 해군에서는 600해리를 지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한국행 유조선은 일본행 유조선과 똑같은 항로를 달리다 규슈 인근에서 갈라진다. 그때까지는 미일 해군에 보호를 위탁하고 제주도 남방부터는 한국 해군이 지키자고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강력히 추진한 것이 기동함대 창설과 올해 어렵게 공사에 들어간 제주해군기지 건설이었다(현재는 함대보다 작은 기동전단만 편성).
이러한 노력이라도 있기에 한국은 이어도와 독도 문제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천안함 폭침 사건 후 대양해군 무용론이 나와 고민하고 있다. 여기서 전략가들은 “대양해군 건설을 포기하면 한국은 스카보로, 쯔엉사-호앙사 영유권 다툼에서 중국에 밀리는 필리핀과 베트남 꼴이 된다”고 경고한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은 비슷한 시기에 To the Sea를 추진했는데, 왜 한국이 중국에 뒤지게 됐느냐”고 지적한다.
중국은 ‘나오려고’하고 동북아 국가들은 ‘지키려고’하니, 앞으로 황해-동중국해-남중국해에서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의 바다 한복판에 이어도와 독도가 있다. 한국은 이 갈등의 바다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도 가만히 있을 것인가. 윤연 전 해군작전사령관은 한국도 항공모함을 갖자며 대양해군 재건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