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만의 방 아파트? 오피스텔? 아니면 원룸? 처음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기만의 방을 가지려는 독신자들은 고민할 것이다. 어떤 주거 형태를 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직업과 취향, 생활습관 그리고 경제사정에 달려 있다.
지난 30여 년간 나는 여러 가지 주거 형태에 거주해왔다. 스무 살 무렵 부모 집을 나와서는 신림동 어느 연립주택의 방 한 칸을 얻었고, 단독주택과 아파트, 원룸, 고시원에도 잠깐 살았다. 오피스텔은 불편해서 직접 거주하지는 않았다. 수영장과 헬스클럽이 딸린 일산의 어느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며칠 뒤에 계약금을 포기하고 해약한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부동산 업자인 그녀를 따라 집을 구경할 때는 창문이 작고 빨래를 널 공간, 베란다가 없다는 단점이 크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현관문을 나와 엘리베이터만 타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수영을 즐길 수 있다니!
흥분이 지나쳐 하루하루를 살며 구체적으로 부딪칠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덜컥 계약서에 사인하고 돌아서자 슬슬 후회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과연 그곳에서 행복할까? 빨래를 자주 하는 내가 베란다에 건조대를 두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담배를 피우는데 환기는 잘 될까? 방음은? 게다가 오피스텔은 복비도 일반 아파트나 원룸에 비해 턱없이 비싸고, 관리비도 많이 나온다.
나의 생활방식과 맞아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나의 선택을 모든 싱글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바쁜 직장인들에겐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이나 원룸이 여러모로 편리하리라. 출퇴근 시간도 절약되고, 집 관리를 크게 하지 않아도 되니 신경이 덜 쓰이리라. 나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고 출퇴근을 하지 않는 이들에겐 공기가 좋고 해도 잘 들고, 대로변보다는 길가에서 약간 들어간 곳에 위치한 집이 좋다.
집을 고르며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밥을 해먹을 것인가, 사 먹을 것인가. 그런데 자신을 아는 게 쉽지 않아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몇 번의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다. 이사를 다니며 늘 마음에 드는 곳에 살 수는 없다. 약간의 불편함을 참지 못해 계속 옮겨 다닌다면, 나만 피곤하고 돈만 깨진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집, 내가 가장 행복했던 방은…. 서울 불광동 근처의 반지하 방이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준비하며 나는 그곳에 살았다. 유명 건축가가 지은, 규모는 작지만 전위적인 건물의 맨 아래층(반지하인데 우리는 그곳을 1층이라 불렀다), 부엌 겸 거실을 지나 안쪽에 붙은 방이 내 방이었다. 2층은 진보적 성향의 미술단체가 통째로 임차해 사무실로 사용하고, 3층은 주인집이었다. 층마다 출입구가 독립되어 다달이 월세를 낼 때를 제외하고는 주인과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어떻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구조의 집이었다. 가운데가 뻥 뚫려 계단이 빙 돌아 올라가고, 화장실과 수도는 밖에 있어 세수를 하거나 빨래를 하려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가야 했다.
비좁은 욕실에 세탁기는 없었고, 손으로 빨래를 비벼 두어 번 헹군 뒤에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중고 ‘짤순이’에 넣어 물기를 짰다. 거실을 작업실로 쓰며 출퇴근하던 만화가가 나간 뒤에, 나처럼 자취 살림을 차리고 잠도 자는 여자 화가가 새 룸메이트로 들어왔다. 나보다 몇 살 어린, 사람 좋고 말없는 그녀와 나는 죽이 잘 맞았다. 같은 지붕 아래에 살며 우리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1993년 가을부터 1994년 초여름까지 그녀와 나는 아침을 같이 먹었다. 그녀가 주로 음식을 만들었고, 나는 거드는 시늉만 했던 것 같다. 그녀가 먼저 일어나 우리의 유일한 열원인 휴대용 가스버너에 불을 붙여 반찬을 만들었다. 당시 나는 거의 매일 낮과 밤을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고, 아침이면 속이 뒤집혀 자주 토했다. 일어나 똑바로 앉기도 힘든데, 어찌 밥을 지을 기운이 남아 있으리오. 그녀는 음식솜씨도 뛰어나, 간단한 재료로 근사한 밥상을 금방 뚝딱 차렸다. 마늘과 당근을 다져 넣은 달걀부침과 김, 그리고 김치가 우리의 맛있는 아침을 열어주었다.
아직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이 없어, 등단한 시인이지만 나는 무명의 백수나 다름없었다. 시집 후기를 고치고 또 고치고, 교정지를 보며 표현을 다듬고, 한 달에 한 번 ‘호텔신라’ 사보에 짧은 미술 원고를 기고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아무 약속이 없는 심심한 오후에는 2층에 올라가 나처럼 한가한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미술을 간판에 내건 그곳에서 일주일에 절반은 급진적인 문예이론가들이 살벌한 회의를 하고, 일주일에 절반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글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모여들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놀았다. 화투를 치거나 공을 던지다가도 토론을 벌이기 일쑤여서, 잠시도 지루하지 않았다. 항상 얼굴에서 장난기가 떠나지 않는 오빠, 재기발랄하며 대책 없는 문학비평가 Y는 아예 2층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사무실에서 먹고 잤다. 1, 2층을 통틀어 이혼남과 이혼녀가 넘쳤다. 별거남과 별거녀도 한둘 끼여 있었으니,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이는 드물었다. 가난했지만 우리는 자유로웠고, 하루하루가 만화처럼 짜릿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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