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시인이 꽃을 불렀다 바람이 바다의 시간을 채웠다

전북 고창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입력2013-02-21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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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 서정주 시 ‘선운사 동구’ 전문

    고창 선운사에 가면 동백꽃이 생각나고 저절로 미당 선생이 떠오른다. 이렇듯 절간 하나에 꽃과 시인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버무려지는 데가 선운사밖에 또 있을까 싶다. 산이 절간을 품고 절간이 꽃을 울타리 삼으며 그 꽃이 시인을 부르는 내력쯤이야 쉬 요량할 수 있지만, 선운사처럼 그것이 역순이 되어 시인이 꽃을 불러와 절간을 차리고 절간이 산을 휘두르는 듯한 감상을 갖게 하기는 쉽지가 않다.

    위에 예 든 짧은 시 한 편에서도 보듯 미당 서정주의 시문에 등장하는 선운사 동백꽃은 이처럼 개개 독자들을 후려칠 만큼 색과 향이 강하다. 시의 이야기를 따져 보면 간단하다. 선운사 골짝으로 꽃을 보러 갔는데 꽃은 못 보고 술집에서 육자배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동백꽃이 목 쉰 채로 남아 있더라…. 흔히 시각과 후각으로 인지되는 꽃이 이 시에서는 청각으로 전해진다는 데 그 절묘함이 있다. 동백꽃을 쉰 목청의 육자배기로 바꿔치기 함으로써 동백꽃은 동백꽃대로, 육자배기와 술집 여자는 또 그것대로 온전하게, 아니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

    꽃무릇 피는 골짝으로

    ‘춘백’으로도 불리는 선운사 동백은 동백류 중에서도 꽃이 가장 늦게 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들 하동의 매화가 지고 난 4월부터 꽃봉오리를 터뜨린다고 하는데 절정은 4월 하순이라고 한다. 선운사 뒤쪽 산비탈의 동백숲이 바로 그 꽃잔치의 현장이다.

    선운사를 보러 가서 그 골 안쪽의 도솔암 둘레를 보지 않고 돌아 나옴은 잔칫집가서 신랑신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떠나옴과 같다.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 냇물과 함께하는 반 시간가량 걸리는 이 평탄한 산길은 곱고도 고요하다. 요즘엔 절 어귀에 차밭이 꾸며지고 길 양쪽으로 꽃무릇을 많이 심어놓아서 사시사철 볼거리도 다양해졌다.

    원추리 꽃을 닮았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색이 짙고 꽃술이 많은 꽃무릇은 근래 몇 년 사이 동백꽃을 압도하면서 선운사를 대표하는 꽃이 됐다. 뿌리를 빻아 물감에 섞어 탱화를 그리면 방부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절간 주위에 많이 심는다는 얘기가 있다. 무리를 지어 핀다 해서 꽃무릇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무리 지어 피는 꽃이 한둘이란 말인가. 아무튼 농염한 여인네의 속눈썹 같은, 가늘고 짙은 꽃술에다 붉디붉은 점박이 꽃잎을 가진 이 꽃이 숲길의 나무 그늘을 점령하면서 산세와 어우러진 도발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선운사를 빙 두르고 있는 산이 선운산인데 선운사 뒤편 봉우리가 주봉이 되며 구황봉, 경수산, 도솔산 등의 이름을 가진 산봉우리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있다. 선운산은 가장 높은 봉우리조차 해발 500m가 못 되지만 산세가 우람하고 계곡미가 빼어나다. 특히 도솔암 주변의 깊은 골과 깎아지른 암벽들에서는 자못 이국적인 자연미마저 느낄 수 있다.

    도솔암에서 절벽을 오르면 제비집처럼 벼랑에 붙어 선 내원궁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마주하는 경관이 압권이다. 내원궁을 내려와 골짝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윽한 자태의 마애석불을 쳐다보게 되고 여기서 용문굴을 거쳐 산 능선에 오르면 이내 낙조대에 선다. 황해 곰소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시인을 키운 건 바람인데…

    이제는 많이 알려져 선운사를 거친 걸음들이 꼭 그래야 한다는 듯이 찾아가는 곳들이 있다. 인근의 서정주 생가와 문학관, 그 맞은편의 돋음볕 체험마을, 인촌 김성수 생가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으로 가려면 선운사 진입로로 되나와 주진천 물길을 따라 곰소만 쪽으로 진행해야 한다. 주진천 냇물이 바다를 만나는 어귀, 그 산 아래 작은 마을이 미당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생가를 가려면 아무래도 미당시문학관을 먼저 거치는 것이 좋다. 교사(校舍)를 개조해 만든 문학관은 외관부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조형미를 발산하는데, 특히 중앙의 탑 형식 건물이 인상적이다. 이 타워에 대해 시인 이문재는 선운리라는 마을에 누적돼 있는 시간은 물론이고 ‘질마재 신화’가 갖고 있는 문학적인 은유의 부피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내가 보기엔 맞배지붕의 단층 건물 사이에 키를 달리해 올라선 두 개의 타워가 주변 풍경에서 크게 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름 동화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구실도 할 것처럼 보인다. 하교 후 빈 교실을 옮겨 다니는 듯한 걸음걸이로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중앙 타워로 올라가면 크기와 모양을 달리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 ‘화폭 같은 풍경’이란 말도 이런 데서 가능할 성싶다.

    문학관을 나와 왼편 마을로 들면 미당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초가지붕의 두 집채가 아래위로 나란히 서 있으며 우물과 장독대가 그 사이에 있다.

    미당은 1915년 음력 5월 18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1942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이 집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으며 1970년 이후 버려진 채 있었다. 현재의 집은 2001년 복원한 것이다. 전에 없던 초가가 생가에 이웃해 있는데, 미당의 동생인 서정태 옹이 몇 년 전부터 와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사이에 동네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당의 문학 작품에서 형체를 따온 조형물이 골목이며 빈 터 곳곳에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미당의 ‘곶감 이야기’에서 빌렸다면서 직접 도깨비집이며 웃돔샘까지 만들어놓았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나름의 이야기가 있는 시인의 마을을 꾸며보겠다는 의도에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놓았겠지만, 내 편에서 바라보면 왠지 딱하다는 느낌만 든다. 터가 비었다면 빈 터인 채로 두고 표지석 하나만 세우면 안 되는가. 거듭 꾸미고 형상을 쌓아가는 일은 마을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레 전에 있던 얘기들마저 지워가는 작업이 됨을 왜 모르는 것일까. 시인도 말하지 않는가, 자신을 키운 건 대부분 바람이었다고. 그래, 시인의 생가엔 바람과 햇살, 풀무더기만 있어도 더 부족할 것이 없을 듯싶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 서정주 시 ‘자화상’ 부분

    미당 시문학관에서 들판 너머로 빤히 바라보이는 동리, 부안면 송현리의 돋음볕마을은 담벼락 그림으로 일찌감치 매스컴을 많이 탔다. 서정주와 그의 시를 기리기 위해 2005년부터 마을 뒷산에 국화꽃을 심고, 2006년 ‘100억 송이 국화축제’를 열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 마을에서는 좀 더 항구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도에서 마을 골목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지붕을 채색했다. 담벼락 벽화 중에는 시 ‘국화 옆에서’를 적은 국화 그림도 있고 사실적으로 마을 주민들의 얼굴을 그린 것도 있어서 정겨움을 더한다.

    돋음볕마을에서 734번 지방도를 타고 부안 방향으로 가다보면 이내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생가’ 안내판을 만난다. 부안면 봉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고택이 곧 인촌과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다. 김성수는 제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정치, 언론, 교육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 형제가 평생을 두고 합심해 창설 혹은 육성한 기관들이 바로 동아일보사, 고려대학교, 중앙중고등학교, 삼양사, 주식회사 경방 등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낮은 담을 경계로 나누어진 큰댁 안채며 사랑채, 작은댁, 곳간 등을 만날 수 있는데 방문객들은 이를 통해 당시 전라도 토호의 집 규모며 살림살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고택은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정좌해 있는데도 배산임수의 지형을 잘 이용한 덕인지 집안 분위기가 무겁기보다 되레 환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조금 전, 미당의 생가를 보고 이곳에 들른 이라면 같은 시대를 산 두 인물의 태생적 환경의 극적인 대비감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인물들이 생애를 거쳐 이룩한 업적들을 보면서 초가와 기와, 대지의 넓고 좁음과 무관하게 이 땅, 이 지기(地氣)가 예사롭지 않음을 헤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해리(海里)에서

    고창읍성이며 고인돌 유적지 등 소문난 볼거리가 많은 고창 땅에서 굳이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을 찾기로 한다. 다시 미당 생가 쪽으로 되돌아 나와 주진천을 건너 해안도로를 따라가보는 것이다. 해리(海里)를 찾아간다. 해리가 어디인가. ‘바닷가 마을’이라고 아무렇게나 한자를 갖다 붙인 지명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입안에 굴려볼수록 괜스레 짠내가 풍기고 파닥이는 햇살마저 눈에 보일 듯한 이름이 된다.

    마침내 작은 배 몇 척이 정박한 포구를 만나고 그 너머에서 너른 백사장을 만난다. 이곳이 해리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자꾸 그리워지는 건 먼지 낀 서울의 하늘입니다.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던 매운 다짐도 물골을 타고 서둘러 빠져나가는 바닷물에 깎이며 풀리고 빈 개펄의 고요가 이제는 저무는 생애처럼 씁쓸할 따름입니다. 정녕 장담할 수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서울을 떠나고 얼마 동안은 용광로 바깥벽에 벌레처럼 붙어서 가까스로 기어가듯 하루하루를 넘기곤 했는데, 자주 찬물 들이켜며 안절부절못하곤 했는데, 어느새 세월이 나 모르게 조금씩 나를 식혀온 모양입니다. 돌아보면 누구나 젊어서 어차피 겪게 마련인 한 시절이었던 것 같고 꼿꼿이 머리 쳐들던 슬픔이나 미움이 다 스러지고 만 지금, 세월이 다스리지 못할 게 세상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 걷어 올린 옷소매를 펴 내리듯 마을에 저녁이 들고 허벅지까지 뻘을 묻힌 천장 낮은 집들 고단한 삭신 뒤채며 불빛 낮게 소곤거리면 결국 어쩌지 못하는 내 그리움 어리석게 서울로 갑니다. 부질없는 미련을 되새김질합니다. 서울, 내 치사한 그리움의 보통명사, 그러나 밤 깊어 다시 만조가 되면 개펄 어딘가에 묻어둔 내 귀 하나는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에 잠겨 오래도록 담아두었던 먼 세상 기억 굳이 씻어내고 있을 겁니다.

    - 강윤후 시 ‘해리에서 띄우는 편지’ 부분

    최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7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식구들의 세월’ 등

    장편소설 ‘서북풍’ ‘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텅 빈 겨울 바다의 모래밭을 걸으며, 예전 어느 때 이 어디쯤에서 해안 초소를 지키던 한 시인 병사를 떠올려본다. 서울을 떠나 외진 바다까지 왔지만 힘들게 하루하루를 넘길 수밖에 없었던 그 슬픔과 미움의 내용에 대해선 관심할 바 없다. 그의 말처럼, 누구나 젊어서 어차피 겪은 일들이었을 테니…. 더러 아프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 젊음이 발견한, 그리고 젊은이 것답지 않은 바다의 시간이다. 어느새 저무는 생애의 씁쓸함을 생각하고 세월이 다스리지 못할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아픈 독백. 떠나온 서울은 여전히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이미 바다에 익숙한 내 귀 하나가 굳이 저편 세상의 기억을 씻는다는 쓸쓸한 각성과 각오를 비춰주는 시의 자리가 굳이 고창 해리 바닷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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