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하이오 주 북부에 위치한 켄트주립대 캠퍼스에 높지 않은 언덕이 있다. 그 언덕 위에 테일러홀이라는 건물이 서 있고 그 앞에 조그만 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1970년 5월 4일 이곳에서 미국을 뒤흔든 사건이 발생한다. 오하이오 북부는 겨울이 길다. 바로 위에 있는 이리(Erie)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4월에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래서 5월은 이 지역이 1년 중 가장 활기를 띠는 시기다. 하지만 1970년 5월 켄트주립대 캠퍼스는 냉기만 가득했다. 흔히 ‘5월 4일 사건’ 또는 ‘켄트주립대 학살’로 불리는 시위대를 향한 발포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당시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전격적으로 캄보디아 침공에 나서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닉슨은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미군의 베트남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1969년 11월 미군이 베트남 양민을 죽인 미라이 학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베트남 철군 여론은 하늘을 찔렀다. 1969년부터 베트남전이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자 종전에 대한 기대가 커졌으나 이러한 바람과 달리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국민의 배신감은 컸다. 징집 대상인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의 불만은 누구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전국적인 학생파업’이라고 지칭할 만큼 미국 전역의 대학가가 시위로 홍역을 치렀다.
학생들에게 발포한 美軍
켄트주립대에서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처음 일어난 것은 5월 1일. 닉슨 대통령이 미군의 캄보디아 개입을 공식 인정한 바로 다음 날이다. 그날 밤부터 문제가 커졌다. 일부 흥분한 시위대가 맥주병을 던져 주차해 있던 자동차를 파손하고 시내 상점 문을 부쉈다. 시위대는 거리에서 불을 지폈고 출동한 경찰을 향해 병을 내던졌다.
이튿날 켄트 시(市) 시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오하이오 주지사에게 질서 유지를 위해 주 방위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저녁 주 방위군이 도착하자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시위대는 켄트주립대 학군단(ROTC) 건물에 불을 질렀다. 소방관, 경찰관이 불을 끄려고 접근하다가 시위대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했다. 주 방위군은 대학 안으로 진입해 캠퍼스에 주둔했다. 5월 3일에는 1000여 명의 방위군이 직접 시위 진압에 나섰다. 오하이오 주지사는 시위대를 “나치와 공산당보다 더 나쁜 존재”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문제의 5월 4일, 2000명으로 추산되는 시위대가 대학 광장에 모였다. 시위대는 대학 캠퍼스 내 작은 언덕에 위치한 ‘승리의 종’까지 평화 행진을 벌였다. 주 방위군은 학생 시위대의 행진이 자칫 격렬한 폭력시위로 변질될까봐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오전 경찰관 한 명이 방위군 차량에 탑승한 채 학생들에게 접근해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연행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일부 학생이 차량에 돌을 던졌고 차 안에 타고 있던 방위군 1명이 깨진 유리창 파편에 맞아 부상했다.
정오 조금 못 미친 시각, 방위군은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고, 최루탄을 발사했다. 바람이 많이 분 탓에 최루탄은 효과가 없었다. 시위대는 해산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방위군에게 돌을 던졌다. 방위군 일부가 시위대에 몰려 포위됐다. 이윽고 29명의 방위군이 학생들에게 발포했다. 그 자리에서 4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고 9명이 다쳤다.
군이 학생들을 상대로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미국 국민은 망연자실했다. 미국 전역에 걸쳐 1000여 개의 대학과 고등학교, 심지어 초등학교까지 수업을 거부한 채 과도한 시위 진압에 항의했다. 무려 800만 명의 학생이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켄트주립대 사건은 미국 학생시위의 역사적 상징으로 남았다.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세계는 극심한 시위와 폭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까지 각종 시민단체와 학생, 좌파조직의 시위로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세계 주요 도시가 거센 시위로 극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 시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저항운동으로는 1963년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일어난 데모와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시위, 그리고 앞서 켄트주립대 학생시위가 꼽힌다. 버밍햄 시위는 1963년 앨라배마 버밍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진행됐다. 앨라배마는 인종차별이 특히 심한 지역이었다. 조지 윌러스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가 취임선서를 통해 ‘오늘도 차별, 내일도 차별, 영원히 차별’을 맹세할 정도였다. 버밍햄은 이런 앨라배마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은 식당에서 백인과 흑인이 함께 식사하지 못하게 하거나 버스를 함께 타지 못하게 하는 등의 각종 인종차별 행위에 대해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버밍햄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했다. 어린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구속자가 2500명에 이르렀으며 학생들에게도 물대포를 쏠 정도로 시위 진압은 가혹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버밍햄 인권운동 지도자들은 대중 집회를 중지했고, 임시협정이 체결됐지만, 킹 목사가 묵고 있던 게스턴 모텔과 킹 목사 형의 자택이 KKK단에 의해 폭파됐다. 이 시위는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평화행진으로 이어졌고, 이후 인종차별 개선을 위한 각종 법규 개정의 계기가 됐다.
“낡은 세계는 등 뒤로…”
1968년 8월 26~29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시위 역시 1960년대의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회를 열기 전부터 어수선했다. 유력한 대통령후보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과 허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한 선거전을 펼쳤다. 특히 베트남전 처리 문제를 놓고 두 후보는 첨예하게 대립했고 각각의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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