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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 - 김관진 우정과 경쟁 40년

스페셜리스트 vs 제너럴리스트

  • 이정훈 편집위원│hoon@donga.com

김병관 - 김관진 우정과 경쟁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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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청이 ‘해결사’ 간청

그러자 육군에서 난리가 났다. 육군은 K-2 납기에 맞춰 오래된 전차를 폐기해 왔는데 K-2 생산이 늦어진다고 하니 전력 유지에 문제가 생긴다며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엔진은 두산엔진, 변속기는 S·T중공업, 냉각시스템은 현대로템이 따로따로 개발했기에 어느 회사에 파워팩 불량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몰랐다. 당연히 세 회사는 책임을 회피했다. 방사청은 곤란해졌다.

한국은 K-2가 세계 최고라고 선전해 개발과 동시에 터키로 수출하게 됐다. 터키에 불량 파워팩을 장착한 K-2를 수출할 수는 없었기에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독일제 파워팩을 탑재해 수출했다. 그리고 한국군에도 독일제 파워팩을 넣은 K-2를 공급하고, 그러는 동안 국산 파워팩을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결정했다.

파워팩에서 핵심은 엔진이다. 방사청은 엔진만큼은 반드시 국산화해보자고 판단했다. 엔진을 제일 먼저 국산화해보자고 한 것은 전차 엔진의 재고 부족이 핵심 원인이 됐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차 엔진은 다량으로 필요해지니,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국내에 엔진 제작 공장을 짓자고 한 것.

엔진은 K-2 파워팩에도 들어가는 독일 MTU사의 것이 세계 최고다. 때문에 MTU사와 합작으로 한국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MTU사는 미래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를 한국법인 설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가 탄 방사청은 UMB텍을 동원했다.



UBM텍은 오래전 MTU사 엔진을 한국에 독점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한국군에 납품되는 K-2에도 MTU 엔진이UBM텍을 통해 공급됐다. UBM텍과 MTU는 사이가 좋았으니 방사청은 UBM텍으로 하여금 합작법인을 만들어보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MTU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해결사’로 초빙한 이가 김병관 씨다. 방사청은 이 사업에 ‘거물’이 참여한 것을 보여줘야 MTU가 움직일 것으로 보고 김 씨에게 UBM텍 입사를 간청했다.

김 씨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화공과에 67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이듬해 육사 28기에 수석 합격했다. 이후 그는 군에서 받은 거의 모든 교육 과정에서 수석입학과 수석졸업을 반복했다. 그는 생도 시절부터 ‘손자병법’을 탐독했다. 육사 시절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각개격파를 현실화한 생도

생도들이 기마전을 벌였는데 그는 한쪽 팀의 대장을 맡았다. 떼로 기마전을 벌이면 전면에 선 기마대만 적 기마대와 싸우고, 뒤에 있는 기마대는 싸울 상대를 만나지 못해 한동안 적을 찾아 돌아다녀야 한다. 그러다 아군 기마대와 맞붙은 적 기마대를 발견하면 달려들어 협공하는데, 요령이 모자라 헛힘만 쓰는 경우가 많다.

오른손잡이가 많기에 양쪽에서 적 기마대를 붙잡으면 대개 오른팔 힘만 써서 적을 넘어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좌우로 붙은 아군이 반대 방향으로 힘을 쓰는 것이니 이것이 묘한 힘의 균형을 가져와 적 기마대는 제법 오래 버틸 수 있게 된다. 시간과 힘을 낭비한 후 이기는 것이다. 김병관 생도는 이것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양쪽에서 적 기마대를 잡았을 때는, 한 사람의 지시에 따라 같은 방향으로 적을 넘기는 연습을 반복시켰다.

이어 전체 병력을 3등분해, 3분의 1 병력은 뒤에 서지 않고 전부 앞에 나와 적 3분의 2 기마대와 맞서게 했다. 그리고 남은 3분의 2 병력으로는 적 3분의 1 기마대를 분열시키고, 2개 기마대로 적 1개 기마대를 붙잡아 연습한 대로 신속히 넘기게 했다. 그리하여 적 3분의 1이 궤멸되면, 적 3분의 2를 견제하고 있던 아군의 3분의 1 병력과 합세해 같은 방법으로 공격해 제압했다.

손자병법은 적은 병력(以少)으로 적 대병력(衆)을 부수는(擊) ‘이소격중(以少擊衆)’을 하려면 적을 분산시킨 후 집중해서 기습하는 각개격파를 하라고 가르친다. 김 생도는 각개격파를 현실화한 작전을 고안하고 이를 연습시켜 실전에서 압승했다. 그 후로도 그는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는 능력을 자주 선보였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았고, 그는 밤잠을 자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줬다.

그가 내놓은 방법이 100%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꽤 높은 승률을 기록했기에 그는 ‘해결사’로 인식돼갔다. 실력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그는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문제, 가령 대인관계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 그런 까닭에 그를 싫어하는 이들로부터는 “건방지다” “잘난 척한다”는 말을 들었다. 잘나가는 사람으로 인식되다보니 인사 때마다 심한 견제를 당했다.

전차 엔진 합작법인 문제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도 사람들은 그의 해결사 능력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대장 출신은 웬만해선 사기업에 가지 않는다. 방사청은 간청하고, UBM텍도 사정했다. 이 때문에 대장 출신은 사기업에 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그는 ‘합작법인이 성사될 때까지만 일한다’는 조건으로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나기 전인 2010년 6월 UBM텍 고문으로 들어갔다.

김병관을 늘 앞서간 김관진

그렇다면 노대래 당시 방사청장은 그와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을 잘 아는 이들은 “노 청장도 김 장군만큼이나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뻣뻣한 김 장군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 청장은 그를 대면하는 것도 피했다”고 전했다. 노 청장이 필요해서 그를 부르게는 했지만,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비는 서로 피하는 사람에겐 잘 통하지 않는다.

육사는 전통적으로 수석 졸업자에게 가장 앞선 군번을 준다. 김 씨는 수석졸업을 했지만 육사 28기에서 선임자는 언제나 김관진이었다. 28기가 졸업할 때는 외국 유학을 갔다 온 졸업자에게 선임 군번을 줬다. 김관진은 생도 1학년 때 독일 유학시험에 합격해 3년간 독일 육사를 다녔다. 28기가 졸업하게 되자 유학 성적이 좋았던 김관진 소위가 가장 앞선 군번을 받고, 수석졸업자인 김병관 소위는 세 번째 군번을 받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대장까지 진급했다. 진급하면 상급자에게 신고하는데, 그때마다 김관진이 대표신고를 했다. 김병관 씨는 진급에서도 김관진 장관을 앞서지 못했다. 김 장관은 모든 진급을 1차로 했지만, 김 씨는 중장 진급을 2차로 했다. 김 장관은 김 씨가 동기 대표로 신고할 수 있는 기회를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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