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함정임의 핫 픽션 터치

소설, 기록으로서의 퍼즐 사용법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소설, 기록으로서의 퍼즐 사용법

1/2
소설, 기록으로서의 퍼즐 사용법

사물들<br>조르주 페렉, 김명숙 옮김, 웅진펭귄클래식코리아

묘하다. 최근 새로 번역된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 1960년대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 페렉이 ‘대모험(La grande aventure)’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64년, 이것을 ‘사물들’로 제목을 바꾸고 ‘1960년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출간한 것은 이듬해 1965년. 이는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의 행보와 궤를 같이한다. 20세기 세계문학의 중심이었던 당시 프랑스 문단과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새로운 미학을 경험하던 한국 문단의 1960년대 중반의 소설적 공기(空氣)가 사뭇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김형, 우리는 분명 스물다섯 살 짜리죠.” “나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도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그들은 어긋나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돌아설 수도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길에 들어서 끌려다닌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대개는 조바심을 낼 뿐이었다. 자신들은 준비된 것 같았다. 자신들은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삶을 기다렸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1960년대 이야기’ 중에서



투명한 감각과 자의식

기묘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둘의 공명(共鳴)이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곳이 어디든, 그 시대, 1960년대에는. 아니다. 두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되는 ‘도시적 감수성’이라는 수식어 앞에 굳이 ‘1960년대식’을 첨언할 필요는 없다. 그 시기 태어난 내가, 철들 무렵 그들을 처음 읽었던 20세기 후반이나, 세월이 흘러 21세기에 들어서도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읽어도 이들 소설이 거느린 ‘도시적 감수성’은 전혀 늙어버렸거나 낡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청춘들에게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렸을지언정, 나만은 이들 작품에 굳이 ‘살아 있는’ 또는 ‘현대의’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들, 서울의 스물다섯 살짜리들이나 파리의 제롬과 실비는 지금 이곳 88만 원 세대의 공기 속에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으니.

35㎡의 아파트는 조그만 현관과 절반은 세면실이 차지하는 턱없이 비좁은 부엌, 작은 침실, 그리고 서재이자 거실이며 작업실, 손님방인,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방, 뭐라 딱히 이름 붙이지 못할 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골방과 복도의 중간쯤 되는 이곳에 작은 냉장고, 전기온수기, 임시로 만든 옷걸이, 식탁, 의자로도 쓰이는 세탁물 함이 놓여 있었다. 어떤 날에는 비좁은 공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옆집을 터서 연결해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번번이 이제는 그들의 운명이 되어버린 원래의 35㎡로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중에서

파리에서 35㎡는 두 공간(2 pieces)으로 나누어진 10평 크기의 작은 아파트다.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연구자나, 소설 주인공인 제롬과 실비처럼 젊은 동거 커플이 세 들어 사는 공간으로 통한다. 1990년대 말부터 파리에 잠깐씩 체류할 때마다 나는 팡테옹 아래 리네 거리 11번지의 아파트에 머물곤 했다. 놀랍게도, 바로 옆 13번지에 페렉이 한때 살았고, 그의 소설 속 공간은 대부분 이곳 또는 이곳과 유사한 크기의 아파트들이다.

위의 인용에서 언뜻 볼 수 있듯이 페렉은 20세기 프랑스 현대소설사에서 소설을 매개로 공간 탐구에 열정적이었던 인물. 그의 소설의 특장으로 평가되는 ‘도시적 감수성’은 사물에 투영된 공간에 대한 작가의 예민하고도 투명한 감각과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공간이라는 것은 시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시공간 속의 인간의 삶이란 인생이자 관습인 동시에 법이다. 이때 관습이란 긍정적인 의미로 일상에서 걸러지고 축적된 지혜의 산물이고, 견고하면서도 유려한 일상의 체계(system)이다.

1/2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목록 닫기

소설, 기록으로서의 퍼즐 사용법

댓글 창 닫기

2023/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