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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변호사의 알아두면 돈이 되는 법률지식<마지막회>

법은 밥보다 가깝다

법은 밥보다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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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도장 찍지 마라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선 법과대학에 가지 않으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16년을 공부해도 계약이 무엇인지, 계약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기회가 없다. 청소년과 청년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계약을 경험하게 된다. 보통 은행에서 자기 명의의 계좌를 만들 때 또는 자기 명의의 휴대전화나 신용카드를 개설할 때 처음 계약서를 써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계약은 모두 은행이나 통신사가 깨알 같은 글씨로 꽉 채워 미리 인쇄해둔 계약서 종이에 직원이 형광펜으로 표시해둔 몇몇 곳에 자기 이름을 쓰는 방식으로 체결된다. 제대로 한 번 읽어볼 여유도 가지지 못한 채. 읽어보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당할 것이다. 처음 하는 계약을 이런 식으로 대충 넘기게 되니 그게 계약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계약서는 읽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사인만 하는구나’ 하는 인식이 심어지는 것이다. 반복되는 경험은 학습되고 급기야는 몸에 새겨지는 체화(體化)에 이르게 된다. 일단 체화하면 다시 바꾸기가 대단히 어렵다.

2000년대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휩쓴 재개발, 재건축 광풍 때 조합이 만들어 온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은행에서 하듯 형광펜 칠한 곳에 서명을 마구잡이로 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결과 전 재산과 같은 자기 집을 내주고 몇 푼 안 되는 돈만 쥔 채 쫓겨나게 된 주민들이 속출했다. 뒤늦게 문제를 알고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소송을 하고 하소연해보지만 자기 손으로 단 몇 초 만에 찍은 도장이나 서명을 뒤집는 데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계약은 이런 것이다. 한순간에 찍은 도장 하나가 자기 인생과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휴대전화, 신용카드, 인터넷 개설과 같이 우리 국민 중의 1000만 명 이상이 같은 내용으로 체결하는 계약은 훨씬 덜 위험하다. 정부가 감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표준적인 계약이 아니고, 가령 자신의 1년 수입이 넘는 금액이 걸린 계약이라면 계약서를 처음 본 그 자리에서 바로 도장을 찍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일단 집으로 가져와서 한 번 더 읽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확인하고 체결해야 한다.



상대방이 급하다고 하면? 그런 정도의 검토할 틈도 주지 않고 재촉하는 상대방은 십중팔구 사기꾼일 것이고, 사기꾼은 상대방이 반쯤 넋 나간 상태에서 계약서에 사인하게 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도 계약을 서두르겠는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기억하고 계약서 쓸 때 조심하자고 마음먹더라도 막상 ‘계약서’라고 이름 붙은 계약을 실제로 보기는 어렵다. ‘계약서라는 제목이 없는 것은 계약이 아닐 테니 대충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천만의 말씀이다. 계약은 상호간 약속이라고 했다. 계약 당사자의 약속 내용이 들어 있기만 하면 제목이 뭐든 모두 계약이라고 보면 된다. 차용증, 현금보관증, 확인서, 하다못해 부부간에 써주는 각서도 계약이 될 수 있다. 재건축조합에서 써주는 ‘동의서’라는 것도 계약서다. 이에 대해혹자는 공증을 안 하면 효력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면지에다 끼적끼적 쓴 것도 서명이 있기만 하면 강력한 계약서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에게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문서는 일단 두 번 세 번 읽고 생각해보는 것, 이건 결코 지나친 행동이 아니다.

소위 문명국가는 예외없이 법이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기본 법체계는 예부터 전해져온 전통 법체계가 아니라 광복 이후 독일, 프랑스 등의 대륙법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법의 틀을 갖춘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국민의 몸에 배지 않아 ‘법 따로, 사람 따로’의 분열상을 못 벗어나고 있다. 이런 현실이 가장 반가운 족속은 사기꾼이 으뜸일 것이요, 덕분에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변호사, 판검사들이 두 번째일 것이다.

교육을 바꿔라

법은 밥보다 가깝다
우리 국민이 지금과 같은 법과 인식의 분열적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고등학교 과정에서 서너 시간이라도 계약과 관련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사회시간에 배우는 삼권분립이니 대통령제니 의원내각제니 하는 내용은 알면 도움이 되는 교양이지만 계약에 관한 지식은 모르면 인생에서 실패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필수적인 내용이 돼야 한다.

지난 4년 가까이 ‘신동아’에 우리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법률 문제들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독자 여러분이 내 글을 읽고 ‘아, 법이 먼 것만은 아니고, 어려운 것만도 아니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면 매월 마감에 쫓겨 진땀 흘린 시간들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밥보다 가깝다.

신동아 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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