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세계 중앙은행장들의 총명한 스승

스탠리 피셔 미 연준 부의장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4-02-19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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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로 재직하며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 의장 등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 시절에는 세계 각국의 외환위기를 수습하며 1997년 한국의 구제금융을 진두지휘했다. 세계 1위 금융회사였던 씨티그룹 부회장도 지냈고 2005년에는 사상 최초로 외국인 신분을 지닌 채 한 나라의 중앙은행 총재가 되는 진기록도 세웠다. 세계 최고의 경제정책 전문가로 유명한 스탠리 피셔 미 연준 부의장이다.
    세계 중앙은행장들의 총명한 스승

    2012년 2월 스탠리 피셔 당시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경제 분야의 경쟁력 강화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01년 미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 역사상 가장 파워풀한 부의장” “세계 각국 중앙은행장의 아버지”“세계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경제정책 전문가”“연준에 뜬 환상의 팀(Great Te-am)”….

    2014년 1월 1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스탠리 피셔(71) 전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 겸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를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의 부의장으로 지명한 후 세계 언론이 내린 평가다. 지난해 10월 사상 최초로 여성인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미 중앙은행 수장(首長)으로 뽑혔을 때의 주목과 관심 못지않다. 대체 피셔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호평 일색일까.

    피셔 부의장 발탁은 여러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그의 화려한 이력과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가 지니는 중량감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피셔 부의장은 학계, 업계, 관계, 국제금융계를 두루 거치며 각각의 분야에서 눈부신 커리어를 쌓았다. 1973년부터 1988년,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두 차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이곳에서 벤 버냉키 전 미 연준 의장,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 올리비에 블랑사르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등 현재 세계경제계를 주름잡는 인물들을 길러냈다. 여기에 피셔 부의장 본인까지 현역으로 복귀함에 따라 “MIT 학파가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와 IMF 수석 부총재도 역임한 피셔 부의장은 IMF 재직 시절 한국과도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은 물론 인도네시아, 멕시코, 브라질 등의 구제금융을 주도하며 고금리와 뼈를 깎는 경제 구조조정 등을 요구해 ‘IMF의 저승사자’로 이름을 떨쳤다. 많은 언론은 이때 ‘신흥국 전문가’로 명성을 날린 그의 이력이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 정책으로 큰 타격을 입은 아르헨티나, 터키, 인도네시아, 인도 등 주요 신흥국과의 소통에도 장점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블룸버그통신은 “금융위기 후 국가 간 통화정책 공조가 중요해지면서 국제 감각은 중앙은행 임원의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피셔는 경제학자로서의 능력은 물론 세계 각국 중앙은행 임원에게 갈수록 중요해지는 능력, 즉 외교 감각과 정치력까지 겸비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때 벤 버냉키 의장의 후임자로도 거론되던 그가 연준 부의장이 되자 일각에서는 ‘옐런 의장-피셔 부의장’ 조합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피셔 부의장은 옐런 의장보다 세 살 많은 데다, 학계 경험이 대부분인 옐런 의장과 달리 정관계 경험도 훨씬 풍부하다. 특히 경기 부양과 일자리 창출을 중시하는 비둘기파 성향의 옐런 의장과 달리 물가 상승을 우려하는 매파 성향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충돌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상당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옐런-피셔’ 팀이 호흡을 잘 맞출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크다. 일단 그를 부의장으로 천거한 사람이 옐런 의장 본인이라는 점,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이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맞아 주요국 중 가장 먼저 금리를 내렸을 정도로 유연한 통화정책을 구사한다는 점, 전 세계 중앙은행 총재나 재무장관 등과의 교분이 돈독하다는 점 때문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피셔와 옐런이 ‘그레이트 팀(Great Team)’을 이룰 것으로 확신한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1913년 설립된 101년 역사의 연준 사상 가장 존재감 있는 2인자인 피셔 부의장은 테이퍼링 충격으로 들썩이는 미국과 세계경제를 잘 다독일 수 있을까.

    유대인 출신 경제학자

    피셔 부의장은 1943년 10월 북로디지아(지금의 잠비아)의 마자부카에서 유대인 후손으로 태어났다. 이곳에는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1200명 규모의 조그만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주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영국 등으로 떠나면서 현재는 공동체가 사실상 해체된 상태. 피셔 부의장 역시 13세이던 1956년 가족을 따라 남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로 이주했다.

    피셔 부의장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본격적으로 눈뜬 것은 1960년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했을 때다. 한 키부츠에서 열린 여름캠프에 참석한 그는 이스라엘 생활에 매료돼 예루살렘 헤브루대 진학을 꿈꿀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의 명문 런던정경대(LSE)에서 장학생 제안이 들어오자 이를 포기하고 영국으로 가 본격적인 경제학자의 길을 걷는다.

    LSE에서 경제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딴 그는 미국으로 적을 옮긴다. 1969년에는 MIT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故) 폴 새뮤얼슨 교수. 이후 4년간 시카고대에서 조교수로 활동한 피셔는 1973년 모교 MIT의 교수가 됐다. 이때부터 그가 길러낸 제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976년에는 미국 시민권도 취득해 정식 미국인이 된다.

    피셔 부의장의 경제학과 제자는 아니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현 이스라엘 총리도 1977년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를 땄다. 이때 인연을 맺은 피셔 부의장과 네타냐후 총리는 이후 남다른 친분을 쌓았다. 2005년 피셔가 거액 연봉이 보장되는 씨티은행 부회장직을 내던지고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가 된 것도 당시 재무장관이던 네타냐후의 설득 때문이었다.

    국제 금융계에서 두각

    학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쌓은 피셔 부의장은 1988년 1월 세계은행(WB)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되어 국제 금융계에 본격 데뷔한다. 그는 2년 반의 임기를 마친 후 잠시 MIT 교수로 복귀했다. 1994년 9월 IMF에 입문한 피셔는 7년간 IMF에서 활동하며 ‘금융 전도사’ ‘개발도상국 문제의 해결사’라는 칭호를 얻는다.

    당시 그가 주도한 IMF 구제금융의 혜택을 본 나라는 십수 개국에 달한다. 1995년 페소화 가치 폭락으로 ‘테킬라 파동’을 겪은 멕시코를 비롯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이다. 1998년 모라토리엄(지불 유예)을 겪은 러시아와 1999년 헤알화 가치 폭락으로 부도 직전에 몰린 브라질의 구제금융도 주도했다. 2001년에는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맞은 아르헨티나의 뒷수습에 나섰다.

    당시 피셔 부의장의 성과가 특히 빛난 이유는 IMF의 최대 자금 분담국인 미국과 친미(親美) 인사가 대부분인 IMF 고위 집행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흥국에 대규모 자금 지원을 이끌어낸 데 있다. 물론 IMF가 고집한 고금리 정책으로 한때 한국의 금리가 20%에 육박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지원국에 상당히 가혹한 조건의 구제금융이었다는 지적은 있다. 하지만 그의 뚝심이 주요 개발도상국 경제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피셔 부의장은 IMF 내부나 조지 부시 행정부의 관료들이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규모 금융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IMF는 회원국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는 곳이다.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는 없다. 특히 해당 국가가 자금 지원을 받는 대신 강력한 경제개혁을 약속했는데 이를 저버린다는 것은 도의상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자금지원을 밀어붙였다. 이미 국가 부도를 맞은 아르헨티나에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80억 달러(약 9조 원)를 수혈한 것도 피셔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금융 지원을 논의하는 IMF 회의에서 피셔 부의장의 첫 마디는 언제나 “우리가 이 나라에 최대 얼마를 지원할 수 있는가”였다.

    피셔 부의장은 2001년 말 7년간의 IMF 생활을 정리했다. ‘IMF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아 이후 IMF 및 세계은행의 총재를 뽑아야 할 때마다 단골로 이름이 오르내리긴 했으나 부시 정권과의 껄끄러운 관계, 다소 많은 나이 등이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신 그는 당시 부동의 세계 1위 금융회사였던 씨티그룹의 부회장으로 변신했다. 학계와 관계 경험까지 쌓은 그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업계 경험’이라는 방점까지 찍은 셈이다.

    사상 첫 외국인 중앙은행 총재

    2005년 1월 초 피셔 부의장은 다시 한 번 국제적 주목을 받는다. 미국 국적의 그가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로 발탁됐기 때문이다. 총재 취임 직후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한 그는 현재까지 미국과 이스라엘 복수 국적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국인 신분이었기에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1694년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인 영국 중앙은행이 설립된 이후 세계 중앙은행 중 외국인 총재를 뽑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혈통은 유대계라 해도 미국인인 그가 이스라엘 중앙은행 수장이 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앞서 언급했듯 그를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베냐민 네타냐후 당시 이스라엘 재무장관이다. 그는 강도 높은 신(新)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이스라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야심에 불탔다. 강성 노조를 손보고 세금 제도를 개편하려는 네타냐후의 눈에 든 사람이 바로 작은 정부, 시장 개방, 경쟁력 촉진을 강조하던 유대계 미국인 경제학자 피셔였다. 네타냐후의 제안을 받은 피셔는 씨티그룹의 거액 연봉을 포기하고 즉각 이스라엘로 귀환했다. 미국에서 경제학자, 경제관료, 금융회사 최고 임원으로 존경받던 피셔가 국제금융계의 변방에 불과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을 두고 놀랍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피셔가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했음에도 고국의 반응은 차갑다 못해 얼음장이었다. 상당수 이스라엘인은 군 의무 복무, 주변 이슬람 국가와의 거듭된 전쟁, 끊이지 않는 테러 공포 등을 겪지 않은 채 미국에서 안온한 삶을 살다온 피셔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잘 이해하겠느냐고 반발했다. 이스라엘 유력지 ‘하레츠’의 칼럼니스트인 아리 샤비트는 “피셔가 얼마나 능력 있고 대단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외국인 중앙은행 총재는 안 될 말”이라고 비난했다. 피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복수 국적도 문제 삼으며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단일 국적만 지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이 2000년간 나라 없이 지내던 세계 각국의 유대인 이민자가 1948년 만든 나라라는 점, 이스라엘에서 장기 거주한 경험은 거의 없지만 피셔가 유창한 헤브루어를 구사한다는 점, 그가 MIT 교수 시절 여러 차례 이스라엘 경제성장을 위한 고문으로 활약해 이스라엘 사정에 밝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중앙은행장들의 총명한 스승


    이런 극심한 진통 때문에 피셔는 2005년 5월 1일에야 정식으로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로 취임할 수 있었다. 그의 전임자인 데이비드 클라인 전 총재의 임기는 같은 해 1월 16일 끝난 상태였다. 무려 석 달 반 동안 중앙은행 총재 자리가 비어 있었던 셈. 본인의 정치 생명을 걸고 ‘피셔 중앙은행 총재’안을 밀어붙인 네타냐후의 뚝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다행히 네타냐후는 1년 후 총리가 됐고 이후 피셔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때부터 2013년 6월까지 8년간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로 재직한 피셔는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금융 안정 및 경제성장을 이끌어 찬사를 받았다. 그는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자마자 세계 각국 중앙은행 총재 중 가장 먼저 금리를 내렸다. 1년 후 이스라엘의 경기 회복이 가시화하자 또 가장 먼저 금리를 올려 출구 전략(Exit Stra-tegy)을 실시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이스라엘의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14.7%씩 성장했다. 고성장, 물가 안정, 유연한 통화정책,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성공적 안착 등 중앙은행 총재로 그가 남긴 업적은 상당하다. 이에 매년 여름 세계 30여 개국 중앙은행 총재의 성적을 평가하는 미국 금융전문지 글로벌 파이낸스는 2009년 피셔 총재의 점수를 가장 높은 ‘A’로 부여했다.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피셔가 보인 활약은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 인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12년 11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Bank of England)이 318년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총재인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를 영입한 것. 성인이 된 후 줄곧 미국에서만 산 라구람 라잔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인도 중앙은행 총재가 된 것도 “일만 잘하면 중앙은행 총재의 국적이나 정체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국 안에서 폐쇄적인 생활만 한 인재보다는 국제 경험과 감각이 뛰어난 글로벌 인재가 더 낫다”는 기류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연준 부의장으로 화려한 복귀

    2013년 2월 18일 WP는 “2014년 1월 말 임기가 만료되는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후임으로 스탠리 피셔가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아직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를 그만두지도 않은 피셔가 미국 경제의 새로운 구원투수로 주목받았다는 점만 봐도 그에 대한 미국 내 기대가 얼마나 높은지 잘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오바마 대통령은 당초 피셔의 제자인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을 차기 연준 의장으로 선호했다. 하지만 서머스 전 장관의 독선적 성격 등이 문제가 되자 서머스는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고 결국 연준 내부 사정에 정통한 재닛 옐런 부의장이 새 연준 의장으로 뽑혔다. 백악관은 당초 2013년 10월 옐런을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할 때 피셔 또한 부의장으로 지명하는 방안을 꿈꿨다. 하지만 한때 연준 의장 후보로도 거론됐고 국제금융계에서 워낙 화려한 이력을 쌓은 그에게 ‘2인자’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 실례라고 판단해 피셔 본인에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때 나선 사람이 바로 옐런 의장. 그는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는 연준 의장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학계와 연준에만 있었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에 본인보다 명망이 높은 인물을 영입해야 한다며 피셔에 대한 삼고초려를 자청했다. 이런 옐런 의장의 태도에 백악관은 물론 피셔 본인도 감동했다. 결국 그는 연준 부의장 자리를 수락했다.

    피셔 부의장 부자(父子)와 베스트셀러 ‘린 인(Lean In)’의 저자이자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여황제로 불리는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의 남다른 관계도 화제다. ‘피셔 제자의 제자’인 샌드버그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부 보좌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이때 그를 재무부로 데려온 사람이 당시 재무부 장관이자 피셔의 MIT 제자인 로렌스 서머스 전 장관. 또 피셔 부의장의 아들인 데이비드 피셔 페이스북 광고담당 부사장은 샌드버그가 구글에서 일할 때부터 그의 오른팔로 활동하며 남다른 총애를 받아왔다. 아버지는 재닛 옐런 의장과, 아들은 셰릴 샌드버그 COO라는 세계적 거물 여성 밑에서 일한다는 점 또한 눈길을 끈다.

    피셔의 연준 입성은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그의 복귀로 MIT 출신 학자의 세계 금융계 장악이 두드러졌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통화주의 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과 그 후학, 즉 시카고학파가 득세한 적도 있지만 지금처럼 MIT 출신 학자들이 세계경제계의 전면에 부상한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앞서 언급한 버냉키 의장, 드라기 총재 등 외에도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2008년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2013년 수상자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 옐런 의장의 남편이자 역시 2001년 수상자인 조지 애컬로프 UC버클리대 교수가 모두 MIT 박사 출신이다.

    둘째, 연준 내부의 역학 구도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무려 18년간 재임하며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둘렀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 미국 대통령까지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금리인상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 폴 볼커 전 연준 의장 등 버냉키 의장의 전임자들은 연준 부의장에게 사실상 실권을 거의 주지 않았다. 부의장은 명목상의 2인자였을 뿐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젊고, 재임 중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를 맞은 버냉키 전 의장은 경제학계의 선배인 옐런 부의장을 예우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준이 경기 부양을 위해 무려 3조 달러를 시장에 푼 정책은 버냉키와 옐런의 합작품이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합작 정부를 운영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옐런 의장보다 더 인지도가 높은 부의장이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각에서 “피셔의 취임이 연준 내 매파와 비둘기파의 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부의장 상왕 정치가 횡행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셋째, 연준과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정책 공조가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미국, 영국, 인도, 이스라엘 등 세계 각국이 국제 경험이 풍부한 중앙은행 임원을 속속 영입하는 이유는 금융위기 후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정책 연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피셔 부의장의 남다른 인적 네트워크까지 감안하면 그가 연준의 정책 목표와 그 의도를 전 세계에 설명하는 일종의 ‘외교관’ 노릇을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 IMF 부총재 시절의 이력을 감안하면 페소화 급락으로 2001년 이후 13년 만에 다시 국가 부도를 맞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는 아르헨티나발(發) 금융시장 불안을 수습하는 데도 피셔의 역할이 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연준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의장이 될 것이란 예측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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