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낮밤 뒤바뀐 생활로 뇌일혈

큰 질병 없던 고종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4-02-19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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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뇨·심장 질환 등을 통칭하던 성인병(成人病)이란 명칭이 생활습관병으로 바뀌었다. 대한내과학회는 2003년 “이른바 성인병은 대부분 흡연, 과식, 과음, 운동부족 등 잘못된 생활습관의 반복으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올바른 생활습관을 지녀야 한다는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성인병’이란 명칭을 ‘생활습관병’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실 질병은 대부분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1852~1919, 재위 1863∼1907)은 나름대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조선 말기 대다수 왕이 병과 싸우면서 많은 처방 및 치료 기록을 남겼지만, 고종은 ‘조선왕조실록’과 ‘태의원일기’ 모두 소화불량이나 가벼운 피부염에 대한 기록밖에 없다. 하지만 생활습관에 선 유별나게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오래하면서 야식을 먹었다.

    명성황후의 영향력

    ‘경성일보’ 1919년 1월 24일자엔 덕수궁 촉탁의인 가미오카의 구술담이 실렸다. 고종의 평상시 생활습관에 대한 것이다. 고종은 평소 새벽 3시에 침소에 들었고 오전 11시경 기상해 오후 3시경 아침식사를 하고 점심은 과자나 죽을 먹었으며, 저녁식사는 밤 11시에서 12시경에 했다고 했다. 키는153cm, 몸무게는 70kg 정도였으며 시력은 좋아서 노안이나 근시의 징후 없이 건강했다고 했다.

    고종은 늦게 자고 야식을 반복해 소화력이 떨어지면서 소화제를 복용하고 수면제 격인 온담탕을 복용했다. 하지만 건강은 약이 아니라 생활습관에서 만들어진다. 늦게 자고 야식을 먹는 습관은 결국 중풍을 유발했고, 이는 3·1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한 사람의 생활습관이 세상을 뒤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올빼미 생활을 하는 데는 명성황후의 영향이 컸다. 비록 양자로 들어왔지만 자신의 오빠였던 민승호가 폭탄테러로 사망한 사건 이후 명성황후는 공포와 원망, 두려움으로 잠들지 못했다.

    폭탄테러의 진상은 이렇다. 민승호의 생모가 죽고 난 후 상중에 함 하나가 배달됐다. 밀실에서 자물쇠를 열어 함을 확인하려는 순간 폭탄이 터져 민승호와 그의 아들, 할머니가 온몸이 숯처럼 타서 죽었다. 이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1895년 8월 6일 이노우에 가오루가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엔 그가 고종과 명성황후를 접견했을 땐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이 민승호를 죽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왕실의 관행으로 본다면 왕비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마땅하다. 그러지 않는다는 건 고종의 동의 내지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 술 더 떠 같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는 건 명성황후가 고종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방증이다.

    고종의 생활습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명성황후의 간택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이 명성황후 민씨가 고아였다고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매천야록’에 소개된 글 중 고녀(孤女)라는 표현 탓에 잘못 알려진 것이다. 매천야록은 “김병학은 흥선대원군과 밀약하여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하였다. 외척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었는데 곧바로 김병학을 배신하고 민치록의 고녀에게 국혼을 정하였다”고 기록했다.

    낮밤 뒤바뀐 생활로 뇌일혈

    근대의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왼쪽)과 작가 정종미 씨의 작품 ‘명성황후.’

    민승호 죽음 이후 불면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 종손인데 민유중은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혈혈단신도 아니었다. 또한 국혼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편모 슬하의 외동딸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민치록은 10촌 형제가 되는 민치구의 둘째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와 친누나, 동생 사이였다. 중종반정 이후 노론의 사대부들이 국혼을 놓치지 말자고 했던 만큼 흥선대원군이 얼마나 치밀하게 며느리를 들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종 8년 11월 4일 명성황후는 원자를 낳았지만 원자는 항문이 막혀 죽고 만다. 실록의 기록은 간결하다. “오늘 해시(亥時)에 원자가 대변이 통하지 않는 증상으로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산실청(産室廳·조선시대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을 철수시키도록 하라.”

    호사가들은 이런 원자의 불행이 흥선대원군의 음모로 산삼을 먹인 결과 나타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태아에게 항문이 형성되는 시기는 임신 10주 이내인데, 명성황후가 산삼을 먹은 시기는 그 후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임신 맥(脈)이 나타나 임신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시기는 임신 6~7주가 지나서이며, 입덧은 아무리 빨라도 5주 정도 지나야 나타난다.

    한의학에서 산삼과 성분은 비슷하지만 약효는 훨씬 떨어지는 인삼을 임신부에게 처방할 땐 기와 혈이 부족한 상태라는 진단을 내린 경우다. 팔물탕이란 약제를 처방하는데, 인삼을 비롯해 백출, 백복령, 감초, 숙지황, 백작약, 천궁, 당귀 등의 약재가 들어간다. 인삼을 단독 처방하면 해로울 수 있지만, 8가지 약재가 혼합되면 인삼은 기와 혈을 조절하는 구실을 한다. 물론 임신기간 중 온몸에 열이 나고 축축해지는 ‘습열(濕熱)’ 상태의 증상엔 인삼을 처방해선 안 된다. 인삼이 임신부에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임신 시엔 함부로 먹어선 안 되는 약재다.

    아무튼 민승호의 죽음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 못 들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잠이 오지 않는 원인 중 가장 큰 건 역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교감신경을 흥분시키고 혈압을 오르게 하며, 위가 아프고 얹히는 등 열을 받는 상황으로 만든다. 결국 인체엔 양기가 넘치면서 음기가 줄어 불면 상태가 된다. 커피, 콜라 등 음료수도 신경을 흥분시키고 잠이 오지 않게 한다. 현대의학에서 보면 갱년기나 갑상선질환, 당뇨, 협심증은 음기를 소진해 불면증을 야기하는 원흉이다.

    잠들기 힘들어하던 고종이 승하하던 날 점심때까지 처방된 약물도 온담탕이다. 온담탕 속 대표 약물은 반하(半夏)다. 반하는 보리밭에서 많이 자란다. 속이 더운 까닭에 보리밭 사이에 숨어 해를 피해 자라며 보리농사가 끝나 쟁기질할 때 캐낸다. 속이 더운 식물이 어떻게 잠을 잘 오게 할까. 답은 그 이름에 담겨 있다. 반하는 하지까지는 잎을 펼치지만 이후론 잎을 반으로 줄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반하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하엔 양이 불타오르는 걸 줄여 음으로 보내는 오묘한 특성이 내재한다. 이는 양을 이끌어 음으로 보낸다는 ‘도양입음(導陽入陰)’으로, 양을 이끌어 음을 활달하게 한다는 뜻이다. 현대의학으로 보면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잠이 오게 하는 것이다.

    반하와 산조인

    온담탕에 가미하면서 잠이 잘 오게 하는 대표적 약재는 산조인(酸棗仁)이다. 산조인은 TV드라마 ‘대장금’에도 등장해 유명해졌다. 중국 사신이 와서 장금에게 수청을 들게 하자 그에게 먹여 잠재운 약재다. 대추나무 종류인데, 크게 자라는 건 대추이고 빡빡하고 작게 여러 개가 자라는 건 산조인이다.

    산조인은 신맛을 지녔으며 간을 보한다. ‘본초강목’은 그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누우면 피는 간으로 간다(간은 근육을 주관하기에 사람이 활동을 그치면 피는 간으로 돌아오고 활동하면 근육으로 스민다). 피가 안정되지 못하여 누워도 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놀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자지 못한다.”

    이 점도 음기와 통한다. 간장으로 수렴하는 건 혈액이며, 음기다. 산조인의 산(酸)은 신맛으로 수렴한다는 뜻이다. ‘동의보감’에서 사과를 먹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해가 떠오르면 환해지면서 만물이 깨어난다. 반면 달이 뜨는 밤이면 사물을 밝히던 빛은 흐려지기 시작해 이내 어두워진다. 태양은 밝은 양기를 주관하고, 달은 어둡고 서늘한 음기를 주관한다. 잠은 달과 같은 음기가 성할 때 잘 오고 음기가 줄면 오지 않는다. 동의보감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음기가 줄어들어 양기가 성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잠을 잘 오게 한다고 알려진 건 상추다. 상추는 본래부터 음기의 상징이다. 여성의 욕망을 가리킨다. 상추의 속명은 은근초다. 숨어서 불태우는 음욕과 연결되는 말이다. 고추밭 이랑 사이에 심은 상추일수록 약이 올라 상품으로 잘 자란다고 하며 텃밭에서도 보이지 않게 파종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욕할 때 ‘고추밭 상치 가리는 년’이라고 하면 곧 남편을 위하는 척하며 자신의 음욕을 채운다는 나쁜 의미가 숨어 있다. 본초강목에서 상추가 신장에 좋다고 한 것엔 내부의 음액을 도와 정액을 잘 만든다는 뜻이다. 속이 찬 사람이 먹으면 설사를 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경련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3·1운동으로 이어지게 한 중요한 사건이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15분경부터 증상이 시작돼 새벽 6시 30분 중태에 빠지는 과정에서 당시 고종을 가장 먼저 진찰하고 임종을 지킨 의사는 일본인 여의 도가와 기누코다. 당시 주치의였던 가미오카의 몸이 불편해지면서 대신 고종을 진찰한 여의다. 1월 23일자 경성일보는 도가와를 인터뷰하고 그의 술회를 게재했다.

    고종은 발병하기 4, 5일 전부터 “다소 식욕이 없고 잠이 잘 오지 않네” 하고 몸 상태를 설명했는데, 발병 전 의자에 앉아 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도가와는 발병 연락을 받은 후 허둥지둥 전의와 참궁을 했는데, 2회부터 7회까지 고종의 경련이 계속됐다. 맥박이 2, 3회에는 110회, 4회부터는 130에서 140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체온도 37도7부로 올라갔다. 8회째부터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졌다. 경련은 12회까지 계속됐고, 고종은 오전 6시경 훙거(薨去)했다.

    고종의 발병에서 임종까지의 시간별 경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1월 20일 오전 11시 고종은 촉탁의 안상호가 배진한 뒤 아침식사를 했다. 오후 3시에 가미온담탕을 복용하고 가미오카와 도가와의 진찰을 받았다. 오후 9시엔 소화제로 가미양위탕을 복용했다. 밤 10시엔 저녁식사를 했고, 전의 김형배와 촉탁의 안상호의 진찰을 받았으며 12시와 1월 21일 새벽 1시 사이에 자다 발병했다. 전의 김형배가 청심환을 처방하고 도가와가 참궁해 진찰했으며 새벽 2시 30분에 안상호가, 4시 53분엔 가미오카가, 5시 30분엔 모리야스 하가가 배진했다.

    낮밤 뒤바뀐 생활로 뇌일혈

    고종은 1885년 선교사 앨런을 통해 광혜원을 세우고, 서양인 의사들에게 건강에 대해 자문했다.

    독살과 관련한 구체적 기록은 윤치영의 일기다. 기록은 고종의 시신을 목격한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함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듣고 적은 것이다. 1920년 10월 13일자 기록은 독살 혐의를 몇 가지로 분류했다.

    ①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 후 죽었다.

    ② 고종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③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가 닳아 없어졌음을 발견했다.

    ④ 30cm나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식혜 독살설

    일본은 독살설을 해명하려고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장문의 해명 기사를 올렸다. 밤 11시경 나인 신응선이 고종에게 은기에 담은 식혜를 바쳤는데 그중 10분의 2를 고종이 마시고 나머지는 나인 양춘기, 이완응, 최헌식, 김옥기, 김정완 등이 나눠 마셨다고 구체적으로 식혜 독살설을 부인했다. 식혜에 독을 탄 궁녀 2명이 함구를 위해 독살됐다는 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박완기라는 나인은 내전 청소와 아궁이 잡역에 종사하다 폐결핵을 앓아 죽었는데 고종의 음식에 다가갈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으며, 또 한 명의 나인은 창덕궁 침방에 근무하는 자로서 덕수궁에 출입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①과 ②의 현상은 시신 팽창 때문에 통상 하루 안에 염을 하는데 고종의 시신은 자연조건하에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이은 왕세자가 도착한 4일 후에 염을 하면서 부패가 진행돼 나타난 현상으로 반박했다.

    고종은 서양문물에 대해선 열린 자세를 견지했다. 동시대 최고 실권자였던 서태후가 서양의학과 약품을 철저히 배제한 반면, 고종은 일찍부터 선교사 앨런을 통해 광혜원을 세울 수 있었고 서양인 의사들로부터 건강 자문을 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1893년 궁녀를 마지막으로 뽑았는데, 일제에 의해 이태왕이란 이름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론 1890년대 200명에 달한 궁녀가 20여 명으로 줄었다. 궁중 법도는 허물어지고, 궁중 음식에 만족하지 못해 요릿집에 주문해 음식을 시켜먹기도 했다. 1903년엔 쌀에서 돌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해 밥을 먹다 이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숙수 김원근이 유배를 당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에 이르렀던 것이다.

    소화기 질환 자주 호소

    고종의 건강을 위협한 최대 위기로 그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타서 독살하려던 시도를 꼽는다.

    궁중의 요리를 담당한 숙수들은 돈에 혹해 왕의 커피에 아편을 넣는 엄청난 범행을 저지른다. 실록은 1898년 9월 12일 이렇게 기록했다.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詔勅)을 받고 그날로 배소(配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의 심보를 드러내고 친한 사람인 공홍식에게 주면서 어선(御膳·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을 어공(御供)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元)의 은(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의 고지기로서 어공하는 서양요리를 거행하였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汰去)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건의 진상은 천민 출신으로 러시아 통역관 역할을 하며 신임을 얻었던 김홍륙이 거액의 착복사건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유배를 떠나는 길에 돈으로 요리사 김종화를 매수해 고종을 독살하고자 한 것이다. 상궁 김명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고종은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알고 바로 뱉었지만 복용량이 많았던 세자의 경우 며칠 동안 혈변을 보았고 치아가 빠져 의치를 18개 해 넣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큰 질병을 앓은 기록이 별로 없다. 연령별로 요약해보면 16세 되던 해에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 귀밑 부분에 종기가 나자 당귀고라는 고약을 붙여 나았다. 33세 때 겨울에 세자와 함께 잠깐 감기를 앓았고, 34세엔 중전과 함께 감기를 앓았다. 39세에도 여름 감기와 체증을 앓았는데, 이때부터 소화기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고종이 가장 많이 호소한 증상은 소화기 질환이었다.

    47세에도 담체(痰滯·담(痰)이 몰려 한곳에 뭉친 것. 또는 그로 인해 생긴 병) 증상을 앓는데, 담체란 소화기가 약해지면서 위장에 불순물이 생겨 쉽게 체증을 앓거나 두통, 어지러움을 느끼고 관절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이론엔 오장육부가 중심이라는 한의학적 사유가 근거가 된다. 한의학적 사유의 핵심은 내면의 질서다. 외면적 형태나 구조가 아닌 내면의 질서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살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필심과 다이아몬드는 흑연을 기본 소재로 삼지만, 단지 그 소재의 내면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연필심과 다이아몬드로 나눠진다고 파악한다.

    낮밤 뒤바뀐 생활로 뇌일혈

    고종의 어진(위)과 그가 커피를 마실 때 직접 사용했다는 은수저. 궁중의 요리를 담당한 숙수들은 돈에 혹해 왕의 커피에 아편을 넣는 범행을 저질렀다.

    봄의 질서는 간, 여름의 질서는 심장, 가을의 질서는 폐, 겨울의 질서는 신장이다. 사계절은 시계와 같다. 시계를 3, 6, 9, 12로 나누면 사계절의 질서는 일목요연하게 시계를 채운다. 그러면 소화기는 무엇일까. 시계의 바닥판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와 땅으로 돌아가듯 사계절은 모두 땅 위에서 펼쳐지는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한의학은 사물을 움직이는 힘은 시계의 바닥판 속 축이라고 보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소화기, 즉 토(土)로 추상한다. 소화기에 생기는 불순 대사물인 담은 머리에선 어지러움을, 관절에선 관절염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축이 멈추는 건 체증이다. 팽이가 돌다 멈추려면 좌우로 비틀거리는 상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증은 축선이 멈추는 상태로 여겨져 비틀거리다 실신하게 되는 것이다.

    고종은 55세 무렵엔 바로 이런 소화기의 질환이 오래돼서 위장에 노폐물이 쌓이는 담증(痰症)을 호소한다. 담이 결리는 증후와 가슴에 담이 차서 괴롭고 호흡이 순조롭지 못한 증상으로 괴로워한다. 태의원 도제조 이근명은 고종에게 통순산을 복용하게 한 후 효험이 어떤지 묻는다. “처음에는 가슴에 담이 차서 괴롭고 호흡이 고르지 못하더니 지금은 차도가 있다. 허리와 옆구리가 아직 결리는데 상부에 겉으로 나타나는 증세가 있다.”

    통순산은 영위반혼탕이란 처방의 다른 이름이다. 이 처방의 효험에 대해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한다. “담음이 가슴, 등, 머리, 겨드랑이, 옆구리, 허리, 허벅다리, 손발로 돌아다니다가 머물게 되면 단단하게 붓고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이런 여러 가지 담증을 잘 낫게 한다.” 이근명의 대답을 보면 기존의 제조나 유학자들과 똑같은 방법론을 제시한다. “청심과욕하며 음식을 조절하고 생활을 조심하고 정신을 기를 것”이다.

    조선의 왕들과 친족들이 내의원이란 기관을 통해 건강관리를 해왔다면, 고종은 태의원을 통해 건강을 관리했다. 사실 격변기를 통해 이름만 바뀌었을 뿐 직제상의 차이점은 크지 않다. 남아 있는 자료는 광무 2년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1년치 기록이다. 그날그날 태의원에서 있었던 문안과 오고간 대화 내용, 전의들의 입진, 처방 내용 등을 기록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 체증인 담체, 어지러움인 현훈, 체증으로 인한 설사인 체설의 증상들이 기록돼 있다.

    대부분의 치료는 약물 처방만 있을 뿐 침구치료에 대한 부분은 찾을 수 없다. 처방한 약물도 소화기 질환에 쓰는 보약이 대부분이다. 인삼이 든 삼출건비탕, 이공산, 가미군자탕 등의 처방이다. 모두 소화기가 허약하면서 소화력이 떨어진 경우에 쓰는 보약 계통의 약물이다.

    태의원일기엔 왕의 일상과 관련한 건강관리법이 나온다. 왕의 일상은 공적 업무 외에도 잦은 국가제례를 주관하는 까다롭고 힘든 것이다. 특히 날씨가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에서는 직접 제사에 참여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기록에 따르면 제사가 9월 2회, 10월 4회, 11월 3회, 12월 3회에 걸쳐 연속으로 겹치면서 친행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한의학의 기본적인 건강관리 요점은 예방의학적 측면에 있다. 이 점에서 눈에 띄는 건 인삼속미음이란 처방으로 미리 체력을 비축한다는 점이다. 보통 인삼과 좁쌀을 물과 함께 끓여 체로 걸러낸 것으로 죽보다 묽은 유동식이다.

    좌지우지된 삶

    좁쌀은 신기(腎氣)를 보하는 음식이다. 조(粟)는 서쪽에서 온 곡식이란 뜻이다. 사실 음양으로 나눌 때 꽃봉오리를 예로 들면 쉽다. 햇볕이 들면 활짝 꽃을 피우고 저녁이 되면 수축한다. 이렇게 수축하고 줄어드는 상태를 음이라 하는데, 가장 수축한 상태를 음이 가장 세게 응축된 상태로 보는 것이다.

    좁쌀은 오곡 가운데 가장 작고 단단하기 때문에 가장 음적인 곡식으로 음의 상징인 신장을 돕는 건 당연하다. 인삼은 뜨거운 양을 상징하므로 찬 성질의 좁쌀과 서로 궁합이 맞다. 동의보감은 좁쌀의 효능에 대해 비위 속 열을 없애고 기를 보하며 오줌을 잘 나가게 한다고 적었다.

    태의원일기 1898년 8월 15일 기록은 속미음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에 경효전(명성황후)의 3주제를 받들어 모시기가 멀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드실 인삼 2돈을 넣은 속미음과 명헌태후전이 드실 인삼 2돈을 넣은 속미음, 태자궁과 태자비궁이 복용할 인삼 2돈을 넣은 속미음을 18일부터 20일까지 한 첩씩 총 세 첩 달여 드리도록 들어가 아뢰었다.” 속미음을 만들 때 감독자의 직책을 기록해 책임 소재를 파악한 걸 보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낮밤 뒤바뀐 생활로 뇌일혈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집필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고종은 자신이 주인인 삶을 살 수 없었다. 즉위 시부터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아래 왕으로 살았고, 이후론 명성황후의 입김 아래에서 민씨 척족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조선을 이끌어본 적도, 저항해본 적도 없었다.

    건강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명성황후의 트라우마에 이끌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서 조선의 아침을 열 기회를 놓쳤다. 뇌일혈로 죽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생활방식에 이입된 타인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했다. 조선의 슬픔은 바로 여기서 잉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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