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려명黎明

1장 개성 파견

  • 이원호

    입력2014-02-21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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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려명(黎明)’은 개성공단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 남쪽의 남자(개성공단 입주업체 직원)와 북쪽 여자(개성공단 근로자)의 사랑이 뼈대다.
    • 이 뼈대에 남북간 갈등과 화해, 통일 염원의 살을 붙였다.
    • 밀리언셀러 대중작가인 이원호 씨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개성공단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 국내 처음으로 개성공단 실상을 파헤친 이 소설은 남북교류와 통일의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 구실을 할 것이다. <편집자>
    려명黎明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1년만 근무해, 1년 후에는 내가 책임지고 과장 진급과 동시에 본사로 복귀시킬 테니까.”

    박경호가 담배를 빨아들이더니 연기를 길게 뱉고 나서 말을 이었다.

    “본봉에다 파견수당 50만 원이 붙는 거야, 거긴 돈 쓸 데가 없어서 1년에 1000만 원은 모을 수 있다는 거다. 들었지?”

    윤기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난데없다. 점심 잘 먹고 들어왔더니 업무부장 박경호가 흡연실로 사용되는 베란다로 불러내 개성공단 현지법인으로 가라는 것이다. (주)용성은 의류 생산 수출업체로 개성에 현지법인 ‘용성’을 설립했다. 2003년 개성공단이 생산을 시작하고 나서 3년 만인 2006년 설립됐으니 이젠 기반이 굳은 셈이다. 기반이 굳었다는 것은 ‘개성 살림’에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개성 용성’의 근로자는 650명, 한국인 직원은 법인장 포함해 8명이 근무한다. 박경호가 바짝 다가서더니 윤기철을 보았다.

    “이봐, 윤 대리, 위기가 기회라는 말 모르나?”



    “무슨 말입니까?”

    마침내 윤기철이 말을 받았다. 박경호와는 3년간 업무부에서 부대끼다보니 알 건 다 아는 사이다. 부장 3년차인 박경호는 책임질 일은 나서서 맡은 적이 없다. 부하가 사고를 치면 감싸준 적도 없는 인간이다. 39세, 나이나 경력이 윤기철보다 10년 선배다. 박경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곧 본사에서 구조조정이 있을 거야, 이 친구야. 개성에 가 있으면 비바람을 피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윤기철이 숨을 들이켰다. 요즘은 기업이 어렵다. (주)용성은 매출액이 내수 수출 합해 2000억 원으로 5년째 답보 상태이고 매년 감원을 해왔다. 그런데 구조조정이라니? 이놈의 회사는 새로운 시장,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만날 감원에 구조조정만 하는가? 그때 박경호가 손바닥으로 윤기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건 비밀이야, 윤 대리만 알고 있어.”

    “예, 부장님.”

    “공단 파견, 생각해보고 내일 아침까지 알려줘.”

    이제는 박경호가 느긋해졌다.

    “개성에 간다고?”

    술잔을 내려놓은 조하나가 윤기철을 보았다. 속눈썹에 가린 검은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름답다. 요즘 세상에서 인조 아닌 것이 있는가? 다 인조다. 조하나하고 모텔에 가면 벗고 떼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린다. 일 끝나고 붙이는 데는 30분쯤 더 걸린다. 그래서 일 치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게 느껴진다. 조하나가 다시 물었다.

    “개성에는 왜?”

    “거기 현지법인 말야, 거기로 발령이 날 것 같아서.”

    “…”

    “1년 근무하면 2000만 원쯤 모이게 된다지만 그것보다도.”

    “…”

    “과장 진급하기 위해서 필수 코스야. 1년 근무하고 나오면 과장 돼.”

    “…”

    “일주일에 한 번 외박 나오는 거지. 토요일 오후에 나왔다가 월요일 아침에 들어가는 거야.”

    말하다보니 시선만 주고 있는 조하나에 대해 윤기철이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1000만을 2000만으로, 과장진급 필수코스 등으로 광택을 낸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입을 다문 윤기철이 소주잔을 들고 한 모금에 삼켰다. 이곳은 인사동의 한식당, 관광객을 상대로 퓨전한식을 만들어 파는 곳인데 조하나의 단골집이다. 조하나가 잠자코 시선을 내리더니 제 잔에 술을 채운다. 26세, 식품회사 비서실 3년차 사원, 167㎝, 52㎏의 날씬한 몸매. 눈, 코, 볼, 입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미인으로 윤기철과는 1년 반째 교제 중이다. 그때 조하나가 말했다.

    “우리 계열사가 그곳에 있어. 식품용 캔을 만드는 회사야.”

    이제는 윤기철이 입을 다물었고 조하나의 말이 이어졌다.

    “그 계열사 사장이 만날 이야기해주는 바람에 개성공단 이야기는 다 들었어.”

    “…”

    “자기가 좋다면 가, 난 상관없어.”

    그 순간 윤기철은 가슴에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느낌을 받는다. 얘는 남이다.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같은 차에 타지 않았다. 한때는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차에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여자다. 그래, 개성은 잘나가는 회사에서는 유배지다. 나 같은 3류 중소기업 직원 입장에서는 구조조정 피하는 피난처 같은 곳이고, 윤기철이 술병을 집어 아직도 빈 잔으로 놓인 제 잔에 술을 채웠다.

    “그래, 갈 거다.”

    말이 저절로 나와버렸다.

    밤 11시가 다 됐는데 윤덕수는 저녁밥을 먹는 중이었다.

    “어, 왔냐?”

    반주로 소주를 마시던 윤덕수가 술잔을 들어 보이며 윤기철에게 물었다.

    “한잔할래?”

    “아뇨.”

    조하나하고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시고 그냥 헤어진 터라 술이 당기기는 했다. 그냥 헤어졌다는 것은 같이 모텔에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만나면 꼭 모텔에 갔으니까.

    “밥 먹을래?”

    이번에는 어머니가 물었으므로 윤기철은 머리만 내저었다. 동생 윤영철은 작년에 제대하고 아직 취직을 못해 하루에 알바 두 탕을 뛴다. 지금은 편의점에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개인택시 운전사인 아버지까지 남자 셋은 열심히 버는 편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윤기철이 술잔을 들고 있는 윤덕수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오늘 쉬는 날이어서 등산을 다녀왔을 것이다.

    “아버지, 저, 우리 회사 개성공단 공장으로 옮겨가려고요.”

    불쑥 말했더니 윤덕수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이 가늘어져 있다.

    “왜?”

    “과장 진급하려면 거기서 1년 근무해야 됩니다. 그것이 필수 코스죠.”

    30평 아파트여서 주방에서도 다 들린다. 어머니 이정옥이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거기, 안 가면 안 되냐?”

    “왜?”

    이번에는 윤기철이 물었더니 이정옥의 눈도 가늘어졌다.

    “지난번 언젠가 한국사람 하나를 잡아 가두고 못나오게 했잖어?”

    “아, 그거, 나중에 보냈는데….”

    “즈그들 맘대로 공단 문 닫고, 쫓아내고 잡아들이고 하잖어?”

    “잡아들이기는 언제….”

    “위험해, 가지마.”

    마침내 이정옥이 말했을 때 윤덕수가 헛기침을 했다.

    “사내자식이 무슨, 가봐.”

    “아니, 기철이 아부지.”

    “우리 돈 내고 지은 공장인데 가는 게 무섭다면 말이 되냐?”

    눈을 부릅뜬 윤덕수가 이정옥을 노려보았다. 윤덕수는 11자로 시작되는 젓가락 군번을 자랑했고 향로봉에다 벙커 작업을 한 것이 추억거리인 이른바 극우 보수인사다. 윤덕수의 시선이 윤기철에게로 옮겨졌다.

    “가야지, 난 월남은 지원했어도 못 갔지만 넌 가야 된다.”

    이로써 윤덕수가 월남파병과 개성공단 진출을 같은 시각으로 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안주 시키자는 말처럼 조하나가 가볍게 말했으므로 윤기철이 엉겁결에 피식 웃었다. 웃고 나서도 감동은 오지 않았다. 다만 오늘 모텔 가는 것은 글렀다는 생각이 스쳐갔을 뿐이다. 조하나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시선을 준 채다.

    “나 많이 생각했어.”

    “…”

    “뭐 일주일에 한 번 서울 올 수 있을 테니까 만나는 건 지금하고 다를 것도 없지만….”

    “…”

    “정리하는 게 낫겠어.”

    “그러지 뭐.”

    술병을 든 윤기철이 제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말을 이었다.

    “나, 오늘 너하고 모텔 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해줄래?”

    이번에는 조하나가 입을 다물었다. 시선도 내려서 눈 밑에 그늘이 졌다. 그러고보니 눈 밑에 주근깨가 많다. 속눈썹 붙인 끝부분이 조금 벌어졌다. 왼쪽. 그때 윤기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 갈게.”

    윤기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술값 내고 먼저 나갈게.”

    “어이 공산당.”

    다가온 임승근이 그렇게 불렀으므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여자 셋이 일제히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오후 10시10분, 이곳은 조하나하고 헤어진 한식당 다음 골목 안 식당이다. 털썩 앞쪽에 앉은 임승근이 식탁을 둘러보며 웃었다.

    “자식, 혼자 두 병 반 마셨구먼.”

    “하나가 반 병 마셨으니까 세 병이야.”

    “걔 어디 있냐?”

    “보냈어.”

    머리를 끄덕인 임승근이 술잔을 쥐었다. 임승근도 술을 마시다가 윤기철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교육 끝났냐?”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임승근이 물었다.

    “언제 가?”

    “다 끝냈어. 다음 수요일에 떠나.”

    “근데 하나는 왜 보냈어? 가기 전에 열심히 떡이나 쳐둬야지.”

    “헤어졌어.”

    술을 따르던 임승근이 힐끗 보았다가 잠자코 술병을 세워놓고 잔을 들었다.

    “누가 헤어지자고 한 거야?”

    “걔가.”

    “왜?”

    “안 물어봤어.”

    “걔도 말 안 하고?”

    “응.”

    “잘했다.”

    잠깐 둘은 입을 다물었고 옆 테이블의 여자들이 다투기 시작했다. 서로 내가 안 했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곧 그쳤다.

    “개성에서 하나 잡아라.”

    불쑥 말한 임승근이 지그시 옆쪽 테이블의 여자들을 훑어보았다.

    “여기 애들보다는 낫겠지.”

    “걔는 젖가슴도 못 만지게 했어.”

    “내가 아는 어떤 애는 바깥 온도가 40도가 넘으면 얼굴이 녹는다는 거다. 어느 뜨거운 날에 그 애가 턱에 주먹만한 물주머니를 매달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거야.”

    마침내 윤기철이 풀쑥 웃었고 임승근이 말을 이었다.

    “개성공단 내부 이야기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어. 그것은 한국 업체들이 철저히 입단속을 해왔기 때문이야. 말이 새나가면 북한 측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정색한 임승근이 윤기철을 보았다.

    “완전히 철의 장막이야. 그곳은, 한국 기업체 120개가 철의 장막 속에 갇혀 있단 말이다.”

    임승근이 손가락 끝으로 윤기철의 콧등을 겨냥했다.

    “네가 한번 풀어봐라. 물론 내가 비밀을 지켜줄게, 여차하면 책임도 질게.”

    “아이구 좆같이.”

    입맛을 다신 윤기철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왜 이래? 형, 여자한테도 차였는데 이제 회사에서도 짤리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래? 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애국을 가장한 집단 이기주의다.”

    “우선 살아야 애국도 하는 거야.”

    “이놈 진짜 공산당이네.”

    “시발, 오늘은 모텔에 가려고 나왔는데 차였어.”

    “가만.”

    자리에서 일어선 임승근이 옆쪽 테이블로 갔다가 1분 만에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뻔한 일이어서 윤기철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임승근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셋 다 멘스란다.”

    “형, 잘 지내. 내가 자주 연락할게.”

    “시발놈, 개성에서는 핸드폰도 안 된다면서 연락은 무슨….”

    문득 말을 멈춘 임승근이 윤기철을 보았다.

    “니가 차인 일백 가지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수요일 오전 10시, 가방 하나만 든 윤기철이 데리러 온 기계과장 백종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개성공단으로 진입했다. 개성공단은 ‘개성국제자유경제지대’라는 명칭으로 거대한 공업지역을 설정했으나 실제로는 그 10분의 1도 안되는 330만m²인 약 100만 평의 부지를 1단계 공업지구로 사용한다.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에서 개성공단이 채택된 후에 2003년 6월 1단계 개발 착공식을 했고 2004년 6월 시범단지의 15개 입주업체가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004년 12월 첫 제품을 생산한 후 2013년 12월 기준으로 123개 업체가 5만3000명가량의 북한 근로자를 고용한 상태다. 한국 측 근로자는 약 800명이다. 차가 용성의 현관 앞에 멈춰 섰을 때 청색 작업복 차림의 여직원이 다가오더니 먼저 차에서 내리는 백종호를 향해 까딱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백 과장님.”

    “어, 미스 정.”

    활짝 웃은 백종호가 윤기철을 가리켰다.

    “여기 이번에 새로 오신 윤 과장이셔.”

    백종호가 윤기철에게도 말했다.

    “사무실 업무담당 정순미 씨, 윤 과장 조수인 셈이지.”

    시선이 마주치자 정순미가 머리를 숙였는데 두 손을 마주 잡고 아랫배에 붙인 자세다. 이런 인사는 난생처음 받은터라 저절로 윤기철의 머리도 숙여졌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순미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나도….”

    조금 당황한 윤기철이 계단을 오르다가 발이 미끄러져 비틀거렸다. 곱다. 이런 표현이 어울리겠다. 그 순간 윤기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서울 여자들한테는 ‘곱다’라는 표현을 써본 적도 떠올린 적도 없는 윤기철이다. 단어도 잊어먹을 정도였는데 갑자기 이곳에서 떠올랐다. 정순미의 안내로 윤기철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연건평 3000평의 건물이다. 현관 안쪽 로비를 반걸음쯤 오른쪽 앞으로 걷는 정순미는 날씬했다. 키가 168쯤 되겠다. 스커트 밑으로 뻗은 종아리는 미끈했고 허리선은 부드럽다. 그리고 보라, 옆얼굴은 솜털이 보인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 인조 눈썹이 아닌 천연 속눈썹, 어느 한 곳에 ‘물’을 넣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곱다.

    “여기예요.”

    넓은 로비를 어떻게 걸었는지 모른다. 옆을 근로자 여럿이 스치고 지나면서 힐끗거렸지만 윤곽만 기억난다. 어느덧 사무실 앞에 선 정순미가 웃음 띤 얼굴로 말하더니 문을 열었다.

    “어서 오게.”

    사무실 안쪽에 서있던 법인장 김양규가 소리쳐 윤기철을 맞았다. 사무실 안의 시선이 모두 윤기철에게 모였다.

    사무실 직원들과 인사를 마친 윤기철이 법인장 김양규를 따라 현장 옆쪽의 회의실로 다가갔다. 이곳에서 근로자 대표와 각 반장들과 접견하는 것이다. 정순미까지 셋이 들어섰을 때 기다리던 남녀가 일제히 시선을 주었다. 모두 장방형 테이블의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남자 셋, 여자 여섯이다. 중앙에 앉은 사내가 대표 동지일 것이다. 그때 김양규가 윤기철을 소개했다.

    “이번에 새로 온 윤기철 업무과장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윤 과장님.”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윤기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곽이 뚜렷한 용모, 키도 175쯤 돼 보이고 어깨도 넓다. 다가간 윤기철의 손을 쥔 대표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내가 근로자 대표 조경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은 간부들과 인사를 마친 윤기철이 테이블의 반대편에 김양규와 나란히 앉았는데 그사이에 정순미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자, 오늘은 신임 업무과장이 인사하는 자리니까 총화라고 볼 건 없고.”

    그렇게 운을 뗀 조경필이 웃음 띤 얼굴로 윤기철을 보았다.

    “개성에서 근무하고나면 모두 승진돼 떠나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면 우리도 기쁘단 말입니다.”

    윤기철은 웃음만 띠어주었다. 최석동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정순미가 쟁반에 생수병을 받쳐 들고 들어섰다. 마실 것을 가지러 나갔던 것 같다. 그런데 정순미는 어느 쪽 테이블에 앉을 것인가. 궁금해진 윤기철이 기다렸을 때 이번에는 김양규가 말했다.

    “예, 그렇죠. 개성에는 엘리트만 옵니다. 승진 대상자만 오는 거죠.”

    정순미의 몸이 옆으로 바짝 붙더니 앞에 생수병이 놓여졌다. 윤기철은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다시 조경필이 말을 받는다.

    “윤 과장님도 전임 최 과장처럼 좋은 결실을 보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이 자가 지금 악담을 하는가? 그러나 조경필의 얼굴은 엄숙했다.

    이원호

    려명黎明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가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출근하자마자 윤기철이 말하자 박경호는 방긋 웃었다.

    “잘 생각했어. 그럼 발령은 열흘 후인 3월 15일자로 날 거야.”

    “열흘 후요?”

    “그래.”

    머리를 끄덕인 박경호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돌아온 최 과장한테서 업무 인수인계를 받으라고.”

    최 과장이란 개성 용성에서 업무과장을 맡았던 최석동을 말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경호가 웃음 띤 얼굴로 윤기철의 어깨를 툭 쳤다.

    “개성 가려고 줄을 섰다고, 넌 나한테 술 한잔 사야 돼.”

    자리로 돌아와 앉은 윤기철의 옆으로 서민우가 다가와 섰다. 서민우는 입사 2년차, 군대도 보충역으로 빠진 터라 스물여섯이다. 2년 벌었다.

    “윤 선배, 개성 가신다면서요?”

    “시발놈아, 넌 대리라고 부르면 입술이 부르터?”

    으르렁거렸지만 서민우가 픽 웃었다.

    “언제는 선배가 좋다고 해놓고선.”

    “그땐 술 마실 때여.”

    서민우가 바짝 다가섰다.

    “들었어요?”

    “뭘?”

    “최 과장이 짤렸다던데.”

    “뭐가? 좆이?”

    “농담 아니에요.”

    서민우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개성에서 짤렸다는 겁니다.”

    윤기철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최석동은 개성 근무 8개월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업무부의 대기자로 발령이 나 있다. 맡은 직책이 없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귀환이었지만 최석동은 업무부에서 근무했을 때도 능력을 인정받은 엘리트다. 본사에서 필요했기 때문에 귀환시킨 것으로 알고 있었다. 윤기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자.”

    윤기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흡연구역에서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다.

    근무시간이어서 흡연구역인 베란다는 비어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서민우가 서둘러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뿜고 나서 물었다.

    “대리님 모르셨죠?”

    “뭘?”

    “최 과장 사건.”

    “사건이라니?”

    윤기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서민우는 정보가 빠르다. 시간만 나면 휴대전화를 조몰락거리는 덕분인지 온갖 스캔들, 뉴스, 사건에 통달했고 사내 인사라든지 사고도 먼저 아는 경우가 많다. 붙임성 있는 성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서민우가 다시 연기를 뿜고 나서 말했다.

    “이건 개성의 자재과장한테서 나온 말인데요. 비밀 지켜주실 거죠?”

    “시발, 지켜줄게, 말해봐.”

    “최 과장이 거기 대표하고 붙었답니다.”

    윤기철은 시선만 주었다. 여기서 대표라고 부르는 건 공장의 북한 근로자 대표를 말한다. 북한의 근로자를 관리, 감독하는 인간으로 직장장이란 명칭이 있다.

    “자기 허락 없이 반장들한테 지시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최 과장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는군요.”

    “…”

    “둘이 사이가 나빴답니다. 대표 되는 놈이 성질이 더러워서 법인장도 꼼짝 못한다는 겁니다.”

    “아, 그거야.”

    윤기철이 입맛을 다셨다. 다 아는 사실이다. 갑을(甲乙) 관계를 따진다면 솔직히 갑은 북한 측이다. 한국이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공단을 세웠지만 토지, 노동력은 북한이 댔다. 공생(共生), 공존(共存)의 바탕이 돼야 했지만 그렇게 안 된다. 2013년, 3개월이 넘도록 개성공단 가동이 중지된 것도 갑(甲) 노릇을 해온 북한 측의 횡포였다는 것이 세계만방에 증명됐다. 현재 개성에 진출한 100여 개의 한국 업체가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알면서도 묵묵히 참고 공장을 운영해온 것이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공장이 가동돼 이익을 창출하면 그것도 애국이라고 자위를 한다. 헛기침을 한 서민우가 힐끗 윤기철을 보았다.

    “이건 제가 의리상 윤 대리님한테 말씀드리는 건데요.”

    “뭐? 의리?”

    “내가 술도 많이 얻어먹었지 않습니까? 홍대 앞에서 놀기도 했고.”

    “읊어봐.”

    “윤 대리님을 추천한 건 박 부장입니다. 아시죠?”

    빨리 말하라는 듯이 이맛살만 좁힌 윤기철을 향해 서민우가 빙긋 웃었다.

    “내가 박 부장이 윤 대리님을 추천한 이유를 분석했지요. 개성 가고 싶어 하는 놈들, 아니, 선배들이 좀 있거든요. 아시지 않습니까?”

    “…”

    “무능한 놈,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는 놈까지….”

    “아니, 권 과장이?”

    윤기철이 서민우의 말을 가로채었다. 업무과 시설담당 권혁주 과장은 지난달 이혼했다. 자식도 없어서 뛰기 좋은 상황이다.

    윤기철이 과연, 하는 표정을 만들고 서민우를 보았다.

    “넌 업무부에서 출세할 거다. 자, 내가 오스카상의 영예를 안게 된 이유를 듣자.”

    “웬 오스캅니까?”

    “인마, 그게 그거지, 말해.”

    “과연 엉뚱한 데는 소질이 있으셔, 그런 것 때문에 선발되셨는지도….”

    “빨랑 말 안 해?”

    “지난번 부 회식 때 선배님이 박 부장한테 대든 적 있죠? 기억나세요?”

    “내가 언제 대들어?”

    눈을 치켜뜬 윤기철이 긴장했다.

    “이 자식이 생사람 잡네. 내가 언제….”

    “우수 부서 포상식 날에.”

    “내가 인마, 부장을 삼촌처럼 모셨는데. 내가 양반 자손이다.”

    “그때 부장이 조 대통령 찍었다고 하니까 대리님은 떨어진 야당 후보를 찍었다고 하셨잖아요?”

    “…”

    “그러니까 부장이 웃으면서 대리님한테 ‘저 새끼 공산당이네’ 했잖아요?”

    그 순간 윤기철이 숨을 들이켜면서 입을 다물었다. 감 잡았다. 그때 서민우가 결정타를 날렸다.

    “어제 오후 권 과장이 따지니까 부장이 뭐라고 대답한지 아세요?”

    “…”

    “윤 대리하고 대표하고 맞을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 한마디에 권 과장이 뻗어버린 거죠. 그때 회식 때 권 과장도 들었으니까….”

    그러고는 서민우가 머리를 기울이고 윤기철을 보았다. 미심쩍은 표정이다.

    “근데 맞아요?”

    “뭐가?”

    “공산당.”

    “까고 자빠졌네.”

    윤기철이 몸을 돌렸다.

    최석동은 활달한 성격에 인간성도 좋았다. 업무 면으로는 가끔 흘리는 것도 있었지만 위아래를 분명히 가렸고 책임질 것은 졌다. 흠이 있다면 입이 좀 가벼워서 도무지 비밀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주변에 진중한 군상이 끼지 않는다. 오후 3시, 윤기철은 회의실에서 최석동과 마주 앉았다. 파견 1일차 교육이다. 회사의 지시로 윤기철은 일주일간 파견교육을 받게 됐는데 오늘은 업무 인수인계이다.

    “뭐, 여기 적힌 사항만 체크하면 돼, 주요 사항은 컴퓨터에 입력돼 있어.”

    최석동이 프린트된 파일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테이블에서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최석동 과장은 32세, 미혼이다. 윤기철보다 나이, 경력이 3년 선배로 신입 때 6개월간 사수로 모신 적이 있다. 최석동이 넓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개자식들, 본사에 자리가 없다고 대전공장으로 가라는데?”

    “대전 본공장요?”

    “공장이면 다 똑같지, 무슨 본공장?”

    “직책은요?”

    “생산부 업무과장.”

    “아, 이런, 그건 개성보다 낮은데.”

    “내년에 차장 진급시켜 준댄다.”

    “그 말 어떻게 믿어요?”

    “너도 개성에서 돌아오면 과장 시켜준다고 했지?”

    “그랬어요.”

    “그럼 너도 본공장 과장으로 와라, 나하고 같이 놀자.”

    “근데, 싸웠어요?”

    “누가 그래?”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묻는 것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 소문 다 났어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그 새끼 독종이야.”

    불쑥 최석동이 말했지만 윤기철은 알아들었다. 최석동과 붙었다는 북한 근로자 대표다. 윤기철은 숨을 죽였고 최석동의 말이 이어졌다.

    “8개월간 그 새끼한테 밀려서 내가 숨을 제대로 못 쉬었어, 생각해봐라.”

    심호흡을 한 최석동이 앞에 놓인 물병을 손에 쥐었다.

    “이건 노조도 아니고 상전이야, 감시원, 감독관이라고. 내가 수십 번 친해지려고 했지만 안 먹혀, 안 통해.”

    “…”

    “그럴수록 더 기세등등해진단 말야. 그런데도 생산량 나오는 거 보면 기적이다. 법인장은 충무무공 훈장을 줘야 돼.”

    “충무무공 훈장요?”

    “아, 저기, 나라에서 주는 제일 큰 훈장 말이다.”

    “그놈 몇 살인데요?”

    윤기철이 화제를 돌렸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보다.

    “성격은 어때요?”

    “마흔세 살, 군 출신 같아. 성격은 뭐랄까? 원리원칙에 철저하고 성실해.”

    “…”

    “밝고 겸손해서 근로자들한테 인기가 있어.”

    윤기철의 표정을 본 최석동이 쓴웃음을 지었다.

    “법인장이 세 살 위라고 깍듯하게 대해.”

    “아, 그런데 왜?”

    “내가 말하지 않았어? 그 새끼, 원리원칙에 철저하다고?”

    어깨를 부풀린 최석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규정에 없는 일은 절대로 안 해. 야간근무, 작업조 배치도 매월 초 아니면 안 돼. 반장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안 돼. 규정대로 대표를 통해야 된다는 거야. 그놈은, 회사 측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양보를 안 해. 회사가 곧 한국 정부고 근로자는 북한이라는 것이지. 남북 대결이야, 그 자식은 융통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어.”

    호흡을 가눈 최석동이 곧 길게 숨을 뱉었다.

    “그놈이 언젠가 나한테 물었어. 한국 대통령하고 과장 동무는 고향이 같다면서요? 하고. 결국은 그거였어. 그놈은 나를 쫓아내고 한국 대통령을 몰아낸 기분이 돼 있을 거야.”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내가 반장들한테 라인 간격을 벌려 부자재를 쌓아놓으라고 한 것을 트집 잡은 거야. 대표를 통하지 않고 번번이 계약위반을 했다면서 내보내지 않으면 작업 중지를 시키겠다는 통보를 했어. 그것으로 끝장난 거다.”

    윤기철이 어깨를 치켜들었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참 좆 같은 놈이네.”

    려명黎明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윤기철은 스물아홉이다. 직장생활 5년, 정상적으로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했고 군생활 2년까지 착실히 마친 후 바로 중소기업 ‘용성’에 입사했으니 단 1년도 썩은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과 비교해서 넘치지도 덜하지도 않을 만큼의 경험과 인연까지 쌓은 윤기철이다. 따라서 직장생활에서 이유 없는 호의와 배려를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박경호의 개성공장 전출 권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사정을 들을수록 점점 어깨가 무거워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롭고 심각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 고등학교 2년 선배인 임승근과 홍대 앞 삼겹살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주간지 기자인 임승근은 윤기철의 사형(師兄) 역할이다. 고등학교 시절 ‘일진’으로 맺어진 관계여서 질기고 끈끈하다.

    “무슨 일이냐? 바빠 죽겠는데?”

    정치부, 경제부를 왔다갔다 하던 임승근이 지난주에 휴전선 취재기를 쓴 걸 보면 국방부로 간 것 같다. 건성으로 물은 임승근이 불판의 삼겹살을 뒤집을 때 윤기철이 말했다.

    “형, 나, 개성으로 가게 됐는데.”

    “거긴 뭐 하러?”

    “개성 공장으로 발령난 거야.”

    “발령?”

    머리를 든 임승근이 윤기철을 똑바로 보았다. 가는 눈이 더 가늘어졌다.

    “왜?”

    “왜는 무슨? 가라고 하니까 가는 거지.”

    “너, 찍혔어? 아님 인사고과가 나빠?”

    “아니, 그게 아니고.”

    은근히 부아가 난 윤기철이 임승근을 마주 보았다.

    “내가 공산당으로 보여서 적당한가봐.”

    “니가 공산당?”

    술잔을 내려놓은 임승근에게 발령이 난 것부터 최석동과 근로자 대표 간의 불화, 그리고 박경호가 ‘저 새끼 공산당’이라고 한 것까지를 설명했다. 설명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술만 따라 마시던 임승근이 입을 열었다.

    “너, 개성에 한국 기업체가 몇 개 있는지 알지?”

    “왜 몰라? 123개, 북한 근로자는 5만3000이야.”

    “네 회사는 몇 명이냐?”

    “650명, 한국 측 관리직은 나까지 8명.”

    “규모는 별로 크지 않군.”

    “근데 왜 묻는 거야?”

    “생산량은 잘 나와?”

    “잘돼, 칭다오 공장보다 수익성이 좋아.”

    용성은 중국 칭다오에도 1000명 규모의 공장이 있다. 그러나 칭다오 공장은 이직자가 많고 인건비가 높아져서 이제는 인건비가 개성 공장의 4배 수준이 됐다. 개성공단의 임금은 주 48시간 근무 기준으로 월 6만6775달러이니 한화로 7만3000원 정도다. 매년 근무수당, 보험료, 복리후생비까지 계산해도 월 130달러(14만3000원)에서 170달러(18만7000원)인 것이다. 손재주와 기술 습득력이 세계 제일인 데다 인건비가 이렇게 싸니 기업 측으로는 이런 천국이 없다. 게다가 매년 5%의 임금 인상을 하기로 계약조건에 명시돼 있으니 앞으로 10년은 견딜 수 있다. 그때 임승근이 말했다.

    “시발놈들이 널 공산당으로 본단 말이구먼.”

    “그래서 그 자식하고 손발이 맞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 같아.”

    “사람 잘못 보았지.”

    임승근이 큭큭 웃더니 물었다.

    “너, 야당후보 찍었어?”

    “아니, 부장놈이 하도 꼬와서 일부러 그런 거야. 난 선거날 놀러갔어.”

    “그럼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 니가 잘 지내다가 돌아오는 방법.”

    “뭔데?”

    “니가 공산당이 되는 거야, 1년만.”

    “죽겠네.”

    “요즘 데모 하는 데 가서 경찰차나 발길로 한번 차라, 그럼 내가 사진 한 방 잘 찍어줄게. 넌 하룻밤만 자고 나오면 독립투사가 된다. 만일 네가….”

    “아, 시발, 형, 그만.”

    손바닥을 펴 보인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 윤기철은 임승근의 일진 후계자지만 더 거칠었다. 복싱과 격투기로 단련된 윤기철은 주변 고교까지 장악했던 ‘영웅’이다. 공산당하고는 거리가 먼 캐릭터다. 소주를 한 모금에 삼킨 윤기철이 임승근을 보았다.

    “형하고 이야기하다가 결심했어.”

    “옳지, 공산당 되는 거?”

    “나하고 최석동이는 캐릭터가 달라.”

    “웬 캐릭터?”

    “최석동이는 겉으로는 으스대지만 뒷심이 없어. 주먹에 자신이 없는 놈들의 습성이지. 그것을 간파당한 거야.”

    “너, 칠래?”

    “척 보면 알지. 그 새끼가 마흔셋이나 됐다니까 내 포스를 느끼겠지.”

    “웃기네, 자식.”

    쓴웃음을 지은 임승근이 윤기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저녁 8시가 넘으면서 주변 분위기가 떠들썩해졌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서 부딪치겠다는 말이군. 내, 그럴 줄 알았어.”

    술잔을 든 임승근의 목소리도 떠들썩해졌다.

    “그 사건은 젤 먼저 나한테 알려줘야 한다. 아마 인터넷 조회수 1등일 거다.”

    토요일 오후 1시 반, 오늘은 개성 용성 법인장 김양규가 본사에서 윤기철과 마주 앉아 있다. 윤기철의 파견교육 사흘째 되는 날이다.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한 후여서 주위는 조용하다. 김양규가 답답한지 회의실 문을 열어놓아서 밖의 빈 사무실이 다 보였다.

    “저 때문에 댁에도 못 가시고 죄송합니다.”

    윤기철의 말에 김양규가 풀쑥 웃었다. 김양규는 법인장으로 가기 전 대전공장 공장장이었다. 용성의 개성공장을 건설할 때부터 7년 동안이나 운영해왔으니 개성공단의 산 역사라고 해도 빈말이 아닐 것이다. 김양규가 마른 얼굴을 들고 윤기철을 보았다.

    “조경필이 이야기 들었지?”

    조경필은 북측 근로자 대표 이름이다.

    “예, 이름은 들었습니다.”

    “최 과장이 뭐라고 하던가?”

    “별 이야기 없었습니다만.”

    “그래?”

    쓴웃음을 지은 김양규가 물병을 들어 병째로 두 모금을 삼켰다.

    “좀 문제가 있었어.”

    “…”

    “최 과장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손발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말야.”

    “예, 법인장님.”

    “내가 오전에 나오는데 조경필이가 묻더구먼, 최 과장 후임은 언제 오느냐고 말야.”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김양규의 얼굴에 다시 쓴웃음이 번져 있다.

    “그래서 내가 쏘아붙였지.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말야.”

    “…”

    “그랬더니 아무 소리 못하더구먼. 나도 대표가 문제 있으면 공업지구 사무소에 신고를 할 수가 있어. 그럼 그곳에서 조사를 하고 판정을 내리는 거야.”

    “…”

    “잘 알겠지만 자네의 과제는 조경필이하고 손발을 맞추는 거야. 그것만 잘되면 다른 사소한 문제는 넘어갈 수 있어.”

    “잘 알겠습니다.”

    “다른 기계, 전기, 자재, 생산은 아무 문제가 없네. 대표와 반장들을 상대하는 업무과가 가장 중요해.”

    “…”

    “최 과장 이전의 배 과장은 대표하고 친했지. 술도 같이 마시고 말야. 물론 조경필이 이전의 대표였지만.”

    “…”

    “조경필이는 우리한테 온 지 만 1년 됐어. 그런데 한 번도 허점을 보이지가 않아. 나한테도 깍듯하고 말야.”

    윤기철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조경필에 대해서는 넘치도록 들었다. 그 망할 놈의 자식은 이제 들어가서 부딪치면 될 테니 딴것을 알아보자.

    “난 그쪽하고 인연을 끊은 사람이야.”

    본사 구매부의 장용만 과장은 3년 전에 1년 반 동안 개성에서 근무한 전력이 있다. 그래서 오전에 면담을 신청하고 회의실에서 만나 법인장 김양규에 대해 물었더니 대뜸 이런다. 눈은 치켜뜨고 잔뜩 불편하다는 표정이다. 34세, 과장 3년차, 구매부는 어디서나 떨어지는 것이 많은 부서다. 그래서 장용만도 부티가 난다. 윤기철이 진심이 배인 표정으로 장용만을 보았다. 이 인간하고는 본사 빌딩에서 같이 근무했지만 그저 눈인사만 하는 사이다. 이렇게 개성으로 얽히게 될지는 몰랐다.

    “예, 아무래도 과장님이 잘 아실 것 같아서요.”

    공손한 표정을 짓고 그렇게 말했더니 장용만이 픽 웃었다.

    “잘 알지, 윤 대리의 개성공장 발령 공지를 보고 잠깐 옛날 생각이 났어.”

    “도와주십쇼.”

    “뭘?”

    “법인장 스타일을 알아야 쫄다구가 견딜 것 아닙니까?”

    “업무과장은 대표한테 쫓겨났다고 들었을 텐데 법인장은 왜?”

    “그게 순서일 것 같아서요.”

    “당신은 좀 독특하구먼.”

    윤기철은 장용만의 눈동자가 깊어진 느낌을 받았다. 초점이 또렷해졌고 입술은 꾹 닫혔다. 장용만에 대한 평을 모았더니 업무능력, 처신, 장래성이 양호했다. 소문도 나쁘지 않았다. 구매부 직원으로서는 드문 경우다. 그때 장용만이 말을 이었다.

    “법인장이 공단 입주업체 모임인 ‘백한회’ 대의원인 줄 알지?”

    “모릅니다.”

    “내가 있기 전부터 백한회 대의원이었어. 대의원은 모두 여덟 명. 회장, 부회장, 총무, 그리고 대의원 여덟 명까지 11명이 공단 입주업체 간부들이지.”

    긴장한 윤기철이 시선만 주었고 장용만의 말이 이어졌다.

    “대의원이 무엇이냐. 입주업체 간부야. 입주업체의 권익을 도모하고 나아가 공단의 발전에 기여하는 역할이라고 백한회 회칙에 적혀 있더군.”

    “…”

    “그래서 내부의 문제는 서둘러 치우는 거야. 제 손이 닿는 범위에서, 말하자면 제 부하를 제거해서 얼른 원상태로 만들어놓는 거지. 제 부하는 얼마든지 충원이 가능하니까. 그래야 간부 체면이 서거든.”

    “…”

    “아마 최석동이는 그런 말을 자네한테 안 해주었을 걸? 걔는 시야가 좁아. 아니, 책임과잉형이야. 문제가 생기면 제 책임이라면서 안고 먼저 자빠지는 놈들이 있어. 그것이 사내답다고 느끼는 모양인데 실상은 귀찮은 것 싫어하는 현대판 무협지 팬들이야.”

    “…”

    “최석동이가 그런 스타일 같아.”

    그러고는 장용만이 윤기철을 똑바로 보았다. 두 눈이 번들거린다.

    “회사에서는 다 알고 있어.”

    “…”

    “하지만 김양규가 백한회 대의원으로 있는 것이 대국적으로 회사에 이익이거든. 그러니까 최석동이가 쫓겨나는 걸 놔두는 거야.”

    장용만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자, 이제 눈앞의 안개가 걷히시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은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이건 갈수록 수렁이 깊어지는 느낌이다.

    교육 닷새째, 보안교육을 마친 윤기철이 다시 최석동을 불러냈다. 어제는 통일원이 주관한 제반 교육까지 다 끝냈으니 절차는 수료한 셈이었다. 개성공단은 남북 간 근로자가 공동 작업을 하는 지역이지만 남북한 양국은 지금도 엄연한 적대국이다. 서로 주적(主敵) 상태로 60여 년을 지내온 상황인 것이다. 현지에 파견될 직원의 보안교육은 필수다. 회의실에 둘이 마주 앉았을 때 최석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대전공장으로 내려간다.”

    “뭐, 저하고 거기서 다시 만나지요.”

    “알았어. 내가 술집 좋은 데 봐둘게.”

    “유성 쪽이 좋다던데요.”

    최석동의 말을 건성으로 받으면서 윤기철은 지난번 대화를 떠올렸다. 최석동은 법인장 김양규가 총무무공 훈장을 받아야 한다고까지 치켜세웠다. 그런데 장용만은 김양규가 제 몸보신만 하는 인간이며 회사 측에서도 그것을 방조한다고 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최석동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장용만의 악담인가? 이곳에 있는 동안 가능하면 확인해보는 것이 낫다. 윤기철이 머리를 들고 최석동을 보았다.

    “법인장 성격은 어때요?”

    “뭐, 앞뒤는 재는 성격이지. 그래서 마흔 살 전에 대전 공장장도 했고 법인장까지 됐으니까.”

    눈을 가늘게 뜬 최석동이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대체적으로 북측 관리자하고는 사이가 좋아. 그것이 본사로부터 점수를 따는 요인이 돼왔지.”

    “이번 사건도 법인장이 무마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별 좆도 아닌 일을 갖고 말입니다.”

    “네가 겪어봐라, 좆도 아닌 일이 아녀.”

    최석동이 머리를 젓더니 한숨까지 뱉었다.

    “쌓이고 쌓인 거다. 법인장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법인장이 정치하느라 부하들을 내버려두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그러자 최석동이 상반신을 세웠다.

    “너, 무슨 말 들었어?”

    “개성 다녀온 직원이 어디 한둘입니까?”

    최석동은 입을 다물었고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백한회 대의원으로 폼 잡느라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제 부하부터 자른다고 말입니다. 그걸 회사에서도 놔두고 말이죠.”

    “하긴 백한회 대의원 덕을 좀 보지.”

    “결국 북한 대표한테 끌려가는 꼴 아닙니까?”

    “대의원이니까 덜 끌려가는 거지.”

    시선을 든 최석동이 웃음 띤 얼굴로 윤기철을 보았다.

    “난 개성에서 졌어. 한때 나도 처신이라든지 기질 면에서 언놈한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

    “그런데 개성은 엄청나게 복잡하고도 위험한 곳이야, 까딱하면 한방에 날아가, 난 잔 펀치를 무수하게 맞고 나간 꼴이 됐는데.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진 거다.”

    “…”

    “시발, 회의 한 번 하는 데도 북한 측 대표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회사가 어디 있냐? 근로자 해고, 고용을 할 수도 없는 회사. 그래서 성과급 대신 초코파이를 두 개씩 주는 회사가 세계 어느 곳에 있냔 말이다.”

    또 있다. 점심밥도 주지 못하게 해서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에 국에 건더기를 듬뿍 넣어서 국밥으로 준다. 모두 계약조건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수십 가지가 더 있었으므로 윤기철이 지겹지만 들을 준비를 했는데 최석동은 말을 뚝 끊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최석동이 다시 말을 이었다.

    “법인장 입장에서 보면 대표놈을 이용하는 셈이 되겠지. 나 같은 놈이야 얼마든지 대체할 수가 있으니까.”

    “…”

    “자재과 놈들이 법인장하고 가끔 갈등이 있었던 건 알아. 지금은 잠잠하지만, 그거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아니냐?”

    윤기철의 심장이 철렁했다. 하긴 그렇다. 공장장이 자재부를 장악하면 떡고물을 왕창 먹는다고 했다. 반대로 상납만 기다리면 굶어죽는다고 했던가? 윤기철의 눈앞에 장용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 때문에 김양규와 원수가 됐는가?

    오늘은 모텔을 갈 작정을 하고 나왔기 때문에 윤기철은 소주를 건성으로, 그러나 빠르게 잔을 비웠다. 소주 한 병만 마시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소주를 석 잔 마셨을 때 조하나가 윤기철을 물끄러미 보았다. 인사동의 한정식당 안이다. 7시 반.

    “언제 가?”

    “닷새 남았네.”

    “…”

    “차로 자유로를 타면 한 시간이다. 내가 미국이라도 가냐?”

    “우리 헤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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