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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심리학

갑질을 원하는가? 지갑부터 준비하라

  • 허태균 |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갑질을 원하는가? 지갑부터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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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사회가 ‘갑질’과의 전쟁을 치른다. 우리는 왜 ‘갑’ 노릇을 하려 할까.
  • ‘너 나 무시하지?’ 정서에 담긴 한국인의 문화심리적 특질을 살펴보니….
갑질을 원하는가? 지갑부터 준비하라

‘땅콩회항’ 사건 당사자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2014년의 대미를 ‘땅콩회항’이 장식했다. 대한항공 비행기가 뉴욕공항에서 이륙하려 공항 게이트를 떠났다가 사무장을 내려놓기 위해 게이트로 되돌아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회항의 이유가 황당했다. 스튜어디스가 대한항공 오너 가족의 일원인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에게 마카다미아(땅콩과 비슷한 견과)를 봉지에 담은 채 제공했고, 조 부사장이 스튜어디스와 사무장을 격하게 나무라는 과정에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하려 회항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문제의 마카다미아는 판매량이 50% 넘게 증가했다. 마카다미아를 생산하는 하와이 농부가 대박이 났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려온다. 

향후 밝혀질 진실이 더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에는 많은 문제가 내포해 있다. 우선 조현아 전 부사장이 승무원들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과 합당한 이유 없이 비행기가 회항했다는 사실 모두에 법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이처럼 주목받고, 조 전 부사장이 구속에까지 이른 상황을 법적인 이슈로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사건은 법적인 문제보다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로 인식된다. 특히 회사 직원에 대한 재벌 오너 가족의 부당한 대우와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갑질’의 횡포라는 관점이 제기된다.

한국 사회에서 갑질 이슈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기업 임원이 비행기에서 라면을 마음에 들게 끓여오지 못한다고 스튜어디스를 잡지로 쳤다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결국 사퇴했다. 우유회사는 대리점에 끼워 팔기를 하다가 사회적 비난에 엄청난 매출 손실을 보기도 했다. 2015년 새해에도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온 이들이 주차 아르바이트 요원을 무릎 꿇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모두 갑의 횡포 또는 갑질로 규정됐다. 한국 사회는 지금 갑질과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갑의 본질 

원래 ‘갑(甲)’은 십간의 첫 번째 천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일상에서 순서를 표시할 필요가 있을 때 가장 첫째 것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한다. 오래전 합격이 가장 어려운 시험을 갑과라고 불렀고 그 합격자들이 가장 높은 관직을 받기도 했으며, 과거 시험 제도에서 성적에 따라 갑과·을과 등으로 등급을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갑은 최고나 최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는 계약서 등의 공문서에서 고용주나 계약 체결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처지에 있는 쪽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된다. 갑이 있다면 당연히 을, 병 등이 더 열등하거나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다.



갑과 을의 관계는 사실 인류 역사에서 항상 존재해왔다고 볼 수 있다. 농경을 통해 조직화한 사회구조를 갖기 전 수렵생활을 할 때도 인류에게는 더 강한 자와 덜 강한 자 간의 차이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간의 서열 및 권력관계는 불평등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대부분의 동물 세계에도 이러한 갑을의 관계는 있다. 사냥에서의 역할, 먹이를 먹는 순서, 짝짓기의 순서와 기회 등에서 갑과 을의 관계는 명확하다. 서열이 낮은 원숭이가 서열이 높은 원숭이의 이를 잡아주고 털을 다듬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권력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진 인간이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지 결코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현상이며, 위계는 항상 자원의 소유에 의해 결정된다. 단지 인류의 역사에서 그 시대에 어떤 자원을 더 가치 있게 여겼는지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약자가 되는 이유

최근 힘 있는 사람이나 대기업이 파트타임 근로자, 종업원, 하도급업체에 소위 ‘갑질’을 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지만, 개개인 모두의 삶에서도 갑을 관계가 항상 존재한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갈 때나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갈 때, 차를 주차할 때와 버스나 택시를 탈 때 등 대부분의 경우 나를 도와주기(실제로 접대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얼마나 좋은 식당인지, 얼마나 고급 옷가게인지, 얼마나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은 약자의 처지에서 우리를 대한다.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 우리의 기분을 맞추려 하고, 귀찮거나 불편한 우리의 요구와 행동을 애써 참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돈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우리가 불쌍해서 그냥 해주는 봉사활동이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돈을 주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이유가 없고 아마도 그만둘 것이다. 우리는 돈으로 그들의 서비스를 산다. 그런 서비스를 포기한다면 자판기나 서비스를 최소화한 패스트푸드점, 셀프서비스를 해야 하는 가게에 가면 되고 그 서비스가 빠진 만큼 저렴한 비용을 지불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받은 서비스가 언제나 돈값을 하기를 바란다. 식당, 백화점, 주차장의 직원, 택시 기사의 행동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 그 기대가 충족되기를 바라고 그렇지 못할 때 실망하며 화를 낸다. 물론 이 상황에서 서비스를 사는 이들, 그러니까 갑이 을에 갖는 기대는 매우 합리적인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 기대가 상대방에게도 합당할 것이냐는 점이다. 합당한 서비스에 대한 요구와 갑질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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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균 |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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