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아온 이혁발은 특히 2003년 여장(女裝)남자를 주제로 한 ‘섹시 미미’전(展)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미술평론가 오세권 대진대 교수는 “이혁발이 보여준 성에 대한 미술 표현의 담론은 국내 에로티시즘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근거들을 남기고 있다”고 평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의 그림들은 여전히 ‘수위’가 높아 정면에서 응시하기 민망할 정도였지만, 입체사진(렌티큘라)을 활용하는 등 “역시 이혁발!”이란 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신선함을 느끼게 했다.
농부 화가
반가움과 궁금증을 안고 1월 초, 경북 안동으로 그를 찾아갔다. 2006년 이곳에 정착해 작품 활동도 하고, 집 앞에 600여 평의 작은 농원을 만들어 농사도 짓는다고 했다.
“포도와 머루를 50그루 정도 키우는데, 그걸로 포도주를 만든다. 많을 땐 50병, 적을 땐 30병쯤 나온다. 1병에 3만~5만 원씩 받고 판다. 그런데 지난해엔 농사도 망치고 제조 과정에 문제가 생겨 한 병도 못 건졌다(웃음). 딸기도 키우는데, 수확하면 지인들을 불러 모아 딸기 파티를 연다.”
이혁발은 1963년 경북 영양에서 농사꾼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셋, 그리고 형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고생하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일찍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동대문상고에 입학했다.
“고3 때 은행 입사 추천서를 받았다. 그런데 문득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재수해서 서울예전에 들어갔다. 군 복무를 마친 뒤 다시 공부해 동국대 미술학과 86학번으로 입학했다.”
▼ 학교 다닐 때도 에로틱한 그림을 그렸나.
“대학 2학년 때부터 여체(女體)에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렸다. 당연히 교수님들이 뭐라고 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는 추상 작업도 했는데, 졸업 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 어릴 때부터 성에 관심이 많았나.
“중학교 1학년 때 자위를 알게 됐다. 그 후 바지 안주머니에 구멍을 뚫고 길을 가면서도 자위를 하곤 했다. 그렇다고 성 도착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웃음). 굳이 이유를 부여하자면…어릴 때 엄마 젖이 안 나와 젖을 못 먹고 자랐다고 한다. 또, 어린 시절 재봉틀 안에서 하루 종일 운 기억이 있는데, 어머니 말로는 밭일을 할 때 나를 데리고 가서 눕혀놓으면 도랑에 굴러떨어지곤 하니까 방 안에 재운 후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다고 한다. 자다 일어났을 때 아무도 없으니 놀랐던 것 같다. 애정이 결핍됐던 거다. 애정 결핍은 성에 대한 욕구 불만과 갈구로 이어진다.”
▼ 대학을 졸업하고 작품활동을 본격화한 1990년대 초엔 민중미술 영향이 강해 에로틱 미술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운동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쟁취하는 것이다. 성만큼 인간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게 어디 있나. 성적인 작업을 하면 우선 내가 즐겁다. 대리만족도 느끼고, 애인이 없어도 그걸 보면서 자위를 할 수도 있고…. 시작은 그렇게, 내가 즐기기 위해서였다. 이왕 하는 예술, 즐길 수 있는 소재를 택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성욕에서 인간 본질을 보다
그는 “내가 기본적으로 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연유한다. 나에 대해 알고 싶고,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냐에 대한 탐구의 출발이지, 성 그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주제는 성 말고도 많지 않나.
“인간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성이다. 성적 욕망을 통해서 인간을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 욕망은 사람을 지탱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섹스는 종족번식 기능도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욕망이다. 남자가 돈을 많이 벌고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는 이유가 뭔가. 결국 좀 더 섹시한 여성과 섹스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성은 영원한 테마일 수밖에 없다. 인간을 알기 위해선 성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 몸을 통해 느껴지는 욕망과 감각에 대한 연구가 더욱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