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인에 비해 말 서툴러
보통 사람은 어떨까. 워딩? 생소할 것이다. 모든 말을 생각 없이 뱉는 것은 아니지만,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사는 이도 별로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다툼은 말에서 비롯된다.
말 한마디로 취업 면접을 통과하거나, 계약을 성사시키거나,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런 성공의 경험이 별로 없다. 오히려 말 한마디로 인해 배우자와 다투고, 친구와 소원해지고, 직장에서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심지어 말 한마디가 살인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표현 문화가 발달한 서양인에 비해 워딩에 서툴다고 보는 게 맞다.
언짢게 하고, 분란 만들고
보통 사람은 모임에서 짧게 자기소개를 하거나 인사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이때 자기를 잘 표현하는 단어 또는 인용문 따위를 활용하곤 하는데, 바로 이것이 초보적 단계의 워딩에 해당한다. 반장 선거에 나갈 때나 단체 대표에 출마할 때는 조금 더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이때는 연설문을 사전에 작성한다. 이 정도면 워딩의 세계에 입문한 격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을 유발했다. 국무회의 자리에서 “규제를 한꺼번에 ‘기요틴’에 올려 처리하겠다”고 발언한 때문이다. 기요틴, 단두대를 말한다. 공포정치의 상징이다. 강해도 너무 강한 단어였다. 곧바로 야당이 공포감을 유발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대체 누가 기요틴 같은 워딩을 골랐는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사용하기엔 영 부적절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기요틴, 찌라시, 국정농단…
대통령의 연설문과 말씀자료 생산과정을 추적해보면 이렇다. 먼저 각 수석실에서 부처의 도움을 받아 시안을 작성한다. 그 시안을 연설기록비서관에게 보내면 대통령의 평상시 국정철학이나 언어습관을 고려해 수정안을 만든다. 그 수정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대통령은 읽어본 뒤 추가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통령에 따라 연설문 또는 말씀자료에 본인이 애드리브(ad-lib·즉석표현)를 보태기도 한다. 사전에 메모해 가는 대통령도 있다. 이 애드리브 때문에 연설기록비서실은 물론 해당 수석실도 긴장한다. 사전 원고와 차이가 많이 날수록 긴장감은 더해진다. 애드리브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기요틴 발언이 원고에 있던 말인지 애드리브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느 쪽이든 문제이긴 하다. 최근 박 대통령의 워딩 수위는 아슬아슬하다. ‘찌라시’ ‘국정농단’같은 워딩이 대표적이다. 워딩으로 되레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셈이다.
정몽구와 조현민의 경우
기업의 CEO 워딩 공정도 청와대와 큰 차이가 없다. 비서실에서 ‘회장님 말씀’을 작성한다. 일부 기업인들은 워딩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말 화제가 된 것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발언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를 평가액의 세 배가량인 10조 원에 매입한 뒤 국내외에서 우려가 나오자 “정부 땅 산 것이라 마음이 가볍다”고 했다. 자신이 땅 매입을 결정했다고 시사한 것이다. 그러자‘재벌 오너의 독단 경영’이라는 비난이 국내외적으로 일었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구설에 오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여동생 조현민 전무의 발언은 더 가관이었다. 조 전무는 “모든 임직원의 잘못”이라고 하더니, 조 전 부사장에게는 ‘복수해줄게’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물 타기 하네’ ‘정신 못 차리네’ ‘조씨 일가는 경영에서 물러나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보통 사람도 말 한마디로 다툼을 초래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 대화는 워딩, 그중에서도 즉석 워딩인 애드리브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다. 반면 잘 선택한 단어 하나는 위기를 넘기게 한다. 나아가 반전을 가져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