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대통령과 유 대표는 동향(대구)이다. 유 대표에게 박 대통령은 ‘은인(恩人)’이라고 한다. 2005년 1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배지를 단 지 반 년밖에 안 된 유승민 의원을 요직인 대표 비서실장에 앉혔다. 9개월 뒤 대구 동을에서 재선거가 실시됐다. 비례대표이던 유 의원이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비례대표는 대구처럼 깃대만 꽂으면 되는 곳의 지역구 의원이 되기를 오매불망 고대한다. 그러나 이런 곳엔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이 여럿 달려든다. 여당 사람들은 “당 대표가 전폭적으로 밀어줬기에 2년차인 그가 지역구를 꿰찰 수 있었다”고 말한다.
대통령 ‘디스’, 野와 ‘합의정치’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유 의원은 박근혜 후보 캠프의 정책메시지단장을 맡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았던 시절은 여기까지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로 위기를 맞았다. 다음해 총선·대선까지 내리 질 거라는 불안이 팽배했다. ‘구원투수 박근혜’가 투입돼 비대위가 꾸려졌다. 유 의원은 “박 비대위원장은 통화도 어렵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는 데도 완강하게 반대했다.
지난해 10월, 그는 박 대통령 방미 연설문 수정 논란과 관련해 “이거 누가 하는 거냐. ‘청와대 얼라들’이 하는 거냐”라고 각을 세웠다. 그러나 올 2월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곤 ‘부드러운 남자’가 됐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여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에게 친박 표가 꽤 몰린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는 원내대표에 당선된 뒤 원래의 ‘박근혜 때리기’ 모드로 돌아온다.
4월 그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초이노믹스’(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단기 경기부양책)에 대해 “다시는 끄집어내지 말아야”라고, ‘창조경제’에 대해 “성장의 해법이라고 자부할 수 없어”라고,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 대해 “달성하기 어려워”라고, ‘134조 공약가계부’에 대해 “더 이상 지킬 수 없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의 4대 경제기조를 싸잡아 ‘디스(비하·조롱)’ 한 것이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양극화 해소의 비조(鼻祖) 격으로 극찬하면서 ‘야당과의 합의정치’를 선언했다. 야당과 진보진영은 “명연설”이라고 화답했다.
나아가 유 대표는 박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를 “허구”라고 했고 박 대통령의 이병기 비서실장 임명에 “유감”이라고 했으며 성완종 리스트 파문 땐 박 대통령을 향해 “진솔한 말씀을 직접 해 달라”고 요구했다.
청와대는 유 대표에 대해 공무원연금 개혁 건으로 일차 폭발했다. 이어 국회법 건으로 또 폭발했다. ‘더 내고 덜 받는 공무원연금 개혁’은 박 대통령의 최대 국정현안인데, 5월 2일 유승민 팀이 야당과 합의한 안은 박 대통령의 눈높이에 못 미쳤다. 이 합의안엔 국민연금액을 생애 평균소득의 50%로 끌어올린다는 내용도 있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구상과 반대로 간 뜬금없는 합의라고 봤다. ‘조선일보’ 사설은 “국민연금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가 500조 원 이상 늘 것”이라고 비판했다.
5월 29일 유승민 팀은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국회 처리를 위해 국회법 개정안에 야당과 합의했다. “대통령령 등 행정입법이 법률의 취지나 내용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경우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구하고 행정기관은 이를 지체 없이 처리한다”는 내용. 이에 대해 김성우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행정부의 행정입법권 침해”라고 반발했다. 유 대표는 “어떤 부분이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다시 반박했다. 청와대가 당·정·청 협의를 거부한 데 대해선 “어른스럽지 못한 이야기”라며 불쾌해했다. ‘동아일보’ 사설은 “정부를 식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황당한 법”이라고 비판했다.
친박계는 유승민 대표에게 공세를 폈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순진한 협상이었고, 밀려도 너무 밀렸다”고 했다. 김태흠 의원은 “졸속으로 합의해준 유 대표가 사퇴하는 등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장우 의원도 “현 사태를 수습한 뒤 사퇴해야 한다”고 했다. 유 대표는 책임론에 대해 “그런 일이 오면 언제든지…”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은 6월 1일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다. 실제로 거부권이 행사되면 국회는 △개정안 재의 △수정안을 만들어 처리 △개정안 재의 포기라는 경우의 수를 갖는다. 어느 경우라도 박 대통령이나 유 대표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치명적 내상을 입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