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 이전의 내게 4 · 19, 5 · 16은 ‘그들만의 리그’
- 월북(越北) 부친의 기억, 그리고 연좌제 노이로제
- 산업화-민주화 세력 功過 따지는 작품 집필 중
- SNS 광장민주주의를 우려한다
이와 동시에 이문열은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작가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표적인 보수 작가로 손꼽혀온 그는 진보적 지식인들과 크고 작은 논쟁을 벌여왔다. 그는 작가의 창작 공간이자 작가 지망생을 위한 학숙(學塾)으로 경기도 이천에 ‘부악문원’을 열기도 했다. 광복 70년을 맞아 그에게 우리 사회의 역사와 작가 개인의 역사에 대해 물어봤다. 인터뷰는 5월 26일 그가 거주하는 부악문원에서 진행됐다.
김호기 1948년에 태어나셨습니다. 광복 70년과 거의 생을 같이해오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회가 어떻습니까.
이문열 제 생일이 1948년 5월 18일(음력)이에요. 양력으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 개표하던 순간이었다고 해요.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됐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분단되던 해에 태어났다는 점에서 광복 못지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김호기 저는 1979년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화제작이던 선생의 ‘사람의 아들’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선생은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한 다음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결국 작가가 되셨습니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이문열 작가가 되고부터 40년 가까이 계속 받는 질문 중 하나예요. 그런데 그 답이 자꾸 변해요. 우리가 무엇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되고자 해서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밀려 밀려 가다가 되는 사례도 있어요. 예전에는 작가가 되고자 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됐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마음속에 작가가 되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답을 하기도 했어요. 제 경우는 적극적으로 되고자 선택했다기보다는 생업을 가진 대다수 사람에게서 보듯이 살다보니 그게 제일 하기 쉬웠고 글 쓰는 일이 가깝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만의 리그
자화상 앞에 선 이문열 작가.
이문열 내가 중년에 접어들기 전까지 권력을 가진 그 사람들은 모두 다 한 발 떨어져 있는 이들이었어요. 4 · 19, 5 · 16, 10월 유신 등과 같은 정치적 변혁은, 내 나이 40대 초반까지 실감 나는 현실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였어요. 나는 국외자였지요. 그 까닭은 아마 아버지의 유산 때문이었을 것이에요. 사회는 살아 있었지만, 나는 연좌제 같은 것에 억압돼서 지냈어요. 어릴 적에 어머니나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영향이 컸어요. 예를 들어 4 · 19 때 어머니가 노심초사 걱정하고 못마땅해하신 것은 형님들이 그 속에 뛰어드는 것이었어요. 자유당과 민주당이 싸울 때도 어머니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여기면서 우리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말씀하셨지요.
김호기 우리 현대사에서 산업화를 연 박정희 시대만큼 논란이 큰 시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은 10대에서 20대에 걸쳐 박정희 시대를 겪었는데, 이 시대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문열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대통령 후보였을 때의 공약 중 하나가 연좌제를 푼다는 것이었어요. 아무도 그런 말을 못할 때였지요. 그 뒤 상황이 이상하게 풀리면서 자기가 다급해지니까 못 풀었어요. 그래도 최초로 연좌제를 푼다고 말한 사람이 박 대통령이지요.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그게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시대에 악감정이 많지는 않았어요. 3선개헌과 유신체제를 지켜보면서 의심은 가졌지만 절실한 문제의식은 없던 셈입니다. 문제의식이 있었다면 시위나 데모에 참여했을 텐데, 그들만의 리그로 생각했어요. 내가 끼어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손해를 보게 되는 거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북한으로 간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한때 ‘일본을 통해 밀항해 몰래 아버지를 만나고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와서 뭘 했다’는 혐의를 받은 적도 있는데, 내가 6개월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려웠어요. 식구들 외에는 증명받기가 어려웠지요. 술집도 한 달에 한 번은 갔지만 그 술집에서 나를 잘 모른다고 했어요. 참 막막했어요. 1982년 연좌제가 풀리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후에도 북한대사관이 있는 나라에 갈 때는 절대 혼자 가지 않았어요. 내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갔어요. 무슨 지령을 받았다 하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이런 상태였으니 제게는 그들만의 리그로 보였던 겁니다.
김호기 선생은 어느 시점부터 정치적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분이지만, 동시에 대표적으로 보수적 견해를 표방해온 작가이기도 한데요.
이문열 1990년대 중반 내지 후반일 거예요. 그때 비로소 ‘적(敵)’ 개념이 확고해졌어요. 내가 결국 적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 그럼 내가 서 있을 곳은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실’이 된 아버지
김호기 선생을 뵈면 여쭤보고 싶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웅시대’가 월북한 좌파 지식인과 남한에 남은 가족의 수난을 그렸다면, ‘변경’은 월북한 아버지를 둔 세 남매의 성장 과정을 그렸습니다. 선생께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이문열 아버지는 제게 현실적인 기억이 전혀 없어요. 만 두 살 때 헤어졌고, 아버지 사진도 남지 않았어요. 어릴 적 하나 있던 사진도 없어졌고 나중에 서른 살 때쯤 아버지 친구 분한테 찾아가 처음 (사진을) 봤어요. 홀로 찍은 사진은 없었고, 졸업 앨범에 여러 명이 찍은 사진이 있었어요. 여덟 명이 찍은 사진인데, 친구 분이 알려주지 않아도 한 번에 알아봤어요. 까까머리들 속에 “이 사람 맞지요?”라고 물어보니까 “알아보네”라고 했습니다.
제게 전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변경’에서 일단의 감정을 표현했지만, 기본적인 감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게 많이 작용했어요. 아버지에 대해선 보통 양가적 감정이 작용하잖아요. 한편으로는 그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내게 부여한 나쁜 유산 때문에 싫어도 하는 것 말이에요. 미워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였고, 저 사람은 왜 그걸 선택했을까, 하면서도 동시에 다가가게 되는 존재였어요.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던 기억이 납니다.
김호기 1990년대 후반 아버지를 만나러 중국에 가기도 하셨습니다. 그때 언론에 크게 보도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문열 1998년 5월 연길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북한에 사는 여동생을 만났어요. 아버지는 그해 3월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제게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그전까지는 끊임없이 제 행동의 제약원리로 작용했지요.
김호기 부친의 이야기를 들으니 분단의 비극을 선구적으로 다룬 최인훈 선생의 소설 ‘광장’이 떠오릅니다. ‘광장’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이문열 대단한 작품이지요. 아, 이렇게 이데올로기 얘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전에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는 것은 반공소설밖에는 못 보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데올로기 문제를 반공소설이 아니어도 다룰 수 있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어요.
김호기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오면서 이 시대를 이끈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두 세력의 승인
이문열 묘하게도 두 세력이 가장 큰 힘을 가졌을 때 오히려 상대편을 인정하는 상태가 되더군요. 근대화 세력 또는 산업화 세력이라는 말을 들은 게 1990년대 중반 이후일 거예요. 1990년대에 들어와 우리 사회는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어요. 그들이 권력으로 나타난 것은 1998년이지만. 그때 근대화 세력, 또는 산업화 세력이라는 말이 생겨나더군요. 또 1980년대에 그렇게 가혹하게 억압했는데 민주화라는 말이 저절로 사회적인 세력으로 등장했어요. 그전에도 많은 사람이 시위도 하고 데모도 했지만 그때에는 민주화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거든요. 이런 것을 보면서 근대사회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을 느꼈어요. 상대방에 대한 승인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김호기 선생이 보시기에, 민주화 세력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산업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인지요.
이문열 1980년대에 근대화 세력 또는 산업화 세력도 원형을 가지고 안착했고, 그때 민주화 세력도 그전까지 불리던 이름과는 달리 민주화 세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어요. 그 사회적 승인은 민주화 세력에 대해 먼저 이뤄졌고, 그들이 먼저 주도권을 잡은 뒤에 산업화 세력의 승인이 이뤄졌어요. 내가 꼭 쓰고자 하는 게 있는데, 이 두 세력이 자기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에요. 그과정이 1980년대에 이뤄졌다고 봅니다.
김호기 ‘영웅시대’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변경’은 제목부터 인상적이었습니다. 1986년에 집필을 시작해 1998년에 12권을 완간하셨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변경입니다. 광복 70년인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날카로운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경’에 담으려 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문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제국의 변경이 우리 한반도에서 만난 셈이지요. 변경이 만났을 뿐 아니라 한반도는 상대방에게 자기 세계를 보여주는, 미국과 소련의 쇼윈도가 됐어요. 보통 제국은 변경에 착취를 가하기보다 오히려 쇼윈도를 가꾸게 돼요. 쇼윈도를 통해 자기 제도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요. 이러한 변경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담고 싶었습니다.
김호기 우리 현대사의 사회변동에는 외인(外因)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하지만 외인 못지않게 내인(內因)도 중요했습니다. 파란만장한 격동의 현대사를 생각해보면, 내인, 다시 말씀드리면 내부의 책임도 크지 않았을까요.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에서 만난 이문열 작가와 김호기 교수.
이문열 지금이야 동서대립이 중요하지만, 1945년까지만 해도 주목할 것은 남북대립이었어요. 서울-평양 축구대회가 가장 흥미로웠고, 또 대립이 심했어요. ‘변경’에도 그런 것이 나와요. 내인과 관련해서는 통일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통일을 생각할 때 외부의 에너지만 얘기하면 계산이 잘 안 나와요. 내부의 에너지도 얘기해야지요. 분단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분단 상태를 만든 에너지 이상이 투여돼야 하는데, 우리가 어디까지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내부의 에너지를 잘 계산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어요.
김호기 2000년대 중반 ‘변경’을 절판했습니다. 2001년 선생의 책들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고 불태운 이른바 ‘책 장례식’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선명히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해야 할 민주주의 사회에서 책을 불태우는 행위는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문열 ‘변경’을 절판한 건 책 장례식 사건 때문만은 아니고 나름대로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어떤 내용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것들을 얘기한 게 있어서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지난해 개정판을 냈어요. 책 장례식에는 이데올로기보다 지역색이 더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이후 나를 제외시킨 세력을 보면, 그때 장례식 당시 발동된 에너지의 연속인 경우가 많았어요. 내가 지역주의자라는 메시지였어요. 지금은 이데올로기 문제인지, 지역감정 문제인지 잘 구분되지 않지만, 책 장례식은 이데올로기적으로만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김호기 ‘변경’에 이은 새 작품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압니다. ‘변경’에서 1960년대 전후를 다뤘으니 이후의 시대를 주목하는 건가요.
이문열 앞서 얘기했듯이 제가 쓰고자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에 관한 것이에요. 1980년대 상황으로 한번 설명해보려고 해요. 원래는 길게 쓰려 했는데, 요즘은 긴 게 잘 안 읽히니까 3500~4500매로 3권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서 제일 공들이는 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문제예요. 두 세력에 대해 현재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느냐, 그것을 따져볼까 해요. 달리 말하면, 부당이득을 취한 적이 없느냐, 어느 쪽의 가격이 부당하게 인하되느냐, 그런 것들을 다뤄볼까 해요.
김호기 1980년대는 뜨거운 시대였습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본격적으로 부딪치고 경쟁한 시기로 기억됩니다. 저는 20대였는데, 지금은 제 생각이 적잖이 바뀌었지만, 일종의 사고의 원형으로 존재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문열 방금 말한 작품에서 사회적 기억의 공정성이나 온당함에 대한 진단도 해보고 싶어요.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개념에 대한 평가나 이해에 큰 편차가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에요. 과거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여러 요소와 함께 작동하면서 만들어지는 게 바로 현재이지요. 그것에 대해 검토하려고 해요. 이 문제를 다루다보면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원형과 정체를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겠고요.
김호기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가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어떻게 평가합니까.
이문열 박정희 대통령한테는,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있던 것을 활용하고 종합한 셈이고요.
김호기 선생의 소설들을 보면 자연스레 ‘유교적 교양주의’가 떠오릅니다. 선생의 사유를 지탱하는 가치의 하나는 ‘영남 남인’에 기원을 둔 양반의식 같기도 합니다. 교양주의는 서구에서 볼 수 있듯 근대적 덕목이지만, 유교는 아무래도 전통적 가치입니다. 소설 ‘선택’을 놓고 페미니스트들과 논쟁한 적도 있는데, 선생에게 전통이란 무엇인지요.
다 안고 가려 해선 안돼
이문열 보통 사람들이 가진 부성(父性)에 대한 기본적인 의존을 저 역시 갖고 있어요. 고향의 전통이나 문화는 아버지의 문화지요. 현실적인 아버지가 아니었고, 일찍부터 부성이 차지하는 자리를 고향과 고향의 가치 및 전통, 이런 것들이 대신해준 것 같아요. 고향의 전통과 문화를 얘기할 때 늘 아버지를 떠올려요. 아버지가 했어야 한 일을 고향이 대신해준 것 아닌가 하는.
김호기 제 고향은 경기도 양주입니다. 초등학교 때 양주를 떠났지만 어릴 적 체험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영향을 미쳤습니다.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한 것 같습니다.
이문열 고향인 경북 영양에 다시 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그 이전의 고향은 기억을 못했어요. 7세 때 떠나서 오랜만에 갔어요. 고향에 가자마자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아갔는데 못 찾았어요. 나는 고향집을 큰 것으로 기억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성(城)’은 없고 다 쓰러져가는 집이 있었어요. 누가 집을 바꿨나 해서 물어보니 저 집이 맞다는 거였어요. 어머니가 약간 과장해서 알려준 이유도 있었겠지만, 살림이나 양반적 전통 같은 것을 엄청 키워서 알고 있었던 거예요. 고향의 다른 것들, 예를 들어 문화적 전통 등은 다 과장된 것 아닌가요. 그런 것들이 나를 떠받치고 지향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두상을 바라보는 이문열 작가.
이문열 나는 보수파를 자처하지만, 진보좌파는 너무 많은 짐을 실은 배 같아요. 전혀 다른 반대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보수우파든 진보좌파든, 정의부터 확정하고 논쟁을 하면 좋겠어요. 자기가 좌파인 줄 모르는 이도 많고, 자기가 우파인 줄 모르는 이도 많아요.
김호기 2003년 한나라당 총선 공천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보수우파들에게 충고를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이문열 짐을 좀 덜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짐을 다 들고 갈 필요는 없어요. 친일파, 이승만 등을 포함해서 얘기하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어떤 부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복권되는 데 동의해요. 하지만 그를 둘도 없는 국부(國父)로 만드는 데는 반대해요. 보수는 지나간 세월과 죽은 사람들의 행적 및 수고에 대해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해요. 그것을 미화해서 잘못까지 바꾸는 것은 문제예요. 보수도 짐을 좀 덜고 정리할 것은 좀 정리해야 해요. 다 안고 가려 하지 말고요. 앞의 사람들이 고생해서 만든 것이라고 해서 모두 좋을 수는 없어요. 좀 덜어야 하는데 보수파들이 그걸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집단지성
김호기 어떤 소설을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제가 공부하는 사회학의 시각에서 볼 때 권력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줬습니다.
이문열 ‘시인’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소설을 최고로 꼽고 싶어요. 이번에 체코어판이 나와서 다녀왔는데 외국에서 많이 팔리기도 했고 평가도 좋았어요. 12~13개국에서 출간됐어요.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을 다룬 이 작품은 제 자전적인 얘기와 비슷해서 그런지 애착이 가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김호기 평역하신 ‘삼국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1800만 부 팔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문열 ‘삼국지’는 내게 효자 같은 책이에요. 부정적 인물로 그려지던 조조를 재평가하기도 했고요.
김호기 작가가 된 지 어느덧 40년이 가까워옵니다. 개인적인 소망과 사회적인 소망을 한 가지씩 말씀해주시지요.
이문열 개인적으로는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작가 생활을 제대로 마감하는 것이에요. 사회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의식적 상황에 대해 작지 않은 우려를 갖고 있어요. 특히 우리 사회가 과도하게 직접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끌려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아요. 대의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오래 익숙한 옷과 같은 것이에요. 인구가 이렇게 많으니 중요한 결정은 국회와 재판에서 하는 거지요. 개인적인 계정이 없지만 어떤 때는 일부러 SNS에 들어가 보기도 하는데, 집단지성이 걱정스러울 때가 있어요. 제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의 많은 의사결정이 SNS를 통해서 이뤄져요. 이런 의사결정은 검증이 안 된 것이고, 다수라고 해도 그게 다수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직접민주주의 의사결정이 우리의 앞날을 잘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호기 사회학 연구자로서 21세기는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생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보사회의 진전은 대중이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의 요구를 강화해온 셈입니다.
이문열 둘 사이의 적절한 분업이 필요해요. 한쪽에는 능력과 전문성의 영역이 있고, 다른 쪽에는 광장민주주의가 존재해요. 문제는 광장민주주의가 너무 커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을 선동할 수도 있다는 거지요. 게다가 SNS로 대표되는 광장민주주의는 문화가 가져야 할 숙려(熟慮)의 요소를 빼앗고 있어요. 문화에는 깊은 숙려가 필요한 법이에요. 한 시간 정도는 생각해보고 얘기해야 하는데, 5분 이내로 빨리 말해버리는 거지요. 이렇게 숙려 과정을 생략하는 버릇에 대해 큰 우려를 갖고 있어요.
김호기 긴 시간 감사드립니다. 여기 부악문원에 와보니 주위 풍광이 아주 좋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