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 연평해전에서 우리가 압승한 것은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의 지침을 명확히 정리한 데 힘입은 바 크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에서 우리 군은 예하 부대는 즉각 대응하는데, 결정권을 쥔 상위 기관은 결심하지 못한다는 허점을 드러냈다. 많은 부대를 동원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별’들은 소심하게 눈치만 보고, 일선의 중위 이하 장병만 살기 위해 ‘악에 받쳐’ 싸우는 식이다.
영화 ‘연평해전’이 아쉬운 까닭
제2연평해전도 이런 허점 때문에 당한 경우다. 지도부의 무소신은 이 해전이 있기 전은 물론이고 끝난 다음에도 거듭됐다. 6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고속정이 격침됐으면 분해서라도 주먹을 불끈 쥐어야 하는데, 먼 산 쳐다보듯 했다. 가장 황당한 일은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전사자 장례식이 열리는 날 한일월드컵 결승전을 보러 일본으로 출국해버린 것이었다.
군 지휘부도 비겁했다. 대통령이 잘못 판단해 부적절하게 행동하면 국방부 장관이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김동신 당시 국방부 장관과 이남신 당시 합참의장은 국내에 있었지만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장정길 해군 참모총장만 장례식에 참석했다.
영화 ‘연평해전’은 바로 이 점을 고발했어야 한다. 이런 국가 지도부와 군 지휘부로는 자주국방을 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세상을 향해 던졌어야 한다.
김동신 장관의 선임 조성태 국방장관 시절 발발한 1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은 완승했다. 1, 2차 연평해전은 3년 간격으로 벌어졌다. 불과 3년 사이에 승전 군대가 패전 군대로 바뀐 것이다(해군 2함대의 고속정부대가 두 해전을 치렀다). 영화는 그 이유를 추적했어야 한다.
군사훈련이 약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다. 장병 훈련은 큰 차이 없이 강력했다. 차이점은 군 통수권에 있었다. 쉽게 말하면 김대중 대통령-조성태 국방부 장관 관계가 김대중 대통령-김동신 국방부 장관 관계와 달랐던 것이다.
1차 연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325정장 안지영 대위와 박정성 2함대사령관의 공(功)은 많이 알려졌다. 당시 합참의장이던 김진호 씨도 지난해 발간한 책 ‘군인 김진호’를 통해 그가 아는 1차 연평해전의 진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1차 연평해전 당시 국방부 수장이던 조 전 장관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 그는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 증언을 들을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지근거리에서 그와 대화하고 지침을 받았던 이를 통해 그가 했던 역할을 복원해보기로 한다.
1차 연평해전 후 조 전 장관이 누구보다 믿고 속을 털어놓은 이는 육군 준장으로 1차 연평해전 직후 국방부 대변인을 맡은 윤일영 예비역 육군 소장이다. 조성태, 김희상, 남재준, 윤일영, 주은식 씨는 육군에서 손꼽히는 전사(戰史)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출판이나 강의를 통해 각자가 이해한 전사를 풀어왔기에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조 장관은 1차 연평해전 후 윤씨를 ‘측근’인 국방부 대변인에 임명했다. 박정성 당시 2함대사령관은 사건 당사자로서 조 장관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1998년 3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처음부터 북한에 유화적이었다. 우리가 유화적으로 나가면 북한은 ‘습관적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력화를 시도한다. 전마선과 함정을 보내 NLL 월선(越線)을 시도하는 것이다. 1999년 집권 2년차에 들자 DJ 정부는 임동원 원장이 이끄는 국가정보원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실현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북한은 NLL 월선 빈도를 높였다. 남북정상회담을 빌미로 김대중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