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호

명사에세이

정동길 따라 걸으며

  • 입력2017-12-1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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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동극장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은 보행자가 걷기 편하도록 차도를 좁히고, 인도를 넓혀놓은 길이다. 양옆으로 은행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같은 가로수가 우거져 아름다운데다 걷기에도 편하니, 서울의 ‘걷고 싶은 길’ 첫손에 꼽힐 만하다. 

    나는 이 길을 매일 걸으며 출근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20년 넘도록 연극의 메카로 불린 종로구 대학로를 지켜온 내가 대학로가 아닌 정동길을 걸어 첫 출근하던 날 절로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1990년대 초반 대학 연극반 시절, 공연 대본을 구하기 위해 덕수궁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 자료실은 덕수궁 내에 있었다. 자료실을 방문하는 일은 추려놓은 작품 리스트 중 어떤 작품을 올리게 될까 하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장 가슴 설레는 일 중 하나였다. 

    필름으로 된 자료를 찾아 복사한 대본을 덕수궁 벤치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내려가면서 머릿속으로는 무대를 그리곤 했다. 대본을 읽은 첫 기억 그리고 머릿속에서 상상한 무대와 장면들. 이날의 기억들이 이후 내가 작품을 만들 때마다 ‘첫 대본을 읽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대본을 들고 자료실 정문을 나설 때 이미 연극 한 편을 다 완성한 것만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 시절로부터 25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정동극장에서 일한다. 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정동길을 걸어서 출근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거리

    정동길에는 많은 문화 공간이 숨 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92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대법원 건물을 전면부만 남겨둔 채 신축했다고 한다. 그런 시립미술관의 미술 작품 감상 역시 정동길 산책에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미술관 앞마당에서 휴식을 취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기에도 좋다. 도심에서 예술과 자연을 느끼며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미술관 정문 앞 로터리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나온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지금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한 배재고등학교의 동관을 가능한 한 원형 그대로 보존한 이 역사박물관의 외벽에는 1916년에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를 바라보며 100년 넘게 자리를 지킨 건물이다. 

    작지만 알차게 꾸며진 박물관을 돌아보면 배재학당은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나도향처럼 우리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을 키운 둥지였으며 야구와 육상 같은 근대 스포츠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방문 한다면 우리의 근대사를 들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거기서 나와 정동극장 뒤편을 돌면 중명전이 나온다. 대한제국의 비운과 함께한 이곳은 덕수궁 별채로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궁궐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 중 하나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이곳을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 사절 알현실로 사용했다. 1907년 고종은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된다. 고종은 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이곳에서 파견한다. 

    올해 7월 1일 보수공사를 마치고 중명전이 다시 문을 열었다. 전시실에는 당시 을사늑약 체결 장면을 인물 모형을 통해 생생하게 구현해놓았다. 그 뒤편에서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 대감의 모형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일로 파면된 뒤 일제가 준 귀족 작위도 거부하고 스스로 집에 유폐된 채 살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을사늑약과 을사오적에 대해서만 배우다가 중명전에서 한규설 대감에 대해 알게 된 후, 나라를 위해 끝까지 소명을 지켜낸 분들을 역사적으로 더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역사는 바로 이런 인물들 아닐까? 중명전 마당은 간결하고 정돈된 잔디밭이어서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느낀 소감을 한 장의 추억과 함께 남기기를 추천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극장

    정동극장과 예원학교를 지나 캐나다대사관 앞에 오면 520년 된 회화나무가 서 있다. 1976년 서울 중구 보호수로 지정된 이 회화나무는 높이가 17m이고 둘레는 5.16m에 달한다. 나무 옆 안내판에는 이 나무의 나이가 520살이라고 적혀 있다. 

    정동은 구한말 외교의 중심지였다. 1883년 미국 공사관과 사택을 덕수궁 옆에 세우면서부터 영국, 러시아, 프랑스 공사관이 들어서게 된다. 아관파천, 대한제국 선포 등 정동은 당시 우리나라 정치와 외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오랜 기간 한자리를 지켜온 회화나무가 그동안 말없이 우리 근대사를 지켜보며 나이테에 적어왔다고 생각하니 숙연해지는 마음이 든다. 

    그 외에도 정동길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최초의 근대식 호텔인 손탁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인 정동교회, 최초의 신식 여학교인 이화학당 등 근대사의 의미와 건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장소와 흔적이 많다. 각 장소들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건축사적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줄 것이다.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복원 이념 아래 1995년에 건립됐다. 하지만 원각사의 원래 위치는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원각사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정동길에서 정동극장은 전통예술을 공연하는 공연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 까지 소개한 정동길은 근대사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서구 문화가 전해진 곳이고 근대식 건축·교육 등의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초’라 불리는 것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오랜 기간을 나이테에 고스란히 기록해온 나무도 빼놓을 수 없는 정동길의 역사다. 

    우리나라에 온 해외 관광객이 한때 정동극장을 많이 찾아준 적이 있다. 정동극장에서는 그러한 해외 관광객만을 위한 전통 공연을 오랜 기간 선보여왔다. 아쉬운 것은 그러는 사이, 우리 관객에겐 정동극장이 먼 추억 속의 극장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지난 역사를 담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그려가는 정동길처럼, 정동극장도 이제 우리 전통을 담아 현재의 우리가 즐겨 찾을 수 있는 공연장이 됐으면 한다. 정동극장에서는 작은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 정동극장의 변화는 전통의 아름다움, 그 우수한 예술적 가치가 지금 우리 관객에게 사랑받기 위한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작품이 결국엔 이곳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알려질 것이라 믿는다.

    25년 전 추억이 깃든 정동길은 외관상으로는 그때와 비슷해 보여도 실제론 많은 변화가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임을 느낀다. 이 길처럼 나 또한 이곳의 시간과 같이 움직이고 있다.

    손상원
    ● 1971년 서울 출생
    ● (재)정동극장 긍장장, 전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 전 (주)이다.엔터테이먼트 대표이사. 
    뮤지컬 '해를품은달' '그날들' 연극 '모범생들' '늘근도둑 이야기' '멜로드라마' '환상동화' 제작, 2004 연극열전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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