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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 | 7화. 봄 같지 않은 봄의 오후

  • 이문열

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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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한쪽은 추진력은 강했지만 절대 믿을 수 없고 양심도 없고 잔인하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쪽은 사람의 모습에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982년 7월, 한국 주재 미 고위 외교관이 본국 언론에 보낸 서한의 한 구절.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어떤 기대 또는 선입견 탓이었을까, 새마을 특급열차가 서울역 구내에 들어설 때부터 역 광장 쪽의 무언가 차가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까닭 모를 불안까지 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일부러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기차로 서울역에 내렸는데…. 실망에 가까운 그런 기분은 기차에서 내려 역 구내를 빠져나오면서 점점 더 심하게 그를 몰아대더니, 집표구를 나와 텅 빈 서울역 광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묘한 적막감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통신사 유인물에도 학생들의 자발적 회군(回軍)이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새마을호 객실에서 들은 방송에서도 대학들은 대부분 학내에서의 토론으로 열기를 식히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지만, 벌써 오후 1시를 넘겼는데도 여전히 텅 빈 광장을 보자 조금은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무리 시위 지도부의 결정이라 해도 어제까지 10만 시위대가 몰렸다는 광장이, 그리고 저녁 6시 무렵에는 시내버스를 몰고 전경들에게 돌진해 다수한 인명사고까지 낸 살기 띤 열정 혹은 광기가 하룻밤 새 이렇게 평온과 적막으로 시치미를 뗄 수 있는가. 

그는 무언가 속은 것 같은, 아니면 놀림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건너편 대우빌딩 쪽을 살폈다. 대학 시절 5층 높이로도 웅장하기 그지없던 건물이 있던 자리에 몇 해 전 새로 들어선 20여 층 현대식 고층빌딩이 새삼 위압적으로 다가들었다. 그러나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빌딩 앞 보도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 옆으로 난 몇 가닥 골목 입구나 인근 높고 낮은 건물 그늘에도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인적이 뜸해, 그가 머릿속에서 그리고 왔던 광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서울역 광장 주변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참을 둘러봐도 특별하게 의미 있는 다중의 흔적이나 은밀한 이합과 집산의 기미를 찾지 못한 그는 옛날 포장마차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섰던 곳에 들어선 몇 개의 가판대를 보고 그리로 가보았다. 역 구내의 홍익회 매점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그 가판대들 가운데서 그의 물음에 대답을 잘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데, 선 채 음식을 먹게 되어 있는 목로 같은 곳에 방금 라면을 끓여낸 중년 사내가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그에게 흘깃 눈길을 보냈다. 

“여기 콜라 한 캔 주시오. 거북선 한 갑도요.” 



그는 대뜸 그렇게 주문해놓고 중년 사내가 그것들을 내오자 값을 치르면서 눈을 맞추기 바쁘게 물었다. 

“어제 그렇게 요란스러웠다는데 오늘은 어째 조용하네요. 오전에도 이랬어요?” 

“뭐 건물 그늘이나 골목 어귀 같은 데서 몇 명씩 모여 빼꼼빼꼼 내다보는 눈길은 더러 있었지만, 데모라고 할 만큼 떼 지어 나온 학생들은 없었어요. 용케 한 무더기 모여 웅성거리다가도 경찰기동대 아이들이 덮칠 기미라도 있으면 꽁지가 빠지게 내빼버리고. 내 기억에 오늘 플래카드에 대학 이름 밝히고 나선 대학교는 하나도 없었지, 아마.” 

“뉴스로 본 거지만, 굉장했다면서요. 어제. 호왈(號曰)십만이었다던데….” 

“오후에 한창 기세가 올랐을 때는 호왈백만인들 못 불렀겠어요? 그런데 요새 대학생들 참 영악해요. 우리도 어제 학생들이 지도부 결정에 따라 제 발로 돌아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늘 정말로 이리 쥐 죽은 듯 조용할 줄은 몰랐지요. 어디나 호전적인 극단파들이 있었을 텐데. 걔네들이 모든 짐은 최규하 대행 정부와 신군부 사람들에게 떠맡겨버리고 학내로 돌아가 느긋하게 농성하며 기다릴 줄도 아는 게 정말 신통하지 않아요?” 

“시내버스로 경찰기동대와 전경을 덮쳐 깔아 죽인 일에 연루될까 봐 자제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일을 그렇게 해석하는 방법도 있군요. 모든 걸 정부와 계엄군에게 떠맡겨버리고 학내로 돌아가 느긋하게 기다린다, 라….” 

가판대 주인의 말을 그가 그렇게 받자 가판대 주인이 갑자기 무안한 듯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받았다. 

“에이, 그거, 나도 들은 말이에요. 실은 오늘도 학생들 서울역 앞 데모 가지고 다 아는 성스럽게 떠드는 거, 이게 벌써 세 번째예요. 요즘은 손님처럼 데모 구경 나온 사람도 많아 지난 주일 그 사람들이 커피믹스 잔 들고 떠드는 얘기 들은 것만도 열 번은 넘을 거예요. 긴급조치가 풀려 그런지 대한민국 성인 남자는 모두 정치평론가가 다 되었고….” 

서울의 신문사와 잡지사와 출판사의 동시 호출을 받아 그달치의 금토 하루 반 출장과 2박 3일 상경 길에 오르면서, 그가 굳이 기차를 탄 것은 전날 서울역 광장 일대에서 그 규모로 한 정점을 찍었다는 학생 시위대를 가까이서 한번 바라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5월 들어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한 대학생들이 그 한 주일 서울역 광장으로 몰려들면서, 그는 대학 시절 동급생들에게서 느꼈던 것보다 더한 괴리감과 이질감으로 그들 새로운 세대의 시위 양태를 궁금히 여겼다. 그런데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 따로 시간을 내 그들이 몰려드는 서울역 광장을 찾아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우정 기차를 탄 것이었다. 

한 번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지만, 1969년 겨울 그가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보고들은 학생시위는 언제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데서 시작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면서 끝이 났다. 4·19 막바지에 경무대나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간 것을 마지막으로, 그 뒤의 학생시위는 기껏 거리 행진과 경찰과의 투석전 그리고 연행과 도주가 절정이 되었고, 끝은 대개 어렵게 버텨낸 대오의 캠퍼스 귀환과 해산으로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그 뒤 후문으로 들은 유신 시절의 학생시위도 그 이상의 일탈은 없었던 것 같았다. 강화된 대학 교련이나 서슬 푸른 유신의 위하(威哧)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더듬어가다가 그는 문득 대학 시절 마지막으로 겪은 학생시위의 한 변형과 이제는 목가적으로 들릴 만큼 온건하게 기억되는 그 시절의 어떤 별난 시위와 그 진압 과정을 떠올렸다.

언젠가, 아마도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시들해갈 무렵의 일일 것이다. 누군가 학교 담 안쪽에서 예고 없이 학교 옆 4차선 도로를 지나가는 대통령과 경호 차량 행렬 앞쪽으로 시멘트 벽돌 한 장을 내던진 일이 있었다. 잔자갈 섞인 굵은 모래를 접착 강도가 떨어지는 시멘트에 말아 대강 찍어 여름 볕에 바짝 말린 불량 혹은 날림 벽돌이 아니었던가 싶다. 넓은 길 한가운데까지 날아가 저만치 다가오는 대통령 호위 차량 앞에 떨어지는데, 흙덩이처럼 풀썩 먼지를 내며 부스러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마치 허술한 폭발물 불발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느낌이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경호팀을 자극해 과잉 충성을 촉발해서인지,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일은 뜻밖으로 거창하고 요란스럽게 발전했다. 

대통령이 탑승한 차가 그때까지의 차선을 버리고 다른 차선으로 바꿔 학교 앞을 지나치고, 잠깐 멈칫했던 선두 오토바이 기동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따라갈 때만 해도 그 돌발적인 일은 그냥 별거 아닌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오토바이 몇 대가 뒤로 처져 학교 정문 쪽으로 되돌아가고, 이어 뒤따르던 경호 차량 두 대가 소리 없이 서더니, 거기서 무장병력 몇이 뛰어내려 그들 오토바이를 세우고 기다리던 기동대와 합세하면서 일이 터졌다.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명령을 수령했던지 그들은 곧 두 조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기동대 복장을 한 조는 원래 휴교령으로 정문에 배치돼 있던 몇 명 경계병과 합세해 교문을 장악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다른 조는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 후문부터 막았다. 그리고 나머지도 호루라기를 불며 학교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달려가는 게 아마도 단과 대학 전체를 봉쇄하려는 것 같았다. 

그 무렵은 그가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인가 하는 시험으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고 법대 3년을 수료하지 않아도 사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따낸 직후라 심사가 복잡할 때였다. 고시 준비를 핑계로 학교를 때려치울 구실은 마련했지만, 막상 학교를 떠나려니 다시 홀로 걸어야 할, 기약 없어 멀고 고단할 길이 갑자기 아득하고 막막해졌다. 그래서 3선 개헌 반대 데모로 휴교 중인데도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시험 준비를 핑계로 얻은 하숙집에 눌러앉아 대학에서의 마지막 두 달을 그야말로 ‘무모하게’(그때 그들에게 무료한 것은 바로 무모한 것이었다) 죽여내고 있었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그날 그는 작취미성(昨醉未醒)의 흐릿한 머리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학교를 건성으로 들렀다가 속이 메스꺼워 하숙집에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임박한 휴교령 해제 풍문 탓인지 입초(立哨)경계가 다소 느슨해진 교문을 막 나서다가 그는 예사롭지 않은 그 벽돌 투척 광경을 보게 되었다. 교문을 나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바로 그 문제의 시멘트 벽돌이 학교 담을 넘어 날아와 아스팔트 위에 허연 먼지를 일으키며 부서지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같은 순간에 이어 대통령이 탄 리무진과 경호 차량 행렬이 지나가고, 그 뒤의 학교 봉쇄는 조용하면서도 아주 긴박하게 진행되었는데도,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좋지 않은 위치다. 어서 벗어나자. 그러나 뛰거나 허둥대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교정을 멀찌감치 벗어나서야 굵은 가로수에 기대 교문 쪽을 살펴보았다. 아직 교문 부근은 별 움직임이 없었지만, 교정에서 간간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그의 예감이 크게 틀리지 않음을 짐작게 했다. 

그날 학교 안에서 벌어진 나머지 일은 같은 집에 하숙하는 연극반 친구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전공이 무엇인지 끝내 기억나지 않는 그 동숙생은 그 무렵 학교 연극반에서 가을 공연으로 체호프의 ‘갈매기’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부대원들에게 끌려가 영문도 모르고 세 시간 가까이나 횡액을 치렀다고 한다. 학교가 봉쇄된 지 30분도 안 돼 가까운 공수부대에서 달려온 덮개 씌운 트럭 대여섯 대에서 내린 100여 명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아직은 휴교 중인 금요일 오후의 교정을 샅샅이 뒤져 정원 1500명 가운데 남학생 200여 명, 여학생 100여 명을 찾아내 연행한 뒤, 남학생은 교련 연병장에서 기초 유격훈련을 시키면서 ‘각하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 불순분자’들을 색출하고, 여학생들은 작은 강당에 따로 몰아넣은 뒤 그 불순한 기도를 목격한 자로서의 신고 내지 자백을 강요했다. 무슨 대학 친선경기에 대비하기 위해 운동장에서 구기 연습을 하고 있던 체육과 특기생들부터, 얌전히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던 모범생들과 이런저런 가을맞이 학내행사 준비로 학교를 찾았던 서클 멤버들에, 휴강 중인 줄 알면서도 궁금한 게 많아 과별로 두엇씩 만나 함께 교정을 어정거리던 아이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두 시간 넘게 반복된 그 문초와 자백 강요 뒤에 아이들을 놓아주었는데, 남학생들은 그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실시된 ‘쪼그려 뛰기’와 ‘오리걸음’으로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여학생들은 되풀이된 군인들의 위협적인 질문에 성깔 있는 몇몇은 앙칼진 대응으로 맞서보기도 했으나, 끝내는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후줄근히 쥐어짜인 빨래처럼 되어 비틀거리면서 저무는 교정을 나서야 했다. 

“그런데 말이요, 정말로 분한 것은 쪼그려 뛰기나 오리걸음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공수부대원들에게서 느낀 모멸감 같은 것이었소. 그들은 진범을 색출한다거나 사건의 진상을 캐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다만 군대식 시범케이스 문화로 우리를 겁주고 길들이려 했을 뿐이요. 물리력에서의 우월을 정신적인 성취와 혼동하며, 이 어리바리한 먹물들아, 한번 당해봐라, 하는 식의 가학 성향까지 보였소.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자발적으로 데모에 참석해본 적이 없지만 ,이제부터는 아마도 달라질 것 같소. 주동을 하지는 못해도 나 혼자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 연극반 친구는 무슨 거창한 그리스비극 속의 대사라도 외듯 그렇게 비장하게 말했으나, 여학생들에게는 거칠고 무례한 말투 말고는 뒷날처럼 원한으로 기억할만한 위해는 달리 없었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가 잠깐 긴하지도 않은 회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다른 손님을 맞은 가판대 주인은 잠시 그 새로운 고객의 주문에 충실했다. 그가 의식을 가다듬으며 보니 새 고객은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데 그 역시도 방금 도착한 어떤 기차 편의 승객이었던 것 같았다. 드물게 ‘장미’ 담배를 찾더니 주인이 가판대에서 내려주자마자 값을 치르고 가까운 버스정류장 쪽으로 가버렸다. 역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또 벌어질 건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머리에 먹물 든 사람들은 지금 시국을 두고 서울의 봄, 서울의 봄,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지요? 김종필 씨는 뭐, 봄 같지 않은 봄이라던가. 도대체 올해는 무슨 봄 타령이 왜 이리 요란하고 길어요? 5월도 중순을 지나 이제 여름이 다 돼가는데.”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의식했는지 가판대 주인이 다시 그쪽으로 다가오며 그렇게 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정색을 하고 대답해주었다. 

“아마도 ‘프라하의 봄’ 때문에 그럴 겁니다. 10여 년 전 체코 프라하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 시기, 소련이 바르샤바 동맹군을 보내 짓밟았다고 알려져 있는 그 봄 말입니다. 김종필 씨는 한시 구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들먹였을 겁니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고. 이른바 유신 잔당을 경계한 것이겠지요.” 

그는 왠지 겸손해져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그렇게 대답해주고 기대선 가판대에서 몸을 뗐다. 가판대 주인이 입으로 떠드는 것과는 달리 정치나 시사에 그리 깊은 소양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아는 대로 성의껏 대답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자리를 뜨려고 돌아서는 그에게 가판대 주인이 한마디 던진 말이 재미있었다. 

“나는 선생이 탐문을 나온 정보 형사인지, 어제 사건 이삭줍기에 나선 기자 선생인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아무래도 기자 선생 같군요.”

2.
다소 후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언론그룹의 출판국이고, 시사 중심의 월간 종합교양지와 문화예술, 패션 및 연예계 가십에 특히 밝은 월간 여성지에, 이제는 제법 전통 있는 계간지가 된 미술잡지와 새로운 야심으로 창간한 문예지까지 내는 데다, 따로 일반 출판도 1년에 200종을 넘기는 출판부를 두어서인지 그들이 함께 쓰는 그룹 사옥 4층은 웬만한 신문사 출판국보다 훨씬 크고 붐볐다. 그래서 그런지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편집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서로 편집이라는 말을 떼어버리고 기자로 부르는 것 같았다. 계간 문예지 파트 편집담당인 심 기자의 안내로 편집국 한쪽 구석에 응접세트 한 조와 함께 시원스레 자리 잡은 데스크 자리로 가니, 이제 막 나온 여름 호 초쇄본을 검토하고 있던 주간이 그야말로 파안대소로 책을 덮으며 말했다. 

“아이고, 어서 오시오. 불휴공(弗休公). 그래 그간 별래무양(別來無恙)하시었소?” 

장편 분재(分載)를 결정했을 때와 첫 분재 원고를 넘겼을 때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고, 그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맥주 한잔 제대로 풀어놓고 마셔보지 못했는데도, 주간의 얼굴에는 오래된 사이의 반가움과 친근감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가 듣기로 주간은 깐깐하면서도 좋고 나쁨이 분명한 사람으로, 원래 국립대학 역사과 교수였는데, 유신 시대 무언가 석연찮은 사유로 재임용이 거부된 이른바 탈락 교수였다. 불휴공도 처음 들어보는 존칭인 데다 별래무양도 흔하게 들을 수 없는 인사말이 된 지 오래라, 그가 조금 어리둥절해 주간을 보고 있는데, 주간이 다시 웃음을 참는 얼굴로 말했다. 

“무쇠 신발이 닳고 겨드랑이털이 다 떨어지도록 돌아다니며 찾아야 할 사람을 내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은 꼴이니 어찌 기껍지 않으리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가 그래도 알 수 없어 그렇게 반문했다. 그제야 주간이 방금 덮어두었던 계간문예지 ‘문해(文海)’ 여름 호를 들춰 보이며 말했다. 

“한 번도 장편을 발표한 적이 없는 등단 1년 차 신인에게 갓 창간한 계간지 권두에 놓일 장편 분재를 맡긴 주간의 심사 정말 편치 않더구먼. 봄 호 첫 회 500매를 다 읽어보고도 우연한 안타 같아 마음 졸였는데, 이제 겨우 한시름 놓은 기분이요. 방금 대씨(大氏·대조영)의 꿈을 좇아 만주로 떠나는 우리 황제를 떠나보내고 돌아왔소.”

평소의 담담한 어조로 돌아간 주간의 말을 거기까지 듣고서야 그는 비로소 조금 전 주간의 낯선 어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별래무양이니 무쇠 신발이니 ‘겨드랑이털이 다 떨어지도록’은 모두 두 번째 분재에 나오는 의고전체(擬古典體) 문장의 어투였다. 그제야 뒤따라온 심 기자도 그들 사이에 오고가는 말을 알아듣고 한마디 거들었다. 

“요즘 이 작가님 소설 때문에 우리 편집부 말투까지 괴상하게 변해간다니까요. 모두가 입만 열면 한문 번역투의 문어체에 되지도 않은 전고(典故) 대고 긴 인용문 다는 건데. 이번호 게라(교정지) 사무실 한 바퀴 돌고 나서 증상이 훨씬 더 심해졌어요. 숙취 씻으러 근무 중에 사우나로 땡땡이치러 가면서,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한운고학(閑雲孤鶴) 하천불비(何天不飛)가 튀어나온다니까요. 거기 한가로운 구름이 왜 나오고 외로운 학이 왜 나와요? 거기다가 어느 하늘엔들 날지 못하리오, 라니? 그뿐만 아니에요. 하다못해 문서 수발하고 원고 나르는 김군 있지요? 너무 말이 없어 입에 냄새날까 걱정이라는 그 김군 말입니다. 누가 너무 꾸물거린다고 나무랐더니 글쎄, 뭐랬는지 아세요? 두고 보자, 군자의 복수는 백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뭐, 어쩌고 하며 구시렁거리더라 나요. 내 참.” 

듣고 있던 주간이 심 기자의 말을 끊듯 핀잔을 주었다. 

“으이구, 저 억삼이, 이제 겨우 두 번째 분재 나갔는데 사내에서 그걸 읽은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된다고. 심 기자 저거, 오히려 소설은 지가 쓰고 있는 거 아냐?” 

“읽은 이가 얼마라니요? 입소문 듣고 그거 보려고 사내 구석구석 돌아다닌 우리 창간호가 몇 권이나 되는지 아세요? 이번 여름 호에는 마지막 게라만 여덟 부나 여벌로 더 뽑았다고요.” 

“아니 무슨 교정지 여벌을 그렇게 많이 뽑아? 교정을 몇 명이나 보는데?” 

“우리 편집부 교정교열이야 지금 있는 셋이면 되죠. 하지만 몇 명이나 마나, 그렇게 여벌을 뽑아 미리 돌려놓지 않으면, 잠깐 손 씻으러 나간 사이에 교정보고 있던 게라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교정지를 여덟 부씩이나 여벌로 찍는다는 거야?” 

“신문사 논설실에서도 재미나 읽는 분이 계시는지 한 벌 넣어달라고 하고, 문화부에서도 한 벌은 필요하다고 하고, 또 일반 출판 쪽에서도 ‘황제 만세’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해서 좀 넉넉하게 뽑다 보니….”
 
“그거 책 나온 뒤에 읽어보면 되지, 아무려면 연재 며칠 빨리 읽어보겠다고 교정지를 가져가? 되지도 않는 소리 치우고 앞으로 교정지 미리 여기저기 돌리지 마.” 

“안 그러면 나야말로 보고 있던 게라 찾으려고 ‘발바닥이 닳아 겨드랑이에 올라붙도록’ 사내 구석구석을 뛰어다녀야 할 판인데요.” 

심 기자와 주간이 서로 쳐다보고 어이없이 웃어가며 그렇게 주고받는데, 주간 자리의 전화기 벨이 울렸다. 평소의 차분하고 단정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주간이 그에게 말했다. 

“5층 우리 신문사 문화부장 나리요. 그사이 불휴공 왔다는 소문 듣고 득달같이 면담 요청이구먼. 한번 올라가 봐요. 나는 이제 여름 호도 완전히 손을 턴 셈이니 불휴공 데리고 부원들과 함께 나가 회식 겸 한 대포하며 반가워할 소식이나 전해줄까 했는데.” 

“4시까지 출판사 들렀다가 5시에는 프라자호텔 로비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어차피 저녁 회식은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은 얼른 듣고 싶은데요.” 

“아 그거….” 

주간이 잠깐 망설이다가 심 기자를 보고 눈을 찡긋하더니 바로 이었다. 

“심 기자도 들었겠지만, 이 작가 연재 고료를 가을 호부터는 장당 5000원으로 올려주라네. 대외비로 하고.” 

그렇다면 일반 문예지 고료의 세 배 가까운 액수인데도 그는 왠지 반갑지만은 않았다. 연재를 시작할 때 약속한 고료만도 일반 문예지 두 배에 가까워 동료 문인들에게 함부로 밝히기 어려웠는데, 여섯 달 만에 다시 세 배 가깝게 오르다니…. 그는 속으로 남의 일을 생각하듯 막연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 ‘황제 만세’ 연재 때문에 그 무렵은 사고의 습성처럼 된 관련 중국전고 찾아보기 기능이 머릿속에서 숨 가쁘게 작동되고, 이내 ‘태뢰(太牢)의 소’가 떠올랐다. 이 사람들이 나를 태뢰에 쓸 소로 정한 게 아닌가? 골격이 번듯하고 뿔이 곧고 잡털이 섞이지 않은 소. 나라의 제사에 쓰기 위해 콩을 먹여 기르고, 제삿날이 가까우면 그 등에 비단까지 둘러준다는 그 살찌고 훤한 소. 종묘의 푸줏간으로 끌려가 정수리에 백정의 도끼날이 떨어져야 비로소 자신이 제물로 희생된다는 걸 알고 슬픈 비명을 지르고 죽어간다는….

그런데 그 건물 5층의 신문사 문화부장을 만나 그는 한 번 더 태뢰의 소를 떠올려야 했다. 전에 다른 자리에서 만났을 때도 그에게 예사 아닌 관심과 호의를 드러낸 바 있는 문학평론가이자 문화부장인 그는 마감이 가까운 시간인데도 신문사 회의실 구석에 따로 자리를 만들고 마주 앉아 말했다. 

“먼저 전화로 귀띔이나 하고 따로 조용히 자리 잡아 의논해야 되는데, 내가 마음이 그만 급해서…. 찾아 나서서라도 만나봐야 할 이 작가가 바로 아래층에 와 있다는데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이 석간 마감 시간이라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그냥 이렇게 얘기하지, 뭐.” 

“아, 예.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신인 작가들은 모두가 이 손안에 있소이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 젊은 작가들을 만만하게 여기는 말투가 고깝기는 하지만 매몰차게 받아치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긴한 당부가 있는 것 같아 오히려 공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렇게 받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가 이 작가 두고 다른 곳도 아닌 우리 계간지한테 된통 선수를 당한 것 같은데.”
 
“예?” 

“요새 이 작가 어제 그제 창간한 우리 새 계간지 연재 두고 이 동네가 시끌벅적하다고.” 

“무슨 뜻인지요?” 

“어떤 사람은 계간지 연재하고 일간지 연재하고는 샘물과 바닷물처럼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문화부장이기에 앞서 명색 평론가라면서 어떻게 신문 연재 끝날 때가 다 됐는데, 이 작가 같은 유망주를 신간 계간지에 처박아 두고. 작가 못 찾아 쩔쩔매고 있냔 거야.” 

“전 또 무슨 말씀이라고. 제가 등단한 게 이제 겨우 1년 남짓입니다. 기라성 같은 원로 선생님, 선배님들 두고 벌써 무슨 일간지 연재를. 그것도 4대 일간지 가운데서도 문화면이 가장 빛나 문화일보, 대학신문이라는 별명까지 있는 대(大)일간지에.” 

“문자 써서 미안하지만,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지 않던가. 나도 실은 이것저것 알 만큼 알아보고 하는 말이니, 이제부터는 본론에 충실하기로 하지. 들으니 지금 이 작가가 하고 있는 우리 계간지 분재, 대강 한 분기에 500매씩 해서 5회 정도로 끝낼 거라며. 그럼 마지막 원고 넘기는 건 내년 초잖아? 지금 내가 이 작가를 보자고 한 것은 바로 그 뒤를 선약으로 굳혀두고 싶은 거네. 이번에 임시로 들어가는 우리 신문 경(輕)장편 연재 끝나고 내년 3월부터 시작되는 새 연재를 미리 계약해두자는 거라고. 연재료나 1회분 원고량. 소재, 연재 횟수. 이를테면 하루 10매(원고지)짜리 박스 연재를 시도해 봐도 좋고, 주간 연재로 일요일 아침에 느긋하게 신문 한 면 소설로 읽게 만드는 수도 있고. 그 밖에 되도록 이 작가의 편의대로 하고 대우는 이 나라 최고 수준을 약속할 수 있네. 선급금이 필요하면 그것도 어떻게 최대한으로 얻어내보지. 아무래도 그냥 보고 있다가는 내년 봄 우리 연재 또 임시낭패 볼 것 같아서 그러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이 작가를 또 딴 데 뺏기고 말 것 같아서 말이야.” 

무엇인가에 몰려 다급해져 있는 줄은 알겠지만, 그래도 그는 문화부장의 말이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저도 겨우 등단 2년 차의 작가에게 유력한 일간지 연재 제의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오랜 무명과 빈곤에 시달려온 늙은 문청(文靑) 출신에겐 그게 황금방석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부황한 인기와 명성으로 다가가는 지름길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도 유례없는 일이라 영 실감이 나지 않는군요. 더군다나 내가 그걸 감당해낼 수 있는지도 전혀 가늠되지 않고.” 

그가 그렇게 더듬거리자 문화부장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찍어 누르듯 말했다. 

“어떤 신중함이나 겸양은 거드름으로 오인될 수 있고 책략으로 경계 받기도 하지. 어쨌든 내가 한 제안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말고 빨리 답해줘요. 서면이든 전화든. 그럼 나는 이만 마감 때문에.” 

그러면서 회의실을 나가는 문화부장을 보고 그는 문득 태뢰의 소를 다시 떠올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디다 쓰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내게 콩을 먹이기 시작하는구나, 내 뿔에 비단을 감아 치장하려 한다.

3.
1979년 한국의 문인 등단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에도 별난 것은 소설 문학 쪽의 등단에 반영된 사회 고령화 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해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 예닐곱이 모두가 나이 서른을 넘긴 데다, 그 전해부터 부쩍 활발해진 문예지의 중·장편 현상모집으로 등단한 신인 쪽도 마찬가지였다. 시인으로 이미 시집까지 두 권 낸 뒤 소설가로 전업한 친구에, 승려로 10년여 떠돌다가 환속한 친구가 있었고, 30대도 후반으로 접어들어 등단하면서 그때는 벌써 아무도 쓰지 않게 된 농촌문학을 기치로 내건 신인도 있었다. 

아마도 단편 중심에다 문예지 추천이나 문학 관련 기관단체의 현상모집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우리 문단의 폐쇄적이고 규격화된 등단 구조 때문이었겠지만, 이전의 신춘문예 등단 연령은 비교적 낮았다. 20대 초반 주로 대학 재학 중이거나, 늦어도 대학 졸업 또는 군 입대 전의 투고를 마지막 도전으로 여겼고, 이르기로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등단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지각한 느낌이 은연중에 형성한 연대감 때문인지, 서른을 넘겨 등단한 1979년도 신인들은 처음부터 다른 연도 등단 동기들과 달랐다. 어떤 오지랖 넓은 잡지사가 마련한 그해 신춘 특집 좌담회에서 한꺼번에 만나게 된 이후, 그들은 등단 동기라는 묘한 연줄로 매달 모임을 갖더니 그해 6월 마침내는 ‘입문(立文)’이란 창작 동인을 결성하고 같은 제호의 동인지까지 내기로 했다. 

그는 그때도 대구에서 서울을 들락거리며 작품 발표를 하고 있을 때라, 진작부터 그런 모임이 있는 줄 알면서도 그들과 함께하지는 못했다. 근무하는 지방신문사의 호의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서울로 올라와 신출내기 작가에게 필요한 섭외 활동에 썼지만, 대개는 출판사가 진행하는 자기 작품의 홍보와 판촉을 지원하는 데 바빴다. 그런데 그 ‘입문’ 동인 가운데 가장 발 벗고 나서 그를 끌어들인 게 지금 간사를 맡아보고 있는 소설가 김형우였다. 

그보다 한 살 위인 김형우는 지방 명문대 영문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자신의 이력에 불만이 많았지만, 어릴 적에 자폐증상이 있었음을 자랑으로 삼아 그 불만을 참아 넘긴다는 괴팍스러움을 특이한 개성으로 삼았다. 그는 또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업 소설가 지망생으로 꼬박 5년이나 등단에 공력을 쏟은 자신을 그 전해 가을까지 악착스레 무시한 문단에 깊은 원한을 품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자신이 끝까지 참고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해내는 선배 원로들이 있어 문학에 아주 등 돌리지는 못했다고 우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에야 겨우 어떤 권위 있는 문예지의 창간 20주년 현상문예가 그를 무명(無名)에서 건져 올렸다.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그의 문학을 보는 김형우의 눈길은 꼭 그리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두 달 전 동인지에 실을 원고를 넘기려고 만났을 때도 마땅찮아 하는 어조로 그때까지 발표한 그의 작품을 몇 마디로 여지없이 후려쳤다. 

“내 보니 이형 소설은 아직도 실패의 행진이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소리지만, 원목이 거창하고 무늬만 번들거리지 그게 어디 소설이요? 억지고 우격다짐이지. ‘인간의 대지’부터 그래. 중세 서양 천재의 절반을 삼킨 기독교를 600매의 경(輕)장편에 쓸어 담겠다고? ‘황제 만세’인가 뭔가 하는 이번 연재도 마찬가지요, 그 방대한 중국 고전의 바다에서 퍼 올린 자투리 사유(思惟)로 우리 근대화 백 년의 의식과 행태를 모자이크해보겠다고? 그런 게 억지고 우격다짐이 아니고 뭐요? 그야말로 거듭되는 실패의 행진이지. 하기야 가끔씩은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실패이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신문사 좌담회에서 처음 만나고 넉 달이나 훌쩍 지난 작년 5월 갑자기 그를 찾아와 동인 가입을 권유하던 김의 말투는 자못 진지하고 절실했다. 

“동갑내기 오정희가 10년 선배고, 네 살 맏이 황석영 형이 15년 선배가 되는 이 층층시하 문학 마당에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로 들어서고 보니 왠지 비장한 기분이 들지 않소? 각개전투로 뛰어보는 것도 좋지만, 무언가 바람막이나 차양 같은 것이 있어 그 그늘에 묻어 서로 격려하고 질정하며, 끊고 자르고 갈고닦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지 않겠소? 그래서 두어 달 전 늙다리 신인끼리 모여 동인회를 결성했는데 이형도 함께할 생각 없소? 단순히 이름으로만 동인이 아니라, 한 해 두세 번이라도 동인지 같은 걸로 내부 심사와 자기검열의 기능을 강화하는 수도 있고.”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그날 김형우는 그의 성의 없는 추측대로 그냥 불쑥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미리 출판사에 문의해 그가 상경하는 날짜를 알아둔 뒤, 그날이 되어서는 다시 한 시간 전부터 출판사에 와서 기다리고 난 다음에야 그를 만난 참이었다. 거기다가 여럿이서 함께 만나고 헤어진 뒤로도 여전히 지방에 남아 홀로 길을 가는 그를 잊지 않고 찾아와준 것도 은근히 감동을 주어, 그는 별 주저 없이 늦깎이 동인 ‘입문(立文)’의 열 번째 회원이 되었다.

원래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금요일 오후였지만, 오후 4시쯤 계간 ‘문해’가 속한 언론그룹 빌딩을 떠난 그가 전속계약은 없어도 전속이나 다름없는 거래 출판사로 가니, 그날따라 정원 12명인 그곳 편집실 응접세트는 만석이었다. 그러나 1년 남짓 서울로 올라오기만 하면 연락처로 삼으며 들락거린 터라, 그곳을 자주 찾는 다른 방문객들과도 대개는 낯이 익어 새로 소개받아야 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보는 사람들과 떠들썩한 소개를 주고받으며 악수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아 있던 김형우 소설가가 불쑥 몸을 일으키며 하던 얘기를 이어가듯 말했다. 

“이형, 우리 얘기는 아무래도 이 아래 다방으로 내려가 따로 하는 게 좋겠는데.”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그 시각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신출내기 작가인 그 둘에게는 문단 안팎 어느 쪽으로든 선배거나 선생님이 될 공산이 컸다. 개중에는 김형우 작가가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몇 있었는데, 김 작가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인 듯 옆 한번 돌아보는 법 없었다. 그가 오히려 민망해져 눈길로만 그런 김 작가의 말을 받다가, 퍼뜩 생각을 바꾸어 둘 모두를 자칫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자리에서 함께 빠져나가기로 했다.

“예. 그러지요. 하지만 다른 분들과 인사라도 나누고, 여기 박 사장님과 노 부장한테 신고라도 한 뒤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이 아래층 다방에 가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그래놓고 그도 대강 인사치레를 한 뒤 김형우 작가를 뒤따르듯 2층으로 내려갔다. 

이내 2층 다방에 마주 앉은 둘은 문인 같지 않게 직선적이고 급한 성미로 서로 눈치 볼 것도 없이 그날의 안건으로 들어갔다. 김형우가 특유의,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삐친 건지 성낸 건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드디어 우리 동인지 마감 원고를 인쇄소에 넘기기는 했는데, 모두 걱정이 많소. 특히 이형 작품 ‘제대병 열차’는 출판 경험 있는 동인들 말에 까딱하면 창간호를 폐간호로 만들 불온문서가 될 소지까지 있다는 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소설 어디가 그래요?” 

그는 진심으로 알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약간 높고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우선 제대라는 말이 지금의 시국에 대치할 알레고리적 함의가 있다는 거요. 봉사를 끝냈다, 복무를 다 했다, 그리고 부정적 표현으로는 의무에서 풀려났다, 짐을 벗었다, 이렇게 풀어보니 이제 막 유신체제에서 풀려나 민주사회로 돌아가려는 우리 정치 상황이 연상되지 않소? 이전에도 그리 온전한 것은 못되었지만 4대 선거 원리를 존중하는 체는 했던 그 민주 말이오. 거기다가 제대병이 되면, 우리 국민을 원관념으로 하는 대유(代喩)가 될 수도 있고, 열차까지 붙으면 이제 막 유신이 끝나고, 집, 원래 있던 곳, 형식적이라도 민주적이었던 옛날로 돌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정치·사회적 도정을 알레고리로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소.” 

“그건 지나친 확대 해석이거나 유추요. 그 단편은 내가 실제 경험한 적이 있는 제대병 열차에 몇 가지 섬세한 장치를 덧대 소설화한 것일 뿐이오. 알레고리가 아니라 단순한 기억의 소환에 가까운 ‘시간의 파괴력과 돌아보는 쓸쓸함’의 한 변주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요. 유신이 끝나고 자유민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든 민중 따위는 애초부터 내 설계에 들어 있지 않았소.” 

그러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강경한 부인의 어조까지 띠었다. 김형우가 거기서 짐짓 느긋하게 받았다. 

“하지만 어쩌나. 우리 동인의 태반은 그 ‘제대병 열차’에서 작년 부마사태의 그림자 같은 걸 느꼈고, 일부는 그 이상 앞으로 올지 모르는, 혹은 와야 하는 성공한 부마사태의 환상까지 끌어내던데.” 

“주인공은 폭력으로 억압하는 쪽을 거부하는 만큼이나 항거 지도층의 조잡한 선동성과 대중의 감성적인 부화뇌동도 눈 찌푸리고 보았지요. 더군다나 종당에는 주인공이 아예 다른 차량으로 객석을 옮겨 앉음으로써 그 상황에서 원천적으로 이탈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김형우는 별로 봐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이해는 하지만 이건 어쩔래 하는 투로 다시 그의 말을 받았다. 

“양비(兩非) 양시(兩是)와 제3지대 추구는 치열한 사회적 시비나 첨예하게 맞붙은 논리적 공방에서 어느 편에도 가담하고 싶지 않을 때 흔히 쓰는 자구적 논법이지. 이형이나 나처럼 생래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특히 쉽게 유혹받는. 그런데 딱한 것은 어느 편의 적(敵) 개념에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짜낸 술책이지만, 종종 양쪽 모두의 적 개념에 들게 된다는 거요.” 

그 말에 그는 어디선가 김형우의 아버지도 월북한 ‘도당 위원장(남로당)’임을 암시하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그게 오히려 김형우만의 이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그의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주었다. 

“아무려면 당장 재야 정치인들과 대학생들이 연계한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서 있을 신군부가 작가의 섬세한 예술적 표현에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기야 하겠습니까? 듣기로 그들은 4년제 정규 육사 1기를 정점으로 하고, 스스로 이 나라의 사회 정치적 엘리트임을 자부하는 집단이 주축이 되어 있답니다.” 

“하지만 학생시위 지도부는 이미 그들을 ‘목 자르는 자(剪頭漢)’와 ‘새로 나타난 악(新現惡)’으로 규정했소.” 

“그들이 누구든, 자기를 겨냥하지 않는 화살에 시비 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취사병 출신 무학(無學)의 훈련소 동기는 왜 ‘똥 덩어리’ 별명을 붙여 그 냉철한 관찰자와 함께 제대병 열차 옆 칸으로 치웠소? 그 동기가 내미는 술잔은 왜 그리 매몰차게 거절했소? 더군다나 그 작품 말미에 덧붙인 필론의 우화는? 그리스 제일의 현자가 돼지 새끼의 둔감과 무지를 흉내 내게 한 것은?” 

거기까지 듣자 그도 차츰 가슴이 서늘해왔다. 그때까지의 부인과 반문의 정서에서 천천히 깨어나 힘없이 물었다. 

“그렇게 엄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었다면 김형은 왜 그 원고를 인쇄소에 넘겼습니까? 아니 넘기기 전에 나와 한번 상의해보기라도 하는 게 온당하지 않겠어요?” 

“물론 그 때문에 서울에 있는 우리끼리는 몇 번 만나 얘기해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야말로 심증은 가도 물증은 없는 일에 동인인 우리가 앞질러 살벌한 검열의 칼을 휘두를 수야 없지 않겠소? 경고와 우려를 에둘러 드러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도 꼭 동인인 우리의 몫은 아닐 것 같았소. 이형이 감당하고 맞서야 할 부분을 우리가 주제넘게 가로막고 설 일은 아니다 싶어. 거기에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 단편은 1980년대 초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작품이 될지도 모르고…. 위태로운 모험일지라도 내게 그런 걸 쓸 기회가 왔다면 분명 망설이지 않고 저질렀을.”

4.
다시 돌아간 출판사 편집실 구석에서 전에 없이 독대를 청해 온 박 사장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꽤나 심란해져 다음 약속 장소인 프라자 호텔로 옮겨갔을 것이다. 

“지난주 골프장에서 경화일보 문화부장을 만났는데 이 선생한테 관심이 많더군요. 일간지 연재 때문인 것 같던데 한 라운드 내내 이 선생 얘기를 물었소.” 

형식적인 사장실인 4층 영업부 한구석에서 마주 앉아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사장은 10여 분이나 전에 없는 다변으로 경화일보 연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문화부장의 사내(社內) 입지와 발언권을 보증하며 여러 가지 밝은 전망과 암시로 그의 연재를 권유했다. 거기다가 조금 전 노부장이 모아 전해준 지난달치 호의적인 문예지나 신문의 서평 월평에, 지난 연말에 나온 중단편집 중쇄(重刷) 소식이 다시 떠올라 김형우가 가슴에 끼쳐두고 간 써늘한 한기를 어느 정도 걷어낼 수 있었다. 

“‘그 겨울’ 3판 들어갔어요. 초판 3만에 재판 2만 그리고 이번에 2만 해서 다섯 달 만에 7만 짼 데, 중단편 소설집으로는 대단하죠. 아직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엔 어림없지만, 속도로만 보면 1974년의 ‘장마’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도 같다네요.”

약속 시각보다 한 5분 늦어 프라자 호텔 로비로 뛰어들다 보니 로비 입구에서 서성이던 횡이 아재가 먼저 그를 보고 다가왔다. 

“왔나? 어예 이래 늦었노?” 

“출판사에서는 맞춰 떠났는데, 시청 앞에서 차들이 엉키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그거사 괘얀타. 글치만 우리 만나는 장소는 커피숍이 아이따. 5층 객실로 잡아놨으이 글로 가자.” 

횡이 아재가 그 말과 함께 앞장 서 승강기 쪽으로 갔다. 마침 로비 층에 열리는 승강기가 있어 둘은 따로 얘기할 것도 없이 승강기를 탔다. 몇 사람이 함께 탔지만, 횡이 아재는 그들을 한번 거들떠보는 법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방 열쇠를 꺼내 보며 큰소리로 객실 번호를 읽었다. 

“보자 507호라. 그런데 이 사람도 늦는 모양이따. 내가 아까부터 로비 입구에 서 있었는데 군복 입은 사람은 못 보았으이.” 

“누가 더 옵니까?” 

“그래. 창동이가 누구 하나를 보내겠다 캐서.” 

“누군데요?” 

“지는 바빠 몸을 뺄 수 없고, 부관이라 카등강, 수사관이라 카등강, 지 밑에 있는 사람 하나 보낼 모양이라.”
 
그때 승강기가 서며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내려보니 복도가 조용한데, 맞은편으로 세 번째 방 앞에 어떤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신사복을 입은 젊은이였으나 머리를 짧게 깎고 있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객실을 빌렸습니까? 커피숍이 훨씬 자연스러울 텐데.” 

“히잇, 그거. 다 눈물의 곡절이 있다. 그런데 보자아, 507호는 바로 저 방 아이라(아닌가)?” 

다시 객실 열쇠 번호를 들여다보던 횡이 아재가 문밖에 젊은이가 서 있는 객실 쪽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 서 있는 거 보이, 이 방에 약속을 잡은 사람인 모양이쎄. 복도에서 들쌀대지(소란 떨지) 말고 인사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자 고마.” 

횡이 아재가 눈인사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열쇠로 문을 따고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젊은이도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 

“그래믄 김 단장이 보낸 사람인 모양이쎄. 자 일루 와서 앉으소. 니도 여다가 앉고.” 

횡이 아재가 창 쪽으로 놓인 객실용 응접세트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아직 쭈뼛거리며 서 있는 두 사람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스위트룸까지는 아니지만 싸구려 베드룸도 아닌 방인지 탁자에 곁들인 의자가 셋이나 되었다. 그제야 젊은이가 공손하게 자신을 밝혔다. 

“단장님 지시로 이불휴 작가님 검열 관련 문의 설명 드리려온 권오인 대위입니다.” 

그러고는 선 채로 바로 브리핑에 들어갈 태세였다. 

“듣고 이해되지 않은 부분 있으시면 바로 질문 주십시오.” 

“하이고, 이 사람들아. 뭐시 이래 바쁘노? 숨이나 좀 돌리고 얘기하자. 누가 몽딩이 들고 왈게(몰아)대는 것도 아이고. 보자, 차는 뭐로 할라 카노? 서이다(셋 모두 ) 커피 시키믄 되나?” 

횡이 아재가 그제야 평소의 느긋함을 되찾아 프런트 데스크에 연결된 인터폰 수화기를 들며 그렇게 물었다.

“봐라, 니 여러 달 전에 보안대 창동이한테 뭐 좀 알아봐 달라 칸 거 있제? 거 왜, 군대 얘기 아무따나(함부로) 썼다꼬, 니 첫 책 뒤에 실래(실려) 몇 달 잘나가다가 갑자기 짤랬뿐(잘려버린 ) 그 소설 말이라. 검열에 걸랬다나(걸렸다나) 어쨌다나 해가주고 요새는 시중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됐다는 그거, ‘전선의 노래’라 캤나, ‘전장의 노래’라 캤나….” 

횡이 아재가 갑자기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그걸 물어온 것은 지난 3월 말이었다. 그런 부탁을 한때가 작년 7월 말 카터의 방한 때였으니 무려 일곱 달 만의 회신이었다. 

“예. ‘전선의 노래’요. 그런데 갑자기 그걸 왜.” 

납본필증인가 뭔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해서 첫 책 ‘인간의 대지’에서 그 중편이 빠지고 다른 중편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은근히 두려우면서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뒤 열 달이 지나도록 별일이 없어 그 무렵은 거의 잊고 지내던 터였는데 횡이 아재가 불쑥 그 일을 꺼내니 그로서는 난데없을 수밖에 없었다. 

“창동이는 점점 바빠져서 요새는 우리 ‘가다(어깨)구락부’에도 잘 안 나온다. 특히 12·12 뒤로는 발길이 아주 끊어졌뿌랬다 카이. 그런데 그래도 그때 내가 부탁한 걸 영 잊어뿌지는 않은 게라. 니 서울 올라오믄 인제라도 밑에 있는 쫄병 하나 보내 그때 그게 어예(어째서) 그래됐는지는 설명해주겠다 칸다. 아직도 알고 싶으믄 다음에 서울 올라올 때 내한테 연락해라.” 

그러나 4월에 상경했을 때는 다른 일이 바빠 그럴 틈을 내지 못하고 이번에 겨우 틈을 내게 되었다. 

권 대위의 브리핑은 횡이 아재가 기어이 프런트 데스크를 통해 커피 석 잔을 객실로 주문한 뒤에야 시작되었다.

“제가 시간이 없어 커피가 오기 전에 브리핑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먼저 이불휴 작가의 작품 ‘전선의 노래’ 배포 중단 조치는 본질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검열 문제와는 아주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유신 이후 군대 및 군사문화를 부인 부정 비방 비하하는 어떤 언사나 표현도 검열 검속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작가의 ‘전선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영을 무대로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정이나 비하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빈정대거나 비꼼 없이 유쾌한 건전성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브리핑은 한동안 우호적인 이해와 너그러움에 찬 비평으로 시작되더니, 곧 긴 논고와 같은 비판이 위협적인 경고와 훈시의 형태로 이어졌다. 

“군대 내부의 어떤 관행이나 전통은 추상적인 대외비로 보호되어야 하고, 어떤 부서나 조직도 부정이나 비방의 대상이 되어 군의 규율이나 단합을 저해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사항들은 비록 그게 일상적인 것일지라도 외부에 실시간으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선의 노래’에서는 우리 군대 내부에 남아 있는 일제 군사문화의 잔재로부터, 새로 도입되거나 편재되어 아직 자리 잡지 못해 부조리한 행태를 보이는 일부 부서 및 부대 간 혹은 단위부대 구성원 간의 내부 갈등이나 불화 등이 아무런 여과 없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통신보안에서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대로 적에게 노출되면 일급 군사비밀이 될 수 있는 지휘관의 동선이, 특히 VIP의 비행 예정 시각 같은 엄중한 대외비가, 초급 음어로 날아다니고, 고위층이 참관하는 포사격 훈련 목표물에 예비선이 설치된다든지 하는 확인 불능의 관행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선의 노래’는 검열 문제로서는 일단 끝난 일로 단언하면서 위로 비슷하게 끝을 맺었다. 그 작품은 현상문예에 당선해 대중의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신 말기의 군사문화 폄하 분위기에 편승해 날카로운 주목은 받지 않았고, 그것도 석 달 만에 단행본에서 삭제됨으로써 다시 문제 삼는 일은 없을 거라는 단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전 작가 김형우와 ‘제대병 열차’를 두고 한 얘기를 떠올리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좋지 않을 때 눈치 없이 급할 것도 없는 얘기를 다시 꺼냈구나. 그러나 횡이 아재는 권 대위가 거수경례와 함께 객실을 나가기 바쁘게 그에게 말했다. 

“창동이 글마 그거 고맙다. 나는 니가 처음 그 문제 얘기할 때 은근히 걱정했디라. 다른 사람도 아인 니가 그런 우환거리를 만들고 댕겼나 싶어. 그러나 끝난 일이라는 얘기 듣고 보이 오히려 속 시원하다, 앞으로는 아무따나 되고 말고 떠들지 말고 조심해 써라. 니 처지가 처지 아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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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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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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