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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통신

‘미국판 스카이캐슬’ 실리콘밸리 팰로앨토 취재기

고액 코디, 입시 중압감에 연쇄 자살한 학생들

  • 글·사진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미국판 스카이캐슬’ 실리콘밸리 팰로앨토 취재기

  • 지난해 여름, 미국 실리콘밸리 중심도시 팰로앨토의 기찻길엔 감시 카메라가 대대적으로 설치됐다. 이 지역 고등학생들이 기찻길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연달아 발생한 뒤 이뤄진 조치다.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한 팰로앨토 명문고 학생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현장에서 살펴봤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를 잇는 통근열차 캘트레인(Caltrain). 한동안 미국에서는 이 일대 고교생들이 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고가 이어져 사회문제가 됐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를 잇는 통근열차 캘트레인(Caltrain). 한동안 미국에서는 이 일대 고교생들이 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고가 이어져 사회문제가 됐다.

1월 31일 오전 11시 30분, 미국 실리콘밸리 중심도시인 팰로앨토의 한 기찻길 건널목에 섰다. 차단기에 달린 빨간 등에 불이 켜지더니 서서히 차단기가 내려왔다. 멀리서 캘트레인(Caltrain) 열차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캘트레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실리콘밸리 남부를 오가는 통근열차로, 아침저녁 교통체증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지역에서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중교통수단이다.

열차가 ‘빠앙’ 하며 두 손으로 귀를 막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굉음을 내는 사이, 차단기 바로 근처 가로등을 올려다봤다. 가로등 기둥 윗부분에 달린 감시카메라 7대가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곳곳에 ‘카메라 가동 중’이란 팻말이 보였다. 철로 옆에도 “열차가 다니고 있으니 함부로 건너지 말라”는 경고 문구와 상담 전화번호가 새겨진 팻말이 있었다.

캘트레인이 지나는 팰로앨토 건널목 4곳에는 지난해 여름 감시카메라가 설치됐다. 시 차원에서 카메라를 단 건 학생들의 자살 시도를 감지하고 예방하기 위해서다. 세계적 정보통신회사가 밀집돼 있는 실리콘밸리 지역은 미국 내 최고 부촌 중 하나다. 이 실리콘밸리에서도 팰로앨토는 명문 학군으로 꼽힌다. 그런데 팰로앨토에서 최근 고등학생들이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잇따랐다.


부모는 고액 연봉 기업가, 엔지니어, 명문대 교수…

팰로앨토시 기찻길 건널목 가로등 기둥 윗부분에 달린 감시카메라.

팰로앨토시 기찻길 건널목 가로등 기둥 윗부분에 달린 감시카메라.

3월 실리콘밸리 도시 새너제이에서 ‘2019 시네퀘스트 영화제’가 열린다. ‘실리콘밸리 영화제’로 불리는 이 축제에 초대된 작품 가운데 현지에서 가장 주목받은 영화는 ‘The Edge of Success(성공의 가장자리)’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팰로앨토 지역 공립학교인 건(Gunn) 고등학교의 학생 10명이 캘트레인에 몸을 던져 숨진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건 고교 출신인 다큐멘터리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팰로앨토에서 왜 이런 비극이 발생했는지, 구성원들이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는지, 그 후 학교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영화 주요 등장인물은 감독의 후배인 재학생들. 공개된 예고편 화면 속에서 학생들은 친구가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겪은 심리적 충격을 이야기했다. 학교에서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친구를 적으로 보고 다투는 현실이 어떤지를 전하기도 했다. 전염병처럼 퍼지던 죽음의 공포, 아무도 선뜻 꺼내지 못한 비극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수면으로 다시 올라왔다.



팰로앨토에서는 건 고교 학생 외에도 여러 학생의 자살 사건이 잇따랐다. 결국 2015년 11월 이 지역을 관할하는 샌타클래라카운티에서 연방정부에 역학조사를 요청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비극이 이어지는지 정밀하게 조사해 달라는 취지였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조사에 나서 2017년 3월 최종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5년까지 팰로앨토의 10~24세 자살률은 10만명당 14.1명으로 주변 도시보다 높았다. 목숨을 끊은 학생 대부분은 정신분열증,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일부는 이전에도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들이 어느 시기부터, 어떤 이유에서 그런 질환을 앓게 됐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약물 남용, 음주, 폭행, 정신질환 등이 자살 위험요인이라는 분석이 덧붙여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는 배후에 팰로앨토의 치열한 입시경쟁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지역에는 공립으로 건 고교와 팰로앨토 고교가 있다. 이 두 학교는 오래전부터 이른바 명문고로 불렸다. 해마다 스탠퍼드대, UC버클리, 혹은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많다. 미국 교육정보회사 NICHE가 매긴 2019년 캘리포니아주 공립 고교 순위에서 건 고교는 2위, 팰로앨토 고교는 4위를 차지했다.

건 고교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7년 졸업생의 16.7%가 UC버클리, UCLA 등 캘리포니아 소재 명문 주립대학에 합격했다. 또 졸업생의 82%가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이 학교 학부모 대부분은 실리콘밸리 소재 기업의 오너, 고액 연봉의 엔지니어, 스탠퍼드대 교수, 연구원 등 엘리트다. 그만큼 학생들이 느끼는 성공에 대한 부담이 크고 경쟁이 치열하다. 한국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연상케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통상 미국 고교생은 한국 고교생보다 입시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실상은 조금 다르다. 대학 진학률에서 양국은 비슷하다. 한국은 70% 안팎이고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2017년 1~10월 미국은 67% 정도다. 건 고교의 대학 진학률은 90%가 넘었다.

미국에서 대학 진학에 뜻이 없는 학생은 재학 중 어려운 과목을 수강할 필요가 없다. 학업 스트레스가 덜하다. 반면 명문대 입학 전쟁이 치열한 곳에선 상황이 전혀 다르다.


수천만 원대 미국 ‘입시 코디’

팰로앨토 지역에서는 이른바 ‘입시 코디’인 대입 컨설턴트도 성업한다. 이들은 학생의 성적 적성 특기를 감안해 합격 가능성이 높은 대학과 학과를 골라준다. 학생이 합격에 필요한 스펙을 갖추도록 사교육과 방과 후 활동도 추천해준다. 또한 입학원서 및 자기소개서 작성에도 관여한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컨설턴트 비용은 수만 달러(수천만 원)에 이르기도 한다. 몇 해 전 자녀가 실리콘밸리 지역 고교를 졸업하고 동부 명문 사립대학에 입학한 필자의 지인도 이런 컨설턴트를 이용했다. 비용은 1만 달러(약 1100만 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일선 고교에도 대학 진학 상담을 해주는 카운슬러가 있다. 하지만 재학생 500명 수준인 학교에 달랑 서너 명 있는 게 보통이다. 카운슬러 1명이 많게는 170명까지 상담해야 하는 셈이다. 건 고교처럼 재정이 넉넉한 학교엔 카운슬러가 20명 정도 있지만 그 역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실리콘밸리에선 전직 스탠퍼드대 입학사정관을 비롯해 고교와 대학에서 입시 전문가로 일한 사람들이 컨설턴트로 활동한다.

입시 경쟁이 학생들의 자살 원인 중 하나라는 얘기는 누구도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비극과 무관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 교육청 성격인 팰로앨토통합교육구는 2012년 학생들에게 지나친 과제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며 새로운 정책을 도입했다. 학생들의 자살 사건으로 지역의 불안감이 고조된 뒤 일어난 변화다. 방과 후 과제를 하는 시간의 경우 일반 과목을 듣는 고교생은 주당 7~10시간, 대학 수준의 고급 과목을 듣는 고교생은 15시간을 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고교생 약물 남용  

실리콘밸리 지역 공립 명문고로 꼽히는 건 고등학교 전경.

실리콘밸리 지역 공립 명문고로 꼽히는 건 고등학교 전경.

딱히 효과는 없었다. 2014년 12월 스탠퍼드대 저널리즘대학원 학생들이 제작하는 한 매체(Peninsula Press)엔 건 고교 학생의 자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사망자 친구의 부모는 인터뷰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오후 6시에 교사가 ‘내일까지 새로운 과제 하나를 더 제출하라’는 e메일을 보내더라”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입시 스트레스는 약물 남용과 연결됐다. 건 고교 학생들이 만드는 신문(The Oracle)은 2018년 12월 7일자 1면에서 “학생들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약물을 남용한다”고 보도했다. 의사 처방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친구들에게 불법으로 판매하는 학생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약을 사는 아이들은 보통 둘 중 하나다. 한 부류는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은 이들이다. 다른 부류는 정말 공부를 잘하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뭔가 도움 될 만한 걸 찾는 이들이다.” (기사 내용)

경쟁에서 뒤처진 학생은 위안을 받고자, 경쟁에서 앞선 학생은 스트레스를 덜고자 불법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행인 건 2017년 이후 팰로앨토 지역에서 학생 자살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입시 경쟁이 덜 치열해진 것도, 과제 부담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당국이 학생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혀낸 것도 아니다. 다만 비극을 극복하려는 여러 시도가 변화를 만들어냈다.

먼저 부모들이 나섰다. 팀을 꾸려 철로 건널목 앞을 교대로 지키며 감시하고 순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에서 부모를 대신해 감시 순찰 활동을 할 경비원을 배치했다. 지난해 여름 사람을 대신할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설치비용은 170만 달러(약 19억 원). 카메라를 통해 수상한 행동이 감지되면 즉시 대응팀을 현장에 보낸다. 이런 시스템을 운영하는 비용은 연간 30만 달러다. 시 교육청과 학교는 24시간 상담전화를 설치했고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학생들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도록 일종의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정서적 도움 필요”

필자는 1월 31일 오후 1시 건 고교를 찾았다. 방문객이 의무적으로 들러야 하는 행정실에서 심리상담 프로그램에 대해 문의했다. 직원은 옆 건물에 상담실이 있다며 안내해줬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여 명의 학생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담당 직원은 안쪽에 있었다. 학생들이 언니, 누나처럼 대할 것 같아 보이는 친근한 표정의 여성이었다. 상담 프로그램이 궁금해서 왔다고 하니 친절하게 설명한다.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영합니다. 학생들은 편한 시간에 약속을 잡아 올 수 있어요. 한 학생이 한 번에 1시간씩 학기당 총 12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문 상담원이 상담을 진행합니다.” 

학교 측은 상담 프로그램에 공을 들이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교 시절은 정서적 도움(emotional support)이 필요한 시기잖아요. 이 학교는 공부를 워낙 많이 하는, 경쟁이 치열한 학교라서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클 수밖에 없어요. 상담을 통해 조금이라도 스트레스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거죠.” 

교정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저만치 꽤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뚜벅뚜벅 앞만 보며 걸어가는 학생 두 명이 보였다.




신동아 2019년 3월호

글·사진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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