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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베트남 송무백열(松茂栢悅) 친구 관계”

[베트남 수교 30年 연중기획 | 한국 기업, 飛上하다] 수교 주역 김석우 前 통일부 차관

  •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한국-베트남 송무백열(松茂栢悅) 친구 관계”

  • ● 노태우 북방정책 ‘마지막 점’ 한국-베트남 수교
    ● “세계 최고의 지도자 박정희”
    ● 약속 지킨 韓, 신뢰로 보답한 越
    ● 국익 앞에 中과 당당히 맞서야
5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에서 ‘신동아’와 만난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은 “한국과 베트남은 소나무, 잣나무 사이와 같은 상생 관계”라고 강조했다. [지호영 기자]

5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에서 ‘신동아’와 만난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은 “한국과 베트남은 소나무, 잣나무 사이와 같은 상생 관계”라고 강조했다. [지호영 기자]

김석우(77) 전 통일부 차관은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Nordpolitik)의 대미(大尾)로 꼽히는 1992년 한국-중국, 한국-베트남 수교의 주역이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수교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제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7년 제1회 외무고등고시 최연소 합격 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이후 주미대사관 2등 서기관을 시작으로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무부 동북아1과(일본담당) 과장, 주일대사관 정무참사관,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제2협력관, 외무부 정세분석관을 역임한 후 아주국장으로서 중국·베트남과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대통령비서실 의전수석비서관을 거쳐 통일부 차관으로 일했고,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공직 퇴임 후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NDI) 원장을 거쳐 지난해부턴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 4월 뜻밖의 팩스 한 장

김석우 전 차관은 “한·베 수교는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시행한 북방정책의 ‘마지막 점’”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은 1995년 6월 노 전 대통령이 고려대 언론대학원에서 북방정책에 대해 특강하고 있는 모습. [동아 DB]

김석우 전 차관은 “한·베 수교는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시행한 북방정책의 ‘마지막 점’”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은 1995년 6월 노 전 대통령이 고려대 언론대학원에서 북방정책에 대해 특강하고 있는 모습. [동아 DB]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의 화룡점정이었다면 12월 베트남과의 수교는 종착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합니까.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마지막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죠. 당시 베트남 정부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의 경제개발 정책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수교에 적극적이었죠. 한국 정부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해 베트남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화답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보면 수교 교섭 당시 그렸던 스케치가 이제 그림으로 완성됐다고 판단합니다.”

김석우 전 차관은 “당시 지리적으로 중국에 인접한 ‘중견국’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한국과 베트남이 우호 관계를 구축하면 서로 윈-윈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낮은 문맹률로 대변되는 베트남의 높은 교육 수준, 베트남인의 근면성, 발전 가능성이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단절된 외교관계가 정상화한 것입니다. 초기 수교 교섭 과정은 어땠나요.

“1990년 4월 태국 방콕 주재 한국대사관에 뜻밖의 팩스 한 장이 들어왔습니다. 내용은 단 한 줄. ‘주(駐)태국 베트남 대사가 주태국 한국 대사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죠. 1975년 월남(越南) 패망 후 한국에 베트남은 ‘미수교 적성국(敵性國·적으로 간주될 수 있거나 전쟁 법규상 공격·파괴·포획 따위의 가해 행위를 할 수 있는 범위에 드는 국가)’으로 분류되는 국가였습니다. 베트남 대사가 한국 대사를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죠. 당시 외무부 정세분석관이었는데, 베트남 약사(略史)부터 현재 정세까지 분석했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베트남판 개혁·개방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죠. 정세를 보고받은 최호중 외무부 장관은 정주년 태국 주재 한국 대사에게 베트남 대사를 만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본국 훈령에 따른 수교 교섭 제의’를 명확하게 한 것이죠. 이에 1990년 10월 10일 정주년 대사가 베트남 대사를 면담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반응은 어땠나요.

“미국은 베트남과의 외교관계에 ‘로드맵(Roal Map)’ 전략으로 이름 붙인 4단계 전략을 수립해 둔 상태였습니다. 1단계 미군 전쟁포로·실종자·전사자 유해 발굴 및 미국에 협조한 베트남인 석방 합의, 2단계 파리 평화조약 준수, 3단계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 완전 철수, 4단계 외교관계 정상화 교섭이었죠. 미국 정부는 이러한 전략에 근거해 한국에 ‘섣불리 외교관계 정상화에 나서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베트남 대사가 공식 접촉했죠. 이 시기에 맞물려 유종하 외무부 차관이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났습니다. 미국 반응은 차가웠어요. ‘로드맵 4단계 중 1단계 문제가 매듭지어지지 않았다’는 거죠. 이 속에서 한국 외무부는 주태국대사관에 ‘베트남과 수교 교섭 시기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훈령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1991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ESCAP) 총회에 부코안 베트남 외교부 차관이 참석했습니다.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의 면담에서 부코안 차관은 도이머이 정책을 설명하며 국교 정상화를 요구했습니다. 이상옥 장관이 미국과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자 베트남 측이 ‘무역대표부를 설치하자’고 했습니다. 정치·외교 문제를 벗어나 실리적으로 접근하자는 메시지였습니다.”

無緣보다 惡緣이 더 낫습니다

1969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참전 장병을 격려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월남 파병은 한·베 사이 구원(舊怨)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베트남 측은 국익우선주의로 한국과의 수교를 택했다. 이에 대해 김석우 전 차관은 “베트남 고위 인사들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과거에 연연해서 미래를 위한 발전을 게을리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는 태도였다”고 회상했다. [동아 DB]

1969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참전 장병을 격려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월남 파병은 한·베 사이 구원(舊怨)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베트남 측은 국익우선주의로 한국과의 수교를 택했다. 이에 대해 김석우 전 차관은 “베트남 고위 인사들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과거에 연연해서 미래를 위한 발전을 게을리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는 태도였다”고 회상했다. [동아 DB]

베트남 정세조사단장으로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기억나는 일화가 있습니까.

“당시 수도 하노이는 낡은 건물이 가득했습니다. 낙후됐다고 느꼈죠. 5일간 베트남 정·관계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마지막 날 캉 외교부 차관보와 식사했고요. 그때 저는 ‘베트남에는 풍부한 자원과 우수한 인력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폐허 위에서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룬 경험과 기술이 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이상적인 남(南)-남(南) 협력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양국 간 협력을 위해서는 무연(無緣)보다 악연(惡緣)이 더 낫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 전 차관은 한자로 ‘송무백열(松茂栢悅·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 벗이 잘되면 기뻐함을 일컫는 말)’을 한자로 써 캉 차관보에게 건네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고 회고했다.

“아시아라는 숲속에서 소나무와 잣나무에 해당하는 두 나라가 울창하게 자라는 모습이야말로 정말 흐뭇한 그림이라고 이야기하자 캉 차관보는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며 동의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베트남 사람들은 한자를 알기에 송무백열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화답했고요.”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문제 등 ‘구한(舊恨)’이 국교 정상화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나요.

“캉 차관보를 비롯한 베트남 고위 인사들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하나같이 모범 답안을 이야기 하듯 담담히 ‘현명한 사람은 과거에 연연해서 미래를 위한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경제발전 모델을 벤치마킹해 자국(自國) 경제 발전에 응용하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주인공입니다. 그에 대한 베트남의 평가는 어땠나요.

“1996년 당시 김수한 국회의장이 베트남을 공식 순방했습니다. 당시 도 무오이 베트남공산당 서기장을 만났죠. 김 의장이 ‘전 세계 지도자 중 누구를 높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도 무오이 서기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한다’고 스스럼없이 대답했습니다. 김 의장이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한 장본인임에도 존경하느냐고 다시 묻자 도 무오이 서기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밤잠 설쳐가며 베트남전 파병을 고심했던 걸 알고 있다. 베트남전 파병과는 별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발도상국 국가지도자로서 수행한 역할은 존경한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국의 성공적 경제개발 모델이 국교 정상화의 계기가 된 것인가요.

“제가 주일대사관 참사관으로 도쿄(東京)에서 근무하던 1988년의 일입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주재 제3국 외교관들을 초청한 환영회가 있었습니다. 주일 베트남대사관 서기관이 참석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한국의 경제발전 성과에 대해서 물어보더군요. 당시 베트남 경제 사정이 어려웠습니다. 역사적 배경에 기인하죠.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에 강점당했는데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탈로 인해 200만 명이 아사(餓死)했습니다. 일본이 떠난 후엔 프랑스, 미국, 중국과 연달아 전쟁을 벌였고요. 경제 재건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수교 전 베트남 경제 관료들이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김 전 차관은 “한국, 베트남 간 과학기술 분야 협력 성과도 주목할 만하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수교 20주년이던 2012년 한·베 정상회담에서 당시 응우옌떤중 베트남 총리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벤치마킹한 연구소 설립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2014년 12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사업을 추진해 한·베 과학기술연구원(VKIST)을 설립했습니다. 7년간 총 7000만 달러 예산이 투입된, 단일로는 최대 규모 과학기술 공공개발원조(ODA) 사업이었습니다.”

韓의 노력으로 얻은 신뢰

수교 교섭 과정에서 경제 지원 등 대가 요구는 없었습니까.

“있었어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당시 베트남의 경제 상황은 어려웠습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었고요. 정주년 태국 대사와의 첫 수교 회담에서 베트남 정부 관계자는 베트남전쟁으로 막심한 피해를 본 베트남 중부 지역의 경제 재건 문제를 꺼내며 경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다만 한국 정부는 이를 수락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김 전 차관은 당시 베트남의 보상 요구로 난항을 겪었다고 술회하며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베트남 당·정 강경파들이 국내의 불만을 무마한다는 명분으로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또 다른 요인은 북한이었죠. 북한 측이 ‘혈맹관계’를 명분으로 한국과 수교하지 말 것을 베트남 측에 강력히 요구했어요.”

옛 소련과 수교할 때엔 차관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차관 15억 달러를 제공한 건 맞습니다. 이 때문에 1992년 8월 한중 수교 시에도 언론에서 ‘중국과 국교 정상화 대가로 경제원조 또는 차관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죠. 사실이 아닙니다. 1991년 12월 1차 수교 교섭 시 중국에 대가를 제공한 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베트남 측에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대신 한국이 시작하는 공공개발원조 첫 수혜국으로 베트남을 선정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베트남 정부 관계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한국의 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베트남은 한국의 첫 공적개발원조 대상국이 됐습니다. 약속을 지킨 거죠. 게다가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넘으면 공적개발원조에서 제외한다는 한국 외교부 지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對)베트남 지원을 강화했어요. 1992년부터 2016년까지 무상 4.2억 달러, 유상 12.1억 달러 등 총 16.4억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베트남에도 믿음을 줬죠. 베트남 중부 지역에 한국의 자금으로 유치원, 학교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했습니다.”

이후 수교 교섭은 어떠했나요. 북한의 방해 공작은 더 없었습니까.

“눈에 띄는 방해 공작은 없었어요. 1991년 1차 교섭 6개월 뒤인 1992년 3월 30일부터 하노이에서 2차 교섭이 재개됐습니다. 베트남 측은 전쟁 보상금이나 경제원조에서 ‘한국 측이 자율적으로 판단해 달라’며 한결 누그러든 태도를 보였습니다. 부코안 베트남 외교부 차관은 ‘6개월의 공백은 시간 낭비였다’라고도 했고요. 이때 ‘상호 연락대표부’ 설치를 합의했습니다. 대표부 기능과 역할을 정규 외교공관과 동일하게 하고 대표도 대사급 외교관으로 파견하기로 했죠. 1992년 4월 2일 ‘상호 연락대표부 설치 양해 각서’에 서명했고, 7월 11일에 하노이에 주베트남 대한민국 연락대표부가 설치됐습니다. 초대 대표(대사)론 수교 교섭 과정에 차석대표로 참여했던 박노수 전 오사카 총영사가 임명됐죠. 그리고 12월 22일 마침내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돼 서울과 하노이에 상호 대사관이 설치됐습니다.”

6월 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베 수교 30주년을 맞아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화상 통화하고 있다. [뉴스1]

6월 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베 수교 30주년을 맞아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화상 통화하고 있다. [뉴스1]

베트남 自强 의식 배워야

중국의 인접국으로서 독립을 지켜온 베트남은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평가받습니다. 베트남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이라 봅니까.

“베트남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중국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았음에도 ‘국익(國益)’이 침해받을 경우 전쟁도 불사하지 않았습니다.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자강(自强) 의식이 강하고 부당한 일에 굴종하지 않습니다. 한국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2012년 한국-베트남 수교 20주년을 기념한 동아일보 기고(寄稿)에 ‘두 나라는 역동성 있는 중견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썼습니다. 수교 30주년을 맞이한 감회가 어떻습니까.

“한국과 베트남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당시 개발도상국의 선두 주자였던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고,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지역 중견 국가로 발돋움했습니다. 한중 수교도, 한베 수교도 동서 냉전체제가 해체돼 가는 과정에서 한국이 능동적인 외교정책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개인적으론 제가 외교관으로서 힘써 일하던 시기에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뿌듯합니다. 국가를 위해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기쁘고요.”



신동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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