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서울청사 앞 어떤 1인 시위
무장 집단이 정부 조직으로부터 독립?
‘시민적 통제’는 위험천만한 발언
‘청와대 시대’서 한걸음 나아가는 길
박송희 전남 자치경찰정책과장(총경)이 6월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경찰청 중립성 보장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이는 박송희 개인의 의견이 아니다. 전국 17개 시·도 경찰 직장협의회(직협) 회장단의 입장이다. 6월 21일 행정안전부 자문위원회가 ‘경찰 관련 지원조직 신설’ ‘행안부 장관의 지휘규칙 제정’ 등을 골자로 한 권고안을 발표하고, 행안부가 그에 따라 행안부 내 경찰국 설립을 추진하자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격이다.
직협 회장단은 경찰국 신설이 “과거 독재시대 치안본부로의 회귀”라고 주장한다. “권력에 대한 경찰의 정치 예속화로 이어질 것”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으로 인해 경찰권이 비대해진 것이 문제라면 “정치적 권력이 통제할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며 “외부 민간인 단체로 구성된 국가경찰위원회와 경찰의 의견, 국민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해 추진해야 한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경찰이 행정안전부의 통제를 받는 것은 권력에의 종속이다, 반면 외부 민간인 단체로 구성된 국가경찰위원회가 국무총리 소속 독립적 합의체 행정기관으로 실체화돼야 민주적 통제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과연 합당할까. 전자가 아닌 후자의 길을 택해야 경찰의 ‘중립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런데 경찰의 ‘중립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말에서 뜻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창의적 해석조차 아닌 ‘왜곡’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6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제도개선 자문위원회 권고안 관련 행안부의 입장 및 향후계획을 밝히고 있다. 이 장관은 이날 행안부 내에 ‘경찰국’으로 불리는 경찰업무조직을 조속히 신설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직협 회장단 및 그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은 정부조직법 제34조 1항에서 정한 행정안전부장관의 업무 범위 안에 ‘치안’이 속해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은 행안부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억지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 치안이라는 업무 영역은 행안부가 직접 관할하지 않고, 대신 그것을 담당하는 경찰이라는 조직을 만드는데, 그 경찰이 행안부 장관 소속이라고 법에 명시돼 있다. 다른 뜻을 뽑아내는 것은 ‘창의적’ 해석조차 아니다. ‘왜곡’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을 다룬 정부조직법 제35조를 통해 우리는 직협 회장단이 주장하는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정부조직법 제35조 1항.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문화·예술·영상·광고·출판·간행물·체육·관광, 국정에 대한 홍보 및 정부발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3항. “문화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소속으로 문화재청을 둔다.”
문화재청장 혹은 문화재청 직원들이 어느 날, 제1항에서 문체부 장관의 사무에 ‘문화재’가 별도 표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화재가 문체부가 아닌 다른 부처의 관할이라고, 혹은 문화재청이 문체부 장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기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주장은 그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행안부와 경찰청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경찰청은 행안부 장관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조직이다. 정부조직법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총 14만 명이 넘는 인력을 거느린 무장 집단이다. 그런 조직이 정부 조직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법적으로 가능하지도, 가당치도 않다.
경찰청은 행안부의 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입법자의 그러한 의지는 정부조직법 제34조 6항과 후속법령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확인 가능하다. “경찰청의 조직·직무범위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 여기서 말하는 별도의 법률이란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명 경찰법이다.
직협 회장단은 국가경찰위원회의 위상을 높여야 하며, 해당 위원회를 통해 경찰은 ‘민주적 통제’의 대상이 돼야지, 정권의 직접적 영향권 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국가경찰위원회에 대한 사항은 어떻게 규정돼 있을까.
경찰법 제7조 1항을 살펴보자. “국가경찰행정에 관하여 제10조 제1항 각 호의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행정안전부에 국가경찰위원회를 둔다.” 직협 회장단이 언론과 시민사회를 향해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건, 행안부와 경찰청의 위계관계는 분명하다. 경찰청은 직제상으로 행안부 장관의 소속이며, 그 조직의 결정 사항 중 주요 내용은 국가경찰위원회가 담당하는데, 국가경찰위원회 역시 행정안전부에 속해 있다. 경찰은 행정안전부의 하위기관이며 그 어떤 이론의 여지도 없다.
국체를 이루는 핵심 요소
국회에서 만든 법에 따르면 경찰청은 행안부 장관의 소속 기관이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 체계의 일부로 작동해야 한다. 행정부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경찰이 수사한 내용은, 편제상으로는 행정부에 속하나 실질적으로는 사법부의 역할을 하는 검사에 의해 기소되고, 행정부와 독립돼 있는 사법부, 즉 법원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70년이 넘게 잘 작동하고 있거니와,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작동하는 법치국가의 기본 시스템이다.그렇다면 경찰의 ‘민주적 통제’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은 경찰이 민주적 통제를 안 받고 있는가. 자문위 권고에 따라 행안부에 경찰국을 설치하면 그것은 ‘민주적 통제’가 아닌 ‘국가 권력에의 종속’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 등 우리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국체(國體)를 이루는 핵심 요소를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찰권에 대한 통제의 방향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시민적 통제를 더욱 확장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경찰 직장협의회의 주장이다. 이는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가 모두 따르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소리다. 미국처럼 지방자치제가 잘 발달한 나라에서는 경찰이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에 속해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정부도 아닌 그저 ‘시민적 통제’만을 받는 경찰 조직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는 직접민주주의라던가 숙의민주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볼 수도 있는, 대단히 이상하고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우리가 현재 운영 중인 대의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이 이른바 ‘10년 주기론’을 깨고 불과 5년 만에 정권을 내준 데서 잘 드러나듯이, 또한 앞선 박근혜 정권은 5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탄핵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는 점이 시사하듯이, 책임 소재가 분명하고 선거를 통해 국민이 심판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선’ 혹은 ‘차악’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경찰 직장협의회가 주장하는 ‘시민적 통제’ 혹은 ‘민주적 통제’는 그렇지 않다. 국가경찰위원회가 “외부 민간인 단체”로 구성돼야 한다는 것이 요구 사항의 핵심 내용인데, 대체 그 “외부 민간인 단체”란 무엇인가? 누구인가? 어떤 이들로 구성되는가? 분명 그들은 우리 국민들이 선거로 뽑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경찰의 인사, 예산, 조직 등 중요 핵심 사안의 결정권을 ‘시민단체’의 손에 넘긴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리다. 그러한 방향의 변화에 ‘민주적 통제’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과연 적절한 일일까.
정체불명의 “외부 민간인 단체”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볼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그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은 적국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직장의 시설을 파괴하고 업무를 방해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소책자를 발행해 배포한 바 있다. ‘생활 공작’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돼 있는 사보타주 메뉴얼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며 문제를 위원회에 넘겨 최대한 오랫동안 논의하게 만들자. 이때 위원회에 들어가는 인원은 반드시 최소 다섯 명 이상으로 둬야 한다.”
경찰 조직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운영을 “외부 민간인 단체”로 이뤄진 ‘위원회’에 넘기는 ‘민주적 통제’는 매우 위험하다. 자칫하면 적국이나 제3국에 우리의 경찰 조직을 농락할 수 있는 고삐를 쥐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재벌이나 조폭 등 외부 이권 단체가 경찰 운영에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민 직접 참여’의 강조가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해치는 사례는 현실에서 흔히 벌어진다. 가령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재정 관련 사안은 반드시 주민투표를 거쳐야 하는데, 그 결과 시민의 이익이 반영되기는커녕 반대로 ‘주민 투표 기획사’(referendum consultancy)를 고용한 기업들의 요구만 관철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투표를 통해 집권한 중앙정부보다 정체불명의 “외부 민간인 단체”가 더욱 ‘민주적 통제’에 적합하다는 발상은 민주주의의 이론과 현실 모두에 맞지 않는다. 경찰에 대한 통제는 그 내용이 어찌 됐건 대의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시스템 내에서 작동해야지, 정체불명의 “외부 민간인 단체”와 ‘위원회’에 의탁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2024년이면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보 수집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다. 반면 경찰에는 지금도 3000여 명이 넘는 정보관(IO)이 활동 중이다. 오직 경찰만이 국내 정보를 수집하는 유일한 기관으로 남게 되는 셈이다. 경찰의 수사에 대한 검찰의 통제 기능은 현재도 크게 약화된 상태다. 경찰이 갖게 된 엄청난 권력에 대한 적절한 통제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민주적 통제’라는 이상한 개념
전국경찰직장협의회 관계자들이 6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찰의 중립성·독립성 확보와 민주적 통제 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권은희 국민의힘 의원의 축사를 듣고 있다. [뉴스1]
문제는 그러한 요구야말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경찰청장이 스스로를 장관급으로 높여달라는 것은 국정원과 검찰, 경찰 등 다양한 수사 권력 기구들을 민정수석이 통제하던 시절의 ‘자존심’을 채워 달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총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직접 목격한 것처럼, 청와대는 궁궐이요 밀실이다. 그런 곳에서 경찰청장을 민정수석이, 때로는 대통령과 함께 만나던 것이야말로 ‘민주적 통제’와는 정반대의 일 아니었던가.
행안부에 경찰국을 신설하는 것은 ‘청와대 시대’를 끝내고 용산에서 시민의 눈앞에 개방된 정부를 꾸리는 조용한 개혁의 일부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청와대라는 ‘대통령 한 사람 빼면 모두가 낙하산’인 조직에 의해 경찰이 움직이던 것에 비하면 분명히 한 발자국 나아간 것이다. 경찰 고위부는 ‘민주적 통제’라는 이상한 개념을 들이대며 반대를 위한 반대에 몰두하는 대신, 경찰 조직이 지금까지 저지른 온갖 과오를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며, 경찰 권력의 통제 방향에 대한 건설적 논의에 동참하는 것이 옳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