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질 사람이 책임 안 지면 몰락
광주 역대 최저 투표율은 유권자 부끄럽게 한 결과
윤석열 정부 실패만 기대는 야당
삼성이 알아서 하겠지?
“국민이 바라는 민주당은 지금의 민주당이 아닙니다.” 5월 18일 ‘복당신청 철회문’으로 파란을 일으킨 무소속 양향자 의원 [조영철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반도체산업의 안보·전략적 가치를 강조하며 법무부 장관, 법제처장 등 비경제부처 수장에게도 반도체 ‘열공’을 지시했다는 소식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 6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양향자 의원(무소속·광주 서구을)을 만났다.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패한 후 내홍을 겪는 더불어민주당이 4선의 우상호 전 원내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는 속보가 전해진 다음 날이기도 했다. 양 의원 개인적으로는 주말 동안 일본 도쿄로 날아가 34년째 부모님처럼 모시고 있는 하마다 박사 부부와 3년 만에 해후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줄기차게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패권국가를 주장해 온 그는 “정권이 바뀌자마자 대통령이 장차관들에게 반도체 공부하라고 한 것만으로도 내 소임은 다했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론 오로지 ‘윤석열 정부의 실패’에만 기대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제1야당의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혁신하지 않으면 국민만 불행해진다고 열변을 토하던 양 의원은, ‘한일 반도체산업의 가교’였던 하마다 시게타카(濱田成高) 박사가 올해로 98세, 부인이 96세인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그분들을 뵐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향자 씨가 됐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돼버린 당
정치 입문 7년차 양향자(55) 의원. 나이 오십 문턱에서 정치인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 계기는 이 한 마디였다.“상무님, 꿈 너머 꿈은 무엇입니까?”
삼성전자 최초의 고졸 출신 여성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민주당의 집요한 입당 권유에도 한사코 “정치는 제 길이 아니다”라며 거절했지만 문재인 당시 대표가 던진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이분은 내가 많은 것을 이뤘고 이제 그다음을 생각한다는 것을 아시는구나. 꿈을 이룬 나는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 내 책임은 무엇인가. 내가 이룬 꿈 뒤에 다시 꾸어야 할 꿈은 무엇인가.’
문 대표는 처음 만난 그에게 세 가지를 얘기했다. 호남, 여성, 일자리. 며칠 뒤인 2016년 1월 12일 그는 민주당사에서 입당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었다.
“저와 반도체가 함께 성장한 30년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생전 반도체 기술로 일본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로 기적을 만들어냈고, 자부심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제 기적 같은 변화와 성장이 제가 새로 몸담을 정치에서 벌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검수완박 꼼수 처리, 민주당 환부 드러내
민주당은 기적 같은 변화와 성장 대신 “괴물과 싸우다 자신도 괴물이 돼버린” “염치도 실력도 민주도 없는” 기이한 정당이 되고 말았다. 지난해 지역사무소 보좌진의 성범죄 의혹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탈당한 양 의원은, 2차 가해 의혹이 ‘무혐의’로 마무리된 후 복당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돌연 정치 생명을 건 소신 발언으로 민주당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민주당이 밀어붙인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에 대해 속도 조절을 요구하며 사실상 반대를 표명한 이른바 4·19 입장문에 이어, 5월 18일 복당 신청 철회문을 내며 쐐기를 박았다.“제가 입당한 민주당은 지금의 민주당이 아닙니다. 제가 돌아가려는 민주당은 지금의 민주당이 아닙니다. 국민이 바라는 민주당은 지금의 민주당이 아닙니다. 지금의 민주당에는 제가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2016년 문재인 당대표 영입인사, 2019년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 2021년 반도체기술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한 그가 왜 “제가 돌아갈 당은 이제 없다”라고 외쳐야 했을까.
양 의원의 정치 인생은 민주당의 검수완박 강행 처리를 반대한 4·19 입장문 발표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민주당 출신 무소속 의원으로 배신자라는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건가.
“입장문은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처럼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양심에 따라 국민만 보고 결단해 작성한 것이다. 국회의원으로서 당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국가 이익을 우선해 행동할 책임이 있다(대한민국 헌법 제46조 2항). 그저 복당이 목적이었다면 모른 척 침묵하는 것이 내 입신을 위해 옳은 선택이다. 그러나 개인의 정치적 미래보다 당과 국민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절차만 지켜진다면 법안에 대해서는 찬성하나.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검사의 확증편향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하고, 사법행정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내 신념이다.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할수록 대화와 타협을 통해 법안을 완성해야만 더욱 흔들림 없는 검찰개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와 검찰 수사권 박탈로 충돌하는 법안 정비 등 시급하게 처리할 과제들이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채 통과되면서 국민에게 끼치는 해악이 너무나 컸다. 무엇보다 ‘아동학대 처벌법’ ‘가정폭력범죄 처벌법’ ‘독점규제법’ ‘성폭력처벌법’ ‘5·18 진상규명법’ 등의 법안과 충돌이 우려된다. 이 법들은 범죄혐의의 고발·수사 요청을 검찰에 하도록 돼 있는데 검찰의 수사권이 사라짐에도 대체 수사기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애초 양 의원은 4월 19일 입장문 작성을 마무리한 뒤 며칠 뒤 열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에서 반대 의사를 밝힐 계획이었다. 법안이 안건조정위에 회부될 경우 최장 90일까지 논의할 수 있어 5월 9일로 끝나는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 처리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문안 검토 과정에서 입장문이 유출돼 양 의원의 반대 의사를 확인한 민주당이 즉각 대응에 나섰다. 민주당 소속 민형배 의원을 ‘위장 탈당’시켜 법사위에 보내는 편법으로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고 형사소송법·검찰청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4월 27일 새벽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기립 표결’이 진행될 때 양 의원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검찰 수사·기소 분리법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사법체계의 근간을 바꾸는 중대한 법안 처리를 절차적 문제를 안고 강행 처리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기권’한 것이다. 아무리 다수당이라 해도 자당 의원을 탈당시켜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하는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이 참담한 과정을 지켜보고 계실 국민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환부를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5월 18일 복당 신청 철회를 발표하면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돼버린 민주당은 지방선거에 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선에 패배한 당대표이자 ‘586 용퇴’를 외쳤던 586세대의 맏형이 사퇴한 지 20일 만에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패배한 대선후보가 한 달 만에 정계 복귀하고, 연고도 없는 지역에 출마하고, 보궐선거 후보가 지방선거 선대위원장을 맡는, 이런 기이한 모습에 박수를 칩니다. 지방선거 완패를 막으려면, 지금이라도 송영길·이재명 두 분은 사퇴해야 맞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2016년 1월 12일 더불어민주당의 ‘인재영입 7호’로 영입된 양향자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입당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입당 원서를 제출하고 있다. [뉴스1]
“입장문은 특정 계파나 개인에 대한 분노로 작성한 것이 아니다. 민주당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당의 반성과 재건을 위한 충정으로 쓴 ‘민주당에 대한 사모곡’이다. 강성 당원들의 목소리가 마치 민주당 전체 의견인 것처럼 포장되고, 이른바 좌표가 찍힐까 두려워 아무도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개탄스러운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지금 민주당에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가 만연해 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에 매몰돼 자기편 외에는 모두 배척하는 문화가 외연 확대를 가로막고 있다. 국가의 일을 진영 논리로만 다루다 보니 건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지금의 민주당에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민주당은 대통령선거에서 0.73%포인트(24만7077표)라는 간발의 차로 졌지만, 지방선거에서는 완패했다. 지방선거 전국 득표율은 국민의힘 53.1%, 민주당 43.3%다. 지지율 격차가 9.8%포인트(222만7187표)로 오히려 크게 벌어졌다.
“올림픽 육상경기를 보라. 100m에서는 0.001초로 메달 색깔이 바뀐다. 그럼에도 ‘졌지만 잘했으니까 나도 금메달 주세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엄청난 훈련과 투지로 다음 4년을 준비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간발의 차이로 졌으니까 다음엔 이기겠지’하며 바로 다른 대회에 출전한다면 거기서 모든 실패가 시작된다. 체육이든 예술이든 정치든 기본은 똑같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영역에서는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런데 대선후보로 뛰었던 사람, 그 선거를 관리했던 당대표가 둘 다 책임을 안 진다. 민주당 내에 두 부류가 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류와 특정인에게 그 책임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부류다. 그러면 책임은 누가 지나.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아무도 책임이 없다는 얘기랑 똑같다. 이재명 의원이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적이 있나. 26세 박지현 비대위원장이 패배를 책임지고 나간들 야당이 책임 정치를 한다고 국민들이 인식할까.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책임을 안 지면 그 조직은 무너진다.”
이재명 고문이 보궐선거에 당선해 굳건한 지지층을 입증한 것 아닌가.
“진영 논리에 매몰돼 국민이 아닌 지지층만 보는 당의 문화가 강화되면서 이재명 의원의 정치적 자산과 이미지가 희석되고 부정적인 면이 부각된다는 우려를 표현한 것이다. 이재명 의원은 민주당의 자산이다. 강성 지지층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 국가적, 국민적 자산으로 거듭나려면 이 의원 본인은 물론이고 당의 깊은 고민과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염치란 잘못 인정하는 것”
민주당의 텃밭인 광주가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고, 국민의힘은 27년 만에 광주시의원을 배출했다. 이를 두고 이낙연 전 총리는 “현재 민주당에 대한 정치적 탄핵”이라고 했다.“광주 투표율 37.7%는 역대로 낮았던 2002년 지방선거 투표율 42.3%보다도 낮았다. 대선 패배와 민주당의 정책 실패에 따른 광주시민들의 상실감과 실망감이 저조한 투표율로 나타났다. 특히 광주의 경우 공천 시스템이 아닌 특정인의 자기 사람 심기 공천이 이뤄졌다는 비판에 휩싸이며 혼란이 가중됐다. 광주시민들은 투표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에 대한 ‘외면 투표’로 철저하게 심판한 것이다. 한편 보수정당 후보가 유의미한 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한국 정치 역사상 의미 있는 사건이다. 민주당이 혁신과 노력 없이 호남 민심에 기대기만을 반복한다면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정리해 보자.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지금 민주당에는 세 가지가 없다. 염치, 실력, 민주. 염치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출마를 하면서 야당의 전략인 정권견제론은 대선불복론 또는 대선연장전의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지역일꾼론도 먹히지 않았다. 당 차원의 전략을 교란해 버린 것이다. 지지자들도 투표장에 왜 나가야 하는지 명분을 공유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대선 직후 선거라 야당의 패배가 자명했지만 예상보다 더 크게 패한 이유다.”
실력과 민주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당에서 실력 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에서 국민의힘보다 실력 있다고 꼽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나. 투표라는 행위는 나의 모든 것을 그 표에 담아 권력 이양을 해주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저 당 저 인물에 표를 주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자랑스럽지 않다, 내 권력을 이양해줄 만한 집단과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더 정의롭다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실력과 전문성 있는 사람 대신 목소리 큰 사람들이 당을 대표하는 형국이다. 이것이 강성 지지자들과 맞물려 당을 점점 고립시키고 있다. 민주당에 ‘민주’가 없다는 말은 민주적 시스템이 붕괴됐다는 것이다. 서울 국회의원 90%가 반대하는 데도 송영길이 서울시장에 출마했다. 당 전략공천위원회가 반대하는 데도 이재명이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많은 국민이 우려하는 법안을 172명 국회의원 전원이 발의했다. 대선 이후 ‘졌잘싸’로 일관하다 보니 민주당은 지지층만 지키면 지방선거에서 승산이 있다고 안이한 판단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당은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려 하기보다 빨리 언론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하는 데 급급하다. 이제라도 당의 민주적 시스템을 재건해야 한다.”
“6·1지방선거 결과가 당내 서로 다른 세력들의 갈등이 표출되는 계기가 될까 봐 걱정”이라고 했는데 실제 계파 갈등이 ‘수박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당내 분열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이제 선거 패배의 책임자를 색출하느라 정작 반성과 쇄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은 당이 당권 경쟁에 몰두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또 얼마나 실망할까. 이대로라면 민주당은 앞으로 더 패배할 것이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까지 전국 단위 선거에서 내리 4연패한 국민의힘이 최근 3연승을 달리는 비결은 뭔가.
“1년 전 국민의힘이 이준석을 당대표로 선출했을 때 (민주당) 패배의 전조를 느꼈다. 이준석이라는 개인의 역량을 차치하고 국민들 눈에 저 당은 새롭구나, 미래지향적이구나, 젊구나, 능력 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로 당명이 국민의힘으로 바뀌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이름까지 바꿀 각오로 혁신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정말 위기라고 생각한 순간은 윤석열과 안철수의 단일화였다. 윤 후보의 공정과 상식 어젠다와 안철수 후보의 과학과 미래가 합쳐져 공동정부로 나아가면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정부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 와중에 민주당은 계속 후퇴하고 있었다. 안철수 후보에 대해 ‘철새’ 타령만 하면서 그와 단일화하면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라고 오만한 생각을 했다.”
지금 민주당은 군대 같다
우상호 비대위원장을 주축으로 새로운 비대위가 꾸려졌는데 어떤 혁신을 기대하나.“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힘이 실리지 않으니 혁신을 이끄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우 위원장이 일성으로 강력한 야당으로서의 정체성과 유능한 민생정당을 꺼내 들었는데 민주당다움과 민주당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민주당의 정통 어젠다인 복지, 서민, 인권뿐만 아니라 경제, 과학기술, 청년, 마이너리티 정책에서 유능함을 보여야 한다. 그러려면 대대적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 미래 어젠다를 대표하고 상징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의 전면(지도부)에 나서야 한다. 지금 민주당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와도 같다. 그러다 보니 개개인의 역량이 보이질 않는다. 다른 목소리를 냈다가는 당론에 반하는 세작(적과 내통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단일대오에서 이탈했다가 공천도 못 받을까 봐 아무도 다른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다.”
양 의원은 민주당이 연패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도부가 국민의힘보다 더 큰 혁신을 이뤄내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이를 위해 혁신지도부를 넘어 재창당지도부가 필요하고 강조했다.
“승자가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혁신이다. 대한민국 반도체는 승리할 때마다 거기서 더 잔인한 혁신을 해냈다.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30년간 1등을 할 수 있었다. 혁신당하는 것은 몰락하는 길이다. 민주당은 이름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 인적 쇄신, 노선 쇄신, 정책 쇄신 등 재창당 수준의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국민의힘을 이길 수 없다. 그동안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에 기대어 선거를 치렀다. 이제 그 구심점도 사라졌다. 똥볼 차는 야당 덕도 많이 봤다. 하지만 지금의 국민의힘은 예전의 국민의힘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민주당이 성공하는 길은 윤석열 정부의 실패에 기대는 것밖에 없다.”
“반도체가 뭔가요?” “미래지”
삼성전자 시절 ‘설계팀은 성장판이다’라고 쓴 칠판을 들고 있다. [양향자 의원실]
1986년 삼성반도체통신에 갓 입사한 연구보조원 양향자가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온 하늘 같은 선배(임형규 삼성전자신사업팀장·사장)에게 물었다. “반도체가 뭔가요?” “미래지!”
복사하고 커피 타던 신입사원 양향자는 반도체에서 미래를 보았다.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회의 준비를 위해 다른 부서에 가서 반도체 도면이나 일본어 책 번역본을 받아오는 일을 하다 문득 미국 박사 출신 대선배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일본 자료의 내용이 궁금했다. 마침 사원 대상 일본어 강좌가 열려 신청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대졸 기술 업무 사원들을 위한 강좌로 고졸 사무보조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두 번, 세 번 줄기차게 신청서를 내니 교육담당 부서도 난감했는지 허락했지만 “고졸이 왜?”라는 수군거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석 달 만에 일본어 자격증을 따고 선배 연구원들에게 일본 서적을 번역해 나눠주자 ‘미스 양’은 ‘양향자 씨’가 됐다.
이제 회의 준비가 아니라 회의에 참여하게 됐지만 기초가 없으니 회의 내용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앉아서 받아 적고 매일 자료를 번역해 배달해 주는 그가 안타까웠는지 어느 날 연구원 선배들이 근무가 끝난 뒤 돌아가면서 반도체와 전자공학의 기초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양향자만을 위한 커리큘럼도 짜줬다. “연구원이 돼서 반도체를 만들고 싶어.” 그러려면 배워야 했다.
1989년 삼성이 반도체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사내대학을 열었다. 양향자는 반도체공학과에 원서를 냈지만 곧장 반려됐다. “고졸 보조원이 무슨 사내대학을. 그것도 여자가.” 해가 바뀌자 또 원서를 냈고 반려됐다. “전례가 없다.” 그렇게 세 번 만에 입학에 성공했다. 사내대학에서 수학 때문에 코피를 쏟으며 공부할 때에는 서울대 수학과 출신 부장(박상식 세종대 수학과 교수)이 과외지도를 해줬다. 나중에는 물리, 화학까지 새벽에 부장 방에서 예습하고 저녁에 사내대학 강의를 듣고 다음 날 점심 때 강의 내용을 복습하는 식으로 공부했다. 사내대학을 졸업하고 드디어 반도체연구실 선임연구원이 됐다. 그러곤 2013년 12월 5일 입사 28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2021년 4월 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양향자 의원이 홍남기 당시 경제부총리에게 물었다.
“반도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대한민국의 전략산업이자 모든 산업의 기초 인프라입니다.”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반도체는 대한민국의 미래다. 그러나 반도체에 담긴 무한의 가능성과 극한의 위험성을 양향자만큼 경험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리 반도체가 위기라고 외쳐도 “삼성이 반도체 세계 1위 아냐?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라는 낙관과 무지가 만연해 있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 나선 기업과 기업인은 애간장이 녹는데 정치인들은 ‘정치적 승리’만 바라본다. 양 의원은 그날 대정부질문에서 세 가지를 확인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최우선 육성 분야임에도 반도체산업에 대한 정부의 컨트롤타워가 명확하지 않고, 지원·육성 정책은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으며, 인재 양성 시스템은 나날이 후퇴하고 있다. 이것을 총체적 난국이라고 한다.
반도체와 관련한 상황의 심각성을 역설하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간 대정부질문은 물거품이 됐다. 4·7보궐선거에서 승리한 국민의힘이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자 이를 지켜보던 국회부의장이 “신났네, 신났어”라며 혼잣말을 한 것이 발단이 돼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 퇴장으로 이어졌다. 그날 양 의원은 잠들기 전까지 못다 한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반도체가 없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습니다.”
일본의 정밀 타격에 강경 대응 주문하다
제2의 아버지인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양향자 의원. 코로나 여파로 3년 만에 상봉했다. [양향자 의원실]
“오늘 일본 정부는 반도체 필수 소재 3개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규제 대상은 포토레지스트와 에칭 가스, 그리고 OLED 디스플레이에 필요한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입니다.”
그때부터 양향자의 전화가 불이 났다.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무슨 의미인지 묻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에게 현황을 파악한 후, 양 원장은 일본의 조치가 한국의 첨단 반도체산업의 질주를 저지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임을 알아차렸다. 일본이 규제한 세 가지 품목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소재였고, 특히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생산의 주요 공정인 노광 공정의 핵심 소재였다. 한국 반도체에 대한 일본의 정밀 타격이었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이후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은 우왕좌왕했다. “일본이 배제한다는 반도체 소재라는 게 뭔가?” “그게 없으면 반도체를 못 만드는 건가?” “일본에서 수출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얼른 만들면 되지 않나?” “왜 우리는 반도체 강국이라면서 그런 것도 사전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나?” 그사이 일본은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양 원장은 반도체 전쟁 상황을 알리기 위해 중앙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중앙일보 7월 10일자에 ‘일본, 한국이 비메모리 패권까지 잡을까 봐 정밀 타격’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바로 민주당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를 만들 테니 반도체 전문가로 참여하라는 당의 소환이었다.
당으로 돌아가기 전 그는 먼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일본 반도체의 거장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 하마다 박사는 1970년대 고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기획할 단계부터 기술이전을 위해 특별히 초청한 인사였다. 삼성반도체통신 시절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러 온 하마다 박사 부부의 통역 겸 안내를 맡은 것이 인연이 돼 30년 넘게 부녀지간이자 사제 관계로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하마다 박사는 “반도체는 최고의 소재를 만드는 일본, 최고의 생산 능력과 기술을 갖춘 한국, 가장 많이 설계하고 소비하는 미국이 함께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반도체 글로벌 분업 체계를 깨는 것은 인류 발전에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다”라며 A4 용지 두 장에 자신의 생각을 빼곡히 적어 건넸다. 그러면서 “한일의 아픈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일본이 반도체 소재 규제로 대한민국 기술 패권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때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내로라하는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을 만나고 일본을 오가며 기업 주재원에게 의견을 들어 내린 결론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강경하게 대응하십시오.”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의 위상을 생각하면 일본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 일본이 소재 공급을 막겠다면 우리는 D램 공급을 차단하면 된다. 피해는 일본이 더 크니 겁먹을 것 없다. 강하게 나가야 한다. 잠시 피해가 있겠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 소재를 국산화하고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
반도체로 시작해 반도체로 죽을래?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반도체에 목숨 걸라”고 지시했다.“대한민국이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를 넘어 퍼스트무버(first follower)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대한민국이 선도국가로 가기 위한 산업이 딱 하나 있다. 반도체다. 30년째 1등을 해온 성공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 와보니 반도체의 성공을 배우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성공의 역사, 성공의 DNA를 궁금해하는 사람조차 없다. 그냥 반도체는 전문 영역이고 기술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반도체 선도국 대한민국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생각에 입만 열면 반도체 얘기를 해왔다. ‘과학기술패권국가’를 쓴 이유도 우리의 미래는 과학기술에 답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경제5단체와 ‘과학기술패권국가 국회대토론회’를 공동 개최하면서, 여야 대선후보들에게 과학기술 관련 정책·공약 질의서를 전달했다. 이후 윤 대통령이 과학기술정책과 반도체산업 육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유일한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새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규제 개혁과 세제 혜택을 늘려야 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특별법 제정 시 업계는 25~50%까지 시설투자 세제 혜택을 요구했으나 최대 20% 그쳤다. 최근 언론에 ‘민관공동투자 반도체 고급인력양성사업’ 예산이 40% 삭감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렇게 되면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 목표를 3500명에서 2100명으로 하향 조정해야 하고, 반도체 R&D 역시 대폭 감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저히 반도체 업계가 필요로 하는 인력 수요를 따라갈 수 없다. 과학기술패권국가 도약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자 안보의 문제다.”
양 의원이 추진 중인는 ‘K-디아스포라 프로젝트’를 설명해 달라.
이스라엘의 생득권(Birthright Israel·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살 권리가 있다)을 벤치마킹해서 K-디아스포라 청소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 790만 명 중 24세 이하 청소년이 200만 명이다. 이들에게 정체성, 문화, 역사, 과학 교육을 시켜서 한민족 발전에 기여할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비정파, 비이념, 비종교, 비영리, 범세계적 프로젝트다.”
무소속 양향자 의원의 지역구는 광주 서구을이다.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거의 보장되는 곳이다. 벌써부터 ‘검수완박’을 찬성한 광주 출신 의원들이 이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양 의원에게 왜 정치 생명을 건 소신 발언을 해야만 했는지 물었다.
“아무도 안 하니까 저라도. 그로 인해 가슴 아픈 일은 최근 6년간 나와 함께 정치를 해온 분들이 이번 지방선거 공천에서 다 탈락했다는 거다. 내 소신 때문에 그분들에게 너무나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럴수록 더 혁신적이고, 민주당의 자산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산이 돼야겠다는 각오로 일한다. 비록 무소속이지만 남은 임기 동안 지역민들을 위한 의정 활동에 집중할 생각이다. 다행히 지역 유권자 중에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양 의원이야’라며 응원해 주는 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