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치형을 이룬 몸
첫인상, 열정적이고도 명랑한 선수
장대에 대고 “나 막으면 안 된다?”
부상 이후 찾아온 슬럼프 2년
“야, 너 그냥 우리나라 1등만 할래?”
우상혁이 5월 14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2022 세계육상연맹(IAAF) 다이아몬드리그 개막전 남자 높이뛰기에서 2m33㎝을 넘어 우승했다. [신화 뉴시스]
우상혁은 한 바퀴를 굴러 매트에 바로 섰다. 그러곤 하늘을 향해 검지를 내지르며 관객들의 환호에 호응했다. “그가 왜 이번 시즌 실내 대회 랭킹 1위인지 보여줬습니다.” 외국 해설자가 감상을 전했다. 우상혁은 매트에서 내려와 트랙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는 관객들을 오른쪽에 두고, 그는 두 팔을 흔들며 마치 춤을 추듯 발을 종종대며 경기장을 돌았다. 이날 베오그라드에서는 아무도 우상혁의 기록을 깨지 못했다. 세계실내육상선수권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딴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우상혁은 또 역사를 썼다. 그는 5월 14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2022 세계육상연맹(IAAF) 다이아몬드리그 개막전 남자 높이뛰기에서도 우승했다. 기록은 2m33㎝.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무타즈 에사 바심을 눌렀다. 다이아몬드리그는 세계 특급 선수만 초청받아 육상계의 ‘메이저리그’로 불린다. 우상혁은 명실상부하게 2022 시즌 최고의 ‘점퍼’다.
국가대표 형들 위협하는 맹랑한 막내
육상이 하고 싶었던 초등학생 우상혁은 달리기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택견은 잘했다. 택견에서 연마한 유연성과 두 발을 차례로 빠르게 구르는 동작은 높이뛰기 종목에 유리하다. 그래서 당시 대전 중리초등학교 육상부 윤종형 감독(65·현 대전광역시육상연맹 실무국장)은 그에게 높이뛰기를 권유했다.어린 시절의 우상혁을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키가 높이뛰기 선수로 활약하기에는 작아 보였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의 오른발은 어릴 적 사고로 인해 왼발보다 10㎜가량 짧았다. 하지만 우상혁은 자신만의 장점을 하나씩 찾아나갔다.
윤종형 감독은 고등학교 시절 우상혁에게 어떤 대회에 나가든 그 경기장의 주도권을 가져오라고 조언했다.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최고의 실력도 나온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우상혁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관객들에게 박수를 치며 호응을 유도하는 습관을 들였고, 이는 그의 전매특허가 됐다. 그해 우상혁은 세계청소년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다음 해부터는 국가대표 형들의 1위를 위협하는 맹랑한 막내가 됐다.
환경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목표를 이루려는 우상혁의 의지는 해외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났다. 시차 적응은 해외 경기의 큰 변수 중 하나다. 한국과 시차가 12시간인 나라에서 오전 10시에 열리는 대회 일정이 잡히면, 우상혁은 출국 한 달 전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 10시에 경기장에 나가 훈련했다.
높이뛰기에 임할 때 항상 낙천적인 모습 역시 우상혁의 장점이다. 서천군청 육상팀 이상동(61) 감독은 2014년 우상혁을 처음 만났다. 그는 우상혁의 첫인상은 열정적이고 명랑했다고 했다. 우상혁은 훈련 도중 갑자기 장대에 대고 “야, 나 이제 뛸 건데 너 나 막으면 안 된다?”라고 중얼거리는 선수였다. 그것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그만의 비결이었다.
허리 이어 종아리 부상까지
우상혁이 5월 19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카타르에서 귀국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오랜만에 만나서 키 좀 컸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걱정하지 말라더라.”
성인이 된 이후 우상혁은 예상치 못한 부상과 체중 관리의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를 늘 지지해 주던 가족 곁을 떠나 홀로 운동을 계속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를 다녀온 후 허리를 다친 데 이어, 2019년에는 종아리 부상까지 얻었다. 몸은 점차 회복됐지만, 우상혁은 그 후로 약 2년 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그는 지난해 초 군 입대를 결심했다. 몸이 조금이라도 좋을 때 군대를 다녀오겠다는 심산이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도 기량이 회복되지 않으면 은퇴할 생각도 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그의 결정을 믿고 따라줬던 아버지 우경원(61) 씨는 이번에도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육상이 하고 싶다는 어린 아들의 말에 대전 교육청까지 가서 육상부가 있는 초등학교를 수소문한 것도 우경원 씨였다.
전화위복이었을까. 군대의 통제된 생활은 오히려 운동에 집중하기에 최적의 환경이 됐다. 우상혁은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영내에서 60㎏ 후반대까지 체중을 감량했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크고 작은 대회가 연이어 있는 바람에 지인은 물론 가족과의 연락도 뜸해졌다. “군인이라서 그런지, 최근에는 저와 만나기는커녕 연락한 지도 꽤 됐습니다.” 아버지 우경원 씨가 말했다. “그래도 가장 힘든 건 본인일 테니,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멀리서 지켜만 봐야지요.”
우상혁에게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높이뛰기는 늘 삶의 현장이자 다음 목적지였다. “야, 너 2m35㎝ 한 번 뛰고 죽을래 아니면 그거 못 뛰고 그냥 우리나라 1등만 할래?”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던 우상혁에게 윤종형 감독이 묻자 그는 “죽어야죠”라고 답했다. 그는 도쿄에서 2m35㎝를 뛰고 한국신기록을 경신했다. 이진택이 1997년 세운 한국기록(2m34㎝)을 24년 만에 1㎝ 더 올려놨다. 그렇게 그는 한국 육상 트랙&필드에서 올림픽 최고 성적(4위)을 거뒀다.
지금도 그는 다음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실외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그의 다음 목표다.
오랜 롤 모델에게 받은 메달
우상혁이 2021년 8월 1일 일본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육상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경기를 마친 뒤 경례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현재까지 높이뛰기에서 50㎝ 클럽(자신의 키보다 50㎝ 이상 높은 기록을 보유한 선수)에 등록된 선수는 세계에서 50명뿐이다. 한국인은 한 명도 없다. 우상혁은 2m38㎝를 뛰고 한국인 최초로 50클럽에 가입하겠다는 목표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아이디도 ‘woo_238’로 지었다.
비주류 종목에서 우상혁과 같은 뛰어난 선수의 등장은 늘 반갑다. 특히 해당 종목에서 지금도 꿈을 키워가고 있는 유망주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 같은 회장이 직접 가는 것보다, 우상혁 선수와 같은 운사모 졸업생들이 직접 찾아와 격려해 줄 때 장학생들도 제일 좋아하고, 저도 가장 기쁩니다.”
이건표 운사모 회장이 말했다. 그러나 한 선수의 영향력만으로 그 종목을 주류 궤도에 올려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상동 감독은 “우상혁 선수 덕분에 육상 인기가 높아진 것은 맞지만, 여전히 예산 지원이 열악하고 선수층도 얇아서 그와 같은 선수가 또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스포츠는 대중의 관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야다. 이 중에서도 육상은 다른 운동의 밑바탕이 되는 기초 종목 중 하나다. 전국적인 육상 대회가 있는 날이면 타 종목 코치나 스카우터들이 경기장에 찾아와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윤종형 감독은 “이런 육상을 무시한다는 것은 뿌리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야구계-육상계 대립
김지연(18·대전 신일여고) 양은 여자 높이뛰기 유망주다. 올해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대학부 1등과 같은 기록으로 고등부 우승을 거머쥐었다. 한밭종합운동장은 대전에서 체계적 육상 훈련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지만, 대전시 신축 야구장 부지로 선정돼 상반기 중 철거될 예정이다. 이대로 철거가 진행되면 김지연 양은 오전에 학교에서 정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1시간여 떨어진 충남대까지 가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한밭종합운동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서남부 종합스포츠타운의 완공은 2027년으로 계획돼 있다. 그 이전까지는 충청 지역 내 대학교나 체육 단지에 조성된 훈련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서둘러 야구장 신축 공약을 이행하라는 야구계의 목소리와 대안 없는 철거를 반대하는 육상계의 목소리가 지금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인기 종목에 밀려 제대로 된 연습 공간조차 확보하기 힘든 비주류 종목에서 우상혁의 등장은 그저 ‘기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