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호

‘판도라 상자’ 엡스타인 파일 유출, 시민사회 기대 짓밟은 사건

[노정태의 뷰파인더] 빌 게이츠, 노엄 촘스키… 억만장자 ‘포주’의 막장 ‘파티’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jeongtaeroh@ries.or.kr

    입력2026-03-05 0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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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엡스타인은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출신 억만장자

    • 유명 인사·권력층에 미성년자 성적 착취 제공

    • 미국 법무부 보관 자료 1월 30일 대중에 공개

    • 법·상식·도덕에 대한 시민사회 기대 짓밟은 사건

    • ‘초엘리트’들이 세상 휘두른다는 ‘위험한 인식’

    “너와 친구가 되는 데 있어 최악의 부분은 네 삶이 너무도 엽기적인데 난 그걸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다는 거야.”

    2015년 6월, 미국의 유명 의사 피터 아티아가 보낸 e메일의 한 문장이다. 장수와 예방의학을 결합한 ‘저속 노화’ 담론으로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고 수백만 명이 듣는 팟캐스트를 운영하던 아티아에겐 차마 남한테 말할 수 없는 ‘비밀 친구’가 있었다.

    그의 정체는 제프리 엡스타인.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출신의 억만장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매진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다양한 유명 인사에게 연락하고 만나서 안면을 트고, 친해졌다 싶으면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개인 섬에 초대해 파티를 벌이는 것.

    과연 그 ‘파티’는 무엇이었을까. 권력자들을 위한 성적 향응이었다. 접대부로 동원된 여성 중 상당수는 미성년자. 엡스타인은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적 착취를 미국·유럽의 유명 인사와 권력층에 제공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왔다. 현대사회의 기준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아니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를 놓고 봐도 사회적 존중을 기대할 수 없는 ‘포주’ 역할을 해온 것이다.

    엡스타인이 그런 일을 해온 것은 애초에 비밀조차 아니었다. 그는 이미 2008년에 미성년자 성매매 등 혐의로 재판을 받은 바 있다. 그때는 유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거래해 가벼운 처벌만 받고 형량을 다 채우지 않은 채 출소했다. 그리고 다시 같은 활동을 반복하다 2019년 수감됐는데, 감옥에서 ‘우연히’ CCTV가 꺼져 있던 시점에 자살로 보이는 흔적과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됐다.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출신의 억만장자이자 미성년자 성착취범으로 복역 중 사망한 제프리 엡스타인. 위키피디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출신의 억만장자이자 미성년자 성착취범으로 복역 중 사망한 제프리 엡스타인. 위키피디아

    그는 미성년자 성착취라는 엽기적 범죄를 수십 년간 저지르면서 자신의 범행을 꼼꼼히 기록했다. 수많은 권력자 및 유명 인사와 e메일을 주고받았고, 자신이 불러낸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쌓인 자료를 미국 법무부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시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에 의해 지난 1월 30일부터 대중에 공개됐다. 이른바 ‘엡스타인 파일’이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다.

    2월 중순 현재 한국에선 엡스타인 파일에 대한 대중적 반응이 크지 않은 듯하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로 여기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반면 미국과 서구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몇몇 부유층과 권력자가 얽힌 성범죄와 추문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반의 인식을 뒤흔드는 ‘결정적 사건’이 돼가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유명 인사들 친구로 행세

    엡스타인이 수십 년에 걸쳐 해온 행적을 되짚어 보자. 미성년자를 동원한 성매매 알선, 즉 성적 착취를 벌여왔다. 유명 인사를 미끼로 또 다른 유명 인사를 끌어들이고,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법적 처벌을 각오해야 할 성범죄에 가담하게 만들면서 엡스타인의 ‘허니 트랩(honey trap)’은 한없이 깊어져 갔다.

    성매매와 성착취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 것, 속된 말로 포주 노릇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타인에게 존중받을 일이 못 된다. 하지만 엡스타인은 그런 행동을 수십 년에 걸쳐 해왔다. 감옥을 갔다 온 이후에도 계속했다. 대체 왜일까?

    미국 법무부는 1월 30일(현지 시간)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인 앤드루 전 왕자가 바닥에 누워 있는 여성의 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AP뉴시스

    미국 법무부는 1월 30일(현지 시간)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인 앤드루 전 왕자가 바닥에 누워 있는 여성의 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AP뉴시스

    일각에선 그가 이스라엘, 러시아 혹은 여러 나라의 정보기관에 소속돼 있거나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엡스타인의 ‘친구’ 명단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을 한 번쯤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트럼프 현 대통령 등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거나 있는 사람들에게 부적절한 쾌락을 제공하고 그 증거를 남겨둘 수 있다면 언제든 협상 혹은 협박의 카드로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확인된 명단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엡스타인과의 친분이 확인됐고, 엡스타인이 제공한 문란한 생활을 즐기다 성병에 걸린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는 상태다. 주미 영국 대사를 지낸 영국 노동당의 거물 정치인 피터 맨덜슨은 속옷 차림 여성 옆에 자신도 바지를 입지 않은 차림으로 서 있는 사진이 공개됐고, 엡스타인으로부터 수만 달러를 송금받은 기록도 확인됐다. 그는 노동당을 탈당하고 상원의원직도 사임한 상태다. 찰스 3세 국왕의 동생인 앤드루 전 영국 왕자는 바닥에 누워 있는, 미성년자처럼 보이는 여성의 배에 손을 대고 있는 사진이 공개됐다.

    엡스타인은 지식과 학식을 지닌 이들에게도 손길을 뻗쳤다. 글 서두에 언급한 유명 의사 피터 아티아도 그렇지만,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대표하는, 미국 경제학계의 핵심 인물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도 엡스타인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엡스타인은 대학을 중퇴한 본인의 학력 콤플렉스를 해소하기라도 한 듯, 유명 학자들을 대거 초대해 ‘파티’를 벌였다.

    그중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이름이 몇몇 등장한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그 유명한 휠체어에 탄 모습으로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사진이 엡스타인 파일에 포함돼 있다. 언어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천재, 그리고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경하게 비판해 온 ‘양심적 지식인’ 노엄 촘스키 또한 등장해 많은 이에게 큰 충격을 안기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미국 각 대학에선 ‘우리 대학 교수’를 찾아보기 위해 엡스타인 파일을 검색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질 지경이다.

    엡스타인 파일은 단순히 권력층의 성적 일탈과 부패로만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다. 파일이 공개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가 재가공되면서 미국과 서구 시민사회는 돌이키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 법과 질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무너지고, 합리적 의심과 음모론의 구분이 흐려지면서 정당과 정파를 넘어 진실과 정의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최소 34명의 미성년자가 잠재적 피해자

    서구권, 특히 미국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문화다. 스스로 책임을 진다면 개인이 어떤 삶을 살건, 어떤 성적 행위에서 쾌락을 느끼건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섹스 테이프를 찍었고 유출되기까지 했던 힐튼 호텔 가문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오히려 더 유명한 셀러브리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성적 자유와 사생활 존중에는 한 가지 절대 넘으면 안 되는 금기가 있다. 미성년자 보호가 그것이다. 성인이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적 행위를 하는 것, 심지어 그런 욕망을 품거나 드러내는 것조차 철저히 금기시한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구글, 애플, 아마존 등이 제공하는 클라우드 서비스에 아동 성착취물로 보일 수 있는 사진을 업로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계정이 정지되고 수사기관에 신고당할 수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가 마땅히 제공해야 할 사생활 보호보다 미성년자를 성적 착취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더욱 상위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다.

    엡스타인과 ‘친구’들은 그 상식을, 사회적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다. 숫제 대놓고 우롱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주고받은 e메일의 행간에서 묻어나는 뉘앙스를 보면 그렇다. 엡스타인 파일에 거론된 모든 이들이 다 미성년자 성착취에 동참한 건 아니지만, 그들 중 일부는 분명히 그랬고, 자신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엡스타인이 2007년 4월 25일 자신에게 보낸 ‘기밀·특권 사항(priveledged and confidentail)’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살펴보자. 그는 FBI와 수사기관의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겪는 난관에 대해 적었다. “내가 보기에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18세 이상인 소녀들만을 (재판 대상으로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결과는 그렇게 반영되지 않았다.…FBI는 16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녀들과 접촉했거나, 혹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이를 외삽해 보면 (증언이 확보된) 그 연령대 소녀가 20명은 된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엡스타인은 “그들 모두가 상반신을 노출한 마사지에 대해 증언할 것이고, 그건 나쁜 소식이다”라고 덧붙였다.

    그해 말 FBI는 수사 내용에 대한 내부 e메일을 작성했고, 그 e메일은 2015년 봉인 해제돼 대중에 공개됐다. FBI는 엡스타인의 잠재적 피해자로 최소 34명의 미성년자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그들만의 은밀한 ‘파티’

    엡스타인의 범죄 행각은 ‘내로남불’이라는 말로 풍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중 잣대’ 같은 표현도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법은 평범한 자들이 지키는 것이며 도덕은 일반인을 다스리기 위한 것일 뿐, 나처럼 ‘특별한 사람’은 그런 것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호주의 비판적 지식인인 클라이브 해밀턴과 마이라 해밀턴은 2024년 ‘특권계급론’이라는 책을 펴냈다. 미국·영국 등 ‘중심부’에서 한발 벗어난 덕분인지 해밀턴 부부는 냉철한 눈으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권계급’들의 일탈을 직시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철학자 대니얼 데닛, 하버드대의 수학생물학자 마틴 노왁, 하버드대 법학교수 앨런 더쇼위츠, 하버드대 총장 래리 서머스 등”, 이름만 들어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 시대 대표적 지식인들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성년자 성착취범과 어울리고 있었다. 

    ‘특권계급론’의 한 문단을 읽어본다. “이 인사들로서는 유감스럽게도, 그들에게 넉넉한 은전을 베푼 억만장자는 바로 제프리 엡스타인이었고, 그가 사람들을 태우고 돌아다닌 제트기는 악명 높은 ‘롤리타 익스프레스’였다. 데이비드 월리스-웰스는 이 기묘한 집단에 관해 논평하면서 백인 남성 지식인들이 ‘자신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식’에 취해 있다고 썼다. ‘그들은 특별한 찬사는 물론 특별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에 대한 신뢰의 붕괴

    엡스타인 파일은 법과 상식, 도덕에 대한 시민사회의 기대를 철저히 짓밟았다. 이는 단지 트럼프와 클린턴이 서로의 추잡한 ‘아랫도리 사정’을 두고 벌이는 정치적 싸움이 아니다.

    엡스타인 파일은 방대하다. e메일만 350만여 통에 영상은 2000편, 사진은 18만 장이 넘는다. 큐아논 등 극우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던 음모론이 새삼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그 속에 자신들이 관심을 갖는 키워드를 집어넣고 결과가 나올 때마다 “역시 우리가 맞았어”라고 함성을 지른다. 물론 그들은 트럼프의 책사로 잘 알려진 스티브 배넌이 엡스타인 파일에서 수없이 거론된다는 불편한 진실은 애써 외면하거나 합리화하고 있다.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에 대한 신뢰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 터지자 음모론의 씨앗이 우후죽순처럼 싹을 틔워 자라나고 있다.

    엡스타인 사건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단할 순 없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권력형 성범죄와 부패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에 대한 신뢰의 붕괴이기도 하다는 점 말이다. 법과 도덕을 사유화한 ‘초엘리트’가 세상을 자신들의 뜻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 사회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 사건을 강 건너 불처럼 여길 수만은 없는 이유다. 엡스타인 파일이라는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열렸지만, 그래도 희망만은 잃지 않을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노정태
    ●1983년 출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역서 : ‘칩 워’ ‘인간의 본질’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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