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문제 아닌 ‘압축성장’의 필연적 결과물
수치로 정량화된 행복의 기준과 질적 빈곤
수익률 오르면 오를수록 도파민의 노예 된다
‘포모 증후군’은 집단주의 문화의 어두운 단면
돈 너머의 가치,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
스스로에게 내리는 ‘자기 자비’ 처방전 필요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오천피·천스닥’ 시대 우리 사회가 집단적 도파민 중독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조영철 기자
2월 5일,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를 ‘신동아’ 인터뷰룸에서 만났다. 발달심리학 권위자이자 사회심리학적 통찰로 한국 사회의 집단무의식을 날카롭게 분석해 온 김 명예교수는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석좌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그는 본인이 직접 겪은 ‘은(銀) ETF’ 투자 실패담을 털어놓으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엔 유례없는 이 시대 주식투자 열풍에 깃든 병리 현상에 대한 뼈아픈 진단이 서려 있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집단적 도파민 중독 상태
요즘 주식시장을 접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사실 난 주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평생 국립대 교수 하면서 돈 버는 데 둔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장 상황을 안 볼 수 없더라. 며칠 전엔 나도 모르게 은 ETF를 좀 샀다. 금 ETF는 비싸니까. 주위에서 안전자산이라고 하도 떠드니 ‘한번 사볼까’ 싶었던 거지. 그런데 세상에! 내가 산 바로 그다음 거래일에 가격제한폭인 29.8%까지 폭락하더라(웃음).”
심리학 전문가인데 투자 분위기에 휩쓸렸다니 다소 의외다. 하한가 맞았을 때 심경은?
“완전 ‘멘붕(멘털 붕괴)’ 상태였다. 투자 액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내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상황에서도 ‘내일은 오르겠지’ 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계속 들여다본 거다. 나 같은 사람도 이럴진대, 전 재산을 걸거나 빚까지 내서 주식투자에 뛰어드는 이들의 심정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집단적인 도파민 중독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천피·천스닥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현 심리 상태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투기의 민족’. 흔히 ‘배달의 민족’이라 자부하지만, 심리학적 기저를 들여다보면 한국인은 투기 성향이 대단히 강한 민족이다. 이건 DNA 문제라기보다 우리가 겪어온 역사적 특수성, 즉 ‘압축성장’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코스피가 종가 기준 사상 처음으로 5000선을 돌파한 1월 27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축하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동아DB
‘한탕주의’와 ‘포모 증후군’이 결합된 결과
경제발전을 이룬 것이 왜 투기 심리로 연결되는 건가.“생각해 보라. 세계 경제사에서 최단기간에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가 한국이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무역 규모 1조 달러 국가가 되기까지 200년 이상 걸렸다. 반면 우리나라는 2011년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 1조 달러 클럽’에 가입했는데, 불과 51년 걸렸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가 반세기만에 경제대국이 된 거다. 이건 경이로운 일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주 위험한 부작용을 낳았다.”
어떤 부작용?
“부(富)의 축적 과정이 한 생애주기 안에서 격변하는 걸 목격했다는 점이다. 서구 사회에선 증조할아버지가 땅을 사면, 할아버지가 건물을 올리고, 아버지가 사업을 키워 손자 대에 부자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부의 흐름이 완만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내 어머니 세대만 해도 ‘냉장고 살 돈으로 서울 강남 땅을 샀더라면 현재 빌딩 주인이 돼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신다. 실제로 1970년대 웬만한 강남 땅값과 냉장고 가격이 비슷했으니까.”
자기 눈으로 ‘대박’ 사례를 목도한 게 투기 심리를 자극한다?
“그렇다. 옆집 삼촌은 땅 사서 벼락부자가 됐는데, 우리 집은 냉장고 샀다가 평범하게 남았다. 이런 경험이 세대를 거쳐 공유되면서 ‘노동을 통해 차곡차곡 돈 모으는 건 바보짓’ ‘인생은 한 방’이라는 무의식이 깔리게 됐다. 코인,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 부동산, 지금의 주식투자 열풍까지…. 이 모든 건 짧은 시간에 신분을 상승시키고 싶은 ‘한탕주의’와 나만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포모 증후군(FOMO Syndrome·소외 불안 증후군)’이 결합된 결과다.”
우리가 유독 주가지수나 아파트 평수 같은 숫자에 집착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까.
“그건 우리 사회가 질(質)적 가치를 따질 여유 없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모든 게 속도전이었다. 빌딩을 몇 개월 만에 올렸나, 고속도로를 몇 km 뚫었나, 수출을 몇 억 달러 했나…. 이런 정량적 수치가 곧 국가적 생존이자 자부심이던 시대가 길었다. 그렇다 보니 개인의 행복마저 정량화하기 시작했다. 내 삶이 얼마나 질적으로 풍요로운지보다 계좌에 찍힌 숫자가 남보다 얼마나 큰지가 더 중요해진 거다. 우리 집단주의 문화의 어두운 단면이다. 서구 개인주의 문화에선 ‘남들이 주식을 하든 말든 내 갈 길 간다’가 가능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민감하다. 그렇기에 외국에선 ‘체면’ ‘눈치’라는 뜻에 적합한 용어조차 찾기 힘들다.”
그러한 심리가 주식시장의 거품을 부풀리는 불쏘시개가 되는 건가.
“그걸 ‘동조(同調)심리’라고 한다. 개인이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없어도 집단이 움직이면 일단 따르고 보는 거다. 요즘 MZ세대가 각종 투자에 몰두하는 것도 단순히 돈을 밝혀서가 아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하층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 주변 친구들은 다 돈을 벌었다는데 나만 제자리라는 박탈감이 혼재된 절규에 가깝다.”
주식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돈 잃은 사람에게 ‘한강 가라’ ‘육개장 먹겠네’라며 조롱하는 경우도 흔한데.
“일종의 자존심 방어기제다. 남의 불행을 보며 ‘난 저 정도는 아니야’라고 안도하면서 일시적 우월감을 느끼는 거다. 익명성 뒤에 숨어 타인의 나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해진 건데,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이 그만큼 황폐해졌다는 방증이다.”
‘한 끗 차이’로 돈 못 벌었을 때가 더 위험
투자에 실패했을 때의 ‘멘붕’ 상태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학계에선 이를 ‘금융 외상(financial trauma)’이라 한다. 전쟁이나 재난을 겪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처럼, 급격한 자산 폭락을 경험한 사람의 뇌에선 공포를 담당하는 편도체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다. 돈이 사라지는 걸 겪으면서 전쟁터에서 포탄이 터지는 것과 유사한 수준의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는 거다.”
반대로 성공할 땐?
“도파민의 노예가 된다. 내가 산 주식 가격이 빨간불을 켜며 올라갈 때 뇌는 마약을 복용한 것과 비슷한 쾌락을 느낀다. 특히 ‘한 끗 차이’로 돈을 못 벌었을 때가 더 위험하다. ‘아, 그때 팔았으면 1억 원 버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면 뇌는 이미 그 1억 원을 번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그래서 더 무리한 베팅을 하게 된다. 주식 과몰입과 도박중독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이다. 오천피 시대의 화려한 축포 뒤엔 수많은 사람의 뇌가 도파민 분출과 금융 외상 사이에서 망가져 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노동의 가치가 많이 희석된 느낌이 든다.
“당연하다. 이젠 명예나 직업적 소명보다 물질주의가 모든 가치를 압도한다. 교수 사회만 봐도 과거엔 월급이 좀 적어도 교수직이라는 명예를 보고 학자들이 모였지만, 지금은 연봉 더 준다면 미련 없이 떠난다.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 노동은 최소화하고 투기를 통해 ‘한탕’을 하는 것이 지능적인 삶이라고 추앙받는 시대가 된 거다.”
청년들은 계층 사다리가 끊겼다며 주식투자에 몰입하고, 중장년층은 노후 대비를 위해 주식판으로 뛰어든다.
“성장이 멈춘 사회에서 ‘각자도생’을 탓할 순 없다. ‘돈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매우 무책임한 조언일 수 있다. 연봉이 일정 수준 이하일 때는 분명 돈이 행복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생존의 문제니까.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그 이후다. 자산 수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음에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심리적 빈곤이 문제인 거다. 돈이라는 지표에 좌우되는 삶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지독한 허상
우리가 숫자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자존감부터 회복해야 할 것 같다.“주식시장처럼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외부 요인으로 실패했을 때 자책에 빠지면 이는 곧 자존감 붕괴로 이어진다. ‘내가 투자를 못해서 돈을 잃었어’가 아니라 ‘나는 돈도 못 버는 무능한 인간이야’라며 존재 자체를 공격하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게 ‘자기 자비(self-compassion)’ 개념이다. 단순히 자기합리화를 하라는 게 아니다. 어떤 실패로 고통받을 때 그 상황을 객관화하고, 과도한 자기 비난을 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라는 의미다. ‘투자를 하다 보면 돈을 잃을 수도 있지’ 하는 자비로운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게 빨간불이 들어온 주식 계좌보다 더 절실하다. 숫자는 여러분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가 홀려 있는 건 숫자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지독한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사람들은 고개를 떨군 채 스마트폰 속 빨간불을 좇고 있다. 문득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곳에서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하략)’
‘투자의 길’과 ‘관망의 길’. 당신이라면 어느 길로 향할 것인가.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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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종합일간지(대구 매일신문), 시사주간지(주간동아), 시사월간지(신동아)를 거치는 33년 기자 생활 동안 제가 늘 염두에 둬 온 글귀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론 진실을 알 수 없으니까요. 항상 선입견을 경계하고, 속단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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