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호

미국은 산업·금융자본가 승리의 역사로 세워진 나라

[‘돈’으로 본 세계사] 독립전쟁·남북전쟁 이후 세계 중심국으로

  •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입력2026-03-11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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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독립전쟁, 3대 민주주의 시민혁명 중 하나

    • 남북전쟁은 지주 계층 누른 자본가 계층의 승리

    • 남북전쟁 후 美, 세계 산업·자본주의 중심국 우뚝

    • 먼로주의 선언하면서 ‘패권국 미국’ 부상(浮上)

    1789년 조지 워싱턴이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신생국 미국이 탄생한다. Gettyimage

    1789년 조지 워싱턴이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신생국 미국이 탄생한다. Gettyimage

    미국의 독립전쟁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대영제국과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 간의 전쟁을 말한다. 미국이라는 신생국은 이 전쟁의 승리 끝에 탄생했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 전쟁은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과 함께 근현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 3대 시민혁명으로 평가받는다.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전, 1765년부터 영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관계는 계속 나빠졌다. 영국은 식민지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발행된 인쇄물에 영국의 인지(印紙)를 부착하도록 하는 인지세법을 시행했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국민의 대표 승인 없는 과세는 부당하다’는 의미)라고 외치면서 반발했고, 1773년 영국에 대항하는 단체인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은 정박 중인 영국 동인도회사 선박에 실려 있던 차(茶) 상자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 ‘보스턴 차 사건’으로 영국과 식민지 간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파국으로 치닫게 됐다. 여기에 식민지 안에서 지폐 발행을 금지한 화폐법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화폐 발행 강제는 식민지의 경제 자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차 사건 이후 영국은 보스턴항을 폐쇄하는 등 강력히 대응했고,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민병대를 조직해 저항했다. 1775년 영국군과 민병대 사이에 렉싱턴 전투가 벌어진 이후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1776년부터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소책자가 널리 읽히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혁명의 방향을 권리 회복에서 독립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등 5인 위원회가 작성해 의회에 제출했고, 만장일치로 의회를 통과해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선포된다. 8년을 끌던 독립전쟁은 결국 식민지의 승리로 끝났고,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국가 지위를 인정받았다. 1789년 조지 워싱턴이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신생국 미국이 탄생한다. 



    초대 정부의 국무부 장관에는 토머스 제퍼슨, 재무부 장관에는 알렉산더 해밀턴이 임명됐다. 건국 직후 미국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정계는 알렉산더 해밀턴으로 대표되는 북부의 연방주의자들과 토머스 제퍼슨으로 대표되는 남부의 분권주의자들(공화주의자들)로 나뉘었다. 양측은 연방의 권한, 연방은행의 설립, 관세 부과 등 모든 정책에 대해서 시각차를 드러내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남북 간의 갈등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점차 커져만 갔다.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국가 지위를 인정받았다. Gettyimage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국가 지위를 인정받았다. Gettyimage

    영미전쟁과 민주주의의 확산

    이런 와중에 1812년 영미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이 영국에 선전포고한 이유는 나폴레옹전쟁으로 인한 영국의 해상봉쇄 조치에 있었다. 영국은 미국의 대(對)프랑스 교역을 제한하고 심지어 미국 선원을 징발하기까지 했다. 미국은 이를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자주권의 침해로 인식하고 제2의 독립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전쟁 초기 미국은 캐나다를 침공해 요크(지금의 토론토) 지역을 점령했으나 병력, 보급 문제로 큰 성과 없이 후퇴했다. 1814년 영국군은 체서피크만으로 진격해 블레이던즈버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후 곧바로 워싱턴에 입성해 의사당과 백악관 등을 방화하면서 미국에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 장군이 영국군을 대파하면서 미국인에게 애국심을 심어줬고, 이 사건으로 후일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7대 대통령이 된다. 1814년 말 겐트조약 체결로 전쟁 전 상태로 복귀하기로 합의돼 양측 모두 큰 실익 없이 전쟁이 끝났다. 이 조약에서 미국이 제기했던 선원 징발이나 해상 중립권 문제는 합의되지 않았지만, 이 문제는 나폴레옹전쟁의 종식과 함께 자연스레 해결된다.

    영미전쟁은 미국의 정치경제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전쟁으로 대(對)영국 무역이 급감하면서 영국과 면화, 곡물 무역으로 이득을 보던 상인들이 타격을 받았다. 또한 전쟁이 끝나자 영국 상인들은 전쟁 중에 쌓아뒀던 엄청난 재고를 미국 시장에 풀었고, 저렴하고 품질 좋은 영국산 제품이 들어오자 미국 산업계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영국 상품에 높은 세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렇게 미국 내 제조업이 보호받으면서 북동부 지역의 산업화에 가속도가 붙는다.

    정치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친(親)영국, 친상업주의 성향의 연방주의자당이 몰락하고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등 토머스 제퍼슨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공화주의자당(민주공화당)이 정권을 잡았다. 이로 인해 정치적 통합과 경제적 번영이 어우러진 ‘좋은 감정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가 열렸고, 잭슨 시대 민주주의 확산의 토대가 마련됐다.

    19세기 미국의 역사는 서부 개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03년 미국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시시피강 서쪽에 대규모 영토를 획득했다. 이후 루이스·클라크 원정을 통해 서부의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서부 개발에 돌입했다. 오리건 트레일 등 마차 도로가 개설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했다. 1848년에는 멕시코전쟁 승리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가 미국에 편입되면서 드디어 대서양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미국 영토가 완성된다.

    때마침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발견된 금광은 서부 개발의 붐(gold rush)을 일으켰다. 1850년대부터 토지, 황금, 일자리를 찾아 무수한 미국인이 서부로 이동했다. 또한 중국인 1만 명, 아일랜드인 3000명 등 이민자들도 서부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는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서부에 광업·상업 등 다양한 산업의 기반이 마련됐다. 또한 남북전쟁 기간 중인 1862년에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을 제정해 서부에 정착하려는 사람에게 약 66만1200m2(20만 평)의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서부 개척을 촉진했다. 영화 ‘파 앤드 어웨이’에서 서부의 땅을 얻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말을 타고 오클라호마의 넓은 들판을 달리던 장면이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남북 간 경제적 갈등의 심화

    영미전쟁이 종식된 이후 남부와 북부는 관세를 둘러싸고 갈등이 촉발됐고,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는 더 심각해졌다. 미국 정부는 산업계를 보호하고 전쟁 채무도 상환하기 위해 높은 세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1820년 북부는 기존 관세 기간의 연장을 원했으나 남부가 반대해 연장에 실패한다. 하지만 1824년 관세가 33%까지 인상됐고, 1828년에는 수입 품목 대부분에 38%의 관세가 붙었다. 남부는 면화를 수출하고 대신 영국의 값싸고 질 좋은 농기계 등을 수입했는데, 관세로 인해 비싼 영국산을 쓰거나 아니면 품질이 좋지 않은 북부의 제품을 써야 했다. 어찌 됐건 높은 관세로 인해 남부 지주의 부담은 늘어난 셈이었다.

    더욱이 면화 가격이 폭락하면서 남부의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중심으로 연방을 분리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고, 여기에 켄터키,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등 다른 주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험악해지자 의회에서는 세율을 20%로 내리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1842년 보호주의 정책이 다시 강화되면서 처음 합의와 달리 수입관세율이 40%까지 인상되자 남부는 다시 반발했다. 이러한 갈등은 1844년 제임스 포크가 대통령에 당선돼 관세를 25%의 표준세율로 통일하면서 봉합됐고, 1850년대 미국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다. 그렇게 남부 주들의 불만도 잦아드는 듯했다. 하지만 1857년 불황으로 경제가 파탄 나자 1860년 또다시 높은 관세가 부과됐고, 이에 반발해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시작으로 남부의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관세 문제는 40년 이상 남부와 북부 간의 갈등을 키워왔고, 결국 이 관세 갈등이 남북전쟁 발발의 실질적 원인이 됐다.

    남북전쟁 발발의 표면적 트리거(trigger)는 노예해방이었다. 관세로 인해 남북 갈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흑인 노예해방 문제는 전쟁의 기폭제가 됐다. 흑인 노예에 대한 남북 간의 입장은 크게 달랐다. 남부에서 흑인 노예해방은 생존의 문제였다. 흑인 노예는 남부 경제에 가장 중요한 면화 산업을 지탱하는 필수 노동력이었고, 노예해방은 그러한 경제구조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흑인 노동력을 사실상 거저 쓰다시피 하던 남부 농장주들에게 흑인 노예해방은 면화 산업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반면 제조업이 중심인 북부에서는 이민자들이 계속 유입돼 흑인 노예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일반 사람들은 노예해방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흑인 노예 문제는 북부가 남부를 도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고, 북부 연방은 이를 십분 활용했다.

    북부에서는 산업혁명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북부의 제조업은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면서 19세기 중반부터 세계 최고의 공산품을 만들어냈다. 1853년 유럽에서 발생한 크림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이 총기의 우수한 성능이었는데, 러시아군의 머스킷 총에 비해 성능 면에서 앞섰던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라이플 총을 생산한 곳이 바로 미국의 매사추세츠였다. 북부는 제조업뿐만 아니라 수송 체계에서도 남부에 비해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1830년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 부설을 시작으로 북부의 도시들은 철도망을 통해 서로 연결됐다. 북부의 발달한 제조업과 수송망은 남북전쟁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남북전쟁과 산업자본가의 승리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에 발발했다. 1861년 3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취임 직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포함한 일곱 주는 남부 동맹을 결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삼아 스스로 독립국가임을 선언했다. 링컨이 취임하고 한 달 뒤인 4월, 남부 동맹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구의 섬터 요새에 포격을 가하면서 남북전쟁이 터졌다. 전쟁 초기에는 로버트 리 사령관이 이끄는 남부군이 승기를 잡았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남부 동맹을 지원해 경제적 실리를 취하고자 했다. 여기서 링컨의 통찰력이 빛을 발했다. 1862년 9월 링컨은 북부군이 앤티텀전투에서 승리하자 노예해방령을 선포해 전쟁의 명분을 연방군 쪽으로 가져왔다. 이로 인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사실상 남부에 대한 지지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1863년 7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군이 남부군에 승리하면서 남북전쟁의 전세가 역전됐다. Gettyimage

    1863년 7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군이 남부군에 승리하면서 남북전쟁의 전세가 역전됐다. Gettyimage

    1863년 7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군이 남부군에 승리하면서 남북전쟁의 전세가 역전됐다. 11월 게티즈버그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추념식에서 링컨 대통령은 전쟁의 목적이 미국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세기의 명연설을 남긴다. 1864년 북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적극적 공세로 남부군을 수세에 몰았고, 1865년 4월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4년에 걸친 남북전쟁은 막을 내린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북부 연방과 남부 연맹 사이의 내전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미국의 자본가 계층이 지주 계층을 누르고 근대 공업화를 이룬 시민혁명이다. 북부의 부르주아 세력이 남부의 지주 세력에 승리함으로써 미국이 근대 공업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미국은 보스턴 차 사건으로 촉발된 시민혁명으로 건국됐는데, 결국 남북전쟁으로 진정한 시민혁명이 완성된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남북 간 갈등은 일단 봉합됐고, 모두 국가 재건을 위해 힘을 합쳤다. 산업자본주의가 심화하면서 대규모 공장제와 대기업이 등장했고, 철도·철강·석유화학·전기 산업이 제조업을 이끌어나갔다.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를 통해 제조업을 일으킨 것은 철도산업이었다. 연방정부는 서부 개발을 촉진하고 국내시장을 통합하기 위해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동부에서 서부로 철도를 건설하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Union Pacific Railroad Co.), 1864년에는 서부에서 동부로 철도를 건설하는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Central Pacific Railroad Co.)가 설립됐다. 정부는 철로를 40마일 건설할 때마다 30년 상환 국채를 주고 중서부의 광활한 땅을 넘겨주는 등 철도회사에 많은 이권을 주면서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적극 지원했다. 드디어 1869년 유타주의 프로먼토리 서밋에서 두 철도가 만나면서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됐다. 

    대륙횡단철도는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전환점이었다. 철도는 광활한 미국 땅을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했다. 원료와 제품의 대량 수송을 가능하게 했고, 철도망의 확대는 철강에 대한 폭발적 수요를 창출하는 동시에 기계 산업을 육성시켰다. 카네기 같은 철강왕을 만들어냈고, 미국의 중공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이어 미국은 석유, 전기의 에너지 혁명으로 제2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영국이 만들어낸 산업혁명을 뛰어넘어 생산방식과 소비 패턴,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석유는 난방, 내연기관 연료, 화학섬유, 생활용품 등으로까지 쓰이면서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석유와 함께 토머스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기는 생산방식, 조명 등 도시의 동력 체계와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꿨다.

    독점·금융 자본주의와 JP모건, 록펠러의 등장

    남북전쟁 이후 거대화된 산업에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근대적 주식회사 시스템이 생겨났다. 돈이 주식으로 형태를 바꾸면서 일반인들의 직접투자를 끌어들였다. 점차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모은 몇몇 대기업이 카르텔(Cartel)을 형성했다. 

    이들은 가격협정, 판매협정, 시장 협정 등을 통해 마치 한 기업처럼 움직였다. 철도, 철강, 석유 등 거대 산업을 중심으로 소수의 기업이 타사의 주식을 소유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트러스트(trust)도 등장했다. 이들은 원료부터 모든 과정을 장악하는 수직적·수평적 통합을 통해 경쟁자를 흡수하거나 도산하게 했고, 이에 따라 산업은 소수 대기업이 지배하는 독과점 구조로 재편됐다.

    이에 미국 정부는 1890년 셔먼 반독점법을 제정해 기업의 독과점을 규제하려 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됐다. 산업자본가들은 점차 금융도 장악해 나갔다. 모건, 록펠러, 카네기 등 소수의 자본가가 금융기관의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금융과 산업이 통합돼 계열화되는 금융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졌다. 독점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는 미국을 세계 1위의 경제 강국으로 키웠지만, 그에 못지않은 많은 폐해도 낳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미국 산업계의 대표적 자본가를 꼽으라면 카네기, 밴더빌트, JP모건, 록펠러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JP모건과 록펠러는 압권이다. 모건은 남북전쟁 때 군수물자를 북부군과 남부군 양쪽에 조달하면서 돈을 벌었다. 전쟁 중에 JP모건 상사를 설립하고 런던에 있는 부친의 은행에서 인수한 유럽의 증권을 뉴욕에서 판매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는 월가에서 금융업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869년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자, 모건은 밴더빌트와 손을 잡고 철도 사업에 진출했다. 또한 모건은 철강산업에도 뛰어들었다. 1901년 모건이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초대형 철강 회사 유에스스틸(U S steel)이 설립됐고, 에디슨의 제너럴 일렉트릭과 손잡으면서 미국의 전신과 전화, 전등 사업을 장악했다. 모건은 개런티 트러스트 은행을 합병해 모건 개런티 트러스트를 만들었고, 모건 스탠리 뱅크스 트러스트 투자회사를 설립하는 등 금융산업도 장악해 나갔다.

    한편 록펠러는 석유화학산업에서 트러스트를 만들었다. 그는 1870년 스탠더드 석유 회사를 세우고 다른 석유 회사들을 차례로 합병해 미국 석유 산업의 95%를 지배했다. 록펠러는 전기 사업에 진출해 발전소를 지배했고, 광업회사를 만들어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를 매수했다. 또한 체이스 맨해튼, 시티 내셔널 은행 등 금융기관도 계열사로 편입해 모건과 함께 미국의 금융산업을 지배했다. 미국 산업의 대부분을 모건가(家)와 록펠러가가 지배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풍부한 자원과 이민 노동력, 통합된 내수시장, 발명가와 혁신 기업가들이 결합하면서 모든 제조업에서 유럽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남북전쟁에 있었다. 이 전쟁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전개된 미국 제조업의 발전은 농업국 미국을 세계 산업자본주의의 중심국으로 변모시켰다. 

    국내 자본이 축적되자 미국은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르면서 카리브해, 라틴아메리카, 필리핀, 괌 등 태평양 지역으로 뻗어나갔고, 먼로주의를 선언하면서 패권국으로서 미국의 부상(浮上)을 세상에 알렸다. 이렇게 근대 말 미국은 20세기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강승준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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