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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心중中일一언言

“이혜영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연기를 잘했나요?”

‘메디아’로 돌아온 연극여왕

  • 글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사진 지호영 기자|f3young@donga.com

“이혜영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연기를 잘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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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아연극상 연기상 3회 수상에 빛나는 연기
  • ● 명동예술극장에서 최장기 공연에 도전
  • ● ‘마녀’ 메디아인가, ‘사랑밖에 난 몰라’의 메디아인가
  • ● “니네들이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 있단다”
국내 연극계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 동아연극상이다. 1964년 작품부터 시상을 해온 이 연극상의 최다 수상자는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무대디자인까지 맡았던 이윤택 씨로 모두 7차례다. 하지만 이를 연기상으로 좁혀보면 남녀 통틀어 3회 수상자가 최다 수상이다.

모두 3명이다. 원로배우 신구(1966년, 1969년, 1971년)와 박정자(1970년, 1985년, 1986년) 그리고 50대 여배우인 이혜영(1988년, 1995년, 2012년)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놀랍게 다가설 만하다. 주로 스크린과 TV에 비친 이혜영은 젊을 때는 톡 쏘는 매력, 나이 들어서는 ‘센 언니’로서의 이미지가 앞선다. 연극 팬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다. 이혜영은 1981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데뷔했지만 연극 무대에 선 것은 10여 작품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강렬한 존재감으로 관객의 마음은 물론 평단까지 사로잡았다. 1988년 ‘사의 찬미’에서 윤심덕 역, 1995년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장녹수 역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첫 연극 출연이던 2012년 ‘헤다 가블러’에서 헤다 역이다.

기자 역시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헤다 가블러’를 보면서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내로라하는 연극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말 그놈의 연기를 위해 얼마나 절차탁마의 노력을 하는지를 익히 아는 기자에게 이혜영은 마치 ‘연기란 타고나는 것’임을 웅변하는 듯 했다.



13년 만에 펼치는 무대 연기였음에도 물 찬 제비가 따로 없었다. 강렬한 시선과 낭랑한 발성 말고도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만으로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대 오른편에서 왼편까지 말없이 천천히 걸어 가는데도 지루함을 느낄 틈새가 없었다.

그런 이혜영이 2월 24일부터 4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메디아’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해 ‘갈매기’에서 젊은 극작가를 사랑하는 늙은 여배우 아르까지나 역이 워밍업이었다면 희랍비극 최고 악녀로 불리는 메디아 역을 맡은 이번 공연은 본게임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이를 기획한 국립극단도 이를 염두에 두고 명동예술극장 재개관 이래 최장 기간인 37일 공연에 들어갔다. 종전 최장 공연작은 2016년의 ‘날 보러 와요’로 31일이었다. 명동에서 공연한 국립극단 공연 중에서 공연 횟수도 33회로 가장 많다. 종전 최다 기록은 2011년 ‘우어 파우스트’의 27회였다.



동아연극상 3회 수상

인터뷰에 앞서 첫날 공연을 먼저 봤다. 헝가리국립극장 예술감독 출신의 연출가 로버트 알폴디는 에우리피데스의 원작을 최대한 현대화하는 방식으로 ‘충격과 공포’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상대는 물론 어린 두 아들까지 살해하는 여인의 이야기가 신화나 전설의 탈을 벗고 지금, 여기의 현실이 될 때 얼마나 소름 끼칠지를 생각해보라.

연극은 고대 그리스 남부의 도시국가 코린토스에서 시작한다. 무대는 서양 대저택의 로비를 연상시킨다. 희랍비극의 코러스에 해당하는 현대적 복장의 여인들과 코러스장에 해당하는 유모(김정은)가 그 로비에 죽 늘어앉은 상태에서 연극이 시작된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여인의 비명이 길게 들려온다.

 산통을 겪는 산부의 비명일까. 아니다. 여러 차례 끊어졌다 이어지는 단말마적 울부짖음은 영혼의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 무엇이다. 그제야 유모가 일어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고 여성 코러스의 화답을 통해 고통스러운 진실이 드러난다.

흑해 연안 도시국가 콜키스의 왕녀인 메디아(이혜영)는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하동준)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 조국과 부모형제를 배신한다. 아비의 추적을 따돌리려 배다른 남동생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가 하면 이아손과 약속을 배반한 이올코스의 왕을 그 딸들의 손에 의해 찢겨 죽게 만든다. 결국 ‘에게 해에서 가장 위험한 부부’로 낙인찍힌 이아손과 메디아는 코린토스에 몸을 의탁한다.

그런데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박완규)이 이아손을 사윗감으로 탐낸다. ‘권력이 모든 것인 남자’ 이아손은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임에도 새장가를 택한다. 뒤늦게 이를 안 ‘사랑밖에 난 몰라’의 주인공 메디아가 그 사랑의 배신에 몸서리쳐지는 절규를 토해낸 것이다.

이윽고 검은 옷의 메디아가 무대 가장 깊은 곳의 출입문 뒤에서 등장해 소름 끼칠 복수를 암시한다. 영혼의 발톱을 한껏 세운 그를 찾아온 크레온은 하루의 말미를 줄 터이니 두 아들을 데리고 코린토스를 떠나라고 최후 통첩한다. 메디아는 미소 짓는다. 복수를 위한 24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아손이 나타나 자신이야말로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것인데 왜 몰라주느냐는 적반하장의 주장으로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에 기름을 뿌린다. 메디아를 동정하던 코러스는 어느 순간 모골이 송연해질 복수극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그 복수가 현실화하자 메디아를 매섭게 비난한다. 승리의 냉소를 짓던 메디아는 권력은 물론 사랑도 잃은 이아손의 손에 목 졸려 죽는다.


팜파탈의 끝판왕

신화의 껍질을 벗겨내고 ‘리얼리티 쇼’에 가깝게 구성된 연극은 내용만 보면 웬만한 아침드라마 뺨치는 ‘막장드라마’의 위용을 과시한다. 연출은 이 작품이 ‘싸구려 멜로드라마’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몇 가지 장치를 준비했다. 하나는 관객을 대신해 분노하고 슬퍼하고 경악하고 비난하는 코러스다. 이들은 상주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코러스는 관객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을 대신 맡는다. 대신 관객은 저 잔혹한 복수극의 한 꺼풀 뒤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는 ‘매의 눈’을 갖게 한 것이다.

두 번째 장치는 속도감이다. 연출은 등장인물의 숫자를 줄이고 시적이면서도 유장한 대사를 다 걷어내 가며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120분 넘게 공연될 작품을 80분으로 압축했다. 관객의 감정이 서서히 숙성될 시간을 주지 않음으로써 냉철한 시선을 유지하게 만든다.

메디아 역의 이혜영은 극의 몰입을 막는 이런 장치 속에서 복수를 위해 모성애마저 버린 신화적 존재를 현실 속 여인의 이야기처럼 연기해내야 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구름 위에 떠 있던 신화를 끔찍한 내 자신의 이야기”로 바꿔야 했다.

“메디아 출연 제의를 거의 1년 전에 받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신화 속에 푹 빠져 살았어요. 그리스비극은 물론 그리스신화까지 쌓아놓고 읽고 또 읽었어요. 메디아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혈통이기에 반신(半神)이었죠. 그래서 꿈을 꿔도 제우스 삼촌과 와인을 마시거나 헤라 고모와 구름 속에서 수다를 떠는 꿈을 꿨죠. ‘그런 끔찍한 배역을 연기하는 데 괜찮으냐’는데 저는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그리스비극은 모두 신의 계획 아래 이뤄진 일이니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알폴디를 만나기 전까지 내 애를 죽여야 한다는 그 끔찍한 일에 죄책감도 못 느낀 채 구름 위에서만 살았던 거죠.”

알폴디의 일성은 그런 환상을 단박에 박살 냈다. “러브스토리로 가겠다.” 신의 계획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치정극이라고? 그럼 원작에 등장하는 신들은 어떡하지? “신들은 다 빼버리겠다.” 그럼 메디아가 수레를 타고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나는 메디아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여인으로 그릴 거다. 그래서 죽여버릴 셈이니 수레도 없을 거다.”

두 아이의 엄마인 이혜영은 그제야 뼛속까지 공포를 체험했다. “제가 연기해야 하는 메디아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현실 속 인물이 돼야 함을 깨달았죠. 소름이 끼쳤어요. 내가 내 손으로 내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사실 이혜영이 소화해온 배역 중에 만만치 않은 팜파탈이 많다.

사랑하는 남자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 종으로 태어나 요염함 하나로 조선을 훔친 장녹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엘리트 남성들을 파멸로 몰고 가다 자살하는 헤다 가블러가 그러하다. 그런 그에게도 메디아 역은 “내 연기 인생 일생일대의 도전”이라고 했다.



“내 연기 인생 일생일대의 도전”

“알폴디는 메디아를 죽어 마땅한 여자로 그리겠다는데 그 여인을 연기해야 하는 나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내가 나 자신을 ‘죽어도 싼 악녀’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할 수는 없다,  나 자신부터 납득시키고 관객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서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그 배역을 연기할 수 있느냐고 했죠. 이해한다곤 했지만 중간중간 제가 눈물을 좀 짜거나 관객의 감정에 호소할라치면 여지없이 차단해버리더라고요.”

이번 무대가 힘겨웠던 것은 이런 감성의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육체적 부담도 컸다. 게다가 완벽하게 준비한 채 무대 위에 오르던 과거의 자신과 달리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첫 공연에 들어갔다고 털어놨다.

“캐릭터 강한 여성을 많이 연기했지만 실제론 소리 한번 질러본 적이 없어요. 화가 나도 한풀 딱 꺾어서 대사를 치지 고함을 지르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제가 등장도 하기 전에 무대 밖에서 온몸을 쥐어짜내는 비명을 계속 질러야 해요. 첫 연습 때 아홉 차례나 되는 비명을 지르고 등장했는데 이미 목이 쉬어서 ‘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사라지고 진이 다 빠지더라고요.

그랬더니 ‘이제 겨우 대본의 8페이지밖에 안 했는데 이러면 어떡하냐’는 거예요. 연출이 스피드와 소리의 볼륨을 워낙 중시하다보니 내 감정이야 되든 말든 정신없이 좇아가기 바빴죠. 연습기간도 말이 6주지 하루 딱 4시간에 일주일에 하루를 꼬박꼬박 쉬니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저는 언제나 ‘레디~’ 하고 완벽하게 준비된 단계에서 무대에 올라가 ‘이 정도면 나 잘했지?’하는 마음으로 연기했는데 이번처럼 준비가 안 된 공연은 처음이었어요.”


메디아의 진실, 이혜영의 진실

여기까지 들으면 연출가와 배우 의 차이를 눈치챘을 것이다. 연출가 알폴디는 관객이 배우에게 동화되는 것을 차단하는 소격효과를 통해 신화화한 ‘낭만적 거짓’ 너머의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메디아가 ‘마녀’로 낙인찍힌 것은 그녀가 나쁜 아내, 나쁜 엄마여서가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남자들이 그어놓은 선을 훌쩍 뛰어넘어버렸기 때문이다.

메디아는 여성이 남자들보다 자신의 욕망에 더 충실한 존재, 남자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아는 존재, 남자들보다 과감하고 무자비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남성우위 가부장제의 허구성을 충격적 방식으로 폭로한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에서 여인은 시집가기 전엔 아버지와 남자 형제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시집가고 난 뒤에는 남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메디아는 이를 통째로 거부했고 끝내는 모성애라는, 남성들이 부여한 신화의 마지막 껍질까지 벗겨냈다. 그녀는 아비를 배반하고 남동생을 살해했으며 남편이 모시는 왕을 시해했고 다시 남편의 뜻을 거스르고 그의 내연녀와 자신의 자식까지 살해했다. 그것은 인륜의 관점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다. 그런 죄를 짓고도 죄책감 없이 살아남았다는 점이 메디아의 영웅적 면모를 훼손하고 그를 마녀로 전락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연출은 메디아를 차디찬 시체로 퇴장시킨 것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저주받은 자’를 영웅으로 신격화하기 위해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서 죽음 또는 죽음에 값하는 희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혜영도 이를 꿰뚫어봤을까.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관객을 휘어잡는 자신의 장점을 무대 위에서 맘껏 펼치지 못하게 알폴디가 계속 방해했음을 꿰지는 못한 듯하다. 하지만 어떤 직관적 이해는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 남자는 내게 확신을 줬어요. 연습 기간 내내 저를 힘들게 했지만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죠. 메디아 역은 완벽히 준비된 상태가 아니라 두려워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연기해야 하는 법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를 믿고 끝까지 좇아갈 수 있었어요.” 또 이런 말도 했다. “이미지로만 접근하다보니 신화를 만화처럼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그런 것으로만 생각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걸 깨뜨리고 지금 여기의 일로 가까이 느끼게 하는 작업이 벅차지만 분명 매력적이었어요.” ‘메디아’는 분명 연출가의 의도가 더 앞선 연극이다. 하지만 이혜영이란 배우는 그런 악전고투 속에서도 낭중지추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 연극에 대한 동아일보 리뷰 기사 제목은 ‘이혜영의, 이혜영에 의한, 이혜영을 위한 작품’이었다.  



야누스를 닮은 이혜영

실제로 만나본 이혜영은 무대 위 이혜영과 사뭇 달랐다. 무대 위의 빈틈없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보다는 어딘가 허술하면서도 애교와 웃음이 많았다. 올해 스무 살 된 딸과 열다섯 된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연극보단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남편도 살뜰히 챙기는 가정적인 여성이었다. 영화감독 이만희의 딸로 유명해졌지만 부모의 이혼과 부재 속에 자란 부끄러운 상처를 감추려고, 들키고 싶지 않아 ‘아닌 척’ 하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영화가 모든 것이던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제겐 연기가 모든 것”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저는 아니에요, 제겐 애들과 가정이 더 중요해요”라며 도리질을 쳤다. 팜파탈 역을 많이 맡아 ‘센 여자’라는 이지미가 강하다고 했더니 “실제론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인데 그렇게 봐주니 오히려 너무 좋다”며 웃었다.

그즈음 진짜 준비한 질문을 던질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혜영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연기를 잘했나요?”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이어서 뜸을 들였지만 실은 그녀를 만나면 가장 묻고 싶은 심중일언(心中一言)이었다.
“연기 잘한다는 얘기는 어릴 때부터 들었어요. 저의 대담함과 당돌함과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을 선배들이 예쁘게 봐주셨죠. 원래 제 꿈은 진저 로저스나 줄리 앤드루스 같은 뮤지컬영화 여배우가 되는 거였죠. 1981년 고3 때 교복을 입은 상태에서 현대극장에서 하는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오디션을 봤는데 당시 주인공 마리아 역을 맡은 윤복희 선배님의 언더스터디로 바로 뽑아주셨어요.

그때 남자주인공이 유인촌 선배였는데 날 보고 그러셨어요. ‘너는 굉장히 잘되거나 굉장히 안될 거 같다.’ 연기를 뮤지컬로 시작해서 그런지 제 발성을 싫어하는 분도 계셨어요. 열등감으로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하다보면 옛날부터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 없었고 칭찬, 격려, 상을 많이 받았어요. 영화 데뷔작인 ‘땡볕’(1984)에 출연할 때 너무 어린 나이에 천연덕스럽게 작부 연기를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겨울나그네’(1986) 땐 영화평론가 정영일 선생께서 “올해의 발견은 이만희의 딸 이혜영”이라고 하셨죠. 많은 분이 제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얘기해주고 일깨워주고 소중하게 여겨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혜영 연기의 진짜 비밀

운이 좋았다, 복이 많았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의 연기가 타고났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워낙 잘한다는 소리만 들어서 절실함이 부족했던 건 아니냐는 타박을 해봤다. “어릴 때는 정말 아무렇게나 한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 먹어서 건강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대사도 못 외우고 박력 있는 연기도 펼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사랑에 보답하는 그런 배우가 되자’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연기에 임하고 있어요.”

그래서 연기에 새롭게 눈뜨게 한 작품이 있느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2012년 작인 ‘헤다 가블러’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전에는 배역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재미를 몰랐죠. 헤다 가블러 때부터 관련 자료를 다 찾아보고 공부하며 그 인물을 알아가는 게 즐거워지기 시작했어요. 학교 다닐 때도 없던 내 책상이 그때 생겼고 책을 가득 쌓아놓고 공부하는 재미를 알기 시작했으니까요. ‘갈매기’ 때는 안톤 체호프의 전 작품을 읽고 그가 좋아한 러시아 작가들 책도 샅샅이 읽었어요.”

그래도 만족할 수 없어 좀처럼 연기가 늘지 않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고심하는 다른 배우들 이야기를 들려줬다. 비로소 원하던 답이 나왔다.
“너무 자신 스스로 그걸 해결하려고 하니까 힘든 것 아닐까요. 나는 연출이 시키는 대로 해요. 가끔씩 교활하게 연출을 속일 때도 있긴 하지만 제게 믿음만 준다면 연출의 요구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하죠. 하나 더 있다면 나이 먹는 걸 즐긴다는 거예요.

예전엔 마흔만 되도 죽어야 할 것 같이 생각했는데 요즘은 젊은 배우들을 보면서 속으로 ‘이 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니네들은 모르는, 나만이 아는 비밀이 있단다’하며 웃어요. 이번에 무대의상을 맡아주신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은 팔순이 넘으셨지만 아마 저를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으실걸요. 내가 그 나이가 되면 더 많은 비밀을 알게 될 테니까요.”

당신이 무대 위에서 제일 빛나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옛날부터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연출가 정진수 선생께서 ‘배우들이 자기한테 맞는 거 하나만 꾸준히 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해주셨는데 어려서 제대로 못 알아들었죠. 일찍 돌아가신 제 사랑하는 오빠도 늘 말씀하셨어요. ‘혜영아 넌 연극이 좋아’라고,”

그럼 무대 위에서 무슨 작품을 가장 해보고 싶을까. “버나드 쇼가 쓴 ‘세인트 존’이란 작품이 있어요. 잔 다르크 이야기예요. 잔 다르크를 다룬 희곡이 200편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 작품을 아직 한국에서 공연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열일곱 소녀의 이야기라 저를 주인공으로 써줄까 싶지만 무대 위에선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도 해보고 싶어요. 400살까진 남자로 살다가 그다음엔 여자로 산 올랜도의 인생을 담아내고 싶어요. 영화 ‘길’의 젤소미나 역도 해보고 싶고 아버지의 페르소나였던 문정숙이 나온 ‘검은 머리’나 ‘귀로’ 같은 영화도 다 해보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니네들은 모르는 나만의 비밀’ 하나만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당신은 아직 슬픔이 뭔지 몰라. 늙을 때까지 기다려봐.” 이번 작품에서 메디아가 그 복수의 실체를 뒤늦게 깨닫는 이아손에게 들려주는 대사였다.
권재현의 심중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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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사진 지호영 기자|f3yo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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