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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농업혁명에 견줄 ‘제1의 물결’

인스턴트커피의 등장

  • 박영순|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농업혁명에 견줄 ‘제1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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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앨빈 토플러의 화법을 커피 역사에 적용하면 인스턴트커피의 확산은 ‘제1의 물결’에 견줄 만하다. 반작용이든 순작용이든 스타벅스로 상징되는 프랜차이즈 커피와 스페셜티 커피의 물결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2000년인 커피 역사에 국가마다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 종자를 이 땅에 처음으로 품어냈고, 예멘은 커피 경작의 길을 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메카를 통해 커피를 이슬람 국가 전역에 퍼뜨렸으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상인은 커피를 상업적으로 볶기 시작했다. 이란의 의사들은 커피를 치료에 접목하며 의학적 쓰임새를 찾아냈다.

오스만제국(터키)은 예멘에서 커피를 빼내 유럽으로 전파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에 의해 커피는 유럽 땅을 밟았다. 네덜란드는 국제적인 커피 생두 무역을 통해 커피 산지를 인도네시아로까지 넓혔고, 프랑스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커피를 꽃피우게 했다.

기나긴 커피 역사에서 인스턴트커피는 20세기 들어서야 미국에 의해 등장한다. 인스턴트커피의 확산은 인류 문명사에서 농업혁명에 비견돼 ‘커피의 제1 물결(The First Wave of Coffee)’이라 불린다. 여기엔 엄청난 물량의 커피를 생산해낸 브라질의 역할도 지대했다.



‘카우보이 커피’

미국에 커피가 전해진 건 1620년대지만, 국민들이 차(茶)를 제쳐두고 커피를 즐기기 시작한 건 1773년 ‘보스턴 차 사건’ 이후다. 커피 대중화가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 비해 100여 년이나 늦은 셈이다. 그럼에도 인스턴트커피가 미국에서 탄생한 것은 커피를 마시는 ‘신속함’과 ‘간편함’에 대한 간절함을 먼저 절실히 경험해서다.



미국은 광활한 땅 때문에 야영문화가 일찍부터 형성됐다. 동부에서 서부로 주거지를 개척해나가며 카우보이는 각성과 활력 등 커피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잦아졌고, 인디언과 수시로 전투를 치러야 하는 민병대에게도 커피는 매우 요긴했다. ‘카우보이 커피’는 19세기 초 미국의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추출법이다.

카우보이들이 들판이나 산속에서 야영하며 코펠과 같은 냄비에 물과 커피가루를 함께 넣고 끓여내 마신 방식이다. 추위와 졸음을 물리쳐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방식의 커피 추출은 향미는 떨어져도 간편했기에 애용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우보이 커피는 플란넬로 만든 주머니에 커피가루를 넣고 끓이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렇게 하면 물에 녹지 않는 커피 찌꺼기가 치아에 달라붙어 불쾌감을 주는 걸 막을 수 있었고, 잡미도 줄여 향미 또한 좋아졌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게 일명 ‘양말 커피(Sock′s Coffee)’다. 커피가루를 담은 천주머니를 물에 넣어 끓이는 대신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 향미를 드높인 방식인데, 천주머니가 물을 먹으면 양말처럼 길게 늘어진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1767~1845)은 군인 출신으로,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역이다. 진지를 요새화함으로써 상대인 영국군 2037명을 전사시키면서도 미군 전사자는 21명에 불과했다. 잭슨 대통령은 커피를 병사에게 전투식량으로 제공한 인물로 기록된다.


남북전쟁 승패를 가르다

커피의 위력은 1861년부터 4년간 치러진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에서 더욱 돋보인다. 북군을 이끈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를 봉쇄했다. 이로 인해 남군은 전쟁 내내 커피를 공급받지 못했다. 커피에 굶주린 남군은 고구마나 사탕무를 커피처럼 진하게 볶아 물에 끓여 마시기도 했지만 카페인의 위대한 효과(?)를 누리지 못해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담배 생산지를 끼고 있던 남군은 휴전이 이어질 때면 담배와 커피를 맞바꾸자고 북군에 매달리기도 했다. 남군은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를 들꽃과 허브를 채취해 끓여 마시는 것으로 달랬는데, 이 덕분에 미국이 허브차 강국으로 발돋움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실제 커피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랐다는 견해도 있다. 북군을 이끈 벤저민 버틀러 대장은 북군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로 커피를 꼽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물통에 커피를 담아 수시로 마시게 하면서 각성 상태가 극에 달했을 때 공격을 지시하는 기법으로 전투의 승기를 잡아나갔다.

그가 다른 부대 대장들에게 “병사들이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그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커피 음용을 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북군은 노예제도를 없애려 남군과 전쟁을 치렀는데, 이길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준 것이 브라질 커피농장으로 잡혀간 아프리카 노예들이 재배한 커피였다는 사실은 남북전쟁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에게 커피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스미스소니언국립미국사박물관에 보관된 한 병사의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북군의 기습부대 요원 에베네저 넬슨 질핀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은 1865년 4월의 일기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긴장감을 견딜 수 없을 정도다. 보급품이 전보다 4분의 1로 줄었으며 커피 보급 자체가 끊겼다. 커피 없이는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

북군은 전투 교범에 “커피는 강인함과 에너지의 원천이다”라고 천명하고, 병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커피를 공급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은 병사 한 명이 하루 평균 1.8L의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병사 한 명당 제공된 커피는 1년에 16kg에 달했다. 그들의 커피 사랑은 지극했다.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커피 원두를 재빨리 갈아 마시려고 아예 소총의 밑동, 일명 ‘개머리판’에 그라인더를 장착했다. 그라인더를 탑재한 당시의 소총이 전시된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아머리국립사적지엔 이를 보려는 커피 애호가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개머리판의 커피 그라인더

전쟁이 끝난 뒤, 미국 사람들로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소총 개머리판에 달린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가는 병사의 모습은 떠올릴수록 아찔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재빨리 끓여 마실 수 있는 커피’를 화두로 풀어낸 게 인스턴트커피다.

1901년 뉴욕 버펄로에서 열린 ‘범미국박람회(Pan American Exposition)’에서 일본계 미국 화학자 사토리 가토는 분말 형태의 인스턴트커피를 처음 선보였다. 그는 앞서 차를 가루로 만들어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법을 개발했는데, 이를 커피에 적용한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긴박한 상황에서 빨리 커피를 마시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대체로 커피를 진하게 추출한 후 갖고 다니며 물에 타 마시는 방식이 있었지만, 이는 미리 추출해둔 원두커피일 뿐이지 인스턴트커피는 아니었다. 인스턴트커피는 커피 원두를 갈아 뜨거운 물로 성분을 추출한 뒤 물을 다시 날려 보낸 가루를 뜻한다. 커피 원두는 70%가량이 물에 녹지 않기에 원두가루를 물에 넣으면 절반 이상이 찌꺼기로 남는다.

이 때문에 커피를 추출해도 필터로 찌꺼기를 걸러 내거나 가만히 가라앉혔다가 액체만 살짝 따라내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토는 물에 녹아내리는 성분만 가려내기 위해 커피를 추출한 뒤 물만 날려 보내는 방식으로 가용성 가루만 정제해냈다. 따라서 가토의 인스턴트커피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찌꺼기 없이 가루를 모두 녹여 간편하게 마실 수 있었다.

가토가 이를 대량생산하지 않고 특허도 내지 않는 사이 미국 초대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조지 워싱턴이 기술특허를 받고 1910년 ‘조지 워싱턴 커피’라는 브랜드로 사업을 시작했다. 가토의 인스턴트커피는 끓인 커피를 분무 건조해 가루로 만드는 방식이어서 향이 거의 날아가는 바람에 맛이 떨어졌다.

반면 조지 워싱턴 커피는 수율이 떨어지더라도 낮은 온도에서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향미를 붙잡았다. 그는 브루클린에 공장을 차린 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기회를 잡았다. 5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미군 보급품으로 제공된 인스턴트커피를 조지 워싱턴 커피가 독점한 것이다.


커피 묘목과 미인계

사실 인스턴트커피라는 용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광고 슬로건으로 사용돼 1951년에야 널리 알려졌다. 그전까지 인스턴트커피는 물에 쉽게 녹는다는 의미에서 솔루블 커피(Soluble Coffee)로 불렸다. 조지 워싱턴 커피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상품을 만들었다.

알루미늄 튜브에 1~2컵 용량의 인스턴트커피를 담은 고급형 ‘바링톤 홀(Barrington Hall)’ 브랜드를 만들었는데, 일반 원두커피에 비해 매우 비쌌다. 더욱이 세계는 1930년대 대공황의 늪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커피 독점 공급으로 번 돈을 이 시기를 견디느라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커피 소비 부진, 여기에 커피 대풍작이 겹치면서 브라질에선 남아돌아가는 커피 생두를 처분하지 못해 증기기관차의 땔감으로 쓰는 기막힌 현상까지 벌어졌다. 커피 과잉생산은 인스턴트커피 제조업체의 춘추전국시대를 낳는다. 이 부분을 보다 깊게 감상하려면 브라질 커피 재배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브라질은 18세기에 북쪽에 접한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커피나무를 들여왔다. 프랑스가 이곳에 커피나무를 심게 된 사연은 흥미롭다. 당시 프랑스 왕립식물원엔 커피나무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앞서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선물로 바친 것을 육종해 온실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있던 커피나무가 가브리엘 드 클리외라는 프랑스 장교에 의해 카리브 해의 작은 화산섬 마르티니크로 옮겨진다. 이 커피가 브라질을 비롯해 콜롬비아, 페루, 파나마,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등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되는 모든 커피의 원조가 됐다.

프랑스는 마르티니크 섬에서 키운 커피나무를 브라질과 국경을 맞댄 기아나에 옮겨 심었는데, 1727년 마침내 브라질에 기회가 찾아왔다. 기아나를 두고 국경 분쟁을 벌이던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브라질에 중재를 요청한 것이다. 브라질을 통치하던 포르투갈은 잘생긴 군인을 수소문했다.

프랑스 총독 부인을 꼬드겨 커피 묘목을 들여오자는 이른바 ‘미인계(美人計)’를 꾸민 것이다. 은밀한 심사과정을 거쳐 프란시스코 데 멜로 팔레타가 선정됐다. 그가 군인인 건 분명한데, 대령인지 특무상사인지 그 직책은 명확지 않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브라질인은 콧대 높은 프랑스 총독 부인을 브라질 군인이 홀렸다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표면적으로는 국경 분쟁을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기아나에 들어간 팔레타는 업무는 뒷전이고, 우선 총독 부인의 시녀를 꼬드겨 ‘목표’에 접근한다. 멋진 외모와 007 뺨치는 매너와 매력으로 총독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브라질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낮엔 총독 부인, 밤엔 팔레타의 연인”이라고 풍자한다. 밀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팔레타는 총독 부인에게 이별을 고한다.

본국에서 호출 명령이 내려져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고 ‘수작’을 부린다. 총독 부인은 가슴 아파하며 “당신의 기억에 남을 선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니 그런 말이 나오도록 팔레타가 작전을 펼친 것이겠다. 팔레타는 “부인의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도 커피나무는 자신에게 소중하다는 알 듯 말 듯한, 그러나 간절함이 밴 메시지를 던졌다.

팔레타가 기아나에서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만찬장에서 총독 부인은 꽃다발 사이에 커피 묘목을 몇 그루 섞어 건넸다. ‘연정의 표시’로 팔레타의 품에 안긴 커피 묘목들은 훗날 브라질을 커피 대국으로 만들고 엄청난 부를 선사한다.


브라질 커피의 기회와 위기

1765년 브라질산 커피가 처음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수출된 이후 생산량이 매년 급증하면서 1920년대엔 정점에 달해 세계에서 소비되는 커피의 80%를 브라질이 감당했다. 세계 최대 커피 소비국 미국과 최대 커피 생산국 브라질의 만남은 인스턴트커피로 이뤄졌다. 2016년 기준으로 미국은 세계에서 소비된 93억4278만t의 커피 중 16.3%를 혼자 먹어치웠다.

반면 브라질은 점유율이 예전에 비해 줄었지만 2016년 생산된 커피 90억9720만t 가운데 36%인 33억t을 공급했다. 소비와 생산에서 각기 엄청난 부분을 차지한 두 ‘공룡’은 상생을 위해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다. 브라질 커피 값의 폭락과 폭등이 미국 시장을 뒤흔드는 위험으로 작용해서다.

브라질과 금융거래를 하던 유럽의 큰 은행들과 미국은 스위스의 네슬레에 브라질 잉여 커피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네슬레는 이에 화답해 1938년 조지 워싱턴 커피보다 생산비율과 향미를 높인 인스턴트커피를 개발해 잉여 커피를 해결했다.

인스턴트커피를 만드는 자, 하늘이 돌보는 것인가. 네슬레가 남아도는 브라질 커피를 헐값에 구매해 인스턴트커피를 만들어 창고를 가득 채울 때쯤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6년간의 긴 전쟁에 돌입한다. 미군에게 보급되는 커피는 네슬레가 독점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인스턴트커피는 바닥이 날 지경이어서, 미국은 군인에게 주기 위해 1944년부터 인스턴트커피의 시중 판매를 금지할 정도였다. 네슬레는 한마디로 돈방석에 앉았다. 그럼에도 네슬레가 공급하는 커피만으로는 부족하자 제너럴 푸드, 스탠더드 브랜즈, 보든스 등이 인스턴트커피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엔 약 200만 명의 미군이 유럽 전선에 투입됐고, 제2차 세계대전엔 미군 1200만 명이 전선을 누빈 것으로 기록됐다. 이들뿐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인스턴트커피가 제공됐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간 군인들을 통해 인스턴트커피의 간편함이 지구촌 구석구석에 소개됐다.

뜨거운 물을 부어 간단히 마시는 인스턴트커피의 간편함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됐다. 이는 7세기 메카의 신전을 찾은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이 “커피를 몸에 담은 자는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커피를 가져가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퍼뜨린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인류 문명사에서 두드러진 대변혁을 ‘물결’에 비유한 앨빈 토플러의 화법을 커피 역사에 적용하면, 인스턴트커피 확산은 가히 ‘제1의 물결’에 견줄 만하다. 인류가 농업기술을 익혀 산업혁명-정보지식혁명의 물결을 차례로 일으켜왔듯, 인스턴트커피는 반작용이든 순작용이든 스타벅스로 상징되는 프랜차이즈 커피와 스페셜티 커피의 물결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관심은 이제 제3의 물결에 이어 제4의 물결이라 할 만한 대변혁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 것이냐에 쏠린다. 커피의 물결은 간편함과 편의성에서 좀 불편하더라도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으로 일고 있다. 인스턴트커피의 매력으로 평가되던 ‘신속함과 재치’는 불과 반세기를 지나면서 ‘견딜 수 없는 가벼움과 경박함’으로 비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박영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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