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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경제적 ‘백업’ 없으면 허사다, 삼성을 최대한 이용하라”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⑰]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문화는 경제적 ‘백업’ 없으면 허사다, 삼성을 최대한 이용하라”

  • ● 물건에는 때가 있고 주인이 있다
    ● 목숨처럼 지켰던 고구려 금동반가상
    ● 삼성이라면 믿고 빌려줬다
    ● 내가 만난 이건희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2010년 10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 [뉴시스]

2010년 10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 [뉴시스]

‘물유각주(物有各主)’라는 말이 있다. 물건에는 임자가 있다는 말이다. 특히 물건이 돌고 도는 수집의 세계는 진짜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도 있다. 콜렉터 고수가 되면 원하는 물건을 반드시 얻으려는 경쟁심이 생긴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은 어땠을까. 김재열 전 리움미술관 부관장 말이다.

“회장님은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하셨습니다.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 손에 들어오지 않아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물건에도 ‘때’가 있고 주인이 있다는 걸 아는 분 같았습니다.”

필자는 취재 과정에서 삼성가에 고미술품을 팔았던 딜러를 수소문한 끝에 만날 수 있었다. 그와의 대화 중 기억나는 말이 있다.

“미술품의 가치는 작품을 가진 사람의 힘에 의해 달라집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馬)이라도 경험 없는 젊은이가 갖고 있다면 가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회장님은 감히 말하건대, 명품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물건 값도 깎지 않았고 좋은 물건을 가져오면 수고비까지 챙겨주셨습니다. 눈빛과 태도에서 명품을 대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인간적으로도 살갑게 대우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작품을 가져다 드리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애국심이나 사명감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인 장사꾼입니다. 그런 저도 좋은 물건을 만나면 ‘이걸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에 달려가곤 했습니다.”

모든 예술작품, 특히 걸작으로 통하는 오래된 예술품에는 창작자의 예술혼이 바닥에 깊이 깔려있지만 오랜 기간 작품을 보관했던 소장자들, 또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고 수집했던 수집가들의 에너지와 혼까지 담겨 있다. 다시 고미술품 딜러의 말이다.



“국보급에 해당하는 걸작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여느 사람들과 다른 분들이 있습니다. 영혼이 깃든 물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물건을 소장할만한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을 때 팔겠다는 고집이 강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 하나하나를 살 때 소장자들에게 정말 열과 성을 다했으니까요.”

대표적인 예가 현재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고구려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년 국보 제118호로 지정)이다.

목숨처럼 지켰던 고구려 금동반가상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문화재청 제공]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문화재청 제공]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은 주지하다시피 석굴암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국보 제83호(93.5㎝)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런데 이보다 키(17.5㎝)가 훨씬 작고 전면에 녹도 많이 슬어있는 반가사유상이 국보 제118호로 지정된 것이 있으니 바로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고구려 유물이 남한에 있는 것 자체가 대단히 드물고 출토지가 확실한데다 반가사유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불상이 어떻게 이회장과 인연이 닿았을까. 여기에는 불상을 목숨처럼 지켰던 고(故) 김동현이라는 소장자의 감동적인 사연이 숨어 있다.

김동현은 우리나라 고미술계에서 전설로 통하는 금속유물 수집가이자 감정전문가이다. 일제시대 평양에서 골동상을 운영하며 우리 문화재를 지킨 그는 간송 전형필(1906~62)에 비견되곤 한다. 그는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터지는 혼란의 한가운데서 목숨 걸고 문화재를 남한으로 갖고 왔다. 그중 백미(白眉) 가 바로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반가상)이다.

조선일보 1977년 8월 7일자는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김씨에 대한 소개 글을 이렇게 싣고 있다.

“남산 밑 회현동 2가 125에 있는 김동현씨(68) 집은 모든 문이 쇠창살로 되어 있어 금고(金庫)같다. 혈육도 없이 부인과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는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40~50년 간직하고 있는 금속 유물들을 혈육삼아 지내고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고구려불(高句麗佛)인 금동미륵반가상(국보118호)을 비롯해 국보 5점과 보물 4점을 갖고 있는데, 평소엔 조흥은행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다. 노령(老齡)에도 금속과 같은 강한 인상을 풍기는 김옹(金翁)은 ‘쥐면 놓지 않는 집념(執念)의 인간’으로 그 계통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김씨는 일제 때인 1940년 평양 인근 공사장 인부로부터 우연히 금동반가상을 입수하게 된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몇 점의 문화재만 갖고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가 고구려 불상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번져 팔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판자촌에 방 하나를 얻어 부두 노동자로 살면서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3억 원에 사겠다는 흥정도 거절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생전에 인터뷰(조선일보 1977년 4월 17일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해방 전 일본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을 걸며 불상을 팔라고 흥정을 해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애초 문화재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것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였어요. 월남할 때도 파손되거나 훼손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서울 길까지 답사한 뒤 옮겼습니다. 살기 어려웠어도 팔 생각을 해본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나의 목표는 세계 어디서도 없는 것, 감히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희귀한 것을 모으는 겁니다. 한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손댈 수 없는 진품들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말도 못합니다. 반가상을 함부로 꺼내보거나 만질 수 없어 은행금고에 넣어두고 사진을 찍어두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나이 여든이 다 될 무렵인 1995년 이건희 회장에게 양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음은 이종선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의 책 ‘리 콜렉션’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동현 부부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건강에 자신을 잃은 그는 ‘고구려반가상’과 ‘삼존불’, 고분출토의 많은 금속유물들의 거취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호암미술관 학예실장으로 근무하던 나와의 만남이 우연히 이루어졌다. 첫인상 자체가 돈에 욕심이 없어보였다. 내게는 첫 대면부터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정중하게 대해왔다. 그에게는 오로지 ‘고구려 반가상’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고 자기보다 더 아껴줄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곳이 나타나 고맙다고 젊은 내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건희 부회장에게 보고하고 우선 집부터 옮겨드렸다. 1980년대 초 그는 자신의 수집품 상당수를 호암미술관에 양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90년대 초 마침내 고구려반가상을 이건희 회장에게 양도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심경을 밝혔다.

‘남이 갖고 있지 못한, 그리고 본 사람도 없을 이 귀중한 반가상을 나 혼자만이 갖고 있다는 어떤 긍지 때문에 이때까지 세상에 내놓질 않았었다. 자식이 없는 우리 부부에게 이 불상은 오랫동안 아들 구실을 해주었다. 이것 때문에 나는 24년 동안 줄곧 불안과 근심, 초조 속에 살아왔다. 줄곧 땅속에다 묻어 작품을 보관해왔다. 그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혔던 작품을 어느덧 세상에 내놓고 보니 마음이 착잡한 한편 후련하기도 하다. 이제부터 나는 편히 잠을 자게 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김 선생 댁에 자주 들러 이야기 상대가 돼 드리라’고 까지 지시했다. 그는 간장만 먹으면서 몇 십 년을 반가상을 지키며 살아왔다. 청와대 가까운 내수동에 마련해준 거처를 다시 방문했을 때에도 그의 생활은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목숨처럼 지켜온 반가상이 손을 떠나서 그랬는지 그는 몇 년 더 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그 분 같은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국보 제118호 고구려금동미륵보살반가상. 이 불상은 전면에 녹이 슬고 불에 탄 흔적도 있으며 뺨을 짚었던 오른손은 없어져 녹록치 않은 사연을 지녔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금속유물수집가 고 김동현 씨의 목숨을 건 보존 노력이 있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제공]

국보 제118호 고구려금동미륵보살반가상. 이 불상은 전면에 녹이 슬고 불에 탄 흔적도 있으며 뺨을 짚었던 오른손은 없어져 녹록치 않은 사연을 지녔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금속유물수집가 고 김동현 씨의 목숨을 건 보존 노력이 있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제공]

삼성이라면 믿고 빌려줬다

이번에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의 규모와 내용을 접한 미술인들은 대한민국의 문화적 수준을 그야말로 세계일류로 도약시킨 계기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삼성가와 거래했던 한 미술상의 말이다.

“기증된 미술품 중에는 제가 팔았던 작품들도 포함돼 있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복잡했습니다. 그 작품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마음을 쓰던 저의 지난 일도 생각났고, 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서 구매해 자식처럼 아꼈던 이 회장의 심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이건희 컬렉션’은 정말 세계적인 겁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이런 문화적 식견을 가졌다고 들은 적이 있나요. 이번 일은 기업인의 품격과 대한민국의 문화적 국격을 메이저리그 급으로 끌어올린 사건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회장은 사업과 예술의 혼연일체를 통해 진정으로 세계 일류가 되려고 했던 분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싸구려 ‘메이드인 코리아’를 세계 일류 반열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이 회장의 문화에 대한 기여는 삼성의 성장과 함께 했다는 것이 미술계 관련자들의 공통된 증언들이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말이다.

2016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분청사기 전시회. [리움미술관 제공]

2016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분청사기 전시회. [리움미술관 제공]

“호암갤러리가 기획한 고려불화특별전, 분청사기 명품전, 대고려전, 조선전기 국보전, 조선 목가구 대전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전시였습니다. 이런 전시들은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우리 것만 갖고는 부족하니까 외국에서 빌려와야 하는데 신뢰가 없으면 작품을 빌려주기는커녕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고려 불화전을 할 때 일본 사찰에서 빌려온 수월관음도도 처음엔 빌려줄 수 없다고 하다가 삼성이 한다니까 빌려준 겁니다. 속옷 뿐 아니라 겉옷까지 일일이 금 문양으로 새긴 귀한 작품이라 일본 쪽에서는 몇 번이나 ‘잘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높이가 4m50cm, 폭이 3m가 넘는 대작이어서 진열장에 넣기도 어려워 가져오느라 돈도 많이 들었지요.”

김재열 전 부관장은 1982년부터 25년 간 호암과 리움 미술관에 있으면서 대한민국과 삼성의 성장을 또 다른 앵글에서 지켜보았다고도 했다.

“1982년에 호암 미술관이 개관해 선진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들이 오시면 안내를 맡았는데, 당시만 해도 삼성이나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잘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 소장품들의 격을 보고 ‘어떻게 이런 작품들이 개인 박물관에 있는 거냐’며 놀라워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유명 대기업 오너, 회장님들, 경제인들은 한국의 도자기나 고미술품 지식이 상당했는데, 호암미술관 소장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를 대하는 눈빛과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 삼성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고, ‘이건희’라는 기업인이 명품을 알아보고 수집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는 게 차차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미술관 박물관 관계자들이 ‘부럽다’는 말을 할 정도가 됐습니다.”

내가 만난 이건희

2010년 10월 11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 개막식에 참석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가운데)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2010년 10월 11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 개막식에 참석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가운데)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이건희 회장의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는 문화계 거장들이 짧게 쓴 ‘내가 만나본 이건희 회장’이란 글들이 수록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눈에 포착된 고인의 모습은 기업인이라기보다 예술가였다는 점이다. 대문호인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 선생은 고인의 눈빛을 예사롭지 않게 보았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서 세상을 응시하는 듯 한 눈빛이었다. 웃는 모습은 스스로워(수줍고 부끄러워하는 느낌) 하듯, 그러나 천진했다…이 회장은 내 눈에 매우 독특하게 비쳤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면 비범한 것은 당연하겠으나 활달해보이지 않았다. 능란하고 세련돼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섬세하고 치밀하고 스스로워 하는 듯 한 그 점 때문에 독특했다. 창조적 감성, 그것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생전에 고인과 깊은 교류를 나눈 것으로 알려진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화백도 고인을 “사업가라기보다 어딘가 투철한 철인(哲人)이나 광기를 품은 예술가로 생각되었다”(현대문학 3월호)고 했다. 이런 시각들은 이번에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인사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리움미술관은 이 회장님 부부가 20여 년에 걸쳐 준비하고 기획한 것입니다. 이 회장님을 처음 뵌 건 일이 진행 되는 중에 승지원에서였습니다. 줄곧 들으시는 편이었는데 많이도 길게도 하시는 법 없이 한 마디 한 마디 불쑥불쑥 던지는 말씀에서 굉장히 어떤 내면적인 깊이를 느꼈습니다. 처음 뵌 이후부터 제 머리 속에는 ‘철학자 경영인’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습니다. 뭔가를 깊이 보는 분이란 느낌, 그래서 그 분 앞에서는 그냥 다 벗겨지는, 영어로 ‘네이키드(naked)’ 해진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내가 다 노출되어 속일 수가 없다는 느낌…아시다시피 홍라희 (전) 관장도 이미 굉장한 예술적인 안목을 갖고 계신 분이잖아요. 시아버지 호암 회장님은 고미술품이 오면 며느리가 옆에서 지켜보길 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인사동에서 물건을 사보라고 하면서 현장 경험도 많이 시켰구요. 며느리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 제가 감히 생각하기엔 문화적인 후계자라는 사명을 주고 싶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 회장님 부부는 리움미술관 건축을 위해 전 세계 모든 좋다는 뮤지엄들은 다 돌아봤을 겁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들도 많이 보고요. 유럽에 갔을 때 동행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열심히 다니시는지 젊은 사람들도 그 에너지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게 지금 리움까지 온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이 회장님이 좀 더 고미술 쪽이라면 홍 관장님은 좀 더 현대미술 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굉장히 절묘한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희 컬렉션’은 두 분이 같이 뜻을 모아 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이건희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기억하는 증언들도 있다.

“사람들이 지레 얼어서 그런 거지 차분하고 조용하고 무엇보다 남을 배려하는 분이었습니다. 권위 의식 같은 게 안 느껴졌으니까요.”(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회장님 말씀은 경상도 말로 ‘억수로’ 사투리가 심해 저도 경상도 사람인데 못 알아듣는 때가 있었습니다. 조용조용하게 말씀하셔서 안 들릴 때도 있었고요. 그럴 때마다 항상 홍 관장님이 통역을 해주셨습니다(웃음). 회장님은 굉장히 소탈한 분이셨습니다. 작품을 볼 때도 그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보셨는데 도자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셨지요. 도자기를 잡을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너무 긴장해도 안 되고 약간 ‘릴렉스’ 하면서 적당히 잡아야 합니다. 잡는 부위들도 따로 있는데 회장님은 ‘요 부분은 괜찮은데 요쪽은 수리됐네?’ 하시며 능숙하게 돌리면서 말씀하셨지요. 말수는 적으셨어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셨습니다. 경상도 사람 특유의 무뚝뚝함은 있었지만 ‘수고했다’면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셔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던 분이었습니다. 고인이 원했던 건 '한국 미술의 재발견'이었습니다. 국수적이거나 민족적 입장에서 우리 것이 좋다는 게 아니라 세계 명품과 비교했을 때 객관적으로 우수하다는 걸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거예요. 그런 것들이 미술관을 통해서 구현이 된 거죠. 그러면서 문화라는 건 경제적인 백업이 없으면 허사다,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위해 삼성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김재열 전 부관장)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예술이 갖는 가치는 무엇일까. 호암은 생전에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다. 그 예술이란 인간정서의 고양을 최고 최선의 것으로 순화하여 표현해내는 인간의 정신활동이다. 오랜 세월에 바랜 서화 도자기 철물 등에서 옛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보다 좋은 것, 보다 아름다운 것을 좇는 인간의 정열을 함께 감지한다. 거기에는 인류의 역사가 있고 영원의 낭만이 있다. 그것들은 때로 침묵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위로와 용기를, 들떠 있을 때는 자제를 던져주곤 한다.”

피 말리는 결정과 선택 앞에 선 기업인들에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호암의 예술론을 읽다보면 작품을 통한 예술가들과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에너지를 최대로 끌어올리려 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이건희 회장은 예술과 문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컬렉션이나 전시에서 세계 최고, 초일류를 지향했던 그는 뜻밖에 ‘엘리트 문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의 책 중 ‘문화 인프라를 키우자’라는 글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이건희 미술’편을 마치고자 한다.

“외국 생활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문화생활에 관한 것이다. 작은 도시라도 전통 깊은 교향악단이나 훌륭한 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부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정작 부러워하는 것은 하드적인 인프라 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한 그들의 마음자세나 태도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일상생활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 외국의 도시에서는 이른 아침이면 유명한 유적지나 문화재 주변에서 산책이나 조깅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문화재가 생활의 일부가 됨으로써 정신적인 문화인프라도 풍부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문화재하면 ‘보호’라는 말부터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조깅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곳에는 예외 없이 튼튼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선진국들의 문화가 ‘열린 문화’라면 우리는 ‘닫힌 문화’다. 우리는 일단 문화라고 하면 먹고사는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는 21세기에 문화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국들처럼 박물관, 전시관, 음악당 등 문화시설을 충분히 갖추어야 할 것이다…고급문화만이 훌륭한 문화는 아니다. 사람들의 문화적 감수성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면서 듣고 보며 형성되는 것도 있다. 옆집 아저씨나 아줌마가 연주하는 동네음악회를 보며 자란 아이와 어쩌다 부모 손에 이끌려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공연을 보러가는 아이 중에 누가 더 문화적 안목이 커질지는 자명하다. 특별한 사람들이 향유하는 고급문화만을 문화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겐 기껏해야 비뚤어진 문화 엘리트 의식만 생길 뿐이다. 기업들도 이러한 문화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기업의 문화 활동이라면 문화행사에 돈이나 내는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업 스스로도 사회조직의 하나로서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다. 앞으로는 기업이 만드는 제품에도 그 기업의 문화와 이미지가 담겨야 한다. 문화적인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문화적 자산이 만들어지면 그 효과는 신제품 몇 개 개발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다. 기업들은 거창하게 ‘메세나 운동’같은 것만 찾을게 아니라 사회전체의 문화적 인프라를 향상시키는 데 한몫을 해야 한다. 기업자체가 사회의 일원이고 21세기는 문화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금동반가상 #삼성은믿는다 #고려불화특별전 #내가만난이건희



신동아 2021년 8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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