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환상극장] 오늘은 ‘태백산신’ 노산대군 승하하신 날!

  • 윤채근 단국대 교수

[환상극장] 오늘은 ‘태백산신’ 노산대군 승하하신 날!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궐내각사인 승정원에서 숙직 번을 서고 있던 윤군평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칠품직 주서로서 당일 기록해야 할 문서를 이미 다 처리한 그로선 달리 할 일도 없던 터였다. 이조에서 보낸 전령이 도착해 여러 차례 헛기침을 하고서야 그는 겨우 졸음에서 깨어났다. 전령이 속삭였다.

“윤 주서, 이조판서께서 급히 찾으시네. 함께 가세.”

판서라면 율곡 이이였다. 깊은 밤에 궐외각사인 육조의 신료가 궐 안에서 숙직 중인 승정원 주서를 급하게 찾을 일은 딱히 없어 보였다. 상대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던 군평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물었다.

“율곡 선생께서 말직인 나를 어찌 알고 찾으시오? 혹 잘못 알고 찾아오신 건 아니오?”

고개를 저은 상대가 군평의 옷깃을 잡아끌며 대답했다.



“결단코 아니니 어서 따라나서시게.”

관모를 쓰고 예복을 단정히 한 군평이 청사 섬돌 위로 내려서며 다시 상대에게 물었다.

“잠깐 경회루라도 거닐며 우선 잠이나 깨야겠소. 그리 급한 일은 아닐 듯한데?”

한숨을 내쉰 상대가 군평을 빤히 노려보며 대답했다.

“금군들이 우릴 발견하면 또 이것저것 캐물을 것 아닌가? 그냥 빨리 가세!”

경복궁 서문을 빠져나와 육조로에 접어들 무렵 군평의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늦여름 공기는 여전히 무더웠고 육조 청사 대부분은 불이 꺼져 어둠에 잠겼건만 이조 청사 쪽에서만 희미한 불빛들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군평은 문득 자신이 제법 중요한 인물이라도 된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돌아오지 않는 어사들

“어사들이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군평이 떨리는 음성으로 율곡을 향해 거듭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율곡이 목소리를 낮추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위아래로 살며시 흔들며 대답했다.

“그래! 지금 윤 주서에게 말한 그대로야. 강원도 영월 땅으로 보낸 어사가 지금까지 모두 다섯 명이었어. 다섯 다 감쪽같이 실종됐지.”

말문이 막힌 군평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희미하게 다시 물었다.

“전하께 윤허를 얻어 이조에서 몰래 어사를 내려보냈다면, 그럼 분명 위험한 기밀 임무였을 것 같습니다. 헤아려보건대, 이번에 저를 보내실 심산이시군요?”
등잔불빛을 받은 율곡의 눈빛이 잠시 휘황하게 빛났다. 그의 입은 일자로 굳게 닫혀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다.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율곡이 천천히 입을 뗐다.

“제법 영리하구나. 어차피 당상관을 어사로 내려보낼 순 없지 않겠느냐? 사라진 다섯 어사 모두 젊은 사헌부 관원 가운데 민첩한 자들이었다. 분명 뭔가를 발견하면 지체 없이 바로 움직였을 게다. 내 생각엔 그게 화를 부른 듯하구나.”

“그렇다면 제가 느리고 우유부단해 낙점된 것입니까?”

초점이 흐려진 율곡의 눈은 잠깐 웃고 있었다. 급히 정색을 한 그가 대답했다.

“어찌 그것 때문만이겠느냐? 너는 기록을 담당해 온 주서고 당연히 습관적으로 매일 일기를 써오지 않았겠느냐? 강원도로 가게 되면 보고 들은 것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매일 파발로 내게 보내라. 내 명령 없인 절대 움직이지 말고. 알겠느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군평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분부를 받들긴 하겠습니다만, 그 분대어사라는 게 은밀하게 암행하는 일이고, 또 잔뜩 위험한 일인지라, 저같이 눈치 없고 잠이 많은 게으른 자가 과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팔짱을 끼고 군평을 그윽이 응시하던 율곡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너를 선발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첫째, 너희 파평 윤문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였다가 최근에 우리 사림 편으로 넘어왔었지? 군평이 네 녀석 집안이 선왕 대에 활개 치던 그 소윤파가 아니었더냐? 맞지? 그런 불쌍한 표정 짓지 말거라. 나무라는 게 아니다. 바른 학문인 성리학으로 되돌아왔으니 가상할 뿐이다.”

탁자 옆에 놓인 놋그릇에서 잣을 한 줌 쥐어 군평에게 내주며 율곡이 다시 말했다.

“고소하니 먹어봐라. 아무튼 그런 너의 모호한 집안 이력이 이번 임무엔 꽤 도움이 된다. 아무도 한량 행세하는 너로 인해 긴장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둘째! 군평이 네 외가가 강릉 아니더냐? 나도 그러하다. 그 인연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맹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군평을 바라보며 크게 입맛을 다신 율곡이 덧붙였다.

“이제 임무에 대해 말해 주마. 이 모든 건 주상전하의 깊은 뜻과 연결되어 있다.”

선조의 은밀한 계획

승정원 주서 윤군평을 만나기 6개월 전인 이른 봄의 어느 날 저녁, 율곡은 경복궁 편전에서 선조 임금을 독대하고 있었다. 유난히 혈기왕성해 보인 임금은 무척 들떠 있었고 말투마저 평소보다 조금 거칠었다.

“이판 대감!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게 대체 누굽니까? 과인 아니오? 과인이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보존하고 성정을 기른다는 그 네 글자를 써서 그대들에게 내렸지 않았었소? 그때부터 조선은 비로소 사림들의 나라가 된 것이오!”

긴장해 고개를 숙인 율곡은 대답 없이 머리만 끄덕여 경의를 표할 따름이었다.

“빈말이라도 변죽 울리는 말씀은 안 하시는구먼? 과인은 그런 이판이 싫진 않소! 다만! 요즘 그걸 뭐라더라,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며 편 가르는 짓, 오호라! 사림들끼리 파벌을 짓고 당색을 만들었다지?”

머리를 조아린 율곡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신 차마 변명드릴 말이 없나이다. 살피고 살펴 그런 기미를 싹부터 자르겠나이다.”

“어디 그게 이판 혼자만의 힘으로 되겠소? 조회할 때부터 동인은 궐 동문으로, 서인은 서문으로 입궐한다고 들었소. 이판 대감은 진즉부터 왜병들이 조선을 침략할 거라며 과인을 겁줘 오지 않았었소? 과연 왜국이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귀담아는 들어주지 않았었소? 그런데 소위 사림 출신이라는 신료들은 태평스레 파당이나 짓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소?”

한참을 씨근대며 사림들을 성토하던 임금은 나른한 음성으로 말투를 바꾸며 이렇게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임금이 바로 서야 나라도 바로 서는 법! 조선의 운명은 충성할 충(忠) 한 글자에 달려 있다고 과인은 보는데, 이판 생각은 어떠시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하늘의 도가 지엄하다 하나 임금의 자리를 통해 실현될 때만 의미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말이오! 우리 함께 좋은 본보기를 한번 만들어보십시다!”

“어떤 본보기를 말씀하시는지요?”

“세조 임금님 때 절의를 지키다 죽은 자들 말이오. 그 여섯 신하는 비록 당시엔 역적이었지만, 어찌 보면 천하의 충신들 아니겠소? 과인은 그렇게 봅니다만.”
말없이 고개를 들어 용안을 마주한 율곡이 때론 염치없이 변덕스럽고 때론 말할 수 없이 계산속에 밝은 필부 한 사람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임금이 덧붙였다.

“그대들이 천도다 뭐다 떠들며 서로 싸우지만, 바로 이 사람 없이 뭔들 하나라도 제대로 되겠소? 임금에게 충성하는 게 곧 천도를 따르는 길이요. 과인에겐 어떤 상황에서도 목숨을 바칠 진정한 충신들이 필요하오!”

역적을 충신으로 만드는 방법

율곡의 말을 다 들은 군평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상감께선 사림들이 주장하는 천도가 왕도를 누를까 봐 불안하신 거로군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율곡이 대답했다.

“그렇다. 주상께선 폐주인 연산군처럼 자신도 신하들로부터 느닷없이 버려질까 노심초사하고 계시다. 누구도 잘 믿질 못하는 성정이시지. 어쩌겠느냐? 그런 분을 임금으로 받드는 것이 또한 우리 운명인 것을.”

한참을 머뭇대던 군평이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판께서 얼마 전 지으신 ‘김시습전’도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로군요?”

한숨을 몰아쉰 율곡이 다시 잣 한 움큼을 집어 군평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잣을 참 잘 먹는구나? 어서 마저 먹어라. ‘김시습전’은 전하의 명으로 지은 게 맞다. 퇴계 이황 선생은 그 글을 보고 날 나무랐다고 하더구나. 정치 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이상적인 생각일 뿐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글에서 주장하신 심유적불 논리는 조금 이상했습니다. 김시습이 마음은 유가 선비였지만 정치 상황 때문에 자취만 불가에 뒀다는 뜻 아니셨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김시습은 분명 유가를 배반하고 승적에 몸을 던진 스님이었습니다!”

군평의 손바닥에 흘려주던 잣을 도로 거둬 놋그릇에 담으며 율곡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입바른 말을 하긴 쉽다. 하지만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만으론 돌아가지 않는다. 현실 속에 임금께서 버젓이 살아계시고, 그분을 잘 보필해 태평성대를 이루는 게 우리 목적 아니겠느냐?”

“원칙이 그렇다는 말이었습니다.”

“전하께선 사육신을 충신으로 널리 현창하고 싶어 하신다. 그렇다면 김시습을 비롯해 살아남아 충절을 지킨 자들도 생육신쯤은 되는 게 맞지 않겠느냐? 나라에 충신이 느는 게 뭐 나쁠 게 있겠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사림들 사이에서 그 글 때문에 수군대는 자들이 많았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나서서 벼슬살이하는 자들은 멀리서 물 구경이나 해선 안 된다. 물에 뛰어들어 노를 저어야지! 아니 그러냐? 그건 됐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길 잘 들어라. 그래야 네 목숨도 보전하고 임무도 완수할 수 있을 게다.”

“도대체 어디로 암행을 떠나는 것입니까? 그것부터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사라진 다른 어사들과는 달리 움직여보도록 하자꾸나. 곧장 영월로 가지 말고 원주목 관아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심어둔 아전을 만나 도움을 받되, 절대 함부로 나서지 말고 은인자중해야 한다. 알겠느냐?”

원주목 아전 신군평

원주목에 도착한 군평은 아예 어사용 마패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지방관아를 감찰하려는 목적 자체가 없었기에 그저 외가에 잠시 놀러온 팔자 좋은 관리처럼 행동하기만 하면 됐다. 강릉 외가를 거쳐 다시 원주목으로 돌아온 군평은 율곡이 심은 협조자가 접선해 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방에서 회계출납을 맡은 늙은 아전 하나가 깊은 밤 그가 묵던 관아 객사로 찾아왔다. 자신을 소개하는 상대의 말을 들은 군평은 처음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원주목에서 출납을 담당하는 계사(計士) 신군평이올시다.”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군평이 띄엄띄엄 응대했다.

“나도, 군평이요, 윤군평! 살다 보니 참, 이런 희한한 일도 있구려.”

키득거리며 웃던 계사가 몇 번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소인도 선비님 함자를 처음 전해 듣고 한참 웃었습니다. 전 이 판서님 외가 쪽 먼 친족입니다. 믿고 의지하셔도 좋습니다!”

군평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선발된 데에는 이름도 한몫했을 거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건 율곡 특유의 해학이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불신의 뭉게구름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계사 양반은 제가 왜 여기 왔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봇짐에 가득 담아온 지필묵을 방에 늘어놓으며 계사가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뭘 매일 쓰실 거라는뎁쇼. 그래서 여기 잔뜩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또 뭐라더라, 영월서 사라진 어사들을 추적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지필묵을 분류해 방구석에 가지런히 배열한 군평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상대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것 말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소.”

갓을 벗어 벽에 걸고 다시 주저앉은 계사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뗐다.

“아직 저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갈 참입죠.”

“자고 간다라? 처음 만났는데, 여기서?”

고개를 크게 끄덕인 계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나이도 많이 들어 잠도 없고, 뭣보다 계사라는 업이 본래 퇴청이란 게 없습니다만.”

불길한 소설책

강원 영월군 단종 유배지. [동아DB]

강원 영월군 단종 유배지. [동아DB]

영월 청령포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첩보가 입수된 건 군평이 객사 생활을 시작한 지 보름쯤 지날 무렵이었다. 군평은 계사의 도움으로 급히 한양에 파발을 띄웠다. 열흘 만에 도착한 율곡의 답신은 간단했다. 원주목사에게 관병을 요청해 신변 보호를 확실히 한 뒤 영월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군평은 즉시 원주감영으로 찾아가 목사에게 자초지종부터 설명해야 했다.

“이게 저 유명한 호남의 반골 선비 임제가 지은 ‘몽유록’이라고?”

책자를 훌훌 넘겨가며 목사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이에 군평이 목소리를 약간 높여 대답했다.

“정확히는 ‘원생몽유록’입니다. 벼슬을 포기하고 이리저리 세상을 떠돌던 임제가 여러 해 전 영월에 들렀다가 지었다는 소설이지요.”

“임제가 아직 살아 있다 들었는데?”

“살아 있긴 한데, 고향인 전라도 광주로 낙향해 있는 데다, 그 광달한 자가 소설 지은 배경에 대해 구구절절 말해 줄 리가 있겠습니까? 칼부림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지요?”

“하긴 성깔이 대단하다지? 뭐 조금 미쳤다고도 하더구먼. 근데 이 책이 뭐 어쨌다는 거지?”

“그 소설 속 주인공이 원호 선생이시지 않습니까? 여기 원주 출신으로 단종 임금님께 충절을 바치다 돌아가신.”

“흠. 그건 그렇다고 들었지. 단종께서 폐위돼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시자 원공께서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까지 따라와 칩거하다 생을 마감하셨다지?”
고개를 끄덕인 군평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의 주상께서 율곡 선생에게 원호 선생의 충절을 새삼 현창해 세상에 널리 알리도록 명하셨다고 합니다.”

눈썹을 잠시 찡그린 목사가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김시습을 그 뭐지? 생육신인지 뭐 그런 걸로 높였던 것과 같은 얘기로군?”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나와 같은 사림 출신들은 그게 별로 마뜩지가 않네. 율곡 선생이 왜 그런 이상한 짓을 하신 건지 도통 모르겠어. 그건 그렇다 치고, 원호 선생을 높이자는 데에는 반대할 사림이 아예 없을걸? 승려였던 김시습과는 경우가 아주 달라. 뭐가 문제지?”

“지금 보여드린 ‘몽유록’이 문젭니다. 율곡 선생께서는 그 내용이 심히 불길하다 하셨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원호 선생께서 청령포를 배경으로 한 꿈을 꾸다 귀신이 된 사육신, 거기다 더해 원귀가 되신 노산군(단종)까지 알현한다는 얘기지 않습니까?”

“나야 안 읽어봐서 몰라. 불쾌한 글이로군그래.”

“율곡 선생께선 임제가 청령포에서 뭔가를 직접 보고 이 글을 지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계십니다. 비분강개함이 넘치는 그 내용이 너무 격렬하고 처절해, 뭐랄까, 생동하는 역모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셨습니다. 께름칙하셨던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역모 기운이 있다면 당장 이 글을 지은 임제를 잡아다 목을 치면 되는 거 아닌가?”

“제 말을 제대로 들으신 게 맞습니까? 주상께선 원호 선생의 충절을 널리 알리고자 하십니다. ‘몽유록’은 그냥 덮고 넘어가면 됩니다. 다만 혹여 청령포에 원호 선생과 관련된 뭔가 불길한 게 있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됩니다.”

“뭐가? 진짜 귀신이?”

“그럴 리가요! 그걸 탐문하려고 어사를 다섯이나 영월로 보냈는데.”

“보냈는데?”

“모두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청령포 귀신놀이

목사가 이끄는 관병들은 청령포 건너편 산기슭에 숨어 은밀히 대기하고 있었다. 영월 상민 모습으로 변복한 채 청령포 들어가는 마지막 배에 가까스로 끼여 탄 군평과 계사는 숨을 멈춘 채 놀라운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칠흑 같은 밤이 되자 이 천애의 요새 곳곳에 숨어 있던 재주꾼들이 하나둘씩 나타났고, 갑자기 사방에 횃불이 솟아올랐다. 신선 가면을 쓴 재주꾼 두목이 노래하듯, 절규하듯 외쳤다.

“오늘은 어떤 날인가? 과연 오늘은 시월의 어떤 날인가?”

삼삼오오 배를 타고 모여든 영월 사람들이 “태백산신이 되신 노산대군께서 승하하신 날!”이라고 목 놓아 외쳐댔다. 이윽고 사육신과 노산군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쓴 인물들이 무대 중앙에 나타났다. 그 대열 끝줄에 있던 인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에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가 중앙으로 나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로 말하자면, 이곳에서 태어나 노산대군을 위해 살고 죽은 원호라오!”

우렁찬 함성이 한차례 군중 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원호 가면을 쓴 사내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꾼 기막힌 꿈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소. 이제 이 얘기에 울고 웃으며 저 옛날의 역적들을 꼭 기억합시다! 사림이라는 작자들은 요즘 한양에서 권세를 잡더니 배가 불러져 노산대군을 잊은 지 이미 오래요. 우리가 그들 대신 저 역적들의 혼들을 이곳으로 불러내 거듭 갈기갈기 찢어 죽입시다!”

이후 이어진 공연은 원나라 희곡에서 유래한 듯 보였는데, 조선 탈춤과 결합해 전혀 새롭게 변형된 정체불명의 잡극이었다. 출연 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비분강개한 노래를 부른다는 내용은 임제의 ‘몽유록’과 매우 흡사했다. 군평이 계사 귓속에 대고 속삭였다.

“율곡 선생께서 염려하셨던 게 바로 이거였소. 이 역시 충절을 사모하는 민초들의 마음임엔 틀림없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소? 노산군을 숭모하려 세조 임금을 역적으로 몬다면 그것도 반역인 거요. 충과 불충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광기에 휩싸인 공연은 오래도록 이어지다 새벽녘에 끝났다. 재주꾼 두목이 느닷없이 군중을 한쪽으로 모으며 소리쳤다.

“한양에서 이상한 간자들이 우릴 염탐하러 왔던 거 생각들 나시오? 이 외진 곳에 언제 한양 것들이 제 발로 오기나 했었던가? 유구한 우리 영월의 전통을 엿보고 흉보러 온 게 아님 뭐였겠소?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검신을 할 터이니, 어느 누구도 이 청령포를 맘대로 빠져나가지는 못하오!”

얼굴이 창백해진 군평이 계사 쪽을 돌아봤다. 계사가 얼굴을 떨며 속삭였다.

“아무래도, 말입니다. 도망쳐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배가 있는 물가를 향해 뛰고 또 뛰었다. 그들 뒤를 재주꾼들이 쫓았다. 물가까지는 어떻게 닿는다고 해도 그 앞은 거칠게 휘감아 흐르는 강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군평이 물가에 이르러 쓰러질 무렵, 공중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건너편 강가에 도열한 관병들이 재주꾼들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율곡의 죽음

군평이 한양으로 돌아와 율곡을 만났을 때, 율곡은 이미 병들어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급속히 쇠약해져 갔다. 두 달을 넘기지 못한 이듬해 1월, 마침내 율곡은 한양 대사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당연하게도 ‘원호전’은 끝내 지어지지 못했고, 군평은 술과 친구를 좋아하던 평범한 옛날로 되돌아갔다. 노산군을 왕으로 복위시키려던 율곡의 애초 계획 역시 차츰 희미해지더니 험악해지고 있던 전쟁 기운 속에 아예 잊히고 말았다. * 이 작품은 임제의 ‘원생몽유록’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2년 3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목록 닫기

[환상극장] 오늘은 ‘태백산신’ 노산대군 승하하신 날!

댓글 창 닫기

2022/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