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윤석열에게도 열광과 환멸… 박정희·DJ 잇는 리더십이 없다

[김호기의 고전으로 읽는 21세기] ‘군주론’과 ‘직업으로서의 정치’로 읽는 한국 정치

  •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2023-07-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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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키아벨리가 제언한 군주의 통치술

    • 정치란 설득과 기만의 이중 과정

    • 르네상스의 자장 안에 놓인 사유

    • 베버의 ‘학문적 유언장’ 같은 위상

    • ‘악마적 수단’과 ‘천사적 대의’

    • 책임윤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 베버가 겨냥한 ‘규범적 마키아벨리즘’

    • 열광의 시간 매우 짧은 尹 정부 1년

    ※ 국내 대표적 사회학자인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이번 호부터 ‘김호기의 고전으로 읽는 21세기’를 연재한다. 고전은 ‘죽은, 불변의 텍스트’가 아닌 ‘살아 있는, 변화하는 텍스트’다. 김 교수가 21세기 한국에 발을 딛고 인문사회과학의 고전을 다시 읽을 예정이다.

    박정희, 김대중,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동아DB]

    박정희, 김대중,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동아DB]

    널리 읽히는 모범적인 책들을 고전(古典)이라 한다. 시대의 구속을 초월한 걸작들이다. 예를 들어 서양의 경우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울프의 작품들은 고전이다. 우리의 경우 신라 향가와 고려 가요, 정철의 가사와 윤선도의 시조, 박지원과 이옥의 산문이 고전으로 꼽힌다.

    문학 작품만 고전은 아니다. 서양의 경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칸트와 헤겔, 니체와 프로이트의 저작은 사상의 고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해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존 롤스의 ‘정의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도 사상의 고전 반열에 올라 있다.

    어느 나라든 대학에 들어오면 교양 강의를 듣는다. 교양 교육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바로 ‘고전 읽기’다. 서구 대학의 경우 고대 플라톤의 철학부터 20세기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까지 고전을 읽게 한다. 이들의 저작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사회란 어떤 방식으로 생산·재생산되는지에 관해 시대적 구속을 초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배우고 깨우치는 것은 대학 교양 교육의 목표 가운데 하나다.

    고전의 목록이 짧은 시간에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고전인 저작은 없다. 책을 통해 나타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유 및 성찰은 시간이 흐르면서 평가가 달라진다. 역사가 구속하는 풍화를 견뎌내어 지속적인 감동과 설득을 안겨주는 작품과 저작이 비로소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다.



    더하여, 기성의 고전이 영원한 고전일 수 없다. 역사란 인간과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만들어가는, 끝없는 변화가 진행되는 나선형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기성의 고전에 대한 평가 역시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어떤 책은 철 지난 고전으로, 어떤 책은 새로운 고전으로 재평가된다.

    이 기획은 인문사회과학의 고전을 다시 읽고 그것이 21세기 한국 사회에 주는 함의를 탐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21세기 우리 사회가 마주한 문제는 20세기의 문제와 사뭇 다르다. 저출생과 고령화, 인공지능(AI) 시대 일자리 창출, 혁신경제와 복지국가의 공존, 계급·젠더 불평등 완화, 그리고 기후 위기 대응 등은 우리 사회를 새로운 시험대 위에 세워두고 있다.

    내가 고전과 21세기 한국 사회를 연결하려고 한 것은 역사의 복합적, 나선형적 특징을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과거·현재·미래는 지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우리 현대사는 지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결합해 나선형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이 지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독해하고 분석하고 전망하는 데 고전은 여전히 의미 있는 텍스트이자 유용한 준거다.

    인간과 사회는 본디 변화하는 것이자 변화하지 않는 것 아닌가. “만물은 흐르기에 인간은 두 번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갈파한 이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라면,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고 노래한 이는 시인 김수영이다.

    들어가는 말이 길어졌다. 앞서 말했듯 진정한 고전은 역사가 구속하는 풍화를 견뎌내는, 죽은 텍스트가 아닌 살아 있는 텍스트다. 그 첫 번째 텍스트로 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1469~1527)의 ‘군주론(Il Principe)’과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의 ‘직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를 골라봤다.

    한국에서 출간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Il Principe, 까치, 2015)’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 나남, 2019)’. [각 출판사]

    한국에서 출간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Il Principe, 까치, 2015)’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 나남, 2019)’. [각 출판사]

    마키아벨리의 날카롭고 깊은 통찰

    정치 또는 정치가를 지칭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마키아벨리즘’ 또는 ‘마키아벨리스트’다. ‘마키아벨리적’이라는 표현은 영악하고 음흉하며 부도덕한 정치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게 한 책이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저술한 ‘군주론’이다.

    ‘군주론’은 군주의 통치술을 다룬다. 이 책은 기존의 미덕과는 상반되는 통치술을 제언해 유명해졌다. 사기, 기만, 억압, 폭력의 비도덕적 행위가 통치자에게 허락된다. ‘군주론’을 통해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은 정치 내지 정치가의 비도덕성을 일컫는 일반명사라는 이미지를 표상하게 됐다.

    그런데 의문이 제기된다. ‘군주론’이 비도덕적 정치가의 찬가에 불과하다면, 왜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읽히는 걸까. 대답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군주론’은 사기와 기만의 정치, 억압적 군주정, 국가의 폭력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날카롭고 깊이 있는 통찰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당시 유행하던 ‘군주의 거울’ 장르의 하나였다. 그 시절 정치 지도자들을 위한 지침서인 ‘군주의 거울’ 장르가 큰 주목을 받았다. 맨 앞에 놓인 ‘헌정사: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께 올리는 글’에서 볼 수 있듯, ‘군주론’은 당시 피렌체의 새로운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하는 간언서였다.

    ‘군주론’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여러 군주국의 모습을 기술하고, 2부는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한다. 이어 3부는 군주의 통치술을 다룬다. 여기서 통치술은 인자함보다 잔인함을, 사랑보다 두려움을 지향하고, 약속보다 기만을 정당화한다. 마지막 4부는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한 호소를 담고 있다.

    ‘군주론’이 놓인 배경을 보면, 이 저작이 발표된 1513년 서구에서는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있었다. 14~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는 종교 중심의 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성격을 지닌 시대였다. ‘군주론’ 안에는 이 르네상스의 정신, 즉 중세의 질서로부터 탈피하려는 인문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군주론’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정치를 윤리 및 종교와 분리된 영역으로 독립시켰다는 데 있다. 근대 이전까지 정치는 윤리의 하위 범주로 간주되거나 종교와 결부돼 이해됐다. 정치가 고대 철학자들에게 ‘영혼의 완성’ 혹은 진리의 실현 수단이었다면, 중세 신학자들에게는 기독교적 가치의 세속적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정치는 그 자체의 영역을 갖지 못했고, 정치 영역에서 적용되는 윤리는 윤리학 내지 신학이라는 외적 판단 기준에 근거해 있었다.

    ‘군주론’은 이런 전통적 사유와 정반대인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정치에 대한 일견 ‘불경한’ 마키아벨리의 시각은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놓았다. 세 가지 면에서 특히 그러했다.

    첫째, 윤리 및 종교로부터 정치의 분리는 정치에 대한 실증주의적 접근을 가능케 했다. 마키아벨리는 전통적 윤리와 종교적 미덕이 정치 현상을 평가하는 잣대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치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리였다.

    둘째, 도덕적 선 혹은 종교적 진리를 대신해 마키아벨리가 정치 행위의 새로운 공적 기준 및 윤리로 삼은 것은 ‘국가 이성’이었다. 국가 이성은 국가의 이익이 그 무엇에도 우선함을 의미한다.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악덕으로 치부되는 일도 허용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사유는 근대 정치적 현실주의의 출발점을 이뤘다.

    셋째, ‘군주론’은 정치의 본래적 특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지도자의 자질로 ‘사자의 용맹’과 함께 ‘여우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여우의 지혜의 다른 이름이 곧 기만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란 설득과 기만의 이중 과정이다.

    ‘군주론’에서 주목할 견해 중 하나는 ‘포트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ù)’의 비교다. 마키아벨리는 중세의 수동적 인간관에 반기를 들었다. 수동적 인간이란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에 굴복하는 존재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을 극복할 가능성을 비르투에서 찾았다. 비르투란 운명이라는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에 비유됐다. 그것은 군주의 비범한 역량 또는 자유의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포르투나와 비르투의 관계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상기시킨다. 인문주의는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발견하고, 인간의 사고능력과 개성·가치를 중시하며,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통해 인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사유는 인문주의로서 르네상스의 자장 안에 놓여 있었다.

    요컨대 ‘군주론’으로부터 근대 정치학이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분리하고, 정치의 현실주의를 부각하며, 나아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지향했다. 근대와 현대 사회가 갖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의 독립성이다. 정치란 무엇보다 공동체의 최종 의사결정 영역이다. 이러한 정치란 과연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선구적 통찰을 선사하고 있다.

    정치 현상에 대한 베버의 독해

    “우리는 그에 필적할 정도의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독일 사회학자 베버의 묘비명이다. 베버가 갖는 지적 생명력의 원천은 정치·경제에서 종교·문화까지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넓고 깊은 통찰에 있다. 베버 사후 베버에 맞설 수 있는, 박식함과 심오함을 모두 갖춘 사회사상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베버는 1917년 11월 뮌헨대학의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 초청으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강연했다. 1919년 1월 다시 초청받았는데, 이때 맡은 강연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였다. 이 강연에서 베버는 그동안 탐구해온 정치 현상의 사회학을 바탕으로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가의 덕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보였다. 사회학자 전성우는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함께 베버의 ‘학문적 유언장’ 같은 위상을 가진다고 평가한 바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강연인 만큼 간략한 저작이다. 간략하다고 해서 이 책에 담긴 정치적 사유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베버가 현대 사회학의 기초를 놓은 만큼 정치 현상에 대한 베버의 독해는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 그 아이디어는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베버는 정치를 ‘천직’으로 부여받은 정치가에 대해 ‘악마적 수단’을 갖고 ‘천사적 대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악마적 수단이란 은유는 강제력을 위시해 목표 달성을 위해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을 포괄한다. 천사와 악마의 대비는 정치가 갖는 독립성과 특수성을 적절히 상징한다.

    둘째, 이러한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윤리로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제시했다. 신념윤리가 선과 악의 구별에서 도덕적 선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한다면, 책임윤리는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 대해 무제한적 책임을 지는 태도를 의미한다.

    베버에 따르면, 바람직한 정치가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 정치가 ‘결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책임윤리에 대한 베버의 통찰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셋째, 이렇게 이중적 윤리가 요구되는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을 베버는 ‘열정·책임감·균형감각’에서 찾았다. 베버에게 정치가의 역할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의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 데 있다.

    이 정치적 대표성에 헌신하려는 태도가 열정이라면, 그 대표성에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가 책임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과 책임감 사이에서 요청되는 게 균형감각이다. 균형감각은 사물과 사람에게 거리를 둘 수 있는 태도이자 주어진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넷째, 베버가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을 특별히 강조한 까닭은 정치가 국가의 운영을 떠맡는다는 점에 있었다. 어느 나라든 국가의 운영은 국민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국정을 담당하는 일에는 무엇보다 현실적 성과가 중요하다.

    베버에게 정치의 치명적인 두 가지 죄악은 ‘객관성의 결여’와 ‘무책임성’에 있다. 객관적 조건을 무시한 채 주관적 판단에만 의존하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국가정책을 추진할 경우 그 정책이 국민 다수에게 불행을 안겨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정치 실패에 대한 베버의 통찰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독특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한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란 시민의 직접투표로 대표를 선출하는 ‘국민투표제적 원리’에 기반하며 카리스마적 리더가 정치를 이끄는 ‘지도자 민주주의’다. 정치학자 최장집이 지적하듯, 베버의 민주주의론은 근대 대의민주주의론과는 다른, 생소한 것이다. 베버가 이러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한 데에는 당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후발 국가였던 독일의 역사적 특수성이 반영돼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주목할 것의 하나는 베버가 말하는 ‘직업’의 의미다. 독일어 ‘직업(Beruf)’은 본래 ‘소명’ 또는 ‘천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이 지상에서 내게 부여한 일이다. 다시 말해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곧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본에는 두 제목이 모두 쓰인 바 있다.

    요컨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드러난 베버의 정치관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베버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옹호한다. 천사적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악마적 수단을 활용하는 이가 정치가라는 베버의 인식은 이러한 현실주의를 생생히 증거한다. 마키아벨리로부터 받은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 베버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근대사회를 지탱하는 양축이다. 그런데 베버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엘리트주의 성향을 드러낸다. 정당 활동에서 추상적 강령보다 리더에 대한 헌신이 더 중요하다는 베버의 주장은 이러한 엘리트주의를 증거한다. 엘리트가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가 근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베버의 견해는 앞서 말한 정치적 현실주의와 정확하게 짝을 이룬다.

    정치가의 책임윤리

    16세기 초와 20세기 초에 발표된 ‘군주론’과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차이점에서 주목할 것은 마키아벨리와 베버의 정치이념이다. 이념 측면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 공화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동시에 구현하려는 정치 이념이다. ‘군주론’이 전하려는 바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가의 미덕이라는 메시지였다.

    베버는 민주주의자였다. 베버는 독일의 제2제국 시대를 살았지만 영국과 프랑스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근대 민주주의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최종 의사결정권,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이상을 구현하려는 정치 이념이었다. 독일이 제정을 넘어서 민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베버는 ‘카리스마적 지배’를 함의하는 지도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공통점에서 주목할 것은 ‘군주론’과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모두 정치적 현실주의와 정치가의 리더십을 부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두 사람이 살아온 당대 이탈리아와 독일의 혼란스러운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다. 정치적 혼란을 넘어 사회의 질서를 일궈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지도자가 요구되고, 더하여 지도자의 통치 기술과 태도가 중시된다.

    베버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보면, ‘군주론’의 정치지도자론은 어느 시대든 필요한 ‘책임윤리를 지닌 지도자’의 원시적 모습에 가깝다. 정치가 결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영역이라면,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비도덕적 수단을 강구할 수도 있다.

    책임윤리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와 베버 사이에는 물론 거리가 존재한다. 마키아벨리는 책임윤리를 배타적으로 강조한 반면, 베버는 책임윤리는 물론 신념윤리까지 모두 요구한다. 21세기 현재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가 반민주적 통치술을 옹호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고, 마키아벨리의 통치론이 현대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고려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부도덕한 것을 숭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부도덕한 일이라도 결과를 위해서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핵심 논리다. ‘군주론’에서 군주의 통치는 사적으로 권력의 획득과 유지, 공적으로는 인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이중적 과정으로 특징지어진다.

    4세기 후의 베버가 겨냥한 것은 ‘규범적 마키아벨리즘’이라 할 수 있다. 윤리와 종교로부터 정치를 독립시켜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승인하되, 그 현실주의를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 안에서 작동시키려 한 것이 베버의 정치사회학이다.

    “세상이, 자기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자기 눈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마지막 구절이다. 20세기 초 베버가 그리워한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을 지닌 정치가는 21세기 초 현재에도 여전히, 아니 더욱 그리운 존재다.

    소통 도외시한 尹 정부의 통치 스타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직후인 1987년 대선 당시 각 후보자들의 선거 포스터. [동아DB]

    ‘대통령 직선제 개헌’ 직후인 1987년 대선 당시 각 후보자들의 선거 포스터. [동아DB]

    이쯤에서 ‘군주론’과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한국 정치에 던지는 함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내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정치적 현실주의 관점에서 본 1987년 이후 민주화 시대에 대한 평가다. 지난 36년의 민주화 시대에는 빛과 그늘이 존재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것이 성과라면, 경제·사회적 불평등이 강화된 것은 그 한계라 할 수 있다.

    민주화 시대의 한국 정치를 나는 2015년 한 칼럼에서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란 집권 초반 새 정부에 가진 기대가 빠른 속도로 실망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국정 운영 지지율에서 잘 나타난다. 정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집권 초반의 높은 지지율은 1~2년 안에 30~40%대 지지율로 하락하고, 이후 낮은 지지율로 남은 기간을 견뎌낸다.

    이 짧은 열광과 긴 환멸의 사이클은 보수 성향 정부와 진보 성향 정부에 모두 숙명과도 같은 조건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집권 후반기 지지율이 40%를 넘었지만 정권교체의 열망이 그보다 컸고,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처음으로 집권 5년 만에 다른 이념 성향의 정부로 권력교체가 이뤄졌다.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 나타나는 1차 원인은 국정 운영 능력에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선거 과정에서 제시된 시대정신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높았지만, 어느 정부건 정작 집권 이후에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구현할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노무현 정부는 ‘낡은 정치 청산’을, 이명박 정부는 ‘선진일류국가’를,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정부의 행정 및 정치 역량이 부족했다.

    마키아벨리와 베버의 정치적 현실주의에서 볼 수 있듯, 정치는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행복이라는 결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낡은 정치를 청산하기 위해 등장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정부가 마감하기 전에 사라졌고, 선진일류국가는 토건 정책인 4대강 사업으로 대체됐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정체가 모호한 창조경제로 둔갑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포용적 국가를 일궈냈다기보다 적폐청산에 주력함으로써 정치의 양극화를 강화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5월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정부 역시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비껴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1년여 시간을 지켜볼 때 윤석열 정부는 열광의 시간이 매우 짧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 양극화가 그만큼 구조화된 점에도 주목할 수 있고, 소통을 도외시한 윤석열 정부의 통치 스타일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와 베버가 강조한 정치지도자의 역량을 환기해볼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지혜를, 베버는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을 강조한다. 21세기적 버전으로 말하면, 그것은 행정 역량과 정치 역량이다. 행정 역량이 정책을 섬세하게 입안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능력이라면, 정치 역량은 해당 사안에 따른 사회갈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새로운 리더십을 향하여

    돌아보면, 우리 현대사에서도 정치가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후발 산업화와 후발 민주화 국가였던 만큼 산업화와 민주화를 빠르게 추격하기 위한 1차 조건의 하나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었다.

    우리 사회를 대표해 온 리더십으로 어떤 이들은 박정희의 리더십을, 다른 이들은 김대중의 리더십을 떠올릴 것이다. 두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그늘이 존재했지만, 박정희 리더십은 빠른 경제성장의 성과를 일궈냈고, 김대중 리더십은 사회민주화와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21세기가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난 현재, 새로운 정치 리더십은 한국 정치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처에서 볼 수 있듯, 정치 리더십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리더십을 잇는 새로운 리더십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국민 다수가 소망하는 바는 유능하면서도 섬세한 정치 리더십이다. 소망스러운 리더십은 국민에 앞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추진하되 국민이 전하는 목소리에 늘 귀 기울여야 한다. 혁신경제 구축과 불평등 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진정한 선진국으로 자리 잡기 위해 국민의 폴로어십(followership)과 생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행복을 꿈꾸고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이, 결코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 1960년 경기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저서 :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공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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