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자유주의 절정, 김수영의 마지막 시 ‘풀’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우리 현대사로 들어가는 좁은 문, 최인훈의 ‘광장’
‘광장 없는 밀실’과 ‘밀실 없는 광장’의 공존
21세기 자유주의 과제, 더 좋은 자유 志向
2011년 동아일보와 인터뷰 당시 최인훈 작가(왼쪽). 생전 김수영 시인. [동아DB]
이 조사에서 시인 두 사람이 추천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지식사회에서 시인과 소설가를 포함한 작가들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동아시아에서 ‘문사철’을 중시한 것은 오랜 전통이다. 이런 맥락에서 광복 이후 시인 김수영과 김지하, 소설가 최인훈과 이청춘이 당대를 대변하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지식사회학을 공부해 온 내게 광복 이후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 시인과 소설가를 한 사람씩만 고르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나는 김수영과 최인훈을 꼽고 싶다.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와 ‘풀’의 시인이다. 최인훈은 ‘광장’과 ‘화두’의 소설가다. 앞서 인용한 광복 60년 조사에서 볼 수 있듯 김수영의 위상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문학평론가 김현과 김윤식은 그들의 저서 ‘한국 문학사’에서 최인훈을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평가한 바 있다.
널리 알려졌듯 김수영과 최인훈 모두 자유주의에 가까운 지식인이다. 문학사적으로 김수영은 모더니즘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고, 최인훈은 중도주의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광복 이후 우리 현대문학을 대표해 온 두 사람이 자유주의 지향을 보인 반면, 정작 현실은 자유주의의 빈곤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수영과 최인훈은 자신들의 작품에서 어떤 자유주의를 선보였을까. 자유주의란 무엇을 추구하는 이념이고 철학일까. 나아가 21세기 현재 이 자유주의가 서 있는 자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김수영 시와 최인훈 소설에 나타난 자유주의를 주목함으로써 한국 자유주의가 걸어온 길과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주요 텍스트는 김수영의 ‘김수영 전집 1: 시’와 최인훈의 ‘광장’이다.
김수영의 현실적 자유주의
2009년 공개된 김수영 시인의 ‘겨울의 사랑’ 육필 원고. [민음사]
광복 이후 우리말로 쓰인 가장 뛰어난 시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들고 싶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 역사는 아무리 /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1964년에 쓰인 이 시는 전통과 마주한 우리 사회 지식인의 내면 의식을 잘 보여준다. 김수영이 발견한 ‘더러운 전통’은 과거로의 소박한 회귀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전통이다. 이 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와 사회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그 속에서 인간과 사랑의 의미를 당당히 발견하려는 김수영의 문제의식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과 만주를 거쳐 광복 후 서울로 돌아와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전집 1: 시’를 보면, 김수영다운 첫 시는 스물여섯에 쓴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1947)이다.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김수영 문제의식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시다. 서구를 그리워하지만 그 서구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과도 같은 존재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나라에서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일궈가고 싶은 열망은 누구나 품고 있던 꿈이었다. 광복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뿌리내리기에 현실은 너무 척박했다.
김수영은 타고난 자유주의자였다. 스스로 밝혔듯 그는 좌파나 우파가 되기 어려웠다. 그의 분방한 상상력과 예민한 자의식은 이념적 구속에 어울리지 않았다. 김수영의 자유주의가 그렇다고 해서 서구 자유주의의 일방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6·25전쟁과 함께 그의 자유주의는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에는 서구적 자유주의의 ‘포즈’로부터 벗어나 ‘현실적 자유주의’를 모색하고 추구했다.
문학평론가들은 김수영의 시가 보여준 세계를 크게 4월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곤 한다. 그의 1950년대 시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제시돼 왔다. 한편에서는 모더니즘의 설익음이 남아 있다고 봤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적 완성도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이 1950년대 시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비서구 사회 지식인의 고뇌다.
“1950년 7월 이후에 헬리콥터는 /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이었고 (…)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을 / 우리는 좁은 뜰 안에서뿐만 아니라 /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 이러한 우리의 순수한 치정(痴情)을 /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 ㅡ자유 / ㅡ비애.”
‘헬리콥터’(1955)다. 헬리콥터가 상징하는 것은 서구 문명이다. 서구 문명을 바라보는 비서구 지식인의 시선은 그 ‘자유’에 열광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돌아보면 ‘비애’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서구적 이상과 한국적 현실의 거리에서 김수영이 발견한 것은 비애의 감정이다. 그것은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구름의 파수병’·1956)이 보여주는 내적 긴장과 갈등이다
1950년대 중반에 마포로 이사한 김수영은 양계를 직업으로 삼아 전업 시인으로 나섰다.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한 그가 사회 전면에 나선 것은 1960년 4월혁명을 통해서였다. 이후 그는 빛나는 시를 거침없이 토해 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 부러워하던 /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푸른 하늘은’(1960)이다. 4월혁명 정신을 대표하는 시의 하나로 꼽혀 왔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혁명은 이상인 동시에 현실이다. 삶의 현장 및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에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김수영은 노래한다.
어떤 구속도 거부한 김수영의 목소리는 5·16 군사정변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역사적 현실에 마주했다. 그 속에서 나온 작품이 ‘거대한 뿌리’(1964), ‘현대식 교량’(196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등이었다.
1960년대 김수영의 시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여러 해석이 제시돼 왔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의 시가 우리 현실에 안착돼 가는 과정이다. ‘헬리콥터’에서 느끼게 된 ‘자유와 비애’는 이제 “퇴계든 정다산이든 수염난 영감이면 / 복덕방 사기꾼도 도적놈 지주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미역국’·1965)라고 노래하는 ‘능변과 여유’로 변화됐다. 이러한 능변과 여유에 담긴 것은 앞서 인용한 ‘거대한 뿌리’에서 볼 수 있는 현실과의 밀착이며, 이 밀착을 통해 김수영은 현실적 자유주의로 나아갔다.
이 현실적 자유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공존, 개인과 역사의 화해를 모색하면서도 시민적 개인의 자유와 의지를 중시한다. 이러한 현실적 자유주의의 절정이 그의 마지막 시 ‘풀’(1968)이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 풀이 상징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민중일 수도 있다. 또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김수영이 바람의 구속을 거부하고 풀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한다는 점이다.
김수영은 체질적으로 보수적 엘리트주의나 진보적 민중주의에 기울어지기 어려운 지식인이었다. 김현이 지적하듯 그에게 일생 동안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유였다. 이 자유를 향한 열망을 김수영은 현실과 역사 안에 위치시키고, 이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에 저항하려 했다. 서구적 자유주의가 현실적 자유주의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1968년 교통사고로 돌연 우리 곁을 떠났다.
2013년 11월 ‘김수영문학관’ 개관에 앞서 동아일보와 만난 고(故)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씨가 그의 초상화를 소개하고 있다. [동아DB]
최인훈의 중도적 자유주의
김수영만큼 최인훈 역시 진정 문제적 소설가다. 최인훈이 세상을 떠난 다음 딸 최윤경은 아버지를 기억하는 산문집 ‘회색인의 자장가’를 내놨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딸의 추억은 잔잔했다. 최윤경은 최인훈이 추천했던 책의 하나인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좁은 문’을 권한 아버지는 내가 잘 모르는 아버지다. ‘좁은 문’은 내가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 좁다란 문을 열면 책 안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만날 수 있을지. 만나게 된대도 가슴이 철렁하고, 못 만나게 된다면 한없이 허전할 것이다. (…) 좁은 문을 열면 아버지가 서 있을까.”
이 구절을 읽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작가 최인훈의 문학 세계는 광복 이후 절망과 희망, 고뇌와 영광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좁은 문에 들어서면 그 안에서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조우한다. 그 좁은 문 안의 가장 앞에 놓인 작품이 ‘광장’이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광장’은 1960년 10월 잡지 ‘새벽’에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여기에 나오는 서문의 한 구절이다. ‘구정권’은 이승만 정권을, ‘빛나는 4월’은 4월혁명을 지칭한다. 최인훈은 ‘광장’을 이후 여섯 번이나 고쳐 다시 발표했다. ‘광장’을 통해 최인훈은 광복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역사적 격변과 그 안에 놓인 이념 문제를 주목한다.
최인훈의 ‘광장’ 초판본. [동아DB]
6·25전쟁 이전에는 북한에서, 이후에는 남한에서 살아온 경험은 최인훈으로 하여금 두 사회를 비교해 볼 기회를 제공했다. ‘광장’에서 철학도 이명준 역시 남과 북의 현실을 모두 체험하고, 남과 북의 이념적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최인훈은 남과 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소설의 시간은 1945년 광복에서 6·25전쟁까지지만, 광복에서 1960년 4월혁명까지의 남과 북의 현실을 최인훈이 날카롭게 지적한 구절이다. 살아 있되 욕망만 넘치는 사회와 혁명을 내세우지만 인간이 죽어 있는 사회, 다시 말해 ‘광장 없는 밀실’(남한)과 ‘밀실 없는 광장’(북한)은 1950년대 한반도에 존재한 두 자화상이었다. 주인공에게 이제 남아 있는 선택이란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일 수밖에 없다.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이명준은 결국 자살을 감행한다.
‘광장’은 중도주의의 비극을 상징한다. 최인훈은 좌파와 우파로부터 모두 벗어나려고 했다는 점에서 중도적 자유주의를 지향했다. 자유주의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1950년대 현실에서 이 자유주의는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었다. 냉전·분단체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한의 냉전·분단체제는 반공주의와 권위주의가 양축을 이뤘다. 반공주의가 사상의 자유에 대한 검열 장치였다면, 권위주의는 사회의 재생산 방식이었다. 북한은 더 심각했다. 증오로 무장된 반미주의와 전체주의가 사회를 철저히 지배했다.
이러한 최인훈의 시대감각은 김수영에게서도 발견된다. 김수영은 1950년대 현실이라는 빙벽 앞에서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고백했다(‘거미’·1954). 여기서 설움은 앞서 인용한 ‘헬리콥터’에 나오는 비애다. 설움과 비애의 감정은 최인훈 역시 공유하고 있던 심정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우울이었다.
‘광장’ 이후 최인훈의 작품 활동은 눈부셨다. ‘구운몽’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등의 소설을 발표했고, 1970년대 잠시 미국에 머문 다음 돌아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등의 희곡을 내놓았다. ‘광장’은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됐다. 최인훈의 마지막 소설은 1994년 출간한 ‘화두’였다.
2008년 최인훈 작가 등단 50주년을 맞아 출간한 전집. [동아DB]
박천군의 한 가난한 집에서 겨드랑이 밑에 날갯죽지가 달린 아기가 태어난다. 부모는 가족이 겪게 될 불행을 염려해 아기장수를 죽이고 만다. 아기장수 설화는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의 비원을 담고 있고, 강대국에 맞서는 약소국의 소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설화를 통해 최인훈은 민족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데 갖다두고만 있던 책을 시덥잖게 뒤적이다가 만난 이야기가 급하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딘가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 밤이 지배하는 고향으로 가기를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 왜냐하면 내게는 꿈꾸는 힘이 남아 있다. (…) 나는 한 달 후 귀국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자살을 감행했지만, ‘화두’의 주인공 최인훈은 ‘밤이 지배하는 고향’인 조국으로 돌아온다. ‘화두’에서 최인훈은 민족과 조우하면서 비로소 회의주의와 비관주의로부터 벗어났다.
민족을 다시 발견했다고 해서 최인훈이 개인의 자유와 상상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꿈꾸는 힘’이다. 꿈꾸는 힘이란 나와 겨레의 기억, 그 속에 담긴 절망과 희망을 모국어로 전달하려는 욕망이다. 그것은 이념 대립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중도적 자유주의의 열망으로 읽을 수 있다.
소설가로서 최인훈의 탁월함은 ‘광장’과 ‘화두’에서 볼 수 있듯 역사와 이념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데 있다. 그는 남과 북의 분단 시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가 던지는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분단과 냉전은 지난 20세기 후반 우리 현대사를 규정해 온 두 겹의 시대적 구속이다. 이 구속에 당당히 맞서 중립과 자유를 꿈꿨던 최인훈은 2018년 우리 곁을 떠났다.
자유주의가 놓인 자리
자유주의는 서구에서 발전한 정치철학이자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사유재산의 보호가 자유주의의 출발점이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자유가 우리 인간에게 최상의 사회적 가치이고, 사회제도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서구사회에서 자유주의의 기초를 세운 이는 영국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자유론’에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선구적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하나의 이론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등으로 발전해 왔고, 대상에 따라서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문화적 자유주의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19세기 자유주의와 20세기 자유주의의 정치적 위상은 사뭇 다르다. 19세기 자유시장 옹호자들이 진보로 분류된 반면, 20세기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보수로 자리매김됐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보수 또는 진보와 결합할 수 있는 이념이다. 21세기 현재 ‘진보적 자유주의’와 ‘보수적 자유주의’ 모두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다.
자유주의가 개인주의와 쌍생아라는 사실도 주목을 요한다. 개인주의는 자율적 개인을 우선시하는 정치·사회철학이다. 이 개인의 자율성에 맞서는 가치가 공동체의 질서다.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질서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 공동체의 질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하거나 억압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자유주의가 우리 현대사에서 빈곤했다는 데 있다. 보수와 진보 모두 자유주의를 앞세웠지만 그 초상은 초라했다.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자기 정체성으로 표방했음에도 비자유주의적 국가주의로 자신을 지탱해 왔다. 진보 역시 자유주의를 정치 이념의 하나로 강조했음에도 자유주의에 맞서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빈곤한 자유주의에 생명을 불어넣은 지식인들은 인문·사회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시인 김수영과 소설가 최인훈이 바로 그들이었다. 김수영의 시는 김현의 말처럼 자유를 구속하는 현실에 대해 절규했다. 이 자유의 구속이라는 심장에 김수영은 다음과 같은 화살을 겨눈다.
“한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이러한 김수영의 독백은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향한 중단 없는 성찰을 요구한 거였다. 1960년대는 자유주의자 ‘김수영의 시대’였다. 최인훈 역시 자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모색했다. ‘광장’ 1973년판 서문에서 최인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다 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진술은 ‘광장’이 이데올로기 소설이라는 것을 최인훈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장’에서 최인훈이 꿈꿨던 것은 남과 북을 넘어 중립을 향한 자유주의였다. 물론 최인훈이 주목했던 당시의 현실과 21세기 현실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북한은 여전히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체제이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이념이 경쟁하고 있다.
21세기가 열린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그렇다면 자유주의가 서 있는 자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최근 그 시선은 다중적이다.
먼저 정치적 자유는 크게 확장했다.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1인 미디어 시대가 만개한 것은 그 구체적 증거다. 그러나 동시에, 포퓰리즘의 부상에서 볼 수 있듯, 온라인 집단주의가 개인적 자유주의를 위축시키고 있다. 정치학자 얀 베르너-뮐러가 지적하듯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서의 포퓰리즘이 언제든지 다원적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사회적 자유가 처한 상황도 눈여겨볼 만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 누구나 시장에서 상품과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자유의 시대가 만개했지만, 이 소비의 자유는 개인이 갖는 화폐의 규모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치적으론 자유로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경제적으론 부자유하다는 아이러니가 오늘날 자유의 현주소라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풍경은 우리 사회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한편에서는 상대방을 혐오하고 악마화하는 포퓰리즘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짓누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삶의 질 차이를 점점 공고히 하는 경제적 양극화가 사회·문화적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더 많은 자유’를 위해 우리 사회가 달려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김수영과 최인훈 같은 지식인들이 나름의 의미 있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21세기 현재 새로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 과제는 21세기 현실에 걸맞은 정치적 자유와 사회·문화적 자유를, 다시 말해 ‘더 좋은 자유’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가 더 좋은 자유를 향해 나아가길 나는 소망한다.
김호기
● 1960년 경기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저서 :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공편)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