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의 사회철학적 인간학 대표하는 ‘인간의 조건’
‘공·사 이분법’ 해체의 대안 ‘세계 사랑’
파머에게 우리 시대 정치 = ‘비통한 자들’의 정치
마음의 민주적 습관 회복해 정치의 목적인 ‘공공선’ 구현 필요
개인주의·공동체주의 공존시킬 공화주의적 상상력 중요한 때
[Gettyimage]
예를 들어,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파악했고,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위선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질을,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특성에 주목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어느 하나의 얼굴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의식은 물론 무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이성과 감성과 영성을 품고 있는 존재다. 또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존재이자 협력하고 갈등하는 존재다.
사회학자로서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사회로부터 영향받지만, 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인간은 사회 구속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 해방적 존재다.
젊은 시절의 한나 아렌트. [동아DB]
아렌트는 두말할 필요 없이 존 롤스, 미셸 푸코, 위르겐 하버마스, 움베르토 에코와 함께 전후 최고의 철학자다. ‘아렌트 르네상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향력이 커져왔다. 파머는, 아렌트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간과 교육과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선사한 실천적 사상가다. 담론과 사회운동 영역에서 새로운 사유 방식과 교육운동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파머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지식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두 저작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1958)과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2011)이다. 이 문제적 두 저작을 통해 21세기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선 자리와 갈 길을 숙고해 보려고 한다.
‘인간의 조건’ 주요 내용
아렌트는 문제적 사상가다. 여기서 ‘문제적’이란 아렌트 사상이 인간과 세계에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다. 아렌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이에 응답함으로써 전후 사회사상과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저, 이진우 역, 한길사 [Yes24]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아이히만의 행동이 대량 학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악의 근원임을 주장함으로써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의 사회철학적 인간학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이루는 세 가지 활동을 구분한다. ‘노동’ ‘작업’ ‘행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아렌트가 특히 중시한 것은 행위다. 행위란 공동체 안에서 타인을 승인하고 소통을 나누며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활동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행위의 역사적 원형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아테네에서 찾을 수 있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폴리스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다. 공적 영역은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공의 일에 대해 말하고 소통하는, 폴리스 전체의 공공선을 위해 함께 토론하는 공간을 뜻한다. 아렌트는 이러한 토론 행위가 다름 아닌 정치 본래의 의미라고 파악한다.
아렌트가 우려한 것은 근대 서구 역사에서 이러한 ‘공·사 이분법’의 해체다.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노동이 다른 활동을 압도하고,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폴리스적 공적 영역은 단순한 행정 영역으로 변형되거나 쇠퇴해 버렸다. 이러한 근대의 과정이 지구로부터 탈출하고 세계로부터 도피하려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 소외’를 가져왔다는 게 아렌트의 진단이었다.
아렌트의 대안은 ‘세계 사랑(Amor Mundi)’이다. 아렌트 전기를 쓴 엘리자베스 영-브륄에 따르면,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의 책 제목을 ‘세계 사랑’으로 붙이기를 원했다. 세계 사랑이란 인간의 존엄성과 복수성, 그 안에 존재하는 공동선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공적 영역의 회복과 공공성의 구현은 세계 사랑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였다.
널리 알려졌듯 아렌트는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나치의 탄압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무국적자로 살다가 시민권을 얻어 활동했다. 아렌트의 인생은 서구 사회에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삶을 상징했다. 실존 및 영혼에 대한 배려로서의 ‘자아 사랑’과 이데올로기 및 주관주의의 ‘세계 멸시’에 대응해 세계 사랑을 열렬히 옹호함으로써 아렌트는 사회철학적 인간학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려고 했다.
아렌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사상은 더욱 높이 평가됐다. ‘아렌트 르네상스’라고 할 정도로 아렌트는 전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됐다. 아렌트의 사상이 시간의 풍화를 견뎌낸 까닭은 인간 존재와 공공성에 대한 심원한 통찰에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생계를 모색하는 ‘노동’,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 타자와 소통하는 ‘행위’에 대한 아렌트의 통찰은 탁월한 것이다. ‘후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생계·의미·소통은 모두 중요하다. 생계를 위한 노동의 미래, 의미를 위한 삶의 미래, 소통을 위한 민주주의의 미래는 인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들이다.
아렌트는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귀속시키기 어려운 사상가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정중함과 중용, 공적 담론의 회복을 포함하는 아렌트의 ‘공화주의적 사유’를 현대 정치이론의 새로운 출발로 삼을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여기서 공화주의적 사유란 자유를 존중하는 동시에 공공성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 사상의 기저에는 실존주의 철학이 놓여 있다. 아렌트는 이 개인의 철학을 공동체의 정치에 연결한다. 아렌트는 ‘철학 없는 정치’와 ‘정치 없는 철학’을 모두 경계함으로써 존재와 사회 사이의 새로운 가교를 놓아 ‘사회적 실존주의’를 이론화하고 대중화하려고 했다.
아렌트의 사회적 실존주의와 사회철학적 인간학이 던지는 함의는 분명하다. 그것은 공적 영역의 중요성에 대한 재발견이다. 역사학자 조승래는 아렌트의 사상적 기여가 공적 영역의 중요성을 계몽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공적 영역에 참여해 민주적 제도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은 후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부여된 중대한 사회적 과제라고 볼 수 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주요 내용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파커 J. 파머 저, 김찬호 역, 글항아리 [Yes24]
파머는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마음은 감정을 넘어선 자아의 핵심이다. 그것은 지적·정서적·감각적·직관적·상상적·경험적·관계적·신체적 앎의 방식이 수렴되는 중심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직감으로 아는 것이 통합되는, 지식이 더욱 인간적으로 충실해질 수 있는 장소가 곧 마음이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 [couragerenewal.org]
이러한 현실에 맞서 파머는 새로운 ‘마음의 정치’를 소망한다. 그에 따르면, 마음은 선과 악의 모든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내적 힘의 근원이다. 이 힘은 마음이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분출되고 증폭된다. ‘마음의 민주적 습관’이 주어지면, 마음은 부서져 흐트러지는 대신 세상에 대해 열리는 탄력성을 갖게 된다.
마음의 민주적 습관으로 파머가 제시하는 것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고전적 견해다. 토크빌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데 법과 제도보다 습관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의 습관이란 인간의 다양한 관념과 의견, 생각의 습관을 형성하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의 전체를 의미한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분석했듯 19세기 중반 미국에는 두 가지 마음의 습관이 존재했다. 독립적 개인주의와 상호의존적 공동체주의가 그것이었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창조적 긴장을 이루는 게 마음의 민주적 습관이었다. 이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배양하는 것이 곧 마음의 정치다.
파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우리에게 비통을 안겨주는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회복함으로써 정치가 ‘공공선을 위한 활동’이라는 본래의 자기 목적을 구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파머는 네 단계를 제시한다. 공동체로부터 더는 분리된 채 살아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내면화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생각을 나누고, 그 결과 제도를 바꾸며 마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그것이다.
파머의 사유를 주목하는 까닭은 21세기 우리 인류의 선 자리와 갈 길에 있다. 불확실성이라는 뉴노멀이 지구적 경향으로 자리 잡은 현재, 인류가 그 불확실성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다면, 그것이 제도로부터 주어진 상처든 자아로부터 비롯된 상처든,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파머는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등 우리 시대의 많은 사회사상가는 마음의 불안과 분노를 이야기한다. 무엇인가에 쫓기고 피로하며 화가 나 있는 ‘성난 사회’는 오늘날 지구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 결과 우리 마음은 파편화되며 훼손되고 찢겨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파머가 지적하듯, 내적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소비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또 희생양을 만들어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지만, 그것은 파시즘이란 정치적 질병을 키우기도 한다. 이렇게 상처 난 마음은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배양하고 회복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파머의 논리는 사회구조나 제도보다 개인 의식이나 문화를 중시하는 경향에 기울어져 있다. 파머의 주장은 마음이 제도로부터 받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의 치유를 받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조건에 놓인 이들에게 마음의 정치가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파머의 주장에 귀 기울이게 되는 까닭은 마음이 갖는 중요성에 있다. 마음이 바뀌어야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어야 행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게 마음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의 변화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삶과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마음의 정치는 마음의 연금술이다. 이 마음의 연금술은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의 연대로, 개인 간 긴장을 공공선을 향한 출구로, 사회적 갈등을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 사회의 변화가 빨라질수록, 그 압력이 커질수록 우리 인류에게는 이에 맞서는 새로운 정신적 거점이 필요하다. 파머는 그 정신적 거점의 하나를 이렇게 선사하고 있다.
소통과 마음의 재발견
무릇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퇴색하기 마련이다. 특히 사회사상은 사회변동으로부터 구속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퇴색 속도는 빠르다. 진정한 고전이란 이러한 사회변동으로부터 받는 강제를 견뎌내는 사유와 담론을 말한다.아렌트의 사상이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이다. 21세기 현재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화폐의 힘과 의미의 힘이다. 화폐 없이, 그리고 의미 없이 우리 삶은 지속하기 어렵다. 아렌트는 의미로서의 삶에 대한 깊이 있고 포괄적 이해를 선사한다.
앞서 나는 리프킨이 우리 인간을 ‘공감하는 존재’로 파악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리프킨이 강조하듯, 오픈 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21세기 과학기술혁명 시대에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의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공감 능력이다. 이러한 공감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 및 타인과의 소통이다.
“이 세계에서 행위하며 살아가는 복수의 인간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유의미성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아렌트의 말이다. 아렌트에게 ‘행위하는 복수의 인간들의 소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이자 조건이다. 이 소통이 공감의 출발점이자 기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둘째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사회의 존재 이유, 즉 사회의 질서를 지나치게 부각할 때 개인의 자유는 억압당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의 질서가 과도하게 약화될 때 개인은 토머스 홉스가 말한 ‘만인 대 만인 투쟁’에 직면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해야 하는 것은 어느 사회든 중대한 과제다. 이를 잘 보여준 사례는 인류의 대재난이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사진은 2023년 1월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코로나19 검사소에서 중국에서 입국한 여행객들이 검사 신청을 하는 모습. [동아DB]
바로 여기에 아렌트의 통찰은 의미 있는 답변을 선사한다. 아렌트는 자유와 공공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자유와 공공성이 반드시 대척적 이념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연대를 중시하는 것은 실현 가능한 기획이다. 자유와 공공성을 동시에 증진하려는 아렌트의 공화주의적 상상력은 21세기 현재 더욱 빛을 발한다고 봐야 한다.
아렌트가 소통을 주목한다면, 파머는 마음을 부각한다. 파머에게 마음은 실존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사회의 핵심 영역이 정치다. 파머가 말하는 정치란 우리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개인의 인생은 물론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가 오늘날 훼손된 상태로 놓여 있다는 점이다. 모두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기득권자들을 위한 정치가 21세기 정치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그 결과 정치가 가져야 할 공공선의 실현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상실돼 있다. 이러한 정치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길은 민주주의의 마음, 곧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활기차고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데 있다.
21세기 현재의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리인인 정치인들이 주인인 국민을 대신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게 우리 시대의 정치적 초상이다.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여민주주의를 증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참여와 연대의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성찰적이고 실천적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파머가 말하는 마음의 민주적 습관의 회복, 즉 마음의 정치다.
상처 난 마음을 올바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은 물론 선하고 고귀한 것을 추구하는 영성이 요구된다. 파머는 이 영성을 중시한 사상가다. 파머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마지막에 인용하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가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설파한 언명은 불확실성의 망망대해라는 21세기를 항해하는 우리 인류에게 북극성과도 같은 빛을 선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은 어느 것도 역사의 즉각적인 문맥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고결하다 해도 혼자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새로운 인간학과 실천학
2016년 11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진상 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 2017년 독일 에베르트재단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나라 국민을 그해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동아DB]
돌아보면 1987년 6월민주화운동으로 열린 민주화 시대는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 시대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란 제도정치보다는 운동정치가 우리 사회 민주화를 이끌어왔음을 뜻한다.
이러한 민주화 과정에서는 특히 시민운동의 역할이 중요했다. 우리 사회 시민운동은 정치·경제 개혁을 위시한 모든 이슈를 다루는 ‘일반적 시민운동’과 환경·여성·평화 등 특정 이슈를 다루는 ‘전문적 시민운동’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일반적 시민운동과 전문적 시민운동은 다양한 사회운동을 통해 공적 영역에 개입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일궈왔다. 금융실명제, 부패방지법, 호주제 철폐 등은 그 구체적 성과였다.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절정은 2016년 촛불집회였다. 이 촛불집회에 대한 가장 온당한 평가로는 2017년 독일 에베르트재단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나라 국민을 그해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들 수 있다. 에베르트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대한민국 국민의 촛불집회가 이 중요한 사실을 전 세계 시민들에게 각인시켜 줬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이제 한 순환을 마감하고 있다. 최근 우리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에 부여된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의 과제는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간의 적절한 관계 설정이다. 제도정치의 대의민주주의와 운동정치의 참여민주주의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는 온전한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어렵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참여민주주의의 강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참여민주주의의 ‘자기 제한성’ 또한 요구된다. 여기서 자기 제한성이란 하버마스가 말한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간의 생산적 균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의 과제는 질 높은 사회통합의 구축이다. 이념·계급·젠더갈등 등은 우리 사회에서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의 대결 구도를 낳아왔고, 이 대결구도는 국민을 둘로 나누는 ‘두 국민(two nations)’ 국가를 강화해 왔다. 경제 양극화와 정치 양극화, 나아가 정서 양극화가 이 두 국민 국가를 상징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갈등을 완화하고 해소해 성숙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국가적 과제로서 의미를 갖는다.
아렌트의 메시지가 크게 와닿는 지점이 여기다. ‘같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나라는 ‘만인 대 만인 투쟁’의 국가다. 투쟁을 통합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소통이다. 인간은 본디 소통하는 존재다. 좋은 정치는 바로 이 소통에서 출발한다. 타자의 존엄성과 복수성을 승인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아렌트의 세계 사랑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인간학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아렌트는 ‘신뢰의 상실, 불투명한 통치, 은폐의 언어, 진실의 폄하가 어둠의 시대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아렌트가 개념화한 ‘공화국의 위기’란 이를 지칭한다. 삶과 사회의 이중적 위기를 넘어서 ‘같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열어가는 것은 우리 국민 다수의 제일의 소망이라 할 수 있다.
파머의 메시지는 이러한 인간학을 구현할 수 있는 실천학의 의미를 가진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정치적 텍스트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삶의 무의미함과 불안과 분노가 개인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면, 파머의 통찰은 이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의 실천학으로서 갖는 의미를 선사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주화 시대가 40년에 가까운 현재 어떤 참여민주주의가 바람직한 것인지의 문제다. 대의민주주의에 담긴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당 참여민주주의적 실천이 활성화돼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의 민주적 요구와 공동체의 질서 요구 간 생산적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 자기 제한적 민주주의는 이를 염두에 둔 전략이다.
파머가 말한 마음의 민주적 습관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는 자유와 공공성을 동시에 중시한 아렌트의 사상과도 잇닿아 있다. 21세기 현재 개인의 자율성도 중요하고 공동체의 질서도 중요하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공존시키고 조화시킬 수 있는 공화주의적 상상력이 더없이 중요한 시점에 우리 사회는 도달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1960년 경기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저서 :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공편)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