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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저자 | 국내 완역 ‘인민 3부작’ 저자 프랑크 디쾨터 홍콩대 인문석좌교수

여기 그 혁명이 인민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혁명의 영웅담에 아직도 취해 있는가?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여기 그 혁명이 인민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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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오쩌둥 통치기간 중국 인민 5200만 목숨 잃어”
  • ●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유토피아 환상의 산물”
  • ●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는 덩샤오핑이 아니라 평범한 인민”
  • ● “경제성장의 환상 조작은 일당독재국가의 특징”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중국 하면 떠오르는 책은 아마도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과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일 것이다.이들 책은 주로 마오가 이끌던 홍군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기 전 ‘수호지’의 양산박 108호걸을 연상시키는 현대적 영웅재사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하지만 마오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역사서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드물다. 있다 해도 다이허우잉(戴厚英)의 ‘사람아, 아 사람아’와 위화(余華)의 ‘인생’ 같은 소설 정도다. 이들 작품에서 마오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주로 1965~1976년의 문화대혁명(이후 문혁)기에 집중돼 있을 뿐이다. 그러고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이후 중국의 눈부신 성공을 다룬 책이 넘쳐난다.

이는 김명호 씨가 인물평전으로 엮어가고 있는 ‘중국인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현대 중국인은 문화대혁명 4인방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재주가 빼어나거나 인덕이 남다른 사람으로 그려진다. 냉혹한 마오의 본색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를 외면한 채 만년 2인자 자리 지키기에 급급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인간미 넘치는 지도자로만 포착된다. 괴팍함과 음흉함에 있어선 마오를 능가했던 린뱌오(林彪)에 대해선 자신의 위세를 업고 중국 최고의 미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이야기까지 미담으로 포장된다.

물론 그 대척점에 위치한 책도 있긴 하다. 소설 ‘대륙의 딸’의 저자 장룽(張戎)과 남편이자 역사학자인 존 핼리데이가 함께 집필한 ‘마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방적으로 마오를 폄하하는 내용으로만 가득해 균형감을 상실했다. 마오에게 불리한 내용만 나열하다 보니 객관성에도 의심이 든다.



혁명의 신화 벗겨낼 기록

중국 현대사에 대한 이런 갈증을 풀어줄 책이 ‘인민 3부작’이다. 네덜란드 출신 역사학자인 프랑크 디쾨터(56) 홍콩대 인문학 석좌교수가 집필한 이 두툼한 책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 이후 1976년 마오가 숨질 때까지 30년간의 중국 현대사를 철저히 사실에 입각해 기술됐다. 그중 상당수는 2000년대 초반 비밀 해제된 중국 공산당의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문서다.



중국 공산당의 기록물은 중앙 기록보관소와 성(省) 기록보관소, 시(市)·현(縣) 기록보관서로 나뉘어 보관된다. 중앙 기록보관소는 접근이 어렵다. 공산당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아킬레스건은 존재했다. 디쾨터 교수는 성 기록보관소가 중앙에서 보내온 문건뿐 아니라 하부에서 보내온 보고서까지 사본을 다 갖추고 있어 자료가 풍성할 뿐 아니라 비밀 해제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허베이(河北),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산둥(山東), 쓰촨(四川), 윈난(雲南) 등 10개 성 기록보관소 문서를 토대로 대약진운동이 펼쳐진 4년간 중국에서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한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를 집필했다. 대약진운동은 농업과 산업 집산화를 추진한 인민공을 통한 사회주의식 생산량 증대운동으로 마오에 의해 대대적으로 주도됐지만 허위 보고와 이를 토대로 한 계획경제로 인해 수천만 명을 굶어 죽게 만든 대참사를 낳았다.

디쾨터 교수는 이 비극이 마오의 과대망상과 편집증과 그에 부화뇌동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초래한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임을 회의석상의 발언과 구체적 통계로 뒷받침했다. 그는 10개 성의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그 4년간 4000만~4500만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했는데 이는 3000만 명 안팎으로 알려진 과거의 추산을 훌쩍 뛰어넘는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들의 희생이 잘못된 계획경제 때문만이 아니라 중앙에서 제시한 목표치 달성을 위해 당 관료들이 가장 야만적 방식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노동력을 약탈했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점에 있다. 당 관료들은 자신들이 배급하는 식량을 그들의 노동력과 연계함으로써 힘없고 약한 자들을 더욱 사지로 몰아넣었다. 작업에 뒤처진 사람은 한겨울에 벌거벗게 하는가 하면 일이 힘들다고 한 임산부를 인두로 지지는 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마구잡이 폭력에 내몰려 자살을 택한 사람만 100만~300만에 이른다고 디쾨터 교수는 추산했다. 그러면서 마오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추진한 것은 ‘중국 인민의 현대적 농노화’였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인민의 해방? 인민의 농노화!

마오는 이런 실태를 보고받고도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또 “성취가 아홉 손가락이라면 실패는 한 손가락”이라는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다가 사태가 악화되자 중소분쟁으로 소련이 식량공급을 중단해서라더니 마지막엔 반혁명분자들의 계급 복수 행위 때문이라는 허구의 변명을 늘어놨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같은 고위지도자 역시 그런 실상을 알면서도 마오와 중국의 위신을 세우려고 같은 공산국가인 알바니아와 제3세계국가에 무상으로 식량을 공급하거나 6억 위안이 넘는 돈을 원조하는 어이없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영웅호걸 중에서 이런 대참사를 막기 위해 마오에게 도전한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6·25전쟁 영웅으로 당시 국방장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와 권력서열 2위였던 류사오치(劉少奇)였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고향을 방문했다가 그 참혹한 실상에 분개했다. 펑은 1959년 7월 “단점이 성과를 9대 1로 능가한다”고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가 공개비판의 대상이 돼 유폐됐고 그를 흠모하던 이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몰아닥쳤다. 이때는 침묵했던 류사오치는 1961년 5월부터 서서히 방향타를 돌려세웠다. 그러나 1962년 1월 “후난성 농민 곤경의 30%가 천재 탓이고 70%가 인재 탓”이라고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으론 업적 대 실패의 비율이 7대 3”이라고 마오의 체면을 세우는 발언으로 대약진운동을 중단시켰다.

마오는 이런 온당한 비판과 충고조차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앙심을 품고 있다가 3년 뒤 중국과 공산당을 산산조각 낼 문혁을 배후 조종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펑더화이와 류사오치에 대한 끔찍한 테러를 사주하게 된다.

디쾨터 교수의 이 책은 출간 다음 해인 2011년 영국에서 최고의 논픽션 작품에 수여하는 새뮤얼 존슨 상을 수상했다. 디쾨터 교수는 이에 힘입어 2권의 책을 더 발표한다. ‘해방의 비극-중국혁명의 역사 1945~1957’과 ‘문화대혁명-중국인민의 역사 1963~1976’이다. 전자는 1945년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 이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과 대결에서 승리하고 1949년 성립하게 되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의 역사를 다뤘다. 후자는 중국공산당이 스스로 인정한 마오의 과오로서 문혁이 중국 인민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를 고발했다. 6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출간으로 한국에서 인민 3부작을 완간하게 된 디쾨터 교수를 여러 차례에 걸쳐 e메일로 인터뷰했다.



30년간 5200만 목숨 앗아가

인민 3부작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는 3부작까지 쓸 생각이 없었다. 내 당초 목표는 2부가 된 ‘마오의 대기근’만 쓰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최선의 계획이 어떻게 어그러지는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 계획 중에서 끔찍하게 어긋난 파괴적 예로서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을 능가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거기엔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비전이 있었지만 결국 거래, 이동, 결사, 표현, 종교를 포함한 모든 자유를 체계적으로 박탈하고 궁극적으로는 수천만 명의 보통 사람을 학살하는 신작로를 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몇 년 앞두고 중국공산당의 문서들이 조용히 공개돼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방대한 자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졌기에 ‘마오의 대기근’을 썼다. 그걸 쓰고 나니 그보다 앞서 일어난 중국혁명의 초기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러고 나서도 관련 문헌이 계속 공개돼 있기에 문혁도 다루기로 결심한 것이다. 3부작 전체를 걸쳐 관통하는 내 마음속 거대한 질문은 딱 하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평범한 인민의 삶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부 ‘해방의 비극’에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기 12년간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했다. 2부 ‘마오의 대기근’에선 대약진운동 4년 동안 무려 4500만 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했다. 3부 ‘문화대혁명’은 1962~1976년 14년간임에도 희생자 추산 수치는 150만~200만으로 상대적으로 적다.
“많은 사람이 문혁 기간에 희생자가 엄청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해방기나 대약진운동 기간과 비교하면 적은 편에 속한다. 해방기엔 실제로 그러했던, 상상의 산물이었던 간에 ‘혁명의 적들’에 대한 의도적 학살이 많이 벌어졌다. 대약진운동 시기엔 굶어 죽은 것뿐 아니라 강제노역에 떠밀리는 과정에서 맞아 죽거나 자살한 사람까지 다 합치면 수천만 명을 훌쩍 넘는다. 문혁기 10년 동안 고통을 받은 사람은 1억 명이 넘지만 실제 사망자는 200만 안팎에 머문다. 문혁은 대학살이나 재난이 아니라 중층의 상실로 특징지어진 극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문화와 영적 가치의 상실, 지위와 명예의 상실, 경력의 상실, 존엄의 상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신뢰와 예측 가능성의 상실을 포괄하는 상실이었다. 문혁의 충격은 인명의 상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무수한 삶을 부서뜨린 데 있다.”

인민 3부작에서 다룬 30년 세월 동안 희생된 인명의 숫자는 서구에서 벌어진 광범위한 학살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1부 ‘해방의 비극’ 서두에서 소개된 홍군의 창춘(長春)봉쇄로 희생된 중국인의 숫자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희생된 숫자에 필적하는 16만 명이라고 밝혔다. 또 2부 ‘마오의 대기근’에서 대약진운동으로 희생됐다고 밝힌 숫자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규모(600만)의 7배가 넘는다. 또 1~3부를 합친 사망자 5200만 명은 스탈린 시대 희생된 소련 인민 2000만의 2배가 넘는다.
“마오의 대기근과 관련해 기억해야 할 핵심 포인트는 그 죽음의 대부분이 식량을 무기화한 지방 당 간부에 의해 초래됐다는 점이다. 희생된 사람 대부분은 당을 위해 자신들의 노동력을 제공하기에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리거나 너무 병약했기에 먹을 것을 제공받지 못해서 죽은 것이다. 그들은 굶어서 죽은 게 아니라 죽도록 굶김을 당한 것이다. 내게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한 차별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근’이라는 단어는 당시의 상황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우리는 인륜성에 반하는 범죄에 대해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파멸

책을 읽으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인민을 앞세우는 척하면서 실제론 인민을 실험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인민 3부작’이라는 제목이 반어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겨냥한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목표도 있었다. 인민 3부작을 쓰기 전의 내 궁금증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인민은 어디에 있는가’였다. 정치학자들은 중국 공산당의 정책과 ‘고공 정치(high politics)’에 대해선 길게 다뤘지만 그 여파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닥쳤는지에 대해선 거의 다루지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중국학자 대다수는 중국 정권의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재생산해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정권은 인민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국가가 활용해야 할 추상, 숫자, 통계, 재료로만 바라봤다. 일당국가에서 모든 것은 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우리는 결코 그 인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중국 공산당의 기만술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서구의 환상이 함께 작용한 결과가 아닐지.
“무엇보다도 중국 공산당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보관소 자료가 일부 공개됐다 하더라도 대다수는 여전히 감춰져 있다. 중국 정부가 과거를 감시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자체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상실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서구의 환상’이라고 불렀지만 더 정확하게는 ‘오리엔털리스트(동양찬미주의자)의 환상’이 작용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에게 중국은 하나의 대안이다. 1950년대까지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전 세계인은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벌어진 일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하게 민주주의를 적대시하는 많은 이에게 중국이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라는 신화는 여전히 강고하다.”



‘공칠과삼’ 주술에서 깨어나자

인민 3부작 시대 중국의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었다. 당신의 책을 읽다 보면 중국 인민에게 마오는 과거의 황제와 큰 차이가 없다. 반역을 통해 권좌를 차지하고 메마른 영혼을 지닌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마오의 끔찍한 범죄행각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숫자놀음 아래 무의식적으로 덮어졌다.
“공칠과삼이란 표현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에 본격 돌입한 1956년 마오 자신이 스탈린에 대해 적용한 표현이었다.(디쾨터 교수는 책에서 마오가 스탈린에게 꼼짝 못했기 때문에 ‘1953년 스탈린의 죽음은 마오에겐 해방이었다’라고 썼다.) 그런데 반어적이게도 덩샤오핑은 1980년대 같은 표현을 마오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공식 평결에 적용했다. 하지만 인민3부작에서 제가 묘사한 것처럼 실제 현실에서 공산주의는 그런 숫자놀음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재앙 그 이상이었다.”

소련과 비교하면 마오쩌둥은 혁명가로서 레닌과 학살자로서 스탈린의 면모를 다 갖고 있다. 당신이 보기에 그는 레닌에 가까운가, 스탈린에 가까운가.
“마오쩌둥은 레닌이면서 스탈린이다. 그 둘(레닌과 스탈린)은 인류에 대한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20세기의 다른 많은 독재자도 그렇게 유죄판결을 받았다.(마오에겐 그런 유죄판결이 없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

어떤 이들은 소련의 레닌-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덩샤오핑을 역전해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 책 속의 덩샤오핑 역시 수만 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국민당군의 총알받이로 내몬 냉혈한이다. 1957년 문화대혁명의 전조라 할 반우파투쟁 때 숙청 인원을 50만 명으로 할당한 마오의 지시를 실행에 옮긴 행동대장이었다. 당신은 ‘마오의 싸움개’라는 표현까지 썼다. 대약진운동 기간에도 수천만 명의 농민이 기아에 시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무자비한 곡물 강출을 옹호하고 다녔다. 덩의 공과 과의 비율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공과 과의 비율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덩이 문혁 기간 비교적 상처를 덜 받고 살아남은 것은 마오의 영악한 정치적 타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덩이 공산당 일당독재를 존속시킬 강경파임을 간파한 것이다. 1976년 마오가 죽고 나서 덩이 착수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덩을 개혁개방의 설계자로 묘사하곤 하는데 인민 3부작의 마지막 권에서 묘파했듯이 개혁개방의 진정한 설계자는 평범한 인민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마오 집권 마지막 5년 기간에 계획경제의 기초를 무너뜨린 주역이자 암시장을 열고, 지하공장을 운영하고, 집단자산을 나눠 가짐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집산화 계획을 조용히 포기하도록 만든 주체다. 그들이 시장을 되살려내 경제성장을 이룩한 사람들이다. 덩은 그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에 대한 주도권을 주장하고 경제성장을 당의 재건에 이용할 정도의 영민함을 갖췄을 뿐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누리고 있는 경제성장은 중국공산당이 없었다면 더 빨리 이뤄지지 않았을까.
“일당국가에 관한 논지의 핵심은 모든 게 항상 정치와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경제와 연관돼 있지 않다. 중국에선 지금도 수억 명의 사람이 절망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 역시 중국에 대한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중국을 움직여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2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의 2차대전 승전기념일에 천안문 위에 올라가 축하한 것도 그런 기대의 산물이었다. 이를 지켜본 당신의 소감이 궁금하다.
“만일 중국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다 하더라도(이는 마오 시대의 중국도 하지 못한 일이지만) 6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할 통일된 한국을 원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중국을 국제정치상의 동등한 동반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매우 이질적 천에서 잘라낸 한 조각처럼 그 정권을 다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은 그 구조나 사고방식에서 여전히 레닌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2030년이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란 관측과 중국식 경제성장이 한계에 달했기에 다시 ‘미국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북핵문제가 악화되면서 한국은 미국이냐 중국이냐는 극단적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중국학자로서 당신의 충고는 무엇인가.
“나는 정치인이 아니며 국제관계 전문가도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역사는 경제적 측면에서 하나의 기본 원칙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경제성장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조작의 대가들이 나치독일과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같은 일당독재국가라는 점이다. 대공황이 들이닥친 1930년대 자본주의보다 더 효율적으로 경제를 통제할 것이란 확고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이 미국에서 소련으로 이주했지만 파국적 결말을 맞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 통제를 강조하는 국가는 경제적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해낼 수 없다. 한국이든 일본, 미국, 독일이든 민주국가라면 비록 그 과정이 불평등하고 무질서해 보일 순 있지만 일당독재국가보다 월등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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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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