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2016 광장시위의 사회문화학

각자도생의 ‘헬조선’을 넘다

  • 정윤수 | 문화평론가,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입력2016-12-29 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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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00만? 200만? 가늠하기도 어려운 숫자다. 경찰 추산에 주최 측 추산에 더해 수학자, 과학자들이 독특한 이론과 정교한 논리로 광화문광장과 전국 곳곳의 거리에 모인 사람들을 계산해야 할 정도로 현대사에 보기 드문 대중 스펙터클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결의안이 통과된 직후에도 이 숫자의 행진은 멈추지 않아서 12월 10일의 차가운 날씨에도 전국적으로 100만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헌재의 탄핵 결정까지 연인원 1000만을 상회하게 될 이 거대한 행렬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 한정해 볼 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광장 외에는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2016년의 광장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탄핵을 요구하는 정치적 광장임을 생각한다면 그 숫자, 그 열기, 그 축제적 분위기는 역사상 유례없다. 왜 이렇게 모였을까. 그 노래는, 그 촛불은, 그 함성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모였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100만 200만이 되려면 몸이 움직여야 한다. 수많은 몸이 움직여 광장을 채우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한 사람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주말의 차가운 초겨울 광장에 나간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몸의 해방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몸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했다. 입시에 찌들어 대학 문에 들어서자마자 취업 예비군이 돼야 하는 몸, 고도의 경쟁 체제에서 쉬지 않고 능력을 발현해야 하는 몸, 육체적인 힘은 남아 있으나 사회적 압력으로 일찌감치 쇠락해버린 몸.



    자신의 몸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광장은 모처럼 그 몸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외치고 행진하게 하는 활력의 공간이 된다.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의 광장, 그것은 곧 해방된 몸의 광장이다. 다중의 눈빛, 여러 개의 몸, 뒤섞이는 목소리가 광장을 메운다. 지배적 시선이 던지는 날카로운 시선의 지배는, 적어도 광장에서는 효력을 잃는다.

    이는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몸이 어떻게 재단되고 관리되고 소비됐는가.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는 “초등학생부터 수천 명의 단위로 각급 학교 학생들이 인명과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각종 ‘해병대 캠프’에 끌려다녀도 사회적 반발이 거의 없는 대한민국은, 군사주의 병균에 대한 면역성”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한국 사회에 “내재돼온 파시스트적 요소들을 좀 더 강화하고 가시화하고 심지어 절대화”하려고 시도해왔다.

    이 징후들, 다시 말해 ‘해병대 훈련’이나 위계서열화한 사회적 양식 등은 언제라도 언론 자유 말살, 의회민주주의 실종, 국가정보원 정치 개입 등의 현실 정치적 전략으로 외화(外化)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은 한국 사회가 “국가를 절대선으로 보는 사고방식, 그리고 내·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적과 전쟁을 하듯이 정당과 국가를 운영하는 것, 그리고 국가 이념의 단일성과 순결성을 강조하거나 정치사회 내의 이해관계 조정의 관념을 배제하는 것, 절차와 법보다는 정치적 목표를 중시하고 저항세력에게 공공연한 폭력을 사용하는 등의 지배적 관념이 압도해왔다”고 말한다.



     최순실 이전의 최순실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몸은 잔인한 경쟁과 참담한 모멸감에 방치돼왔다. 광장의 열기가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을 보자. 예컨대 전경련의 이승철 부회장은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거만한 자세에 비웃음까지 섞어가며 “최순실의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에 대해서는 기업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지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거들먹거리는 표정, 싱겁다는 듯 다리까지 떨면서 국회의원과 국민을 바라보는 그의 잔인한 냉소는, 이 사회의 지배적 집단이 어떻게 하위 계층을 바라봤는지, 이른바 ‘개돼지’들을 어떻게 부려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순실 이전에도 얼마나 많은 최순실이 있었던가. 이른바 ‘라면 상무’를 시작으로 바로 그 항공사 부사장의 ‘땅콩 리턴(회항)’ 같은 비인간적인 횡포를 비롯해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건은 수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겪은 숱한 모멸감을 참혹하게 되새기게 하는 사건들이다. 여기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보여주는 양태는 감시받고 일상적으로 억압받아 늘 모멸감에 짓눌려 살아온 수많은 사람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왔다. 물론 계기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으로는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 그것을 합리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국의 권위주의와 군사문화, 그에 따른 청년 실업과 각종 사회문제, 급기야 개인의 몸이 억압받는 파괴적 양상으로 모멸감을 당한 몸들이 견딜 수 없어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광장에 나온 각자의 몸속에는 응어리진 감정들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길게 보면, 한국의 근현대사는 강력한 지배자들이 세상의 ‘개돼지’들에게 굴욕의 감정을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일제의 ‘황국 신민화’, 그 문화 지배 전략을 복제한 광복 이후의 독재 동원 체제,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가혹한 경쟁 구도는 특정한 형태의 ‘감정 생산과 통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 특정한 형태란 ‘가만있으라’는 말로 압축된다. 국가가 하는 일, 국가의 결정, 국가가 가리키는 방향에 대해 저항은커녕 이견 표출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이 말은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 회사의 숱한 조직, 심지어 향우회나 조기축구회나 계모임에서도 관철되는 생존법이었다.


     세월호 이후 생겨난 공포

    3수 끝에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을 때, 그것이 자칫 지역경제 파탄과 환경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일부 학자들이 비판했을 때 민동석 외교부 차관은 평창 올림픽 유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국민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국정교과서 논란이 한창 벌어질 때 이 정책에 반대하면 “국민도 아니다”고 말했다. 자동반사적으로 나온 이 발언들은 지배 집단이 ‘국민’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것은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가 전시동원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설정한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은 비교적 평화 시기에는 약간의 논란으로 그치지만, 비상사태에서는 끔찍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6·25전쟁을 전후로 한 숱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물론이고 4·19와 5·18 악몽, 가까이로는 용산 참사와 세월호가 그렇다. 용산 참사가 발생하자 한나라당의 어느 의원은 철거민들을 ‘불순 테러 세력’이라고,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전 청와대 정무수석)는 세월호진상조사위원회에 대해 ‘세금 도둑’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태의 핵심은 결국 ‘세월호’에 있다. 세월호의 비극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 깊이 공포를 느꼈다. 아,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국가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구나, 뭐라도 요구하면 ‘비국민’으로 몰리는구나, 하는 참담한 감정 상태 말이다.

    세월호 이후 각종 비참한 사건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국가는 책임을 다하기보다 방관하거나 심지어 조롱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8월의 ‘광복 70주년’ 행사다. 나는 그때, 광화문광장에서 똑똑히 보았다. 광화문 바로 앞에 초대형 무대가 만들어졌고 드넓은 도로까지 완벽하게 통제해 크고 작은 공연이 벌어졌다. 군악대가 도로를 따라 광화문으로 행진하고 사물놀이단은 세종문화회관 쪽 도로를 이용해 광화문 앞 대형무대로 운집했다. 바로 그 자리에 1년 4개월이 넘도록 간신히 버티고 있는 세월호 천막 농성장이 있었지만 그 거대한 국가 행사는 오히려 세월호 천막을 비웃듯이 그야말로 ‘풍악을 울리며’ 진격했다.



    혼자이면서 여럿인 광장

    아무리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 행사라 해도, 어찌 됐든 자식을 잃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1년 4개월을 보내고 있는 유족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자제할 법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세월호 천막의 좌우에서는 경사스러운 음악과 충만한 음향이 넘쳐흘렀다. 버스를 개조한 무대 위에서는 세월호 유족들을 내려다보면서 조롱하듯이 요란한 춤을 췄다.

    그때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구경꾼의 처지에서도 마음이 극도로 심란해지는데, 유족들은 어떤 상태였을까. 그런 감정 상태에 내몰린 수많은 사람이 이번에 광화문광장으로 모여든 것이다.

    이 광장에는 예술가들도 함께했다. 11월 5일 시작된 광화문 캠핑촌 농성은 주말의 집회 광장을 평일의 일상 광장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 예술가들(송경동, 신유아, 노순택, 이윤엽 등의 작가)을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 성직자들, 시민들이 노숙 농성에 참여했다. 과거 몇몇 예술가가 공장과 생활 현장을 찾아갔다면, 한때 그들의 지원을 받아 외롭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캠핑촌 농성장을 찾아와 연대한 것이다. 록, 포크, 힙합, 레게, 국악 등 전 분야의 뮤지션들도 광장 무대에 올랐다. 갤럭시익스프레스, 허클베리핀, 크래쉬 같은 인디 뮤지션과 안치환, 강산에, 손병휘, 이은미, 정태춘, 전인권, 양희은이 나섰다.

    이 광장을 채운 사람들은 ‘동원된 군중’이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누군가 ‘동원’한다고 해도 10만, 100만, 200만은 어림없다. 이들은 손에는 촛불을 들었지만 마음에는 뜨거운 횃불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다. 한복판으로 들어가 보면 원래 정해놓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벅찬 숨을 몰아쉬며 광화문 저 너머를 응시했다.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몸이 지배당하고 감정이 사육당한 사람들, 그들이 해방의 광장, 위계질서가 일시적으로나마 파괴된 카니발의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그들의 생존 조건은 저마다 다르며 그 기호, 감각, 취향도 다르다. 바로 이 ‘수많은 다름’이 의미가 있다. 그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광장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행진을 한다.

    그 흥미로운 증거가 독특한 깃발들이다. ‘장수풍뎅이연구회’를 시작으로 해 범야옹연대, 햄네스티, 트잉여연합, 민주묘총, 어부바연합, 전견련(전국견주연합회), 사립돌연사박물관 같은 깃발들이 펄럭거렸다. 100만, 200만은 이런 사람들의 참여로 가능한 것이다.



    그런 예감, 기대, 가능성

    무한경쟁 시대에서 혼자 살아남는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헬조선, 다시 말해 각자도생! 그리하여 혼밥, 혼술, 혼잠 같은 말들이 잔인한 블랙유머로 일상화하고 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면서, 스펙을 쌓고 성과를 올리고 사방으로 뛰어다녀도, 결국 혼자인 상태로 방치되고 버려지는 곳이 헬조선이다.

    그런데 광장이 열렸고, 그래서 ‘혼자’인 사람들이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광장에 나오는 것이다. 광장에는 보란듯이 ‘혼자 온 사람들’이라는 깃발도 펄럭이고 있었다. 헬조선에서 혼밥을 먹고 혼술을 마신 사람들. 마땅히 어떤 모임이나 연합에도 가입돼 있지 않은 사람들도 혼자 거리로 나와 광장으로, 청와대로 걸어간 것이다. 헬조선은, 혼자 탈출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여럿이 함께 움직이면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예감, 그런 기대, 그런 가능성을 위해 모인 광화문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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