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가 길회선 종단항 예정지로 발표한 나진만에 대한 ‘동아일보’ 1932년 11월13일자 르포기사. 기사 위쪽 사진은 지도에 이름조차 표시되지 않았던 오지 나진만의 당시 전경이다. 왼쪽은 나진 주변에 대한 부동산 투자로 수백배 차익을 남긴 동일상회 두취 김기덕.
‘오늘 하루도 녹록지 않겠는걸. 대체 나진이 뭔데 청진, 웅기랑 맞먹는다는 걸까.’
얼마전 사업상 알고 지내는 일본인 관리로부터 길회선(吉會線·옌지-회령 철도) 종단항(終端港·철도종착역과 연결된 항구) 후보지가 청진, 웅기, 나진 세 곳으로 압축됐다는 정보를 건네들은 뒤부터 줄곧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의문이었다.
‘청진이야 인구 4만의 중견도시인데다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이니 당연히 유력한 후보지일 테고, 웅기야 병합 이후 일본이 총력을 기울여 건설한 군항이니 청진과 자웅을 겨뤄봄 직한데, 황무지나 진배없는 나진은 도대체 왜 후보지에 낀 것일까. 청진, 웅기와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진이 종단항으로 유력하다는 뜻 아닌가.’
김기덕은 일단 나진이 어디에 붙어 있고 어떻게 생긴 곳인지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넷이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회한 사업가는, 나진까지 가는 네댓 시간의 여정 동안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종단항 후보지에 슬그머니 나진을 끼워넣은 일본의 속셈이 뭘까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김기덕은 1892년 함경북도 부령군의 가난한 농부 김형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인근 경성군의 함일학교에서 얼마간 신학문을 닦은 후 열여덟 살에 혈혈단신으로 청진에 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강제합방을 한 해 앞둔 청진의 상권은 이미 일본인 상인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김기덕은 이와타(岩田)라는 일본 상인의 상점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일했다. 근면하고 명석한 김기덕은 잔심부름꾼 생활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해 열심히 일본어 실력을 닦았다.
강제병합 후 청진에 축항(築港) 공사가 시작됐다. 항만의 시공을 맡은 일본 상선회사는 통역과 잔심부름을 맡을 소년을 구했다. 이태 동안 김기덕의 성실한 태도를 눈여겨보아온 이와타는 김기덕을 상선회사에 추천했다. 처음엔 일개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얼마 후 정규직 측량 보조기사로 채용됐다. 1년 후에는 ‘보조’자도 떼버리고 측량기사로 승진했다.
함경북도 토지왕 김기덕
서글서글한 성격의 김기덕은 누구와도 잘 어울렸지만, 특히 일본인 간부들의 총애를 받았다. 1913년 청진항 측량이 끝나자 측량기사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기덕을 아끼던 간부들은 귀국 선물로 그의 일본행을 주선했다. 오사카로 건너간 김기덕은 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간장 도매상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2년 남짓 일본 상인들의 상술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학교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생생한 현장학습을 했다.
1915년 스물네 살 김기덕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청진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지인들과 ‘공동무역상사’라는 회사를 차린 후 청진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조선의 곡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연해주의 해산물과 잡화를 수입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사업인 만큼 국제무역은 그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줬다. 이와타의 상점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간 지 10년도 안 돼 김기덕은 함북에서 손꼽히는 부호로 성장했다.
가장 유력한 길회선 종단항 후보지였던 청진항.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였지만 다롄에 필적하는 대항구로 확장되기에는 만의 크기가 협소했다.
수백만 루블을 매집하고 루블화가 반등하기를 기다리던 그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됐다는 소식이었다. 루블화의 환율은 0.7루블, 0.6루블, 0.5루블… 날마다 폭락하더니 급기야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무모한 환투기의 실패로 김기덕은 러시아와의 국제무역에서 모은 수십만원의 현금을 하루아침에 고스란히 날려버렸다. 10년 남짓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찾아온 첫 시련이었다. 그러나 서른 살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김기덕은 조선은행에 전 재산을 담보로 잡히고 50만원을 대출받았다.
비록 빚은 빚이로되 50만원이나 졌다면 그의 수완을 알 것이다. 더욱이 조선은행 같은 빚지기 어려운 중앙은행에서 50만원의 거액을 빌려 쓴 것은 오늘날까지 희귀한 일이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
조선은행이 ‘한낱’ 조선인에게 20만원 남짓한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선뜻 50만원을 빌려준 데에는 총독부 국장의 압력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김기덕은 대출 알선을 부탁하기 위해 총독부 국장에게 1만원짜리 순금 괘종시계를 선물했다고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본인 관리들을 누구보다도 잘 요리한 조선인 사업가였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국형 정경유착’의 선구자였다.
어쨌거나 현재 가치로 10억원 상당의 뇌물로 500억원 상당의 현금을 확보한 김기덕은 파산 직전에 몰린 사업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공동무역상사를 ‘동일상회’로 확대 개편해 만주, 연해주, 조선을 잇는 삼각무역을 개시했고, 회령에 백산상회를 차려 목재와 물화를 수집하는가 하면, 무산과 청진에는 각각 목재회사를 설립했다. 함경선 부설공사에서도 김기덕은 조선은행 대출 때와 비슷한 방식의 수완을 발휘해 철도국에 다량의 침목과 전신주를 납품했다. 그러나 김기덕의 ‘본업’은 무역과 목재가공업이 아니었다.
김기덕은 조선은행에서 대출받은 50만원을 밑천으로 땅 장사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60억톤의 석탄과 3억그루의 목재, 10만정보의 미개간지와 무진장의 해산물을 지닌 함북을 점차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함북의 토지가격도 점차 올랐다. 예민한 눈을 가진 김기덕은 이 점을 깨닫고 상공업의 부지가 될 만한 곳을 택해 싼 값으로 사서 비싼 값으로 되팔았다. 그리하여 일약 백만장자라는 명성을 들었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
탁월한 안목을 가진 ‘부동산 투자자’ 김기덕이 1925년 가을 비포장도로 100km를 달려 외딴 포구 나진을 찾아간 이유는, 과연 길회선의 종단항이 될 만한 곳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청진과 웅기가 유력한 종단항 후보지라 하더라도, 나진이 종단항이 될 확률이 단 1%라도 남아 있는 한 투자를 신중히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해의 다롄’
일본은 섬나라다. 섬나라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려면 일본과 대륙 양측에 각각 대규모 항구가 필요했다. 근대 이후 일본은 대륙과 교역하기 위해 세 가지 간선을 개척했다. 첫째는 쓰루가(敦賀)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철도로 이어지는 ‘동해항로’, 둘째는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부산, 신의주를 경유해 펑톈(奉天)으로 연결하는 ‘조선철도’, 셋째는 모지(門司)에서 다롄(大連), 남만주철도로 이어지는 ‘황해항로’였다.
거리만 보면 최적의 노선은 쓰루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동해항로였다. 그러나 동해항로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이 겨울에 얼고 러시아 영토라서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노선은 1910년 이후 완전히 일본의 통제 하에 놓인 조선철도지만, 이동거리가 너무 길고 철도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물류비가 비싸지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대륙과 교역할 때 일반적으로 황해항로를 이용했다.
종단항 결정 직후의 나진 풍경을 묘사한 1932년 11월의 잡지 기사.
그 때문에 길회선이 완공되면 일본과 대륙 사이의 교역은 대부분 종단항을 통해 이뤄질 것이 분명했다. 이론상으로 길회선 종단항은 남만주철도 종단항 다롄보다 경제적·정치적·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터였다. 인구 100만의 다롄보다 더 크고 부유한 도시! 그것이 길회선 종단항의 장밋빛 미래였다.
1909년 중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그때까지 조선 땅이던 간도와 길회선 부설권을 맞바꿨을 만큼, 일본은 길회선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길회선이 착공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어느 항구를 종단항으로 삼을 것인지는 결론을 보지 못했다. 16년이 지난 1925년에야 겨우 청진, 웅기, 나진 세 곳의 후보지를 발표할 만큼 종단항 건설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어느 항구로 결정하든 조금씩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결국엔 청진이 종단항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지만, 청진이 종단항으로 최적의 입지조건이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을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청진은 1925년 당시 함경북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으나 청어와 정어리잡이 고깃배들이 이용하는 어항으로 개발됐다. 함경북도에서 나오는 목재를 원만히 반출하기에도 협소한 청진이 만주와 중국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물자를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입지조건상 조선의 지방항구로는 손색이 없지만 8000t급 대형 선박 수백척이 한꺼번에 정박해야 하는 국제적 대항구가 되기는 역부족이었다.
웅기는 한일강제합방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항으로 개발된 항구였다. 항만시설이 청진에 비해 새것이라는 이점이 있었지만, 청진과 마찬가지로 항만이 협소하고 물살이 세다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청진에 비해 도시기반시설도 부족했다.
청진과 웅기가 종단항 후보지로 10여년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나진이 제3의 후보지로 선정된 것은 청진, 웅기 등 기존의 항구가 그만큼 종단항으로서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진은 만철(만주철도)과 항만협회 기사들이 10여 년 동안 함경북도 해안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천혜의 항구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나진만은 관동령의 비탈이 낮아짐에 따라 해면이 넓어진다. 동남으로 터진 나진만의 어귀에 형이냐? 아우냐? 대초도와 소초도가 무슨 약속이나 있듯이 바깥 바다의 파도를 가로막고 있다. 만(灣)의 가장자리에서 바깥 바다를 볼 수 없어 바다라기보다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동에서 북, 북에서 서, 좌우로 말발굽모양으로 휘어진 해안선을 안고 나진동, 간의동, 신안동, 명호동, 유현동이 붙어 있고, 바깥 바다를 내다볼 여지도 없이 만 가장자리는 나지막한 평원한 지대다. 인위적 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천연적으로 생긴 나진만은 1년에 900만톤의 화물을 처리할 대항만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항만 해면의 면적이 2000만평에 가깝다 하거니와 만 가장자리에서 한번 바라보면 타원형으로 생긴 해면은 맑은 날이 아니면 광활한 해면을 전부 시야에 끌어들일 수 없을 만치 크고 창창하다. (‘종단항 나진 답사기’, ‘동아일보’ 1932년 11월13일자) |
1925년 가을 답사를 위해 나진을 방문한 김기덕은 한눈에 나진이 항구로서 가진 무궁무진한 잠재력에 매료됐다. 나진만을 가득 채울 수백척의 대형 선박과 나진동, 간의동, 신안동, 명호동, 유현동 일대를 가득 채울 30만~40만의 인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물과 허허벌판뿐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폐가인지 사람 사는 집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허름한 초가집이 10여 채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신안면에 들어와 간의동에서 면사무소와 주재소, 보통학교를 본 이후 사람 사는 것 같은 마을은 한 곳도 볼 수 없었다.
웅기 시가 전경. 종단항 예정지 나진과 1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리적 이점 덕분에 돈벼락을 맞은 이 거리 양편에는 ‘떴다방’이 가득 찼고 브로커와 투기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기덕은 적잖이 우려됐지만, 일본의 기술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동행한 비서에게 바깥 바다와 나진만 사이에 놓인 대초도와 소초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섬 두 개 보이지? 당장 저 땅 몽땅 사들여! 그리고 나진 부근 토지가 매물로 나오면 논이건 임야건 황무지건 가리지 말고 사들여!”
나진 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김기덕은 내친김에 나진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웅기까지 둘러봤다. 입지조건만 놓고 볼 때 웅기는 나진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항만이었다. 웅기의 매력은 항만이 아니라 나진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나진은 지역이 협소하기 때문에 나진이 종단항으로 결정되면 시가지는 웅기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김기덕은 동일상회의 본사를 웅기로 옮기고 나진과 웅기의 토지를 전력을 다해 사들였다. 오늘날 그가 웅기에 300만평, 나진에 150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 유수의 대지주가 된 것도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김기덕은 말하자면 나진에 오늘이 있을 것을 벌써 7~8년 전에 꿰뚫어본 것이다. 나진의 지세를 아는 이는 짐작하리라. 내항 30리나 되는 바다를 고요히 싸안고 있는 천연의 방파제 노릇을 하는 것에 대초도와 소초도가 있다. 대초도는 약 80만평, 소초도는 약 40만평 되는 섬이다. 이 섬 두 개를 김기덕은 전부 샀던 것이다. 120여만평에 달하는 섬 2개는 온전히 김기덕의 소유이다. 이곳에는 다른 사람의 땅이라고는 한 평도 없다. 실로 옛날 전설에 나오는 ‘섬의 왕’인 격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총독부의 수용령에 의해 수용되지 않은, 장차 40만명이 들어앉을 시가지가 될 간의동, 신안동에 수십만평의 토지를 가졌고, 장차 공업지대로 개발될 웅기와 서수라(西水羅) 해안과 온성대안(穩城對岸)의 회막동에 약 300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다. 모두 합치면 450만평의 대토지가 김기덕의 소유인 것이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
대초도와 소초도 땅 120만평을 사는 데 김기덕이 지급한 돈은 고작 2만원 남짓. 농사는커녕 풀 한 포기 키우기 어려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돌산 황무지인 까닭에 평당 1, 2전이면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대대로 살 사람이 없어 팔지 못하고 마음 썩이던 대초도와 소초도의 옛날 지주들은 1000원씩, 2000원씩 뭉칫돈을 받아들고 뒤로 돌아서서 김기덕을 손가락질했다.
“젊은 녀석이 정신이 나갔지. 그 섬이 어디 농사가 되는 땅인가, 땔나무가 나오는 땅인가. 하고많은 논밭 놔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초도를 사는가.”
“그러게 말이야. 그것도 조선은행에서 이자 내고 빌린 돈으로 산 것이라지. 꼬박꼬박 이자 물면서 돌섬 산 돈 갚으려면 제아무리 김기덕이라도 속이 터질 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대초도와 소초도의 옛날 지주들은 아름다운 나진만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대초도와 소초도를 볼 때면 황무지를 ‘거금’을 받고 외지인에게 떠넘긴 자신의 탁월한 선택을 기특하게 여겼다. 적어도 1932년 8월23일 아침까지는 그랬다.
불꽃 튀는 종단항 쟁탈전
1932년 8월23일,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은 담화를 발표했다.
“지난 20여 년간 심혈을 기울여 건설하고 있는 길회선의 종단항이 오늘로서 결정되었다. 그간 종단항 입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청진, 웅기, 나진이 후보지로 경합을 벌였고, 청진과 웅기 두 항구를 병용해야 한다는 의견과, 청진을 주항으로 삼고 나진을 보조항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 나진과 웅기 두 항구를 병용해야 한다는 의견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많았다. 다양한 의견을 검토하여 총독부와 만철이 숙고한 결과 길회선 종단항은 나진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오늘부터 만철이 중심이 되어 나진에 대규모의 축항설비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나진이 유일한 종단항이라는 것은 아니다. 장래 북만주의 개발이 진전하여 북만주와 북조선을 연결하는 대규모 산업단지가 구축되는 때에는 도저히 현재의 웅기, 청진 두 항만만 가지고는 물자를 처리하기 곤란하다. 길회선이 개통하여 2, 3년간은 웅기, 청진 두 항구를 함께 사용하면 족할지 모르나 10년, 15년의 후에는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 명백하다. 그때를 대비해 만철은 나진에 대규모 축항공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진이 출현한다고 즉시 청진, 웅기 두 항구가 몰락하는 것은 아니다. 나진의 번영은 곧 청진, 웅기의 번영을 의미한다.” (‘길회선 종단항 나진으로 결정’, ‘동아일보’ 1932년 8월25일자) |
이로써 일본이 길회선 부설권을 확보한 지 33년, 청진·웅기·나진 세 후보지가 발표된 지 7년 만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길회선 종단항은 나진으로 최종 확정됐다. 후보지가 발표된 1925년 이후 7년간 종단항 입지를 놓고 ‘국론’은 갈기갈기 찢겼다. 청진과 웅기 두 항구를 개축해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총독부의 주장과, 나진에 대규모 신규 항만을 건설해야 한다는 만철과 군부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사이 청진 주민과 웅기 주민의 유치 경쟁은 감정대립으로까지 비화했다. 길회선 종단항이 청진으로 확정됐다거니, 웅기로 결정됐다거니 하는 뜬소문과 오보도 줄을 이었다.
3일 오후, 경성에 머물고 있는 전 대의사(지금의 국회의원) 나카노(中野實吉)는 만철측이 청진을 길회선 종단항으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각지에 미묘한 분위기가 일고 있는데, 청진에서는 도처에서 화제가 되어 도시 전체가 긴장과 환희에 휩싸여 있다. (‘길회선 종단항 청진으로 결정’, ‘중외일보’ 1928년 10월10일자) |
청진이 종단항으로 결정됐다는 오보가 나가면, 이내 자세히 알아보니 웅기가 종단항으로 유력하다는 또 다른 오보가 잇따랐다.
길회선 종단항은 청진을 주로 하고 웅기를 종항으로 하기로 결정한 소문이 많으나 조선에서 이 방면에 전문으로 연구하는 편에서는 종단항의 주종은 고사하고 화물의 대량은 웅기에서 출발하리라고 본다. (‘길회선 종단항은 청진보다 웅기 유력’, ‘중외일보’ 1928년 10월14일자) |
청진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가면 웅기 주민이 동요하고, 웅기가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가면 청진 주민이 동요했다. 나진으로 종단항이 최종 결정되기 6개월 전에도 웅기가 종단항으로 결정됐다는 소문이 돌 만큼 종단항 입지 문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최근에 와서 길회선 철도 종단항 문제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물의거리가 되고 있는 웅기읍 일원 신안면 일원 방면은 실로 지가가 폭등했다. 그렇게 된 것은 대자본가들이 웅기 부근 토지를 매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토지가격이 급등현상을 보이자 무지한 촌민들은 대대로 자기들의 전 재산으로 목숨을 걸고 있던 소유 토지를 전부 매각해 가지고 일시에 낭비해버리고 서북간도 등지로 유리 표랑하는 처참한 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토지 브로커들은 날이 갈수록 활기를 띠고 있다. (‘웅기읍 토지 폭등’, ‘동아일보’ 1932년 1월17일자) |
1931년까지만 해도 종단항의 입지는 청진이냐 웅기냐 아니면 청진과 웅기 병용이냐의 문제로 좁혀지는 듯했다. 만철과 군부에서 제기한 나진에 종단항을 신규로 건설하는 문제는 일찌감치 논의선상에서 배제되는 듯했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논의는 180도 뒤집어졌다.
만주 전역이 일본의 실질적 지배하에 떨어지면서 길회선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대규모 만주 개발 계획이 입안됨에 따라 청진, 웅기 두 항구만으로는 만주에서 쏟아질 엄청난 물자를 처리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급변한 국내외 정세 덕분에,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졌으되 건설비용 문제로 논의선상에서 배제되었던 나진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나진에 불어닥친 ‘땅바람’
나진이 길회선 종단항으로 결정됐다고 발표되자 인구 100여 명의 한미한 어촌에 불과하던 나진은 일약 전 조선, 전 아시아적 명소로 떠올랐다. 나진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단지 그곳에 동양 굴지의 대항구가 들어선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철에서 축항공사를 위해 첫 삽을 뜨기도 전, 조선·일본·만주·중국에서 투기꾼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종단항 나진항!’이 발표되자 곧 토지의 매매가 성행하여 소위 땅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토지 매매 대금의 수수는 자연스럽게 금융기관이 있는 웅기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토지 매매는 간혹 나진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웅기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웅기가도(街道) 좌우에는 토지 매매인 중개인으로 가득 찼다. 여기에다 나진에 돈벼락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남들이 돈 버는 판이라도 구경하자고 돈과는 인연이 먼 사람들까지 견학삼아 산보를 나서서 그야말로 웅기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진 잡화’, ‘조선일보’ 1933년 2월3일자) |
웅기는 비록 종단항에 선정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황무지 나진과 가장 가까운 도시인 덕분에 덩달아 돈벼락을 맞았다. 종단항 발표 이전 한 평에 1~2전, 비싸야 20~30전 하던 나진의 땅값은 발표 직후 2~4원, 한 달 후에는 20~40여 원까지 치솟았다. 한 달 사이에 ‘1000배’ 이상 치솟은 것이다.
1932년 8월 중순. 함경북도 경성군에 갔다가 일주일쯤 뒤에 청진을 거쳐 웅기항에 이르렀다. 이때 웅기의 전 시가지는 “땅!” “돈!” 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몇 해를 두고 청진이냐 웅기냐 나진이냐 하여 수수께끼처럼 이어져오던 길회선 종단항 문제가 필경 나진으로 결정되어 8월23일로서 정식발표가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토지 열풍이 휘몰아쳤다. “자 이제 됐다!” 하고 와글와글 모여드는 것은 모두 다 브로커 무리다. 여관마다 대만원. 거리에는 밤낮없이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실로 공전의 대활기! 나진은 웅기에서 남쪽 30리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포구로 산이 좌우에 둘러 있고 인가가 적은 황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만 해도 거기의 토지 시가가 한 평에 불과 2~ 3전이던 것이 지금은 일약 10~20원까지 올랐다. “아아 나진 근처에 땅마지기나 있었던들 두말할 것 없이 부자는 떼어놓은 것을!” 하며 탄식을 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닌게아니라 거기에 수십만평씩이나 가진 청진의 김기덕, 나남의 홍종화 같은 행운의 대지주들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네들이 그만한 토지를 장만할 적에는 그리 큰 힘이 든 것도 아니다. 만평이라 해야 100여 원가량이면 족했던 것이다. 또 그곳 빈농들이 지세 체납으로 말미암아 차압을 당하게 될 때 기십전 되는 지세나 물고 거저 가질 수도 있었다. 이러든 것이 오늘날 와서 천 배, 만 배나 오를 줄이야 꿈엔들 어찌 생각했으랴. (‘나진만의 황금비’, ‘동광’ 1932년 11월호) |
인구 4만의 도시 청진이 인구 100명도 안 되는 나진에 밀려 종단항 유치에 실패하자, 청진 주민들은 일치단결해 ‘종단항 탈환 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당시의 청진 시가.
나진 땅을 둘러싼 전설도 여럿 나왔다. 나진의 늙은 어부는 몇 평 안 되는 땅을 팔아 1만여 원(현재 가치 10억여 원)을 수중에 쥐고 집에 돌아와서 지폐 뭉치를 베개에 넣고 자다가, 평생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라 너무 기쁜 나머지 실성을 했다.
어떤 이는 수년 전에 나진에다 수만평 되는 밭을 사두었더니 수확은 적고 지세만 물게 되는 것을 성가시게 여겨 종단항이 발표되기 바로 몇 달 전 매입 원가에서 얼마 밑지고 다 팔아버렸다. 그것이 지금 시가계획도에서 가장 중요지로 최고가이며 멀지 않은 장래에 매 평 200원씩 될는지도 모른다 한다. 그 사람은 후회막급이라 하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다 한다. 이러한 비극이 있는 반면에 또 희극도 있다. 어떤 브로커가 한 1000평 땅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 땅을 팔라고 권하며 매평 8원씩 주겠다 하는 것을 땅임자는 통틀어 8원이라는 줄 잘못 알고 승낙했다. 그 땅이 밭이 아니고 산판이므로 종단항 발표 이전에는 비싼 값으로도 매평 5리(0.5전)였다. 땅임자가 땅값을 받으러 갔을 때 8000원을 내어주는 고로 하도 어이없어 “무엇을 이렇게 주오?” 하고 물으니 브로커가 대답하기를 “여보 아까 한 평에 8원 씩으로 계약하지 않았소? 그러니 모두 8000원이면 맞지 않소?”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땅임자는 넋 잃은 사람같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돈을 가지고 덜덜 떨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서는 이내 실성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한다. 겨우 30원의 자금으로 일주일 만에 2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번 청년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 같은 참말. 이것도 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다. (‘나진만의 황금비’, ‘동광’ 1932년 11월호) |
김기택은 몇십호(戶) 되지 않던 나진 원주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면서 월급 30원을 받았다. 그에게는 자기 땅, 종중 땅 합쳐 100만평의 땅이 있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 땅을 다 팔아봐야 서울에 집 한 채 사기 어려웠다. 그러나 종단항이 결정된 후 그는 하루아침에 천만장자가 됐다. 그밖에도 웅기의 김영근은 40만평, 나남의 홍종화는 50만평의 나진 땅을 샀다가 수백만원을 벌었다.
그러나 나진 땅바람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뭐라 해도 대초도, 소초도를 몽땅 소유한 토지왕 김기덕이었다. 웅기의 토지 300만평을 제외하고 나진 토지 120만평만 평당 10원씩 환산해도 120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2만원 남짓 투자한 돌섬이 7년 만에 무려 600배의 수익을 안겨준 것이다. 1932년 당시 1200만원 정도의 자산을 소유한 조선 사람은 ‘토지대왕’ 민영휘 후작이 유일했다.
인구 10만 규모로 추정되는 오늘날의 나진항. 1991년 북한은 이 지역 일대를 경제특구로 지정해 해외투자 유치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최근에는 중국에 50년간 항만시설 사용권을 넘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종단항 탈환’ 청진 시민 궐기대회
나진이 돈잔치를 벌이고 있는 동안 청진 주민들은 대재앙을 맞았다. 청진은 가장 유력한 종단항 후보지로 토지 투기가 기승을 부리던 곳이었다. 종단항이 나진으로 결정된 이후 땅값이 폭락하자 빚을 끌어와 땅 투기에 나섰던 이들은 알거지가 됐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투기꾼이 속출했다. 청진에 사는 김씨는 누거만의 황금을 뿌려 청진 땅 수백만평을 사놓고 ‘로스차일드’의 꿈을 꿨다. 그러나 그는 나진이 종단항으로 결정됐다는 전보를 받고 혼절해 와병 사흘 만에 “종단항, 종단항”을 연이어 부르다가 세상을 떠났다.
1925년 세 곳의 후보지가 발표된 이후 4만 청진 시민은 사실상 종단항 유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종단항으로 웅기나 나진이 유력하다는 소문이라도 나돌면 즉각 진정단을 조직해 총독부로 파견했고 ‘종단항 유치 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총독부로서는 일치단결한 청진 주민이 무서워서라도 종단항으로 청진을 배제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처럼 간절히 소망하던 종단항을 한낱 조그만 어촌인 나진에 빼앗겨버리자 청진 주민은 집단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거리는 온통 눈물바다가 됐고 도시는 활기를 잃어 초상집처럼 숙연했다. 종단항 발표 이틀 후인 1932년 8월25일 오후 7시 청진공회당에서 열린 ‘종단항 탈환 청진 부민 궐기대회’에는 무려 700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인구 4만의 도시에서 2% 가까운 주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진에 ‘강탈당한’ 종단항을 되찾아오기 위해 모였다.
공직자 유지 등 20여 명은 부민의 생명선인 종단항을 탈환하여 청진을 사수하자는 비분한 열변을 토한 후 비장한 결의로 결의문을 귀족원, 추밀원의 각 의장을 위시하여 척무성, 총독부 등 각 관계당국에 타전하는 동시에 5명의 진정원을 선출하여 즉시 상경 총독부에 진정키로 했다. 전 부민이 일치단결로 종단항을 탈환하기 위해 매진키로 결의한 후 오후 11시 반경에 폐회했다. 길회선 종단항이 나진항으로 결정된 것은 기대 많던 청진항으로서는 치명상이라 하여 부민대회에서는 제1, 제2, 제3, 제4의 진정 위원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그 선발대로 제3 진정위원 조동운, 차운철, 세토(瀨戶茂一郞), 니시하라(西原義一) 등 5명은 금 27일 아침 상경했다. 당일은 토요일이라 총독부 관계자들에게 대한 진정은 후일로 미루고 우선 천하의 여론을 환기코자 진정위원 5인은 경성 부내의 각 신문사를 방문하고 적극적 성원을 구했다. 이와 전후하여 제1번, 제2번으로 상경한 황종국, 니시하라, 오카모토 등 4명도 빠른 시일 내에 도쿄에 건너가서 중앙 정계 관계자들에게 진정하리라 한다. 총독부 진정원들은 말하되, “문제의 종단항은 청진 웅기를 도외시 않고 두 항구 병용주의를 총독부 수뇌부가 누누이 언명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번 그를 나진으로 결정해버린 것은 4만에 가까운 우리 청진 부민들의 여망을 너무도 무시한 것이며 당국의 신뢰를 너무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다수 부민의 장래 복리를 위하여 어디까지든 항쟁할 결심입니다.” (‘격분한 청진 시민대회’, ‘동아일보’ 1932년 8월28일자) |
청진은 함경북도의 중심항구로 발전해온 도시였다. 4만 주민 절반의 생계는 항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나진에 인구 30만~40만의 대도시가 세워진다는 것은 청진 주민으로서는 생계에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10년 안에 함경북도 중심항구로서 청진의 위상은 급속히 퇴락할 것이고 주민의 반수 이상이 나진으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됐다. 문제는 이주할 때 집이며 논밭 등을 사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협 앞에 조선인, 일본인의 구분, 민관의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1932년 청진은 생존권을 매개로 완벽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그것도 자발적으로 구현했다. 종단항 탈환을 위한 청진 주민의 노력은 이듬해 겨울까지 지속됐다. 나진에 땅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친 지 6개월이 지난 1933년 1월, 나진만에 얼음이 떠다니는 괴사건이 발생했다. 나진은 한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곳인 만큼 겨울철 결빙의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호시탐탐 ‘종단항 탈환’을 노리던 청진 주민은 이러한 호재를 놓치지 않았다.
요사이 함경북도 나진 일대의 주민들은 조선인, 일본인 불문하고 청진 발간의 ‘북선일보’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달하여 ‘북선일보’를 타도해야 한다느니, 불매운동을 단행한다는 등 여러가지 비난이 자자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난 13일, 14일 양일간 혹한에 나진항의 내항 30리가 전체 결빙되어 3일간 배가 통하지 못하였으니 나진의 종단항 문제는 이에 수포에 돌아갈 것이다”라는 삽화기사가 지난 16일, 17일, 18일부 ‘북선일보’에 사흘간 연재되었으므로 이에 분개한 것이다. 나진 주민들은 지난 19일 고사여관에 임시 긴급회의를 열고 대표를 선출하여 만철과 함께 조사한 결과 ‘북선일보’가 보도한 내항 30리 결빙과 기선 불통 기사는 허무맹랑한 날조 기사이고 사실은 항구 주변에 얼음성애가 약 두어 자 넓이로 앉았고 명호동 방면으로부터 바람에 떠내려온 얼음성애가 서로 엉겼다가 다음날 북풍에 다시 물러나간 것뿐이라 한다. 요컨대 이는 종단항의 나진 결정에 불만을 가진 청진 소재 ‘북선일보’가 나진의 종단항 건설을 방해하고자 그와 같은 허무한 기사를 게재하여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이라 한다. (‘결빙설, 나진주민 분기’ ‘동아일보’ 1933년 1월30일자) |
종단항 건설 문제로 함경북도에서는 10여 명의 백만장자, 100여 명의 십만장자가 출현했지만 지역감정은 극도로 악화됐다. 총독부는 청진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하고 항만과 철도를 확장하는 당근책으로 흉흉해진 청진 주민의 민심을 가까스로 수습했다.
나진의 추억
“관변에 있는 유력자를 통해 비밀리에 나온 말일세. 서해안에 제2의 나진이 생긴다네. 지금은 관청에서만 알 뿐이지만, 항만 용지는 비밀리에 매수되었네. 머지않아 당국자로부터 공표가 있을 것일세. 어때?”“대관절 어딘가?”“그걸 낸들 아나. 그 모씨라는 이만 알지. 날더러 만원이라도 자본을 끌어오면 자기는 설계도를 복사해낸 사람이라 거기서도 어디어디가 요지인지 아니까, 그 요지만 산단 말이지. 그리고 많이도 바라지 않아. 비용 죄다 제치고 순이익의 20%만 달라는 거야.” (‘복덕방’, ‘조광’ 1937년 3월호) |
소설가 이태준이 소설 ‘복덕방’에서 묘사한 토지 브로커의 활약상이다. 나진의 땅바람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아 불과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 나진 일대 웬만한 곳의 땅값은 서울 땅값보다 비쌌다. 1000배씩, 1만배씩 올랐던 땅값은 10분의 1, 100분의 1로 떨어지고 나서야 진정됐다. 인구 40만의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만철의 예상과는 달리 광복 직전까지 나진은 인구 4만의 소도시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청진의 인구는 4만에서 8만으로 증가했다.
나진의 투기 열풍은 3년 만에 종말을 고했지만, ‘나진의 추억’은 영원했다. 총독부는 조선 곳곳에 길을 닦고,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했다. 그때마다 개발이 있는 곳에 투기가 있다는 ‘나진의 추억’은 따라다녔다.
북선제철소의 청진 유력설이 떠돌고 각계의 중요인물이 속속 들이닥치자 청진 나남 양 도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정도로 토지 투기열이 맹렬하여 경향 각처의 토지 브로커가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토지 브로커가 퍼뜨리는 유근무근의 억측이 성행하여 그들의 수중에서 요리되어 땅값은 날개 돋친 듯 날이 갈수록 폭등하고 있다. 청진-나남 간 일등도로 연변을 중심으로 한 수성평야의 주요지대는 금년 여름보다 10배 이상 폭등했다. 지금까지 황무지나 모래벌판으로 세상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던 토지가 매평 3~4원에서 7~8원까지 거래되고, 갖은 협잡까지 끼어 도리어 지방 발전상 지장이 크리라 하여 일반 시민들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매도, 매수측은 유언비어에 주의하야 자중해야 할 것이다. (‘토지광시대 도래’, ‘조선일보’ 1936년 11월12일자) |
‘투기적 투자자’
농사짓던 땅이 공장지대로 바뀌고 비포장도로로 연결된 마을에 아스팔트가 깔리면 토지 가치는 그만큼 증대한다. 근대화는 곧 지가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0여 년간 개발이 얼마나 지가를 올려놓는지 수도 없이 목도했다. 나진 토지바람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었던 집단적 땅 투기 열풍이었고, 브로커와 투기꾼이 합심해서 끌어올린 땅값도 사상 최대였을 것이다.
아무리 투기가 위험하다고 역설해도 근본적으로 투기를 막지 못하는 이유는, 투기를 통해 돈을 번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투기를 막기 위해 개발을 멈출 수 없듯 투기로 벌어들인 돈을 한푼도 남김없이 환수할 방법도 사실상 없을 것이다. 투기와 투자는 백지 한 장 차이이기 때문이다. 나진만을 에워싸고 있는 돌섬 두 곳을 사서 일약 천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김기덕은 투기꾼일까, 예리한 안목을 가진 투자자일까. 아마도 ‘투기적 투자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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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를 막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투기로 돈 버는 것이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투기가 너무나 위험천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기를 막기 위해 발상을 전환해봄 직도 하다. 어지간히 연구하고 노력하지 않고서는 투기로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이다. 나진에서 돈 번 사람은 수백 명을 헤아리지만, 그 몇백배, 몇천배의 투기꾼들이 청진에서 알거지로 전락했다. 전 재산에 목숨을 걸고 투기하고 싶은가? 나 같으면 꼬박꼬박 주는 월급 받으며 그냥 성실하게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