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거사 앞둔 김상옥이 정말 폭탄을 던졌을까?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8-05-07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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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살단이 총독 암살이라는 중차대한 과업을 코앞에 둔 1923년 1월12일. 누군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그것은 영웅적인 행위였고, 그 덕분에 총독부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경찰은 범인으로 김상옥을 지목했다. 수십명의 동지와 3년 가까이 준비한 사이토(齋藤) 총독 암살 거사를 코앞에 둔 김상옥이 과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거사를 그르쳤을까. 김상옥은 교전 도중 자살했고, 목격자는 아무도 없다.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상하이 망명 시절의 김상옥, 1923년 투탄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종로경찰서, 종로경찰서 폭탄 폭발 현장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1923년 1월14일자.

    1923년 1월12일 금요일 저녁. 홍인순, 장상용, 염창용, 박봉환, 김영칠 등 매일신보 기계부 사원 다섯 명은 종로사거리 요릿집에서 때늦은 신년 모임을 가졌다. 맛깔스러운 음식이 잇따라 나오고,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오후 8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사이 준비된 요리가 모두 나왔다.

    “이보게들, 내일도 윤전기 옆에서 기름 냄새 맡아야 하니 이쯤해서 그만 일어나세.”

    선임 사원 홍인순이 기름때 묻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말했다.

    “초저녁인데 벌써요?”

    “자. 자. 어디 오늘만 날인가. 전차 끊어지기 전에 어서 일어나자고.”



    후임 사원들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홍인순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다섯 사내는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종로경찰서 담벼락을 따라 어깨를 맞대고 걸어갔다. 겨울밤 섬뜩한 한기가 외투 속까지 파고들어 뼛속까지 저려왔다. 다섯 사내는 세운 옷깃 아래로 얼굴을 파묻고 몸을 웅크린 채 꽁꽁 얼어붙은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종로경찰서에 날아든 폭탄

    쾅! 와장창.

    오후 8시10분, 다섯 사내가 동일당 간판점 앞길을 통과할 때 종로경찰서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연이어 둔탁한 물체가 날아와 다섯 사내의 다리를 강타했다. 폭탄 파편이었다. 다섯 사내는 비틀거리다 차례로 쓰러졌다. 홍인순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우리 다섯 사람은 술을 마신 후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런 말 저런 말을 나누며 무심히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돌연히 ‘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무슨 돌조각 같은 것이 날아와 우리 발목을 칩디다. 우리는 그때 정신을 잃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저히 알지 못하지요. 정신없이 두어 걸음 걸어 나가다가 그만 땅에 꺼꾸러졌습니다. 그때 광경이라든지 누가 무엇을 던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참말 우리는 신수가 사나웠습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동아일보’ 1923년 1월14일자)


    폭탄은 종로경찰서 서편 담벼락과 인접한 교통실(交通室) 벽면 상단부에 맞고 튕겨 나와 공중에서 폭발했다. 유리창 세 장이 산산이 깨지고, 창 옆에 걸어둔 경찰복이 벌집이 되었지만, 퇴근시간 이후에 벌어진 일이라 경찰 측 인명 피해는 전무했다. 하지만 때마침 부근을 지나가던 매일신보 기계부 사원 다섯 명과 기생 원산월(元山月), 기생의 아홉 살배기 몸종 정하영 등 민간인 일곱 명이 파편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폭탄을 던진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해는 경미했지만, 경찰의 심장부에 폭탄 세례를 가한 중차대한 시국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오하라(大原) 검사, 경기도 경찰부 우마노(馬野) 경찰부장이 부리나케 달려와 전조등을 비추고 현장검증에 나섰다. 그렇지만 시야가 어두워 대충 훑어보고 자세한 검증은 이튿날로 미뤘다.

    폭음을 듣고 종로경찰서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종로사거리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찰은 시내 곳곳에 경계망을 치고 행인들의 몸수색까지 벌였으나 용의자 검거에는 실패했다.

    수사는 미궁에 빠지고…

    이튿날 오전 재개된 현장검증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가키하라(枾原) 검사장과 총독부 마루야마(丸山) 경무국장까지 나와 수사를 독려했다. 피해 본 곳을 촬영하고, 자로 재고, 파편과 유리 조각 하나까지 낱낱이 수집했다. 경찰은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시내 각 경찰서에 수사지부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미와(三輪) 경부를 중심으로 별동대를 조직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치자 수사 책임자 우마노 경찰부장은 흔히 있는 폭탄 테러의 하나일 뿐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관사에 있다가 전화로 처음 사건을 접했습니다. 비록 종로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졌다 할지라도 민심은 그리 동요하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폭탄 테러는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민심이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일부 과격한 독립파 사람들이 어찌할 수가 없어 최후 수단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외다. 어쨌든 부상자들에게는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올시다.”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동아일보’ 1923년 1월14일자)


    1월13일, 사건 발생 이틀째. 경찰은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전개했다. 과거 시국사건 관련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만 발견되면 노인, 여성 가리지 않고 가차 없이 연행해 문초했다. 당일에만 종로경찰서에서 30여 명, 동대문경찰서에서 3명을 체포해 신문했다. 수사 진행 상황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마노 경찰부장은 발표할 것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직까지 어떤 것도 발표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 수색을 진행하는 중이올시다. 지금 범인을 잡았다든지 잡지 못했다든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외다. 범인을 잡았다 할지라도 범인의 계통을 조사하며 연루자를 잡지 않으면 아니 될 터인즉, 그 진상을 발표치 못하는 것을 양해해주십시오. 경찰 당국에서도 사건을 발표할 시기가 오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진상을 세상에 발표해 일반의 의심을 풀고자 하는 바올시다. 또한 폭탄으로 말하면 교통실 유리창에 부딪히고 공중으로 퍼지며 산산이 터져버린 관계로 경찰 당국에서는 폭탄의 성질과 세력을 감정하려고 지극히 노력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수색본부는 종로에’, ‘동아일보’ 1923년 1월15일자)


    1월15일, 사건 발생 나흘째. 서울 시내 전 경찰은 70여 시간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폭탄 투척 용의자 수색에 나섰다. 그렇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수사가 장기화하자 경찰은 수사본부를 종로경찰서에서 경기도 경찰부로 이전하고, 미와 경부, 아사이(淺井) 경부보 등 40여 명의 고등계 형사로 조직된 별동대를 중심으로 수사에 나섰다.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수사를 펼치다 보니 사건은 갈수록 미궁에 빠졌다.

    삼판통 혈투

    1월17일, 사건 발생 엿새째 새벽 5시. 남산 아래 삼판통(지금의 후암동) 304번지 고봉근의 집 주위를 15명의 수사대가 에워쌌다. 지난 밤 내린 폭설이 그대로 얼어붙어 길은 온통 빙판이었다. 지휘관인 종로경찰서 이마세(今瀨) 경부가 조용히 대문 앞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당겨보았다. 예상대로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마세가 손을 들어 담장 너머를 가리키자 경찰 10명이 담장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이마세는 남은 경찰 4명에게 대문 밖에서 경계를 설 것을 지시하고 자신도 담장을 뛰어넘어 비좁은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마세가 손을 들어 안방과 건넌방을 차례로 가리켰다. 뒤에 서 있던 경찰 10명이 권총을 꺼내 이마세가 가리킨 두 곳을 5명씩 흩어져 겨냥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이마세가 동네가 떠나갈 듯 고함을 질러 집주인을 찾았다.

    “고봉근! 고봉근 자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마세가 다시 소리쳤다.

    “고봉근! 고봉근 나와!”

    “이 시간에 대체 누구세요?”

    안방에서 잠결에 목이 잠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주인이 눈을 비비고 나오다 마당에 빼곡히 들어선 무장경찰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 “에고머니” 소리쳤다.

    “김상옥이 어디 있나? 김상옥이 당장 내놔!”

    “오라버니를 왜 여기서 찾으세요? 오라버니는 3년 전 집을 나가 연락이 끊겼어요.”

    3시간의 교전, 그리고 장렬한 최후

    이창규가 자고 있는 이혜수를 깨워 유리창 너머 지붕을 쳐다보게 했다. 이혜수가 찬찬히 살펴보니 경찰임이 확실했다. 이혜수는 조용히 대청으로 나가 김상옥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시오. 김 동지. 경찰들이 몰려왔소. 일어나 어서 피하시오!”

    “뭐라고?”

    “글쎄 지붕 위에 그것들이 바글바글해요. 어서 반침(半寢·큰 방에 딸린 조그만 방) 안으로 들어가요.”

    김상옥이 이혜수가 가리키는 반침 안으로 들어갔다. 반침 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한적(漢籍)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김상옥은 한적 뒤에 숨어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형사대가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동안 집안사람들은 새벽부터 죄다 일어나 미닫이를 여닫고,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는 등 부산을 떨었다. 지붕 위에서 집안을 감시하던 경찰이 우물쭈물하다가는 또다시 김상옥을 놓칠 것 같아 상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아직 시야가 어둡다. 특별한 이상 징후가 없는 한, 계속 기다려!”

    이마노는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말라고 거듭 지시했다. 겨울밤은 길어서 오전 7시가 지나서야 먼동이 텄다. 특별한 이상 징후는 없었다. 7시30분, 이마노가 드디어 작전개시 명령을 내렸다. 동대문경찰서 고등계주임 구리타(栗田) 경부를 선두로 지붕 위에 포진하고 있던 형사대가 권총을 꺼내들고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김상옥! 김상옥 나와!”

    구리타 경부가 공포를 쏘아대며 김상옥을 찾았다. 집안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형사대가 방문을 죄다 열어보았지만 김상옥은 보이지 않았다. 구리타가 찬찬히 방안을 둘러보니 벽장문이 조금씩 움직였다. 구리타가 벽장문을 버럭 열어젖히자 김상옥이 한적 더미 뒤에 숨어 양손에 권총을 든 채 구리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탕… 탕.

    “으악”

    구리타가 쏜 총탄은 허공을 갈랐고, 김상옥이 쏜 총탄은 구리타의 오른쪽 어깨를 뚫었다. 구리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경찰이 벽장을 향해 일제히 사격했다. 효제동 일대는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성으로 뒤덮였다. 김상옥은 방문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락의 담벼락을 발로 차서 뚫고 옆집인 효제동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했다. 김상옥이 집주인 김학수에게 사정했다.

    “주인장 이불을 좀 주시오. 이불을 뒤집어쓰고 탄환을 피해 몇 놈 더 쏘아 죽이고 나도 죽을 테니….”

    화들짝 놀란 김학수가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도둑이야! 강도야! 우리 집에 쌍권총을 든 괴한이 들어왔소!”

    김상옥은 76번지 담을 넘어 72번지로 달려갔다. 담을 넘을 때 동상에 걸린 발가락 하나가 떨어졌다. 수사대가 72번지를 에워싸고 항복을 권했다.

    “김상옥! 항복하라! 더는 도망갈 곳이 없다!”

    72번지 담벼락을 경계로 김상옥과 400여 명의 수사대는 30분 동안 대치했다. 대치하는 동안 이마노는 경찰 수십명을 72번지를 둘러싼 집들의 지붕에 배치했다.

    “닥치는 대로 쏴버려!”

    30분 동안의 회유에도 김상옥이 항복하지 않자 이마노가 일제사격 명령을 내렸다. 김상옥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응사했다. 72번지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집주인 이진옥 노인은 억울하게 유탄에 맞아 죽었고, 김상옥도 온몸 수십 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장독이란 장독은 모조리 깨졌고, 기둥과 벽면이 벌집이 됐다. 김상옥이 마당 옆 변소로 뛰어들어가 몸을 숨긴 채 빈 탄창에 총알을 쟀다. 총알도 이제 몇 발 남지 않았다.

    ‘다 다 다 다 다…’

    총탄이 변소간을 향해 빗발처럼 쏟아졌고, 이에 맞서 김상옥도 맹렬히 쌍권총을 쏘아붙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깨진 변소간 문짝 사이로 총탄이 날아들었다. 김상옥은 온몸에 총상을 입었다.

    탕.

    탄창에 총알이 한 발밖에 남지 않았을 때, 김상옥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움켜쥐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효제동 72번지 변소간에서 3시간 동안의 교전을 마치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폭탄은 누가 던졌나?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경찰은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의 범인으로 김상옥을 지목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 될지언정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김상옥을 따르던 동지들도 그렇게 믿었다. 오늘날까지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영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과연 김상옥이 사이토 총독 암살이라는 중차대한 과업을 코앞에 두고 경솔하게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수십명의 동지들과 3년 가까이 준비한 거사를 그르쳤을까?

    김상옥은 교전 도중 자살했고, 목격자는 아무도 없다. 결국 누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는지 정확히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확실한 것은 1923년 1월12일 누군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그것은 영웅적인 행위였으며, 그 덕분에 총독부는 등골이 서늘해졌으며, 매일신보 사원 5명과 기생과 어린아이가 다쳤고, 김상옥이 3년여에 걸쳐 준비한 거사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오늘날 국사학계에서는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의 실행자가 김상옥이라는 설을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무명지사 김상환, 맹호단원 이강연, 고려공산당원 이한호가 실행했다는 설도 이설(異說)로 인정하고 있다.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삼판통 효제동의 총살사건의 진상’, ‘동명’ 1923년 3월 18일자.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다 알고 왔으니 순순히 김상옥이 숨은 곳을 대라!”

    이마세가 안주인을 윽박질렀다. 마당에서 벌어진 소란에 뒤늦게 잠에서 깬 고봉근이 대청으로 나와 꼿꼿이 서서 경찰을 꾸짖었다.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에서 웬 소란이오? 경찰이면 아무 집이나 불쑥 쳐들어와 행패를 부려도 되오?”

    “아니, 뭐라고? 저것들 당장 끌어내.”

    이마세가 체포 명령을 내렸다. 경찰 4명이 대청으로 달려들어 고봉근과 안주인을 포박해 마당으로 끌어내렸다. 다무라(田村) 순사가 대청으로 뛰어올라 권총으로 건넌방을 가리키며 포박당한 고봉근을 향해 외쳤다.

    “김상옥이 저 방에 숨었지?”

    다무라는 유도 2단이었고, 힘세고 날래기로 종로경찰서에서 첫손가락 꼽히는 인물이었다. 고봉근은 분노에 찬 눈길만 보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무라가 건넌방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김상옥! 다 끝났다. 순순히 손들고 나와!”

    문은 안쪽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몇 번이고 항복을 권유해도 김상옥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다무라가 완력으로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이마에 핏발이 서도록 잡아당기자 꿈쩍도 하지 않던 문짝에 틈이 약간 벌어졌다.

    퍽.

    자물쇠를 지탱하던 배목이 빠지면서 문이 덜컥 열렸다. 다무라가 중심을 잃고 뒷걸음질 쳤다.

    탕… 탕.

    다무라가 중심을 잡으려는 순간, 어둠에 싸인 건넌방에서 김상옥이 양손에 권총을 들고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다무라의 목과 가슴을 연이어 뚫었다. 다무라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탕… 탕… 탕.

    김상옥이 대문을 향해 돌진하며 쌍권총을 쏘아붙였다. 부엌에 서 있던 이마세 경부가 오른쪽 팔과 옆구리에 총을 맞고 고꾸라졌고, 뒤쪽에서 달려들던 동대문경찰서 우메다(梅田) 경부보가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경찰 3명을 제압한 김상옥은 버선발로 눈 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고 권총을 난사하며 추격했지만, 김상옥은 쌍권총으로 응사하며 비호처럼 눈길을 내달려 어둠에 싸인 남산 등성이로 자취를 감췄다. 다무라는 즉사했고, 이마세와 우메다는 중상을 입었다.

    김상옥을 놓친 경찰은 정복 순사 천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 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는 한편, 순사 수백 명은 왕십리 일대와 광희정 일대를 수색했다. 기마 순사가 총칼을 번쩍이며 삼판통 일대를 경계하니 실로 일시에 경성 시내 일대는 전시 상태가 되었다. (‘癸亥 벽두의 대사건 진상’ ‘동아일보’ 1923년 3월15일자 호외)


    대장장이 소년가장

    종로경찰서 투탄(投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코앞에서 놓친 경찰은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김상옥의 누이 김아기와 매부 고봉근,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사는 모친 김점순과 아내 정진주, 동생 김춘원 등 일가 전원을 체포해 경기도 경찰부에 인치했다.

    김상옥은 1890년 서울 어의동에서 영문포수(營門砲手·영문을 지키는 군인)를 지낸 김귀현의 3남 1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이 어려서 죽어 집안의 큰아들로 자랐다. 아버지 김귀현은 김상옥이 태어나기 8년 전 임오군란에 참가했다가 군대에서 쫓겨난 이후 가사를 돌보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김상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달리 모험을 좋아했지만, 집안이 간구해 글도 배우지 못하고 여덟 살 때부터 쳇불(체의 그물) 공장에 다니며 가족을 부양했다. 열네 살부터는 대장간에 직공으로 들어가 말발굽을 만들었다.

    김상옥은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코흘리개 때부터 생활전선으로 내몰렸지만 공부를 해서 큰 인물이 되겠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16세 되던 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대문 예배당을 찾아가 기독교에 입교했다. 예배당 안에 신군야학교를 세우고 대장간 일이 끝나면 야학에 나가 밤늦도록 공부했다. 훗날 어머니 김점순은 김상옥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애가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을 다했지요. 옷 한 가지 변변한 것을 못 얻어 입고, 밥 한 술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 메밀 찌꺼기와 엿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지요. 어려서 공부가 하고 싶어 ‘어머니 나 3년만 공부를 시켜주오.’ 하던 것을 구복(口腹)이 원수라 그 원을 못 풀어주었습니다 그려. 그래서 낮에는 대장간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니는데, 시간이 촉박해 방에도 못 들어오고 마루에서 주는 것을 받아 서서 퍼먹고 갈 때 그저 체하지나 않을까 가슴 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예수교에 들어갔을 때는 저의 아버지한테 천주학 한다고 매도 많이 맞았어요. 글 읽을 틈이 없어서 낮에 일하고 고단한데도 밤에 책을 읽다가 피곤함을 못 이겨 얼굴에 책을 덮고 자던 일이 많았지요.” (‘단판 씨름의 예언’ ‘동아일보’ 1923년 3월15일자 호외)


    신군야학교는 재정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김상옥은 1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영어와 천자문을 배웠다. 하지만 그마저 대장간 일과 병행하기 어려워 1년 만에 그만뒀다. 김상옥은 보통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밤이면 동흥 야학, 경성 영어학교 등을 전전하며 배움의 길을 이어갔다.

    김상옥은 주경야독하는 고단한 일과를 이어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19세에 자신의 대장간을 차렸고, 23세에는 영덕철물상회라는 철물점을 세웠다. 어엿한 경영자가 된 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대장간에 나가 직공들과 어울려 풀무질을 하고 망치로 쇠를 두드렸다. 사업 기반이 어느 정도 닦인 후에는 동생 김춘원에게 철물점을 맡기고 충청·전라·경상 삼남지방으로 떠돌며 기독교 전도를 겸한 약장사를 다녔다.

    김상옥은 24세 되던 해에 정진주를 신부로 맞아 동대문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동대문 밖 창신동에 커다란 이층집을 지어 철물점과 살림집을 합쳤다. 28세 되던 해에는 철물점 2층에 양말, 장갑, 농기구, 말발굽, 말총모자 공장을 차리고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다. 김상옥이 손수 개발한 말총모자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훗날 어머니 김점순은 김상옥이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제 손으로 푼푼이 돈을 모아 동대문 안에 집을 두 채 짓고, 저 장가들고 제 아우 장가들이고 기를 쓰고 모아서 지금 사는 창신동 이층집 짓고 그럭저럭 돈 삼사만 원을 모았지요.” (‘단판 씨름의 예언’ ‘동아일보’ 1923년 3월15일자 호외)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김상옥 사건 시에 활동하던 일’, ‘제일선’ 1932년 5월호.

    김상옥은 20대 중반을 넘기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풍족하지는 않아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냈다. 부부 사랑도 깊어서 태용·의정 남매가 연이어 태어났고, 형제간 우애도 돈독했다. 정규 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일하는 틈틈이 공부를 계속해 상당한 한문 실력을 길렀고 일본어와 영어도 곧잘 했다.

    자신과 가족의 형편은 몰라보게 나아졌건만 김상옥은 늘 마음이 무거웠다. 일본의 국권 침탈과 강압적 통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대장간에서 쇠망치를 두드릴 때나,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수시로 울분이 끓어올랐다. 밤을 새워 술잔을 기울여봐도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김상옥은 교회를 통해 알게 된 보성고보 재학생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불교학원 재학생 신화수, 경성우편국 집배원 전우진, 애국부인회 회원 이혜수 등과 어울려 시국에 대해 토론하며 일본을 상대로 한바탕 싸워볼 기회를 노렸다.

    1919년 3월1일 아침, 김상옥은 공장 문을 닫아걸고 지난밤 고무판에 새겨 찍어낸 태극기를 직공들에게 나눠주고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갔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고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김상옥은 군중과 어울려 파고다공원을 빠져나와 경성우편국, 서울역, 대한문, 미국영사관, 서소문, 총독부, 창덕궁 등지로 분주히 돌아다니며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불렀다.

    동지들과 ‘혁신단’ 조직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의 김상옥 동상.

    오후 5시, 일본 군경이 만세운동 참가자 검거에 나섰다. 김상옥은 군중에 휩쓸려 다니다 헤어진 직공들의 안위가 걱정돼 직공들을 찾아 동대문 방향으로 걸어갔다. 동대문에 다다랐을 때 일본 헌병 하나가 장검을 치켜들고 여학생 뒤를 쫓으며 김상옥 앞을 지나갔다.

    “이놈!”

    김상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헌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장검을 든 팔을 등 뒤에서 낚아채 비틀며 오른발로 등골을 힘껏 걷어찼다. 헌병이 장검을 떨어뜨리고 비틀거리다 고꾸라졌다. 먼발치에서 육박전을 지켜보던 군중이 쓰러진 헌병 주위로 몰려왔다. 헌병이 화들짝 놀라 땅에 떨어진 장검을 내버려둔 채 종로 방향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경찰이 몰려온다!”

    누군가가 소리치자 김상옥은 헌병의 장검을 집어 들고 서둘러 몸을 피했다. 헌병에게 빼앗은 장검을 전리품 삼아 집안 깊숙이 감춰두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 후 김상옥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상옥은 오래전부터 함께 시국을 토론하던 전우진, 정설교, 윤익중, 신화수, 이혜수 등 동지들을 규합해 ‘혁신단’을 조직하고, 비밀리에 등사판과 종이를 사들여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간행했다.

    김상옥은 시위운동을 격려하는 ‘혁신공보’와 ‘독립신문’을 등사해 여러 달 동안 서울 시민에게 배포하다가 결국 1919년 8월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비상한 고초를 겪고 그해 10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불평만만의 삼십사 성상’ ‘동아일보’ 1923년 3월15일 호외)


    김상옥의 체포로 ‘혁신공보’ 발간도 중지됐다. 김상옥은 가혹한 고문에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두 달 남짓한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김상옥은 신문 발간 같은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좀 더 적극적인 투쟁 방법을 모색했다.

    백발백중 명사수가 되다

    1920년 1월23일, 효제동 혁신단 여성단원 이혜수의 집에서 김상옥과 윤익중, 그리고 만주 길림군정서에서 밀파한 김동순이 비밀회합을 가졌다. 김동순이 국내로 잠입한 목적을 설명했다.

    “3·1운동 이후 수많은 젊은 청년이 일본과 맞서 싸우겠다고 만주로 넘어와 군사훈련을 받고 있소. 우리 길림군정서는 난징 중국 정부로부터 폭탄 제조 기사를 초빙해 대규모로 폭탄을 제조하고 있소. 올해 한 해 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내년 1월 두만강이 얼면 대규모 도강 작전을 전개할 것이오. 국경 일대를 점령하고 일본 군대를 무찌르는 한편 동해 연안을 항해하는 내외국 선박을 파괴해 조선인이 일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릴 것이오. 도강 작전이 시작되면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일본 관공서를 파괴하고 관리들을 암살해 전투를 도와야 하오. 혹 동지들이 그 일을 맡아줄 수 있겠소?”

    “평소 꿈꾸던 바이오.”

    김상옥은 흔쾌히 승낙하고 김동순과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논의했다. 총독, 고관, 친일파까지 모조리 처단하기로 뜻을 모으고, 혁신단 동지들을 중심으로 암살단을 조직했다. 김상옥이 암살단의 실행 책임자를 맡고, 김동순이 무기 공급, 윤익중이 자금 모금 및 집행, 신화수가 비밀문서 취급을 담당했다. 김상옥의 대장간을 암살단 서울본부로 삼고 창고 바닥을 파 지하실을 만들어 폭탄을 제조할 화약과 쇠붙이를 넣고 비밀문서를 담은 궤짝으로 덮은 후 그 위에 농기구를 쌓아 감쪽같이 위장했다. 조직의 기틀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김동순이 김상옥에게 장일진을 소개했다.

    “김 동지, 아직 총 쏘아본 적 없죠? 암살단 동지들과 함께 이 친구에게 사격술을 배우도록 해요.”

    김동순과 함께 밀파된 장일진은 펑톈, 하얼빈, 창춘 등지를 싸움패로 전전하다가 지린으로 들어와 길림군정서 일을 측면에서 거드는 열아홉 살 난 평안도 청년이었다. 만주를 유랑하면서 사격술, 표창 던지기, 올가미질 등 살인기술을 실전을 통해 익혔다. 김상옥은 날마다 단원들을 인솔해 북한산 깊숙이 들어가 장일진에게 사격술을 배웠다. 어린 시절 최고의 석전(石戰·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전사로 이름을 떨쳤던 김상옥은 사격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 권총을 잡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성장했다.

    광복단 결사대와 손잡다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김상옥 사건 전모를 밝힌 ‘동아일보’ 1923년 3월15일자 호외.

    그해 5월 어느 날 김동순이 김상옥을 찾아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김 동지, 거사 계획을 조금 앞당겨야겠소.”

    “무슨 일이오?”

    “미국 상하 양원 의원 46명이 오는 7월초 미국을 떠나 8월5일 상하이에 도착해 난징, 베이징, 펑톈을 거쳐 8월24일 서울을 방문한다고 하오.”

    “미국 의원단하고 우리 거사하고 무슨 상관이오?”

    “미국 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총독과 고관을 처단하고 관공서를 폭파한다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을 것이오.”

    “옳은 말씀이오. 그렇다면 거사 계획이 5개월 당겨지는 셈인데…. 그때까지 무기는 준비되겠죠?”

    “자금만 마련되면 늦어도 8월20일까지는 만주에서 무기와 탄약을 들여올 수 있을 것이오.”

    김상옥은 혁신단과 암살단 자금의 대부분을 사재를 털어 조달해왔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1년 넘게 독립운동에만 매달리다 보니 한때 3만~4만원에 달하던 저축이 바닥을 보였다. 김상옥은 창신동 이층집을 담보로 2000원을 빌려 무기 구입 자금으로 내놓았고, 자금 모집책 윤익중도 자기 집을 담보로 1000원을 융통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무기 구입 자금을 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김상옥은 암살단 단원들과 함께 박영효, 박승빈 등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했다. 군자금 기부를 거부하면 대의를 위해 권총으로 위협해서라도 기어이 받아냈다.

    무기 구입 자금을 만주로 보낸 후 본격적인 군사 훈련에 돌입했다. 김상옥은 새벽마다 대원들과 함께 인적 없는 북한산 골짜기로 들어가서 권총 사격술을 연마하고, 산봉우리까지 뛰어서 오르내리며 체력을 단련했다. 김상옥은 산꼭대기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내려와서 숨을 헐떡거리며 권총을 쏴도 10발 중 9발을 명중시킬 정도로 명사수였다.

    두 달 동안의 강도 높은 군사 훈련으로 대원들의 체력과 사격술은 몰라보게 향상됐지만, 거사 일이 가까워져도 무기가 도착하지 않았다. 김상옥이 초조해서 김동순에게 물었다.

    “도대체 만주로 주문한 무기는 언제쯤 오는 거요?”

    “무기는 모두 구했는데 경계가 삼엄해서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오. 혹여 거사 일까지 무기가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달리 무기를 구할 방도를 찾아봅시다.”

    미국 의원단의 서울 방문을 기해 거사를 도모하는 단체는 암살단뿐만이 아니었다. 한훈이 지휘하는 광복단 결사대 역시 암살단과 비슷한 계획을 도모하고 있었다. 광복단 결사대는 서로군정서를 통해 권총 40자루, 탄환 3000발, 폭탄 10발을 조달해 국내로 들여왔지만, 정작 권총을 다룰 줄 아는 대원이 턱없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해 7월, 김상옥은 한훈과 만나 암살단의 거사 계획을 설명했다.

    “미국 의원단이 서울에 도착하는 날, 우리 암살단 대원들은 환영 인파 속에 흩어져 있다가 미국 의원들이 열차에서 내려 경성역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할 때 전단을 뿌리고 독립만세를 불러 군중을 선동할 것이오. 본격적인 거사는 다음날 종로에서 실행할 거요. 미국 의원단을 태운 자동차가 조선호텔에서 나와 종로를 통과할 때 뒤따라오는 자동차에 탄 총독과 고관들을 차례로 처단할 것이오. 경비대가 출동하면 대원들이 일본 군경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한편 관공서와 주요 시설을 폭파할 거요.”

    “실로 놀라운 계획이오. 내가 뭐 도울 일은 없겠소?”

    “한 동지가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우리 암살단에 무기를 좀 나눠주시오.”

    “어렵지 않은 일이오. 무기는 어떻게 전달하면 되겠소?”

    “미국 의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인 8월23일 오전 11시 우리 집 철물점 2층으로 가져다주었으면 하오.”

    “너무 위험하지 않겠소?”

    “원래 등잔불 밑이 어두운 법이오.”

    “김 동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김상옥은 거사 전날 한훈에게 무기를 건네받아 곧바로 서대순, 이운기 등 암살단 집총대원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함께 거사를 치르기로 의기투합한 김상옥과 한훈은 그 후로도 수시로 만나 거사 계획을 조율하고 다듬었다.

    실패로 돌아간 암살 계획

    ‘23일부터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떠나는 25일까지 서울에 거주하는 불순분자 1000여 명을 예비검속 한다.’

    1920년 8월23일, 서울 시내 전 경찰서에 예비검속 명령이 하달됐다. 미국 의원단의 서울 방문을 기해 독립운동 지하조직에서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자, 음모를 꾸밀지도 모르는 위험인물 전원을 그 기간에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불상사를 예방하려는 속셈이었다. 혁신단 사건 이후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오른 김상옥도 예비검속 대상자에 포함됐다.

    8월23일 오전 9시30분, 동대문경찰서 형사 10여 명이 김상옥의 집에 들이닥쳤다.

    “김상옥이 어디 갔어?”

    형사들이 뒷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짜고짜 김상옥을 찾았다. 김상옥은 집과 붙어 있는 철물점 2층에서 한두 시간 후 무기를 가져올 한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상옥의 아내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채고 둘러댔다.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갔어요. 왜 그러시죠?”

    “응, 별일 아니야. 경찰서로 데려가서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래. 정말 집에 없어?”

    형사들이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와 함부로 돌아다니며 안주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김상옥은 계단 틈으로 형사들의 동정을 살폈다. 무슨 단서를 잡고 들이닥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거사를 하루 앞두고 경찰을 따라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사들이 1층 수색을 끝내고 2층 계단을 올라왔다. 김상옥은 한훈과 접선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창문을 열어젖히고 옆집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쿵.

    “김상옥! 김상옥! 거기 서!”

    형사 하나가 2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지붕을 타고 달아나는 김상옥을 향해 외쳤다. 형사들은 추적을 포기하고 김상옥이 숨어 있던 2층 방을 샅샅이 뒤졌다. 별것 아닌 예비검속을 피해 저렇게 도주하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방안에 별다른 단서는 없었다.

    “어라, 벽이 왜 이래?”

    겉으로 봐서는 편평한 벽이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벽장이 달려 있었다. 비밀스러운 벽장문을 열어젖히자 암살단 취지문, 경고문, 암살단 가입서와 명부, 암살 대상자 목록 등 각종 전단과 비밀서류가 쏟아져 나왔다. 형사 몇 명은 벽장에서 입수한 전단과 비밀서류를 챙겨들고 김상옥의 도주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본서로 달려갔고, 나머지는 김상옥의 집에 남아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오전 11시, 한훈이 무기를 전달하기 위해 김상옥의 철물점 현관으로 들어왔다.

    “김 동지! 김 동지 집에 없소?”

    한훈이 계단을 올라가 김상옥을 찾았다. 계단 밑에 숨어 있던 형사들이 쫓아올라와 한훈을 덮쳤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한훈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몸수색을 하자 품에서 권총 3자루와 실탄 300발이 쏟아졌다.

    동대문 밖에 사는 김상옥은 오래전부터 배일사상을 품고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듯한 혐의로 경무 당국의 주의가 엄중했다. 이번에 미국 의원단이 입경(入京)할 때 무슨 음모가 있는 듯해서 지난 23일 오전 9시30분에 경관 일대가 돌연히 김상옥의 집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몰려들어가 김상옥을 찾았다. 김상옥은 어느 틈에 지붕을 뛰어넘어 자취를 감췄고, 가택을 수색한 결과 한훈이라는 혐의자와 최신식 10연발 육혈포(六穴砲·탄알을 재는 구멍이 6개 달린 권총) 3자루와 탄환 300발과 암살단 가맹 계약서 외에 불온문서 50매를 발견했다. 한훈을 엄중히 문초한 결과 한훈은 본시 상하이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에 있던 사람으로 이달 10일에 상하이를 떠나 안둥현에 이르러 기차가 위험할 것으로 예측하고 즉시 배로 압록강을 건너 개성까지 도보로 와서 개성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경성에 이르러 즉시 김상옥을 찾아와 이번 암살 음모에 가담한 모양이다. 그들의 목적은 미국 의원단이 남대문에 도착할 때 육혈포로 일본인 고관을 암살해서 조선 사람이 일본 관헌에게 얼마만한 반감을 품었는가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목하 다수 연루자를 착착 검거 중이다.(‘육혈포 암살단’ ‘동아일보’ 1920년 8월26일자)


    서울 시내 전역에 경계가 강화됐고, 이튿날 경성역에서 열리기로 예정돼 있었던 미국 의원단 환영행사는 모두 취소됐다. 경찰은 김상옥의 집에서 발견된 비밀서류를 바탕으로 대대적으로 혐의자 검거에 나서 24명의 암살단 단원 중 김동순, 윤익중, 신화수 등 18명을 체포했다. 가까스로 경찰의 검거망을 빠져나온 김상옥은 석 달간 서울에 숨어 지내며 동지들이 수감된 유치장을 파괴해 그들을 구출할 방책을 구상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1920년 10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2년 11월, 김상옥은 비단장수로 위장하고 상하이 부두에서 영국 상선에 올라 안둥으로 향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마련해준 권총 3자루와 실탄 500발은 비단상자에 감쪽같이 감춰들고 갔다. 지난해 7월 군자금 모금을 위해 밀입국한 데 이은 두 번째 국내 잠입이었다.

    “단판 씨름을 하러 왔소”

    “이번 거사에 생사가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상하이를 떠나면서 김상옥은 2년간 고락을 함께한 의열단 동지들에게 이처럼 비장한 결의를 밝혔다. 임시정부와 의열단이 김상옥에게 부여한 임무는 총독과 고관을 암살하고 관공서와 주요 시설을 폭파하라는 것이었다. 2년 전 암살단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안둥에 도착한 김상옥은 압록강이 결빙되기를 기다려 12월1일 밤 얼어붙은 압록강을 밟고 국경을 넘었다. 몇십리를 도보로 이동하다가 경의선 간이역에 정차하고 있던 화물열차에 숨어 타고 일산역까지 내려왔다. 김상옥은 일산역에서 하차해 도보로 서울로 들어와 암살단 단원 전우진의 집에서 며칠 동안 숨어 지내다 창신동 집에 들렀다.

    “어머니 주무시오?”

    대문 밖에서 아들 목소리가 들리자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어머니는 1년 만에 만난 아들이 반갑기도 했지만, 또 무슨 위험한 일을 벌일지 몰라 걱정이 앞섰다. 암살단 사건 이후 김상옥의 가족은 경찰서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고, 풀려난 이후에도 감시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집안으로 들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야, 왜 또 왔니. 죽으려고 왔니?”

    “어머니 이번엔 내가 아주 단판 씨름을 하러 왔소.”

    “얘야, 가족 생각도 좀 하고 살아야지.”

    “어멈은요?”

    어머니가 건넌방에서 손자들과 함께 자고 있는 며느리를 깨워 데려왔다. 김상옥은 1년 만에 만난 아내에게 안부를 물은 후 비장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내가 없더라도 자식들을 잘 길러주구려.”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어머니가 입을 뗐다.

    “상옥아, 그만 가거라. 그놈들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른다. 어미 생각해서라도 부디 몸조심하고.”

    “참, 누이는 어디 사오?”

    김상옥이 대문 밖으로 나가려다 물었다.

    “왜? 누이까지 못살게 하려고 그러느냐?”

    “하나밖에 없는 누이 혼례에 참석도 못했잖소. 매부 얼굴도 모르고.”

    “고 서방하고 삼판통에 산다. 삼판통 304번지. 하긴 네 누이가 집에 들를 때마다 네 소식을 잊지 않고 묻느니라.”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오. 나 이만 가오.”

    김상옥은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일본 의회의 새해 첫 회의에는 조선 총독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김상옥이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사이토 총독은 일본 의회 참석을 위해 1월17일 경성역을 출발할 예정이었다. 김상옥은 1월17일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암살단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진 동지들을 재규합했다. 전우진, 이혜수, 정설교, 신화수, 윤익중 등 암살단 핵심 단원들이 1월17일 사이토 총독 암살 거사에 동참하기로 흔쾌히 동의했다.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전후

    서울로 잠입한 후 일주일간 동지들의 집을 전전하던 김상옥은 12월7일부터 매부 고봉근의 집에서 묵었다. 삼판통 고봉근의 집은 남산 아래 감나무 밭 사이에 위치한, 이웃이라고는 두 집밖에 없는 외딴 집이었다. 절간같이 조용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낯선 사람이 왔다 가도 소문 날 염려가 없는 최적의 은신처였다. 고봉근은 처음 보는 손위 처남이 불쑥 찾아와서 달포 넘게 신혼집에 머물러도 싫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1923년 1월12일 오후 8시, 김상옥은 윤익중과 함께 종로사거리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몹시 추운 날씨였다. 종로경찰서 부근에 다다랐을 때, 김상옥이 말했다.

    “윤 동지, 나 소피 좀 보고 곧 따라갈 테니 천천히 가고 있어요.”

    “이왕이면 종로경찰서 녀석들에게 시원하게 갈겨줘요.”

    윤익중은 김상옥이 시키는 대로 속도를 조금 줄여 가던 길을 걸어갔다.

    쾅! 와장창.

    김상옥과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로경찰서에서 폭음이 진동했다.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행인들이 종로경찰서로 우르르 몰려갔다. 윤익중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해서 걸음을 멈추고 종로경찰서 쪽을 쳐다보았다. 김상옥이 허겁지겁 달려와 윤익중에게 물었다.

    “윤 동지, 대체 이게 무슨 소리요? 우리도 저쪽으로 한번 가봅시다.”

    “그러게요.”

    두 사람은 오던 길을 거슬러 종로경찰서로 달려갔다. 소리만 컸지 피해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폭발 현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김상옥의 팔목을 윤익중이 잡아끌었다.

    “김 동지, 여기 오래 있다가는 공연히 놈들에게 붙잡힐지도 모르오. 어서 여길 뜹시다. 종로경찰서가 폭탄을 맞은 것은 후련한 일이지만 이러다 일주일도 안 남은 우리 거사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오?”

    “그… 그럴 리가. 아무튼 어서 여길 뜹시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어수선한 종로를 빠져나왔다. 그날 밤부터 서울 시내에 경찰이 쫙 깔렸다. 관공서의 경계가 강화됐고, 골목골목 경찰이 지키고 서서 불심검문을 해댔다. 요시찰인 명부에 올라 있는 몇몇 동지는 경찰에 연행돼 신문을 받기도 했다. 암살단 사건 관계로 지명수배 상태였던 김상옥은 더 이상 나다니기 어려워졌다. 김상옥은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고 고봉근의 집에 숨어 지냈지만 한 곳에 달포 넘게 머물다 보니 결국 경찰에 꼬리가 잡혔다. 경찰은 투탄 사건 발생 직전 국내로 잠입한 김상옥을 투탄 용의자로 지목했다.

    사건 발생 엿새째인 1월17일 새벽, 수사본부는 날쌔고 민첩한 형사 15명을 선발해 삼판통 고봉근의 집으로 급파했다. 새벽 5시 이마세 경부의 지휘하에 검거 작전이 시작됐고, 김상옥은 다무라 순사를 살해하고, 이마세 경부와 우메다 경부보에게 중상을 입힌 후 눈길을 내달려 어둠에 싸인 남산 등성이로 달아났다. 1월17일은 김상옥이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던 날이기도 했다. 총독을 살해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치겠다는 김상옥의 두 번째 꿈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신출귀몰한 도주

    “으악…”

    퍽.

    경찰의 추격을 벗어난 김상옥은 날이 밝기 전 남산을 빠져나가기 위해 한강리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다 발을 헛디뎌 얕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을 참고 정신을 추슬러 주위를 둘러보니 서빙고 채석장이었다. 눈 쌓인 편평한 바위 위에 떨어진 덕분에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채석장 비탈을 걸어 올라갔다. 한 발짝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발바닥에서 찢어지는 고통이 전해졌다. 장충단 부근 백호정에 도착하니 먼동이 텄다. 그제야 자신이 신발을 신지 않고 뛰쳐나와 눈길을 헤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카로운 채석장 돌멩이를 밟아 너덜너덜해진 버선은 찢어진 발바닥에서 흐르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날이 밝은 후 경찰이 김상옥의 발자국을 추적해보니 발자국 사이가 5~10m씩 벌어져 있었다. 경찰 사이에 ‘김상옥이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실제로 김상옥이 축지법을 썼는지, 타잔처럼 나뭇가지를 붙잡고 나무 사이를 옮겨간 것인지, 아니면 극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인지는 그 후로도 밝혀지지 않았다.

    김상옥은 왕십리 안장사에서 아침밥을 공양하고 주지에게 버선과 승복, 짚신, 여승이 쓰는 모자를 얻어 새벽 불공을 드리러가는 여승으로 변장하고 왕십리를 향해 산길을 내려갔다. 짚신을 거꾸로 신어 왕십리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왕십리에서 올라온 것처럼 보이게 위장했다. 김상옥은 마장동 개천을 건너 청량리로 가서 영도사 고개를 넘어 미아리 무내미에 있는 이모 집으로 피신했다.

    “아니 상옥아! 상하이에 갔다더니 그 꼴로 어쩐 일이니?”

    경관 400명, 겹겹의 포위망

    이모가 묻자, 김상옥은 “이모님 저는 이제 세상이 귀찮아 중이 되었으니 시주나 좀 하시오” 하며 껄껄 웃었다. 김상옥은 이모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효제동 73번지 이혜수의 집으로 은둔처를 옮겼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지들이 어서 상하이로 몸을 피하라고 권했지만, 김상옥은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김상옥은 이혜수의 집에서 새로운 거사 계획을 구상하고 도주할 때 입은 발바닥의 상처를 치료했다.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이 발생한 지 11일, 삼판통 혈투가 발생한 지 6일이 지난 1월22일 새벽 4시30분, 경기도 경찰부 이마노 경찰부장은 무장경관 400여 명을 동원해 효제동 일대를 4겹으로 포위했다. 미와 경부가 이끄는 별동대는 경성우편국 집배원 전우진을 체포해 가혹하게 고문한 끝에 지난 밤, 자신이 암살단 단원이며, 김상옥이 암살단 여성단원 이혜수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자백받았다. 미와 경부의 보고를 받은 이마노 경찰부장은 무장경관 15명이 김상옥 한 명을 제압하지 못하고 3명의 사상자를 낸 치욕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총동원해 자신이 직접 인솔해 효제동으로 달려갔다.

    이혜수의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제1진은 권총으로 무장한 경관, 제2진은 소총으로 무장한 경관, 제3진은 기마 경관, 제4진은 헌병대 및 자동차 순으로 겹겹이 에워쌌다. 제1진에 속한 경찰 수십명이 지붕 위에 올라가 김상옥이 숨어 있는 방을 감시했다.

    진눈깨비가 흩날려 길은 몹시 질척거리고 어두웠다. 효제동 포위망을 설치한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이마노는 작전 개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무리하게 김상옥을 검거하려들다 공연히 3명의 사상자만 낸 삼판통의 치욕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날이 완전히 밝은 후 작전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새벽 5시, 이혜수의 동생 이창규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변소간에 가려고 대청으로 나오는데 어디선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니 지붕 위에 사람 같은 시꺼먼 물체가 흩어져 앉아 있었다.

    “에고머니!”

    이창규는 마당에 있는 변소간에 가려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방으로 쫓아 들어갔다.

    “저… 저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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