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m2(20평) 남짓한 교회 부속건물에는 1970년대 노동자들의 벌집방처럼 작은 쪽문이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이곳 가평 산골짜기는 원래 화전민이나 살던 곳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한 달 하숙비 70만~100만원을 내야 하는 요양원과 그보다 두 배 이상 월세를 내야 하는 요양병원이 속속 들어서는 중이다. 서울에서 가평까지 승용차로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 물리적으로는 멀지 않은 거리다.
우리가 가는 곳은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 산기슭에 위치한 사설 요양원. 문을 열자 사감인 듯한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신지체자로 이곳에 머물며 봉사활동을 하는 듯했다. 116m2(35평)쯤 되는 실내는 개미굴 같았다. 좁은 거실을 중심으로 방 세 칸, 화장실 하나, 목욕실이 빙 둘러 있었다. 할아버지 5명과 할머니 12명이 머물기에는 옹색한 공간. 일반 주택과 다른 점을 들라면 화장실의 남자용 소변기나, 좌변기가 앉은뱅이 변기로 앉아서도 볼일을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점과 수도꼭지를 틀면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것 정도였다.
그들이 입은 유니폼만 본다면 ‘새싹반’ ‘개나리반’ 같은 유아원생을 연상케 했다. 할아버지는 연둣빛 티셔츠에 흰색 바지, 할머니는 노랑색 티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구석에 꼼짝 앉고 누워 있는 한 명을 빼고 훈련병들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할아버지들은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김장을 도울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마침 할머니를 돌보고 있던 원장님은 쭈뼛거리는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예배실로 쓰고 있는 큰 방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었다. 20여 개의 꽃 화분이 있었지만 똥오줌 냄새와 노인 특유의 냄새를 감추진 못했다. 욕창을 막기 위해 에어매트에 누워 있든, 베개를 벤 것처럼 목을 든 채 뻣뻣하게 누워 있든, 앞으로 꼬꾸라질 듯이 앉아 있든 모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시간이 정지한 화면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할머니는 원장님 무릎을 벤 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할머니 오른쪽 목에는 작은 달걀만한 혹이 나 있었고, 평생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쪽을 쪘던 머리는 마구잡이로 쑹덩쑹덩 잘려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아파 죽겠어, 아파 죽겠어” “추워 죽겠어, 추워 죽겠어”만 쉬지 않고 되풀이했다. 두 손으로 원장님 무릎을 받친 모습은 마치 아이가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거나 새색시가 신랑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었다. 아들 셋, 딸 다섯, 손자만 서른 명이 넘는 대가족을 일구었지만 병들고 아픈 때 무릎 하나 빌려주는 이가 없었다.
“할머니 외증손녀도 왔어, 둘이나. 외증손녀 예쁘네.”
원장님이 거듭 눈을 꼭 감고 있는 할머니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충남 대천, 독산동, 의정부 같은 도시의 변두리 지명에 이어 충남 보령 오서산 아래 성골이라고 고향 마을 이름을 대자 표정이 없던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는 말없이 앉아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는 이번에는 “밥 좀 먹어, 밥 좀 먹어”라고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