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노력의 사회에서 포기의 사회로

  •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2013-12-19 1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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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면 된다’와 ‘너는 노력해도 안 돼’ 중에 어느 말이 보통사람들에게 더 잔인하게 들릴까.
    • ‘하면 된다’처럼 노력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과연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일까.
    노력의 사회에서 포기의 사회로
    나는 강의하면서 듣는 이들을 종종 불편하게 만든다. 내 강의는 평범하고 착한 보통사람들이 대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현실에 근거해 ‘불가능한 꿈은 버리고 조금 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소박하게 살라’고 얘기한다. 이런 강의는 ‘하면 된다’라든지 심지어 ‘될 때까지 하라’ 같은 매우 이상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에겐 무척 불쾌한 궤변으로 들리고, 때로는 상처가 된다.

    하지만 과연 ‘너는 노력해도 안 돼’와 ‘하면 된다’ 중에 어떤 것이 보통사람들에게 더 잔인한 말일까. ‘하면 된다’와 같이 노력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성취의 歸因 원리

    기대에 못 미친 성적표를 받아온 자녀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대부분의 부모는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많이 안 해. 하면 잘할 텐데 안 하는 이유가 뭐니?” 이 말은 대부분의 자녀에게 진실일까. 물론 어떤 분야에서든 노력하지 않는 경우보다 노력하는 경우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부모의 그런 말이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노력하는 학생 모두가 원하는 성적을 거두진 못한다. 대부분은 기대와 먼 성적을 받고 기대와 먼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런데도 왜 우리 부모들은 끊임없이 노력을 강조할까. 부모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성공과 실패를 한결같이 노력의 결과로 해석한다. 공부, 사업, 취업, 심지어 결혼에 이르기까지 인생사에서 거둔 성공은 힘든 역경을 부단한 노력으로 이겨낸 결과이고 실패는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원래 능력이 뛰어나서…나는 원래 타고나서…별로 노력하지도 않았는데…그냥 어찌하다보니 성공했어요’와 같은 말은 거의 들어볼 수 없다. ‘재수 없어’ 보이고 잘난 척하는 것으로 보일까 두려워서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겸손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겸손한 모습이 사회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평가되니까. 왜 애초에 우리 사회는 그런 겸손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됐을까.

    심리학에서는 사회적 사건의 인과관계나, 자신과 타인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찾는 심리적 기제를 귀인(歸因)과정이라고 일컫는다. 귀인과정은 어떤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호기심 자체도 어떤 사건, 성공 또는 실패의 원인을 파악해서 미래에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고 원치 않는 결과를 막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즉 인과관계를 밝히는 심리적 귀인과정은 인간의 환경에 대한 통제욕구(need for control)와 직결된다.

    부모가 자녀의 성적을 어디로 귀인하는지는 자녀의 미래 행동, 궁극적으로 자녀의 성적을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같은 논리로 한국 사회가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노력하게끔 채찍질하는 거시적 사회 시스템의 본질로 이해하면 된다.

    웨그너라는 심리학자는 성취에 관한 인간의 귀인원리, 즉 뭔가를 성취하고자 할 때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찾아가는 심리적 원리를 체계화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능력’ ‘노력’ ‘운’ ‘과제의 특성’ 등으로 결론짓는다. 이런 원인들은 내 탓이냐 아니냐, 변할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 어찌해볼 수 있느냐 아니냐의 측면에서 미래의 행동에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친다.

    닥치고 노력해?

    성공이나 실패를 노력에 귀인하는 것은 그게 내 탓인데, 쉽게 변할 수 있고(노력은 쉽게 늘리거나 줄일 수 있고), 나의 통제 아래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를 노력에 귀인한다면 결국 미래의 성공을 위한 결론은 하나다. 더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 반대로 똑같은 결과를 능력에 귀인할 경우 내 탓이기는 한데, 지능이나 재능과 같이 잘 변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어찌해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실패한 사람이 실패의 원인을 능력에 귀인하면 별로 해볼 것이 없다고 느껴 미래에도 그냥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실패를 운에 귀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패가 내 탓도 아니고, 내가 어찌해 볼 수도 없고, 운은 돌고 도는 것이어서 미래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전혀 예상이 안 된다고 느껴진다면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가위바위보에서 졌을 때 보통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당장 “삼세판”을 외친다. 왜? 그냥 계속 해보는 거다. 새롭게 노력할 것도 없고 바꿀 것도 없다. 언제까지? 그냥 이길 때까지.

    이제 부모와 사회가 왜 그렇게 노력에 집착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자녀와 국민이 실패를 자기 탓으로 받아들이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능력이 안 된다’고 줄기차게 외치는 자녀와 국민에게 ‘아니야, 절대 능력도 운도 아니야.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 더 열심히 해’라면서.

    이렇게 애정 어린 격려처럼 들리는 말이 실제로 많은 자녀와 국민에게 얼마나 현실적인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될까. 진실로 애정 어린 격려이기는 할까. 자녀가 실제로 성공할 수 있을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만족을 위해서? 한국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국민 개개인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죽어라 노력하다가 극히 일부의 성공을 확인시켜주는 임무를 완수할 다수의 실패자가 필요해서?

    노력을 사회적 덕목으로 강조해온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이런 보편성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해볼 수 있다. 노력의 부족에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찾고 부단히 노력하며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이들의 생존과 번식 확률이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자연선택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모두의 유전자 속에 노력을 중시하는 성향이 생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이런 논리는 한국 사회의 남다른 집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는 새마을운동 구호와 같은 사회적 신념을 넘어, 노력이 아닌 다른 요인은 아예 거론하기를 금기시하는 것 같다.

    자기고양 vs 자기향상

    노력의 사회에서 포기의 사회로

    수능 성적표가 배부된 지난 11월 27일 서울 배화여고에서 수험생들이 대학 정시 배치참고표를 들여다보고 있다.

    청소년의 90% 이상이 대학을 목표로 똑같은 공부를 하는데, 전교 1등도 꼴등도 성적이 떨어지면 모두 노력이 부족해서지 결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한다. 학생 스스로 능력이 없어서라고 말해도 부모, 교사, 사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가장 높은 교육열과 가장 긴 노동시간,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짧은 수면시간…. 이 모든 것은 노력, 또 노력,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선 농경정착사회, 친족 중심의 집단생활, 유·불교적 가치와 같은 생태학적 특성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강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거의 같이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특별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 감추거나 속이기 힘든 대상이다. 이런 한국인들에게 주변의 평가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 그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더욱더 추구하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서양 사회는 사회적 이동성이 상대적으로 높고 개인주의적 가치를 중요시해 주변의 평가보다 자기 스스로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다소 착각의 여지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주관적 자기고양(self-enhancement)을 서양인들에게 선사했다. 그래서 자신을 실제보다 잘난 사람으로 믿는 경향을 갖게 됐다.

    반대로 한국인에게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보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했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위해 실질적 발전을 이뤄내는 자기향상(self-improvement)이 더 중요했다. 많은 비교문화 연구에 따르면 서양인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더 원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정확히 묘사하지만,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더 가치 있게 평가하고 더 중요하게 다룬다. 자기향상에 대한 심리적 성향은 그 무엇보다도 노력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문화심리적 특성에다 마치 불난 데 기름 부은 격인 폭발적 요인이 하나 더 있다. 지난 60년간의 엄청난 경제발전이다. 비약적인 경제발전 과정에서 사회는 물론 한국인 개개인도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 발전과 성공을 이뤄내고 목격했다. 아직도 어려운 사람이 많고 균등하게 성공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국민은 60년 전보다 훨씬 잘 먹고 잘산다. 60년 전 세계 최빈국 국민이던 한국인들은 이후 목숨을 걸고 노력했고, 그간의 변화와 발전 과정에서 노력에 대한 엄청난 학습효과를 경험했다. 그 결과 더 잘 살게 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 배경과 능력이 다른데도 국민 대부분이 더 잘살게 된 경험은 그 무엇보다 노력이라는 요인을 부각시켰다.

    이런 학습효과에 더해 우리를 헛갈리게 한 것은 인과 혼동의 오류다. 성공한 사람 100명을 붙잡고 물어보면 99명은 엄청난 고생과 노력을 통해 그 자리에 왔다고 얘기할 것이다. 사실이다. 지금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 아니 성공하지 못한 사람 대부분도 몇 십 년 전에는 못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노력이 성공의 필요조건인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충분조건이 되진 않는다. 성공한 사람이 노력했던 건 맞지만, 노력한 사람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한 사람 중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이런 학습효과와 인과 혼동의 오류에서 비롯된 ‘하면 된다’라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룬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진실보다는 거짓이나 사기에 더 가깝다.

    노력이 일으키는 문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노력에서 찾는 성향은 젊은 세대보다는 기성세대에서 더 강하다. 그래서 한국의 어른과 부모는 젊은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너희가 고생을 해봤어야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경험에서 나온 이런 진실한 믿음과 충고는 오히려 귀납법 오류의 결과일 수 있다.

    오늘 마주친 속도위반 단속 카메라가 고장 난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면 대개 내일도 그 카메라가 고장 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많은 예측 불가능 요인, 예를 들어 경찰이 작동되는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거나 고장 난 카메라를 수리할 수 있다는 사실들을 고려하면 내일 그 카메라가 작동할지 여부를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예측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귀납법의 오류 가능성은 지금의 노력도 과거 노력만큼이나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는 매년 엄청난 속도로 경제 규모가 팽창하면서 인력이 늘 부족했다. 평생 직장이 가능했던 것은 사주가 종업원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인재가 항상 모자랐고 인력을 계속 채용해야 할 만큼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뿐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그냥 하려고 시도만 하는 사람, 심지어 별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까지 모두 필요했고, 그들은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느려진 요즘엔 인구가 늘어난 데다 교통, 통신, 운송 발달이 전 세계를 하나의 경쟁 시스템으로 묶어버렸다. 전 세계 사람뿐 아니라 전 세계 상품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세계적으로 가격 대비 가치가 가장 높은 몇 개의 제품을 전 세계 소비자가 다 같이 소비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프리미어리그, NBA, PGA 등 세계 최고의 경기를 안방에서 지켜본다.

    이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현상이지 누가 강요한 것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능력이나 노력 중에 어느 것 하나로만 적당히 만들어진 제품과 인재는 별 의미가 없다. 이제는 타고난 천재적 능력에 엄청난 노력까지 겸비한 이들의 세상이다. 타이거 우즈, 리오넬 메시, 스티브 잡스, 김연아 등을 보라.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이들을 앞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과연 오늘날의 성공과 실패 요인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보다 줄었을까, 늘었을까. 그래도 여전히 노력이 중요하다?

    이런 귀납적 오류는 한국 사회의 여러 비합리적 현상과 연결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학 진학률이다. 웬만한 나라들은 50%를 넘기 힘들지만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0%를 넘나든다. 산업구조상 대학졸업자가 필요한 직장이 50%를 넘지 않는 현실에도 한국 청소년의 대부분과 그들의 부모는 대학 진학에 목숨을 건다. 지금의 성적이 어떠하든,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은 모두 노력이 부족한 탓이 된다. 하지만 공부와 지적 영역도 노력만큼이나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필요하다. 취업할 때도 취업 후에도 똑같다. 회사와 사회생활에선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상당히 필요한데도 평생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쉬운 수능의 딜레마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측면이 있는데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철들고 노력하면 자동으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들과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점점 줄어드는 사회에서는, 그런 노력마저 타고난 재능, 관심, 능력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노력이 설 자리는 점차 줄고 있다.

    노력의 환상에 빠져 한국 사회가 병들어가는 데는 그런 환상에 근거한 정책들이 한몫을 한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쉬워졌다. 수능을 치르는 날이면 출제위원장은 매년 한결같이 그해 수능이 어렵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수능이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오면 마치 출제에 오류라도 있었던 듯 대역죄인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도대체 시험이 어려우면 안 되는 이유가 뭔가. 흔한 논리는 “학교수업을 ‘성실히’ 한 수험생이면 무난히 풀 수 있는 문제 위주로 출제해서 사교육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은 시험이 어려우면 공부를 더 해야 하고, 그러면 사교육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단선적인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국민이 망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 포퓰리즘 정책의 극치일 것이다.

    오히려 시험이 쉬워지면 학생들이 더 힘들어지고 사교육이 더 늘게 되는 현상에 숨은 심리적 과정에 대한 이해는 찾아볼 수 없다. 시험이 쉬워지면 국민 대부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점수가 오르고, 그래서 갈 수 있는 대학이 바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돈으로도 어쩔 수 없는 자녀의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돈과 사교육, 정보력과 같은 부모의 노력이 좌우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크든 작든 돈을 투입하면 그 만큼의 효과가 나온다. 왜? 문제가 쉬우니까.

    문제가 어려울 경우 눈에 띄는 차이를 만들어내려면 너무나 큰돈이 들어가야 하고, 사실 돈을 들여도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돈을 들여도 원래 안 되는 재능과 능력은 그냥 안 되는 거다. 그런데 100만 원만 들이면 한 문제를 더 맞힐 수 있고 그러면 한 단계 더 좋은 대학에 가는데 누가 안 하겠나. 모든 것을 노력에 귀인하고 자신이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느낌이 들면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소년과 학부모들은 죄책감에 빠져 산다. ‘할 수 있었는데’ ‘돈만 좀 더 있었으면’ ‘사교육을 조금만 더 시켰다면’ ‘우리 애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왜 포기하면 안 되나

    왜 ‘우리 애는 머리가 나빠서’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서’ ‘해도 안 될 것 같으니 그만 포기할래’ 같은 말은 그렇게 나쁜 말일까. 너무 잔인하고 상처를 줘서? 그럼 ‘너는 할 수 있어’ ‘노력하면 될 수 있어’라고 하면서 죽어라 고생시켜놓고, 끝에 가서는 ‘미안하다’는 한 마디 하고 버리는 건 어떤가. 그건 잔인하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가. 오히려 김장김치처럼 오래 묵혔다가 더 큰 상처를 주고 다른 것을 할 기회마저 빼앗는 잔인함의 극치는 아닐까.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다. 회사에서 출세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가장도, 자녀의 사교육을 포기하고 노후를 준비하려는 학부모도, 경제적 부와 사회적 성공을 포기하고 소박하고 가난한 삶에 만족하려는 자영업자도 절대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다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하기만 하면 성취할 텐데 충분히 안 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노력을 강조해서 얻은 결과가 무엇인가. 엄청난 청년실업, 무너지는 중산층, 돈 없고 갈 곳 없는 노년층, OECD에서 수학성취 1위, 그러나 학업관심도 꼴찌, 자살률 1위.

    세상에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적당히 하면서 대강 살다가 죽는다. 그게 그리 나쁜 것도 아니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뭔가를 포기한다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하나를 포기하면서 다른 것을 얻는다. 마음의 평화, 안식, 여유로움, 사랑, 어쩌면 행복도.

    노력의 사회에서 포기의 사회로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現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저서 : ‘가끔은 제정신’


    노력을 무작정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원래 그런 재주가 없어’라고 위안하며 다른 재주를 찾아가는 현명함은 포기에서 나온다. 때로는 스스로 포기 못하는 국민을 포기하게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도 길게 보면 진정한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정도(正道)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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