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공정’ 찾는 청년이 ‘더 살만한 세상’ 만든다

생존경쟁 익숙한 청년들, ‘공정한 사다리’는 유일 희망

  • 김민섭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작가

    3091201lin@gmail.com

    입력2021-08-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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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쟁을 욕망하는 이는 없어

    • 성공 아닌 생존 위한 경쟁

    • 모두가 각자의 사다리를 찾는다

    • 청년세대 원하는 건 공정한 사다리

    • SNS에서 발견한 ‘공정한 선함’

    • 기성세대, 청년 비난하기 전에 미안해해

     청년들은 성공이 아닌 생존을 위해 계층 사다리를 찾는다. [GettyImage]

    청년들은 성공이 아닌 생존을 위해 계층 사다리를 찾는다. [GettyImage]

    ‘공정’이라는 가치는 청년세대, 특히 20대 사이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기성세대는 이런 태도를 보고 “공정성에 매몰”됐다고 하거나 그들을 “경쟁밖에 모르는 세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탄생한 신(新)종족이 아니다. 그들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20대를 둘러싼 사회구조를 인식하기란 더욱 까다롭다. 나는 한때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로, 현재 작가로 일하며 10·20대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들의 공정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민감도를 이해하게 됐다. 그 경험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성공 아닌 생존 위한 경쟁

    시작은 고등학생을 만난 이야기다. 몇 년 전 인천 강화여고에 강연하러 간 일이 있다. ‘훈의 시대’라는 책을 쓰고 있을 즈음이어서, 교실 뒤에 붙어 있는 여러 훈(訓)을 ‘스스로를 규정한 언어’로 인식하고 바꿔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저희는 직접 훈을 바꾸었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답했다. 원래 강화여고 교가 후렴구 가사는 “아, 여자다워라”가 반복됐는데, 학생들 요구와 제안으로 “아, 지혜로워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나는 “정말 멋진 일”이라고 말해 줬다.

    어느 학생이 “그런데 학교 앞 바위는 언제쯤 치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고 첨언했다. 학교 정문에는 과연 “여자다웁게”라는 글씨가 새겨진 큰 바위가 놓여 있었다. 몇 달 뒤, 강화여고는 그 바위 문구를 다시 새기게 된다. 이 역시 학생들이 직접 이룬 성과다. 당시 학생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문구였다고 하는 그것은 ‘流水不爭先(유수부쟁선)’. 노자가 쓴 ‘도덕경’에 등장하는 말로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자로 새긴 그 문구는 오히려 전보다 더 고루해 보였다. 나는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자신들의 훈을, 자신들의 욕망을 학교 정문 앞에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서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들이 “우리는 친구와 경쟁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선언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을 욕망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만난 학생들은 입시를 위해 다른 학생들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흐르는 물이 될 수 없고 계속해 앞을 다투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명문대에 진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기성세대에게는 선택의 문제였다. 명문대에 가지 않아도 다른 직업을 택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학 타이틀 없이 살아가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입시와 취업이 매우 긴밀히 연계되고,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 나가고 있다. 청년들은 아르바이트 구하기조차 어려워진 상황에서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채 기본소득을 받으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성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청년들의 공정에 대한 지지와 관심은 이런 상황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고등학생들이 깊은 데서 길어 올린 단어는 경쟁과 맞닿아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구조가 경쟁 속으로 학생들을 몰아넣었다는 데서 공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방 캠퍼스 학생들의 ‘사다리 매달리기’

    두 번째 대학교 이야기다. 나는 모 대학교 지방 캠퍼스에 입학해 그곳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2002년부터 2015년까지 14년간 나를 포함한 그곳 구성원들의 욕망을 보았다.

    나를 비롯한 지방 캠퍼스 청년들은 세 부류에 속한다. ①서울 캠퍼스로 가는 사다리에 오르려는, ②지방 캠퍼스에서 만족하려는, ③인생이 끝났다고 믿고 방황하는 이로 나뉜다. 시간이 지날수록 ①의 비율은 늘었던 것 같다. 내가 학부생이던 2000년대 초반에는 서울 캠퍼스로 갈 방법이 세 가지 있었다. 이중전공·복수전공·부전공이다. 이중전공이나 부전공은 상대적으로 쉽다. 선발 인원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대신 졸업장에 지방 캠퍼스 출신임이 명시되기에 ‘학벌 세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복수전공의 경우는 다르다. 서울 캠퍼스 졸업장이 한 장 더, 그러니까 따로 나왔다. 말하자면 자기 소속을 부분적으로나마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서울 캠퍼스로 간 지방 캠퍼스 학생들은 서울 캠퍼스에만 있는 ‘그 학과’ 출신임을 어떤 식으로든 드러냈다. 내가 아는 지방 캠퍼스 인문분반 학생 중엔 ‘OO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타이틀을 자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프로필로 걸어둔 이가 많다.

    2010년대 들어 ‘소속 변경’이라는, 이름부터 노골적인 제도가 생겼다. 아예 캠퍼스 소속을 변경하는 것이다. 이를 노리고 대학입시에서 하향 지원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소속 변경은 정말로 좁은 사다리였다. 한 학과에서 1등이나 2등 정도만 소속 변경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시기에 1학년 필수교양과목인 ‘글쓰기’를 강의하면서 소속변경을 하려는 학생 여럿과 만났다. 실로 우수한 학생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중 내가 본 성공 사례는 단 한 명에 그쳤다. 나를 찾아와 소속 변경 자기소개서를 첨삭해 달라고 부탁한 학생이었다. “이 학생이 떨어진다면 이 제도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싶었는데 그가 합격했다면서 감사 문자를 보내왔다.

    그렇다고 ②와 ③유형 학생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대부분 선택하는 사다리 중 하나는 공무원 시험이다. 7급이나 9급 시험 합격, 또는 지역인재전형을 통한 특채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다. 결국 모두 자신이 탈 수 있는 나름의 사다리가 있다. 거기에서 학생들은 위안을 받았을 터.

    청년들은 부모 재산이나 권력이 개입하지 않는 ‘공정한’ 사다리가 사회 곳곳에 존재하기를 원한다. 애초에 경쟁조차 어려운 상대가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대신 자기들의 리그에서 자신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거둘 수 있는 희망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패자부활전이기도 하고 밸런스를 맞춘 경쟁이기도 하다. 서울 캠퍼스 학생들이 보기에 이것이 공정한 경쟁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들은 하나의 학교로 불리기를 거부하거나 애초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 나름대로의 사다리를 타기 위해 바빳을 것이다.

    굳이 내 유형을 고백하자면 학부생 시절 내내 ①과 ② 사이에 있었다. 잘 되면 서울 캠퍼스로 가고 안 되면 남아 있고자 했다. 어쩌면 가장 흔한 유형이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내가 공정한 경쟁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으며, 이 상태로 앞으로의 삶을 감내해야 한다”는 패배의식 같은 무엇이었다. 서열화한 삶이 개인을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이 시기 나와 선후배들은 서열 안에서만 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그에 따라 ①과 ②유형을 왕복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사다리를 잡기 위해 애썼다. 그런 그 시기의 나를, 그리고 지금의 청년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서열주의에서 초연하기란 어렵다. 지금 진학과 취업에 이르는 공정한 사다리는 경쟁 구도에 익숙한 청년세대에게 더 중요하다. 공정한 사다리라는 희망마저 사라진다면, 이제는 해묵어 버린 ‘노오력’이라는 단어조차 무상해졌다며 한탄하게 될 것이다.

    가상세계에서 발견한 ‘공정한 선함’

    인스타그램에 ‘돈쭐(돈으로 혼쭐내 주다의 준말)’을 검색한 결과. 청년세대는 ‘돈쭐’의 방식으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인스타그램 캡처]

    인스타그램에 ‘돈쭐(돈으로 혼쭐내 주다의 준말)’을 검색한 결과. 청년세대는 ‘돈쭐’의 방식으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인스타그램 캡처]

    마지막은 가상세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2021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저마다 가상화폐에 뛰어들었다. 20대가 특별히 노동을 싫어한다거나 대박을 노리는 한탕주의자들이어서는 아니다. 부동산은 그들이 낄 수 있는 리그가 아니다. 자신의 평생 소득으로도 서울에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없게 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결국 가상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 비트코인 가격이 폭락했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다만 나는 그들이 발견한 또 다른 가상세계에서의 희망을 언급하고 싶다.

    최근 SNS에서 만들어진 ‘돈쭐내다(돈으로 혼쭐내 주다)’라는 신조어를 보자. 아동급식카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결식아동에게 무료로 밥을 내주는 식당 주인, 가난한 형제에게 치킨을 줬다는 치킨집 주인, 기후변화에 대처하려고 친환경 제품을 사용한다는 스타트업을 이들은 그냥 두지 않는다. 돈으로 혼쭐내 준다.

    방식은 이렇다. 팩트 체크를 해본 뒤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면 ‘좌표’를 찍고 그 사실을 널리 알린다. 그리고 굳이 필요하지 않아도 물건을 구입하거나 배달 앱에서 결제하며 “음식은 배달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타인의 선행을 외롭게 두지 않는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가진 연결의 힘을 잘 알고 있다. 과거처럼 어디에선가 깃발을 들고 그 아래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자신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기성세대가 신봉해 온 연대라는 가치는 이제 다음 세대에 이르러 ‘느슨한 방식의 연결’로 대체되고 있다.

    이 선함이라는 가치의 기반도 공정이다. 팩트 체크 과정에서 ‘돈쭐’의 대상이 ‘공정한 삶을 살아왔는가’를 함께 살핀다. 기획된 것은 아닌지, 세금은 잘 냈는지(불법 노점상이 아닌지)를 확인해 대상이 ‘돈쭐’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면밀히 검증한다. 그 후에야 청년들은 자신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대상에게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공정 찾는 청년 덕분에 살만한 세상 돼

    청년들이 바라는 ‘잘됨’이란 ‘돈쭐’ 대상이 잘되는 일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성공해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다시 자신의 잘됨으로 이어질 거라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은 움직인다. 선한 영향력이 공정한 방식으로 공공선에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많은 기성세대가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말하지만 나는 이들 덕분에 “이제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다.

    얼마 전 공정에 대한 짧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기자가 나에게 말했다. 자기가 만난 모든 교수가 공정에 매몰된 청년세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지 않은가 싶다. 나를 비롯해 적어도 ‘기성세대’에 편입될 만한 이들은, 청년들에게 공정이라는 사다리를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사회를 만든 데 대해 우선 미안함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공정 #경쟁 #사다리 #돈쭐내다 #신동아


    김민섭
    ● 1983년생
    ● 사회문화평론가
    ● 저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 ‘훈의 시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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