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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못 살면 국민이 밖에서 사람 행세 못 해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㉔]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2-1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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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욕심은 허욕이나 야심과는 다르다

    • 사업은 타이밍, 히트 앤 런이 중요하다

    • 컴퓨터가 이끄는 정보화시대가 온다

    • 30대 때 실리콘밸리에서 받은 충격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업(業)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타이밍 사업’이라는 점을 꼽았다. 고인의 글 ‘반도체 세계 1위에 서기까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반도체 산업은 한마디로 타이밍 업(業)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해서 수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선행 투자를 최적의 시기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사업에서 최적의 투자시기를 결정할 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이 뒤따른다.”

    2003년 6월 사장단 회의를 주재 중인 이건희 삼성 회장. [동아DB]

    2003년 6월 사장단 회의를 주재 중인 이건희 삼성 회장. [동아DB]

    ‘피를 말리는’ 고통의 순간

    ‘피가 마른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이 쓰여서 구태의연하게 들릴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처럼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긴 여행이다. 그 길 위에서 누구나 피를 말리는 선택의 순간 앞에 마주한다.

    사업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는 선택마다 성공했고 그리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부를 일군 이건희 회장에게도 ‘피를 말리는’ 고통의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반도체 사업이란 게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비즈니스였는지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글들은 수사나 군더더기가 없어 살과 근육을 모두 발라낸 뼈처럼 건조하지만 단단하다. 감정표현이 들어간 문장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그가 말하는 ‘피가 마른다’는 감정 표현의 무게감이 굉장히 크게 다가온다.



    어쨌든, 고인이 반도체 사업의 본질로 언급한 ‘타이밍’은 사실 전자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업의 개념이다. 그러다보니 손익 개념부터 남과 달랐다. 생전 고인의 말이다.

    “전자산업의 경우 장부상 이익과 손실만 갖고 경영을 잘했으니 못 했느니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물건을 얼마나 팔았느냐 못 팔았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보다 빠르게 기회를 잡아 선점했느냐 못했느냐가 진정한 이익과 손실 개념이다. 물건을 팔지 못해 받은 직접 손실보다 기회 상실에 의한 손해액은 차원이 다르며 따라서 단기적 이익이나 손실을 낸 것만 갖고 경영자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회장은 전자레인지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분개한 적도 있다.

    “전자레인지는 내가 먼저 하자고 한 사업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기회를 선점한 것으로 일본보다 앞섰던 것이다. 한때는 삼성이 마쓰시다보다 더 많이 만들면서 앞서갔는데 지금은 뒤지고 있다.

    300만 대씩 만들면서도 이익이 몇 십억이라는 게 말이 안 된다. 한 대에 1달러가 남는다고 할 때 고작 300만 달러(24억 원)가 남는다. 이런 건 장사가 아니다. 공장 문 닫아야 한다. 자선사업 하는 거다. 지금 담당자가 아니라 이전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처음은 잘 시작해놓고도 끈질기게, 성의 있게, 차분하게 자기 것으로 챙기지 못하고 개선하지 않으니 뿌리가 사라진 거다. 남보다 앞서서 만들어 놓은 것을 놓치니 정말 어리석고 억울하다. 문제는 이렇게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회사에서 나 말고는 없는 것 같다는 점이다.”

    성공한 기업인들의 생애를 쫓아가다보면 그들의 DNA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대목이 있는데 다름 아닌 엄청난 승부욕이다.

    이 회장이 “남보다 앞서 만들어 놓은 것을 놓치면 억울하다”고 한 대목을 읽다보니 그가 신동아 1991년 10월호 인터뷰에서 꺼낸 말이 생각난다. 그는 당시 “지금 이 순간 인간적인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어느 때 화가 정말로 나는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쉬운 것이 안 될 때 화가 납니다. 굴러든 기회를 무성의해서 놓치고 몇 천억 원의 손해를 보았다면 얼마나 딱합니까. 요즘 삼성이 전자, 정밀화학, 반도체산업 등에 주력하고 있는데 왜 10년 전부터 이와 관련된 인재를 확보하지 못했는가 한이 됩니다.”

    -욕심이지요.

    “좋은 뜻의 욕심은 허욕과는 다릅니다. 야심과도 다르지요.”

    “기업 세계에서 2등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2000년 7월 삼성전자 기흥반도체공장 16메가D램 생산라인. [동아DB]

    2000년 7월 삼성전자 기흥반도체공장 16메가D램 생산라인. [동아DB]

    이 회장은 생전에 직원들을 이런 말로 다그치기도 했다.

    “남보다 1년 빠르면 2등에 비해 플러스알파가 나오고 모든 걸 선점해 들어가면 10배, 15배 이익이 난다. 올림픽 2등은 은메달이라도 걸지만 기업 세계에서 2등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모험도 해봐야 남보다 앞서갈 수 있다.

    공금을 횡령하는 게 아니라면 일을 저질러야 한다. 일 자체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거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가능한 빨리 뛰어들어 기회를 선점하든가 아니면 최소한의 기회손실이라도 막아야 한다. 지금 이익이 좀 나도 없앨 것은 빨리 없애라. 적자가 나도 시작할 건 빨리 시작해야 한다.”

    말하는 건 쉬울 수 있어도 행하기는 어렵다. 고인의 경영 철학은 말이 아닌 결과로 증명됐기에 설득력을 갖는 것이리라. 이 회장이 말한 ‘기회의 선점’과 관련해 제일기획 사장을 지낸 배종렬은 이렇게 말한다.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하며 늘 강조한 부분이 ‘업의 개념과 스피드’였습니다. 다른 데는 모르겠는데 특히 반도체 연구개발(R&D)과 관련해서는 히스토리를 많이 말씀하셨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R&D를 6개월 먼저 해 생산해서 시장에 내보내는 것과 1년 늦어지는 것과 비교를 해보면 엄청난 이익의 차이가 생긴다는 거였지요. 실제로 반도체 가격이란 게 쑤욱 올라가다 확 떨어지는 완전히 2차 포물선을 그립니다. 1년 동안 가격이 1만5000달러 하다가 1년이 지나면 한 1000달러 됐다가 2년이 지나면 10몇 달러로 떨어지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회장은 그런 사이클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반도체 업의 개념이 뭐냐?’는 질문을 던지더니 ‘스피드’라고 하면서 1년 안에 개발하느냐, 6개월 안에 개발하느냐에 따라 이익이 1000억 원 날 수도 있는 것이 1조 원이 될 수도 있다며 계산해 정리해보라고 비서실에 지시했습니다. 계산한 결과에 따르면 1메가 D램의 경우 투자 타이밍이 1년 늦으면 2000억 원 가량의 이익차가 생긴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생전에 회장은 스피드를 위해 사내 결제 시스템도 단순화했다. 생전 고인의 육성이다.

    “내가 처음 그룹 경영을 인계받았을 때 1메가 생산이 6개월 늦었다. 기술, 판매, 생산 준비는 다 갖췄는데 생산 설비가 늦게 들어온 것이다. 원인을 알아보니 설비 발주 담당자에서 삼성전자 회장까지 무려 스물여덟 개 도장을 찍는데 넉 달 걸린 것이었다. 그래서 도장 찍을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다. 기안을 발표하고, 의문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토론하고 반대가 없으면 도장을 찍도록 했더니 단 하루 만에 결정이 끝났다. 그래서 4메가 설비는 발주부터 훨씬 나아졌다.”

    남보다 빨리 기회를 선점하고 시장이 포화상태이다 싶을 때는 재빨리 빠져나오는 ‘엑시트(exit) 전략’도 그가 타이밍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이기도 했다. ‘히트 앤 런 개발 전략’이란 제목의 글 중 일부다.

    “반도체 사업을 보면 후발자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다. 삼성이 지금은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다. 특히 분쟁에 휘말려 미국 TI(Texas Instruments)사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도 했고 가격 경쟁력 면에서 우리보다 앞선 일본 기업들이 제품을 세계 시장에 값싸게 파는 바람에 가격이 폭락해 1985년, 1986년 2000억 원에 이르는 손실을 입기도 했었다. (…) 세계 초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개발하고 먼저 판매하고 먼저 철수한다’는 선발자의 논리에 충실해야 한다. 즉 남보다 먼저 개발해 판매하고 후발자들이 많아져 시장이 포화상태다 싶을 때 미련 없이 빠져 나오는 ‘히트 앤 런’ 식의 전략 구사가 필요하다.”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메모리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작업자가 포토마스크를 점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메모리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작업자가 포토마스크를 점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고인이 생전에 남긴 몇 번의 인터뷰

    이 회장은 어떻게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게 됐을까. 이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글 ‘반도체 사업의 시작’ 편에 잘 나와 있다.

    “내가 기업 경영에 몸담은 것은 1966년 동양방송에서부터였다. 처음 입사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단의 순간을 거쳤지만 반도체 사업처럼 내 어깨를 무겁게 했던 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전자와 자동차 기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새로 나온 전자 제품들을 사다 뜯어보는 것이 취미였다. 나는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틈에 끼여 경쟁하려면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1973년에 닥친 오일 쇼크에 큰 충격을 받은 이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생전 몇 차례 하지 않던 인터뷰에서도 이런 메시지를 일관되게 말했다.

    “1973년에 오일쇼크가 있었습니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원이 없는 우리 현실에서 선진국들과 경쟁하려면 머리를 쓸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두뇌를 이용한 첨단기술을 개발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죠.

    미국, 일본에도 가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힌트를 받은 것이 앞으로 반드시 컴퓨터를 활용하는 정보화 시대가 올 것이다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미 선진국들에서는 그런 조짐들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반도체가 대규모로 필요할 것이고 미국과 일본보다 10년 이상 뒤지기는 했지만 우리 민족 특성에 딱 맞는 사업이라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월간조선 2000년 7월호)

    “1973년 오일쇼크를 겪은 후 재래형 기술사업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오일쇼크 당시 일본 업체들이 TV, 냉장고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IC(집적회로) 물량과 가격을 통제하며 횡포를 부려 자체 반도체 산업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습니다.

    당시 미국, 일본에서는 이미 반도체 산업을 대표적인 미래 하이테크 사업으로 보고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었습니다. 반도체 산업이 우리 민족의 문화특성에 꼭 맞기 때문에 10년 남짓한 기술격차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신동아 2005년 10월호)

    고인이 인터뷰를 잘 하지 않기도 했지만, 삼성의 명운과 대한민국 산업사의 명운을 가른 반도체 사업 진출과 관련해 생전에 남긴 육성은 이 정도가 전부다.

    “약소국가라는 게 서럽더라고”

    1973년 1차 오일쇼크는 대한민국 경제를 일시에 집어삼킨, 훗날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급에 비교할만한 충격이었다. 회사는 물론 나라가 휘청거린 전례 없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고인은 자원 없는 가난한 나라 기업인으로서 설움을 많이 겪었던 듯하다. 월간조선이 입수해 지난해 공개한 생전 육성 테이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국에 다니면서 경험을 많이 했어. 일본에서 소학교 다닐 때는 조센징 소리 들으면서 고약한 설움을 당했지. 1960년대 말 미국에 갔는데, 행사 끝나고 불우이웃돕기 같은 기금을 모집하더라고. 근데 거기서 한국 아이 사진이 나오는 거야.

    지금 우리가 방글라데시 아이들 보는 그런 분위기로 참 약소국가라는 게 서럽더라고. 선대 회장 따라 외국 출장을 가보면 우리는 회장이 나오는데 저쪽에선 상무급 아니면 평 이사가 나와. 그나마 삼성이라서 그 정도였지. 나라가 못살면 국민들이 밖에서 사람 행세를 못 해. 내 회사가 잘되고 대우받으려면 나라가 발전해야 된다는 거, 이게 내 기본 의식이야.”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 이미 1970년대부터 미국과 일본을 드나들며 새로운 세상의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던 고인의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미래사회는 정보화가 이끌 것이라는 판단이 섰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듣는 고인의 육성(월간조선)이다.

    “나 스스로 변해서 잘사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맞는 자세가 더 중요해. 앞으로 10년, 15년 후에는 카드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에서 통용이 되고 전화도 되는 세상이 온다고.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도 바로 집으로 전화할 수 있게 된다 말이지. 일제 때 태어나서 전쟁 겪고 굶주리던 시절 살던 사람들이 이런 시대에 살게 된다니 얼마나 변화가 빨라. 우리 경쟁력도 여기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겠나.”

    이 회장의 행보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30대 때인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집중적으로 드나들었다는 점이다. ‘분모경영에서 분자경영으로’이란 제목의 글에서는 당시 실리콘 밸리에서 받은 충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효율성 면에서 보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 기업인들을 만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00건 투자 중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두세 건에 불과하더라도 일단 성공을 거두기만하면 투자금의 수백 수천 배 이익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80년대에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다고 했던 미국 경제가 1990년대에 들어와 깜짝 놀랄 정도로 긴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당시 이런 벤처 기업들의 효과성 투자였다는 사실을 당시에 나는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다.”

    2001년 10월 17일 삼성전자와 마이트로소프트가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디지털홈 구축을 위한 전략적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날 조인식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가운데)이 직접 참석했다. [동아DB]

    2001년 10월 17일 삼성전자와 마이트로소프트가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디지털홈 구축을 위한 전략적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날 조인식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가운데)이 직접 참석했다. [동아DB]

    1955년생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에릭 슈미트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라난 ‘세계의 산물’이라고 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 노력이 사회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는 시대를 만나는 게 열쇠라는 의미다.

    미국에서 컴퓨터와 인터넷 혁명을 일으킨 스타 기업인들이 1950년대 대거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가 1955년 동갑내기라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랫동안 구글이라는 거함을 이끈 에릭 슈미트 역시 1955년생이다. 소프트뱅크 손정의는 2년 뒤인 1957년 태어난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에릭 슈미트 모두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대형 컴퓨터를 접하고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 살았다. 시간을 나눠 써야 했던 카드 천공식 컴퓨터이긴 했지만 이들 모두 컴퓨터와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30대 청년 이건희가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던 때는 이들이 막 20대가 된 시기다. 개인용 컴퓨터(PC)가 출시(1975년)되면서 실리콘밸리에서 PC 혁명이 동을 트는 여명기였다.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 ‘알테어 8800’(498달러)이 파퓰러 일렉트로닉스 잡지 1면 표지로 등장한 때가 1975년이다.

    대학생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알테어 8800’을 보고 흥분해 베이직 언어를 개발하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1975년)했다.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차고에서 애플1과 애플2(1977년)를 잇달아 만들어내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인텔의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도 ‘무어의 법칙(칩 밀도가 24개월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법칙)’에 따라 컴퓨터 칩 속도를 무서운 기세로 키우고, 1200달러를 갖고 오라클을 창립한 래리 엘리슨이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차린 것도 이 무렵이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당시 코리아의 위상은 어땠을까. 1970년대는 한국이 저개발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의 진입이 막 시작된 때다.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던 때가 1964년이었는데 수출품이라고 해봐야 합판, 신발, 섬유, 홍삼, 담배, 설탕, 화장품, 그릇 정도였다. 그러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기계, 선박, 철강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197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430달러(48만원)였다. 미국은 이보다 18배나 많은 7310달러(820만원), 일본은 3610달러(430만원)였다. 전 세계 평균도 1175달러(133만원)로 한국의 두 배를 훌쩍 웃돌 때다.

    IT(정보기술) 산업은 고사하고 국민 모두가 입에 풀칠하는 데서 겨우 벗어나던 때, 이건희 회장은 국민 대다수가 컴퓨터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던 시절, 미국 IT 신인류들이 밤낮없이 연구실과 개발 현장의 불을 밝히던 시절, 실리콘밸리를 오갔던 것이다.

    이 회장은 앞서 언급했던 미국 IT영웅들보다 10년가량 먼저 태어났다(1942년 생). 국제 사회에서 전혀 존재감이 없던 후진국 중의 후진국 기업인이었던 청년 이건희는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내면은 어땠을까.

    오일쇼크(1973년)에 따른 미증유의 충격으로 나라 살림이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던 때,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극도의 절박감이 그의 내면에서 오가고 있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 밤낮으로 고민하던 그에게 어느 날 ‘한국반도체가 파산 상태’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남들은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뉴스가 그에게는 천둥소리로 다가온 것이다. 삼성의 반도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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