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굴원 가생 열전

현실에서 좌절된 꿈, 문학이 품어 날개를 달아주다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9-05-29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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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굴원 가생 열전’의 굴원은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의 시는 남았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나 보통의 여인네들이 누리는 소박한 행복마저 갖지 못했던 허난설헌은 한(恨)을 시로 풀어내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의 삶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문학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굴원 가생 열전

    일러스트레이션·이우정

    박경리 선생의 시 ‘옛날의 그 집’을 보는 어둔 저녁이다.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그 시절 어둡고 외로운 마음이 들면 시를 쓰면서 견딘 모양이다. 좋은 시가 한 인간의 품에서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박경리 선생의 내밀한 속내가 엿보이는 시집이라 가까이 두고 간혹 잠든 아이 얼굴 들여다보듯 읽는다. 그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전국시대의 위대한 비극시인 ‘굴원’을 연상했다. 비극의 화살은 궁형을 받은 사마천에게 정통으로 박혔지만, 이 넓은 세상에 사마천 혼자 그 화살을 맞았을까?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화살은 날아오고, 인간은 이를 피하지 못한다. ‘사기열전’에서 빛나는 대목은 굴원과 백이, 형가 등 인간 비극성의 육화다. 비극이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이 글을 쓰고 칼을 든다. 비극은 그리스 로마와 동아시아, 즉 동서양을 관통하는 궤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굴원은 이름이 평이고, 초나라 왕실과 성이 같다. 그는 초나라 회왕의 좌도(左徒·초나라의 관직명)로 있었는데, 보고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잘 다스려질 때와 혼란스러울 때의 일에 밝았고, 글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궁궐에 들어가서는 군주와 나랏일을 의논하여 명령을 내렸으며, 밖으로 나와서는 빈객을 맞이하고 제후들을 상대하였다. 회왕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사마천은 이렇게 굴원을 소개하며 그가 왕족의 족보를 가졌음을 밝힌다. 굴원의 시조인 굴하는 초나라 무왕의 아들로 ‘굴’이라는 지역을 다스리게 되어 ‘굴’이라는 성을 받았다. 좌도는 왕의 곁에서 정치적인 조언을 하고, 조서나 명령의 초안을 잡아 보고하고, 외교 협상 등의 주요한 일을 맡았던 요직이다. 왕과 성이 같고, 정치적 요직에 있는 굴원이 글까지 잘 썼으니 왕은 그를 믿고 의지했을 것이다. 왕의 곁에서 사랑받는 그를 시기하는 자가 없었다면 굴원은 위대한 정치인으로서 초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끌었다’가 아니라 ‘이끌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후 굴원에게 닥친 고난 때문이다.

    분통함을 시로 달래고

    회왕은 굴원에게 국가 법령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때 굴원의 정치적 라이벌인 상관대부(上官大夫)의 중상모략이 펼쳐진다. 정치세계는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따기 위해 상대방의 입안에 들어있는 것까지 손가락으로 뽑아내는 인면수심의 세계이기도 하다. 상관대부는 굴원이 법령을 만들면서 하는 행동이 ‘교만하고 안하무인’이라며 왕에게 고한다. 상관대부가 굴원에게 법령의 초안을 좀 보자고 했는데,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고 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왕의 판단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귀가 얇은 왕은 조금씩 굴원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굴원은 무엇을 하였을까? 권력을 되찾기 위해 자기 세력을 모으고, 와신상담하면서 상관대부를 밀어낼 궁리를 했을까? 아니다. 시인 굴원은 엇나가는 세상과 나라와 사람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 ‘걱정’이 시가 되었다. 굴원의 대표작 ‘이소(離騷)’는 ‘걱정스러운 일을 만나다’란 뜻이다. 깊은 사색에 빠져 이 시를 짓고 아픈 가슴을 달랬다. ‘이소’ 창작동기를 사마천은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이 곤궁해지면 근본을 뒤돌아본다. 그런 까닭에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자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을 때 부모를 찾지 않는 자가 없다. 굴원은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군주를 섬겼지만, 참소하는 사람의 이간질로 곤궁하게 되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원은 이처럼 분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서 ‘이소’를 지은 것이다.’

    ‘이소’의 첫 구절은 굴원 자신의 태생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님을 그리는 여인의 ‘한’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대변한다. 왕과 자신의 관계를 그리운 님과 실연한 여인의 관계로 설정한 것이다. 여인은 님이 자신을 다시 부르기를 간절히 애원한다. 이 서사는 비극적인 서정시의 낭만성을 지니고 있다. ‘이소’는 종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와 비교된다. 호메로스는 트로이전쟁을 배경으로 장편 서사시를 쓰지만, 굴원은 전쟁과 모험의 세계 대신에 한 여인의 한을 신화와 함께 펼쳐 보였다.

    굴원 가생 열전
    글은 간결하고 뜻은 고결하니

    굴원의 시에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굴원의 시는 중국 신화전설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의 시 ‘천문’은 신화 연구자들에게 열쇠와 같다.

    묻노니, 아득한 옛날, 세상의 시작에 대해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 그때 천지가 갈라지지 아니하였음을 무엇으로 알아낼 수 있으랴/ 모든 것이 혼돈 상태, 누구라서 그것을 분명히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 속에서 떠다녔는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

    끝 모를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나니 어찌된 일일까?/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서로 섞여서 생겨나니, 그 내력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둥근 하늘엔 아홉 개의 층이 있다는데, 그것은 누가 만든 것일까?/ 이러한 작업은 얼마나 위대한가? 누가 그 최초의 창조자였을까?//

    후대의 신화 연구자들은 시인 굴원의 이러한 질문을 염두에 두고 신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고대 동아시아의 신화세계를 굴원은 시로 노래한다. 사마천은 사람이 곤궁해지면 근본을 뒤돌아본다는 말을 했다. 굴원은 곤궁해지자 좌절과 분통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신들의 세상이 있었다.

    아침에 곤륜산에서 흐르는 백수를 건너/ 신선들이 사는 낭풍에 말을 맨다/ 문득 돌아보니 흐르는 물/ 슬프다 초나라에 님이 보이지 않는구나.//

    나는 우레의 신 풍륜을 불러/ 구름을 타고 강의 신 복비를 찾아/ 허리 패옥 풀어 언약하고/ 그녀의 신하 건수에게 중매를 부탁하리라.//

    ‘천문’과 더불어 ‘이소’는 고대 중국전설의 신화세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사마천은 말한다.

    ‘위로는 제곡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나라 환공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은나라 탕임금과 주나라 무왕을 서술함으로써 세상일을 풍자하였다. 넓은 도덕적 숭고함과 잘 다스려질 때와 혼란스러울 때의 일의 조리를 밝힘에 있어 빠짐이 없다. 글은 간결하고 문장은 미묘하며 그 뜻은 고결하고 행동은 청렴하다. 문장의 분량은 적지만 뜻하는 것은 매우 크며,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인용했지만 그 의미는 높고 깊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 진나라, 제나라 삼국의 균형을 이루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굴원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력을 확장 중인 진나라를 견제하는 방책을 썼다. 이때 진나라의 장의가 나타난다. 장의는 초나라 회왕에게 땅을 바치겠다고 거짓말하여 초나라가 제나라와 관계를 끊게 만들었다. 뒤늦게 장의의 모략에 속아 넘어간 것을 안 회왕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때 국교가 단절된 제나라는 초나라를 못 본 척했다.

    왕이 현명하지 않으니 복이 있나

    진나라는 초나라와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회왕은 농락당한 것이 분해 장의의 목숨을 원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장의는 자신이 희생하겠다면서 초나라로 들어갔다. 장의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회왕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유형의 인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나라의 권력자인 근상에게 뇌물을 주고 당시 회왕의 사랑을 받던 정수를 통해 감언이설로 왕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덕분에 호랑이 굴 같았던 초나라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굴원은 왕에게 장의를 신속하게 처단할 것을 권했으나 이미 장의가 멀리 도망친 뒤였다.

    굴원은 회왕의 진나라 공격을 반대하다가 추방됐다. 기원전 299년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회왕이 객사하고 경양왕이 즉위하여 진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자 굴원은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국교가 회복되면서 또다시 강남으로 추방되어,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가 돌을 안고 멱라수에 투신 자결했다.

    굴원은 진나라의 장의가 꾸민 합종연횡의 함정을 잘 알고 있어 제나라와 동맹하려 했다. 그러나 초나라-진나라 초나라-제나라의 동맹관계가 자주 바뀌면서 그의 정책은 실패했고, 그의 운명도 뒤바뀌었다. 사마천은 말한다.

    ‘그는 비록 내쫓긴 몸이지만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회왕을 생각하며 항상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또한 군주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속세의 나쁜 풍습이 고쳐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군주를 생각하고 나라를 일으켜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로 탈바꿈시키려고…(중략)… 회왕은 충신과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를 구분할 줄 몰랐으므로 안으로는 정수에게 미혹됐고 밖으로는 장의에게 속았으며, 굴원을 멀리하고 상관대부와 영윤(令尹)인 자란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대는 꺾이고 군(郡) 여섯 개를 잃어 땅은 줄었고, 진나라에서 객사하여 그 자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는 제대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재앙이다. ‘역경’에서 말하기를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 이 물을 길어갈 수는 있다. 왕이 현명하면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는다’고 했다. 왕이 현명하지 않으니, 어찌 복이 있겠는가! ’

    가시투성이 월계관

    굴원은 왕이라는 절대자에게 자신을 던진 인물이다.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좌절한 정치인은 자신의 뜻을 펼칠 공간을 잃었다. 그가 현실에서 벗어나 신화의 세계를 노래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절대적인 존재가 사라진 세상은 그에게 더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리움만 쌓이는 것이다. 변방에서 왕이 부르기만을 기다리며 ‘사미인곡’을 지어 불렀다. 결국 정치인으로서의 좌절감이 그의 머리에 비극시인이란 월계관을 얹어 준 것이다. 월계관은 가시투성이였다.

    님 그리워/ 눈물 글썽이며 하염없이 바라보노라./ 전해줄 사람 없고 길마저 끊겨/ 가슴에 맺힌 말 전할 길 없네/ 일편단심 애태우건만/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니/ 아침마다 이 마음 펴 보이려 해도/ 답답한 이 마음 전할 길 없어라.//

    어느 순간 이 그리움과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인 왕이 진나라에서 비참하게 객사한 순간, 굴원의 목숨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어부가’는 더 이상 세상 살아갈 의미를 상실한 천재의 비참한 심경을 담고 있다. 굴원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꾀죄죄하였고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여위었다.’

    신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여인은 사랑하는 님을 위해 화장을 고친다. 굴원의 꾀죄죄한 얼굴빛과 마른 나뭇가지가 된 몸은 군주를 잃은 신하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굴원은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깨인 자임을 알고 있었다. 이 심경을 시 ‘회사’로 지어 불렀다. 기세춘·신영복 선생이 번역한 중국 시선(詩選)을 보면 ‘회사’를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지다’라고 번역했다.

    굴원 가생 열전

    경기도 광주에 있는 허난설헌의 무덤과 시비.

    북망산에 당도하니/ 해는 뉘엿뉘엿 저무는구나/ 걱정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죽음으로 끝내리라.//

    마지막 이르노라/ 원수와 상수는 호호 탕탕/ 두 갈래로 소리치며 흐르는데/ 나의 긴 여로는 가려 보이지 않고/ 바른 도리는 멀고 아득하구나//

    미쁜 성품과 고운 마음씨/ 나는 짝 잃은 외톨이/ 백락은 이미 죽었으니/ 천리마를 누가 알아보랴//

    사람의 삶은 누구나/ 각각 제 자리가 있는 법/ 바른 마음과 큰 뜻을 품었거늘/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제 실망은 슬픔이 되어/ 길게 탄식하노니/ 혼탁한 세상 나를 알아줄 리 없고/ 인심이란 믿을 수 없는 것//

    죽음을 물리칠 수 없음을 아노라/ 애석하게 생각지 마라/ 군자들이여 분명히 말하노니/ 장차 나를 본보기로 삼아라.//

    굴원이 죽은 뒤로 초나라는 날로 국세가 기울어 수십년 뒤에는 결국 진나라에게 망하고 만다.

    조선의 비극시인

    사마천은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지고 100년이 지나서, 한나라의 가생을 이야기했다. 가생이 굴원의 뒤를 이은 중국인이라면, 조선에는 허난설헌이 있다. 나는 허난설헌에게서 굴원의 마음을 보았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남과 구분하는 행위인데, 난설헌은 ‘난설헌’이라는 당호말고도 ‘초희’라는 이름과 ‘경번’이라는 자(字)까지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살았다.’

    허미자 선생은 허난설헌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허난설헌 연구서를 시작한다. 난설헌은 굴원이 맛본 좌절을 고스란히 품고 태어난 여인이었다. 난설헌의 조선은 어찌할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좌절의 벽이었다. 여자는 글을 배워서 안 된다는 사대부의 세상에서 난설헌은 어깨 너머로 글을 익히고 배웠다.

    조선의 여자로 태어난 딸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던 아버지 초당 허엽은 일찍이 영민한 딸의 불행을 짐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가 글을 읽으면 팔자가 세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난설헌의 오빠인 하곡 허봉은 누이 난설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글벗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우게 했다. 그녀는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당대 석학이던 아버지와 오빠들의 책을 모조리 읽고 외워 스스로 시세계의 지평을 넓혔다.

    난설헌의 스승인 손곡 역시 좌절한 조선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울분은 서자로 태어난 신분에서 기인한다. 양반이 첩에게서 얻은 자식인 서자는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널리 쓰이지 못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서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방탕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손곡을 품어준 곳이 바로 난설헌의 집안이었다. 스승의 이러한 기질이 난설헌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아버지와 오빠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공부하고 시를 짓던 난설헌의 불행은 안동 김씨 집안의 성립에게 시집을 가면서 시작됐다. 뛰어난 재능의 아내를 맞은 김성립은 어찌된 일인지 밖으로만 나도는 난봉꾼 같은 행태를 보였다. 사람들은 그가 아내의 뛰어난 재능에 질투를 느낀 것이라고 숙덕거렸다. 달콤한 신혼을 꿈꾸었을 젊은 난설헌에게는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비는 처마 비스듬히/ 짝 지어 날고,/ 지는 꽃은 어지럽게/ 비단옷 위를 스치는구나/ 동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사뭇 아프기만 한데/ 풀은 푸르러져도 강남에 가신 님은/ 여지껏 돌아오시질 않네.//

    굴원이 변방에서 회왕의 부름을 기다리면서 님에 대한 그리움을 ‘사미인곡’으로 노래했다면, 난설헌은 못난 남편을 기다리며 시를 짓는다. 굴원의 님은 왕의 은유지만, 난설헌의 님은 직접적인 현실이다.

    조선의 고질적인 고부갈등까지 겹치면서 난설헌의 몸과 마음이 병들기 시작하고, 아낌없이 사랑한 아들과 딸을 연이어 하늘나라로 보내야 하는 부모의 한까지 마음에 품으니, 난설헌의 일생이 28년으로 짧은 것을 건강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당대 명문장 집안에서 태어나 탁월한 재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을 간행한 시인 허난설헌. 나는 그녀를 여성시인이라 부르지 못한다.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가슴 깊이 한을 새겼을 시인을 훗날 다른 시인이 여성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 일이다. 나는 그녀를 굴원의 대를 잇는 위대한 ‘조선의 비극시인’이라 부른다.

    지상으로 귀향 온 선녀

    그녀는 대선배 굴원처럼 신화,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 시인이다. 중국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의 시집에 머리말을 쓰면서 그녀를 ‘봉래섬’을 떠나 인간세계로 우연히 귀향 온 선녀라고 소개하고, 그녀가 남긴 시들은 모두 아름다운 구슬이 됐다고 했다. 천재로 태어난 조선의 여인, 현실에 좌절하고 고통 받은 눈물은 난설헌 시의 구슬이 되었고, 당대 중국 선비들은 난설헌의 시집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의 시에는 신선과 꿈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터져 나와 꽃봉오리로 피어난 것이다. 이 꽃봉오리에 신선이 노닌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울분의 마음이 지평을 넓힌 것이다.

    어젯밤 꿈에 봉래산에 올라/ 갈파의 못에 잠긴 용의 등을 탔었네/ 신선들께선 푸른 구슬지팡이를 짚고서/ 부용봉에서 나를 정답게 맞아주셨네/ 발 아래로 아득히 동해물 굽어보니/ 술잔 속의 물처럼 조그맣게 보였어라/ 꽃 밑의 봉황새는 피리를 불고/ 달빛은 고요히 황금 물동이를 비추었어라.//

    굴원 가생 열전

    유배지에서 여러 권의 책을 쓴 정약용.

    바닷속에 있는 신선의 산인 봉래산을 향해 용을 타고 신선의 나라로 가고 있는 난설헌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한 시절 나는 동양신화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이 신화의 세계야말로, 내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고향임을 간절히 느낀 적이 있다. 그땐 삶이 무척 힘겨웠다. 인간관계에 대한 배신감, 재능 없음에 대한 한탄 등의 좌절감을 광활하고도 신비한 신화세계가 다 품어주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만 천체 망원경으로 올려다보아도, 현실이라는 이 좁고 미어터진 세상에서 한발 떨어질 수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치열한 삶을 살면서 현장에서 투쟁하고 정치적으로 건강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이 정도(正道)지만, 신선이나 신화세계를 통해 인간의 꿈자리를 넓게 펼쳐주는 것 역시 문학이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좌절한 정치인으로 비극시인이 되어 신화의 세계를 거닐었던 굴원이 살던 초나라, 그리고 허난설헌의 이름 초희, 허초희. 번역하면 초나라 계집이라는 뜻이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는 굴원의 한을 품고 태어난, 중국 시인의 은유처럼 선녀인지도 모를 일이다.

    천상의 선녀는 잠시 지상에 내려와 쓴 시를 임종을 맞아 다 태워버렸지만, 여섯 살 아래 동생 허균은 천재적인 머리로 불우했던 천재 누나의 시를 외워 시집으로 엮어냈다. 동생 허균에 의해 편집돼 전해지는 시가 210편이다. 천재 허균은 보는 대로 외우는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려서 누이에게 시를 배웠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시집을 중국으로 보낸다.

    인생은 짧고, 글은 길다

    허미자 선생은 말한다.

    ‘허균이 오명제와 주지번을 통해 중국에 보낸 허난설헌의 시집은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 차례 간행됐다. 조선에서 문집을 간행할 때는 대부분 집안에서 비용을 내어 주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지만, 중국에서는 그의 문집을 무상으로 간행해 나눠줄 만한 후원인이 없었기에 자연히 상업성을 띠게 되었다. 난설헌의 시가 뛰어났기 때문에 문인이나 출판업자들이 자금을 마련해 간행하고 판매하는 식이다. 물론 문인이 엮은 역대 선집이나 여러 시인의 선집에 실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두 가지 경우 모두 난설헌의 시가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는 자체가 국제적인 수준에 올랐음을 입증하는데, 이처럼 조선인의 시집이 중국에서 제대로 간행된 것은 난설헌이 처음이었다.’

    조선에 비해 중국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이미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여성 시인이 109명이나 된다고 한다. 난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몇백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출판되었고, 일본에서도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이 출판돼 목판본이나 필사본으로 퍼졌다. 동아시아 3국에서 그의 시가 읽혔으니, 난설헌은 국제적인 시인이나 다름없었다.

    현실에 좌절한 사람은 굴원을 좋아한다. 굴원은 정치인으로서 조정에 나가 뜻을 펼치고 싶었다. 현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지금껏 위대한 비극시인으로 남은 것이다. 그가 만약 초나라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면 이처럼 이름이 빛날 수 있었을까?

    다산 정약용 역시 위대한 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다. 22세 나이에 정조 7년부터 시작된 그의 관직생활은 정조가 세상을 떠나는 날, 39세까지 이어진다. 이후 17년간의 유배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산은 굴원처럼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백성을 위한 정치인으로 일생을 살았다. 다산은 ‘한 사람만이라도 이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심경으로 지난한 세월을 견뎠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도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그 세월을 견뎠고, 굴원은 그 세상을 버렸다. 우리는 어떤 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쉽게 답하기 어렵다. 굴원 역시 위대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생이란 얼마나 짧은가. 굴원의 생이나 다산의 생이나 허난설헌의 생 모두 한순간이다. 그 한순간이 남긴 것이 시집이요, 저작물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

    현실의 좌절을 딛고 위대한 작품을 쓴 굴원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더러운 세상으로 보았다. 마지막 시 ‘어부사’는 그런 심경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굴원이 말하길/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오/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리요/ 차라리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백옥같이 고결한 몸에/ 어찌 속세의 티끌을 묻힌단 말이오./

    ‘어부사’의 마지막 구절은 ‘그렇게 떠난 후로는 그 어부를 다시 볼 수 없었다’다. 하지만 우리는 이 어부를 지금도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 사마천은 ‘굴원 가생 열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내가 ‘이소’ ‘천문’ ‘초혼’ ‘애영’을 읽어보니 그 내용이 슬펐다. 장사에 가서 굴원이 빠져 죽은 연못을 바라보고 일찍이 눈물을 떨구며 그의 사람 됨됨이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가생이 굴원을 조문한 작품을 읽었는데, 굴원이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다른 제후에게 유세하였더라면, 어느 나라인들 받아들이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 스스로 이렇게 생을 마쳤구나. 그러나 복조부를 읽어보니 그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가볍게 여겼으니, 나는 마음에 깨달은 바 있어 상쾌해지며 스스로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굴원을 두고 현실도피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에의 좌절감과 분통함을 잊기 위해 신화세계를 노래하고, 난국의 더러운 것을 싫어하여 고결하게 죽겠다는 그의 선택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평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출가와 출세의 길을 가볍게 여겼으니 자신은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어 상쾌하다고.

    현대 인물 중에서는 굴원의 맥을 이을만한 이를 찾을 수가 없다. 이미 신화의 자리에 자본이 들어앉았고, 그리움 대신에 순간적인 쾌락이, 위대한 자결이 아닌 우울증에 시달리는 소심한 자결이 만연하고

    굴원 가생 열전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저서 :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불경이야기’ 등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한다. 굴원이 당초 꿈꾸었던 삶이 좌절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무엇일까? 섬진강 위에 배를 띄워놓고 있는 저 어부에게 물어볼까? 다시 박경리 선생의 시를 읽는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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