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호

만보객(漫步客)이 되어 2011년 서울의 청계천변을 걸어보자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1-02-22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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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보객(漫步客)이 되어 2011년 서울의 청계천변을 걸어보자

    더블린사람들<br>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338쪽, 1만2000원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한복판에 가면 한 남자가 낮이나 밤이나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형상으로 서 있다. 마른 체구의 그는 중절모를 쓰고, 현미경 렌즈와 같은 둥근 안경을 끼고 짐짓 도도하게 치켜든 턱이며 걸음걸이가 삐딱한 자세다. 모든 사물의 형상 이면을 꼼꼼히 보는 눈과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신경의 소유자, 그는 소설가다.

    더블린에서는 이 작가가 출간한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딴 ‘블룸스데이’ 축제가 매년 6월 열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가는 이 도시의 거주자들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소설을 쓴 이래 죽을 때까지 이 도시로부터 배척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이 도시, 그러니까 세계의 의미심장한 수도들 중 하나인 더블린을 줄기차게 소설의 무대로 삼았지만, 자랑이라고는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이 비난과 비판에 치중했다.

    자기 몸의 태생지이자 정신의 성장지인 더블린을 그는 마비의 공간, 심지어 제 새끼를 팔아먹는 더러운 도시라고 욕설을 내뱉듯 퍼붓고는, 자신의 조국은 대영제국이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의 식민지인 아일랜드가 아닌 ‘예술’임을 공표하며 자발적 망명자로 평생 유럽과 미국을 떠돌며 살았다. 생전 지은 업을 죽어서 영원히 되사는 것일까. 조국 아일랜드로부터, 태생지 더블린으로부터 그토록 멀리 떠나고자 했으나 그는 어제도 오늘도 이 도시의 심장 오코넬 대로 옆 킬모어 카페 앞을 걸어가는 모습 그대로 ‘더블린 사람들’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조이스. 나는 2005년 한여름과 한겨울, 두 차례에 걸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그를 찾아갔다. 그의 주위에는 그의 소설 주인공들처럼 언제나 걸어오고 걸어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시가지는 8월의 따사로운 노을에 잠기고, 거리에는 여름을 연상시키는 훈훈한 바람이 감돌았다. 일요일의 휴식을 위해 셔터를 내린 거리는 화사한 옷차림의 군중들로 북적였다. 찬란한 진주 같은 가로등은 전신주 꼭대기로부터 그 밑에서 끊임없이 모양과 색채가 변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직물 속으로 빛을 던졌고, 따뜻한 회색의 저녁 공기 속으로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웅얼거림 소리가 퍼져 나갔다.

    문학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소설을 단순히 ‘이야기’로 여긴다. 자신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거의 모두가 소설을 안 쓸 뿐이지, 쓴다면 몇 권쯤은 너끈히 될 것으로 믿는다. 여기에서 한 단계 나아가, 소설은 이야기이되 사실이라기보다 어느 부분 ‘과장하면서 덧댄 이야기’, 즉 ‘꾸며낸 이야기’로 인식하는데, 과장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주는 단계에 이르면 어떤 식으로든 ‘환상’이 솟아나게 마련이다. 이 환상의 창출이야말로 한 편의 소설로서의 핵심 ‘장치’가 성공적으로 안착됐다는 증표다.



    ‘더블린 사람들’의 소설들은 단순한 ‘이야기’의 차원과 ‘환상’의 창조 사이에 존재한다. 더블린이라는 도시, 그곳에 살며 떠도는 군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세밀하게, 그러나 어떠한 환상의 인위적인 장치도 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고증하기 때문이다. ‘더블린 사람들’은 이야기와 환상의 차원 너머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곧 소설로서의 ‘고현학(考現學)’의 세계가 그것이다. 옛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고고학(考古學)이라고 한다면, 현대(modern), 그러니까 현재 우리 삶의 양식과 체계의 근간이 된 근대의 산물(modernity)을 연구하는 학문이 고현학이다. 고현학의 대상은 산업혁명 이후 20세기 초 자본제 생산 체제하의 도시, 거리, 병원, 영화관, 카페, 서점 등이다. 15편의 단편과 중편으로 구성된 조이스의 첫 소설집 ‘더블린 사람들(1914)’은 모든 작품이 거리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주인공들은 도시의 곳곳을 걷고, 그 걷기를 통해서 존재한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에게 공손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는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킹즈 인의 중세풍 아치문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헨리에터가(街)를 걸어 내려갔다. (중략)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그는 단조롭고 비예술적인 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에 점점 가까이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한줄기 빛이 그의 마음의 지평에 아롱지기 시작했다. 그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서른둘이었다. (중략) 콜리스 식당 근처에 갔을 때 아까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하여 그는 엉거주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더블린에서의 방랑기

    고현학으로서의 조이스 소설의 백미는 그의 위대한 장편 ‘율리시스’(1922)다. 자전적 성장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을 발표함으로써 예술을 조국으로 삼고 자발적 유배자가 되어 파리로 떠난 작가답게, 조이스는 이 세기의 역작 ‘율리시스’의 첫 페이지 헌사로 “나는‘율리시스’ 속에 굉장히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추어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기세등등하게 써놓았다. 그는 고대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십여 년에 걸친 방랑의 이야기’를 레오폴트 블룸이라는 광고장이 사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더블린에서의 하루 방랑기’로 압축해버리는데, 20세기 모더니즘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하는 이 장편은 1904년 6월16일의 하루 떠돌기이지만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소설이 시작되는 해변의 탑, 소학교, 수많은 거리, 목욕탕, 장례 행렬과 묘지, 신문사, 국립도서관, 호텔, 주점, 역마차 오두막 등 주인공 사내가 걸어가는 더블린 거리 풍경과 들르는 곳들과 만나는 사람들의 기록이 ‘율리시스’인 셈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익숙하게 한국의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1930년대 근대 경성의 모던 보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동경에 유학을 다녀온 구보씨는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신세로 아침에 대학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서서는 광교통으로 해서 경성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들어와 그날 외출에서 들른 곳과 만난 사람들을 기록한다. 그것이 곧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떼어 들고, 그리고 문간으로 향하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 가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중략)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 하고 대답 못했던 것을 뉘우쳐 본다. (중략) 구보는 마침내 다리 모퉁이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일 있는 듯싶게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멈추었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하여 본다. (중략) 구보는, 약간 자신이 있는 듯싶은 걸음걸이로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은 이어 발표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의 원점에 해당한다. 혹자는 대작을 쓰기 위한 스케치(습작)로도 부른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로 도시 세태 기록의 고현학과 현기증 나는 패러디와 압축술로서의 환상, 나아가 자신의 조국을 800년 가까이 식민지로 삼은 영국의 자랑인 셰익스피어 문학의 2만 단어를 뛰어넘은 4만 단어 구사로 소설의 제국을 세웠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15편의 단편과 중편은 ‘고현학으로서의 도시 걷기 소설의 출발점에 그치지 않고 ‘에피퍼니(現顯)’라는 단편소설의 독특한 미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현현이란 원래 가톨릭 종교 용어로 주현절(主顯節·교회에서 행하는 1월6일의 축일. 예수가 30회 생일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공증받았음을 기념하는 날)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 용어로 자리를 옮기면, 복잡하게 얽힌 사태의 핵심이 오롯이 잡히는 순간, 또는 한 편의 작품이 거느린 상(象)이 문득 파악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보다 쉽게 우리의 현실에서 겪는 현상으로 표현하자면, 너무 강한 빛 속에, 또는 너무 깜깜한 어둠 속에 들어가면, 분간할 수 없이 먹먹해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물의 형체가 명료하게 눈에 잡히는 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아래 인용문 대괄호 안 강조 문장 참고). ‘더블린 사람들’이 20세기 초 단편소설 양식에 대한 새로운 실험으로 읽히는데, 바로 작가가 현현의 미학을 단편 소설의 핵심 장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집 친구 누나를 향한 소년의 혼란한 성장통을 그린 단편 ‘애러비’는 에피퍼니를 통한 격조 높은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1930년대 우리의 구보씨처럼 ‘더블린 사람들’을 옆구리에 끼고 만보객(漫步客)이 되어 2011년 서울의 청계천변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겨울도 봄도 아닌 2월에서 3월 사이, 무겁고 혼탁한 마음을 말갛게 헤쳐나가는 하나의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나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물건에 대한 나의 관심이 사실임을 좀 더 보여주기 위해 그 상점 앞에서 계속 서성거렸다. 그런 다음 나는 천천히 돌아서서 바자의 한가운데를 걸어 내려갔다.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두 닢을 6펜스짜리 동전 위에 떨어뜨렸다. 회랑의 한쪽 끝에서 불을 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홀 위쪽은 이제 완전히 깜깜해졌다. 그 어둠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노라니 나 자신이 허영에 쫓겨 농락당하는 한 마리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두 눈은 번민과 분노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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