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성찰 없는 나르시시즘의 끝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5-01-20 1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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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찰 없는 나르시시즘의 끝

    리어왕<br>윌리엄 셰익스피어, 박우수 옮김, 열린책들

    때로는 권력욕이나 재물에 대한 욕구보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리어왕이 그런 경우다. 그는 말년이 되자 더 이상 정치나 재산에 미련을 느끼지 못하고 ‘남은 생을 세 딸의 보살핌 속에서 편안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식들의 재산 싸움과 상속세를 걱정하는 현대사회의 부유층이나 권력자들과는 달리, 그는 ‘자식들의 보살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리어왕은 일찍 부인을 여읜 것으로 보이며, 오랫동안 딸들과 돈독한 관계를 지속해온 것처럼 행동한다. 그가 ‘이제 정치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딸들에게 영토와 재산을 모두 물려주자’고 판단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딸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내 딸들은 내가 왕일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상관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애정으로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아직 건강함에도 자식들에게 영토를 분할하는 엄청난 결심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갈등의 주원인은 리어왕이 딸들에게 재산을 분할하는 방식이다. 그는 ‘딸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크기에 따라 재산을 분할하겠다’고 선포한다. “이제 과인은 통치권과 영토의 소유권, 국사의 근심거리들을 모두 벗어버릴 생각이니/ 딸들아, 나에게 말해다오. 너희들 중 누가 과인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사랑의 분량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의 크기에 따라 왕국의 소유권을 배분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리어왕은 어쩌면 제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 누렸지만 ‘사랑’만은 얻지 못한, 애처로운 애정결핍증 환자가 아니었을까.

    ‘딸들아, 도대체 너희들 중 누가 나를 제일 사랑하니?’라는 질문의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막내딸 코딜리어뿐이었다. 이보다 더 황당한 질문이 또 있을까. 아이들에게 흔히 던지는 어른들의 짓궂은 질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 더 황당한 나르시시즘적 질문이다.



    첫째, 사랑의 질량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문제다. 둘째,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는 재산을 나눠주겠다는 계산 심리 또한 문제적이다. 셋째, 진짜 사랑의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화려한 수사학을 선택할 위험이 있다. 사랑을 간직한 자가 아니라 사랑을 가장(假裝)하는 자에게 가장 커다란 트로피가 돌아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리어왕의 허영과 어리석음

    언니들은 그 질문에 담긴 아비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이용한다. 장녀 고너릴은 온갖 번드르르한 문장을 동원해 거짓된 사랑을 표현한다. 세상 그 어떤 진귀한 보물들보다도, 자신이 지닌 목숨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둘째딸 리건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기쁨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훨씬 크다고 선언한다. “저는 폐하에 대한 사랑 안에서만 유일하게 행복할 따름입니다.”

    리어왕은 두 딸의 감언이설에 서린 탐욕을 알아채지 못한 채, 흡족한 기분으로 영토를 듬뿍듬뿍 나눠준다. 막내딸 또한 자신을 기쁘게 해주리라 짐작하고는, 어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표현해보라 재촉한다. “넌 무슨 말을 하려느냐? 말해보아라.”

    코딜리어는 어떤 과장된 사랑 표현도 늘어놓지 않고, 차라리 침묵하는 길을 택한다. “없습니다.” 리어왕은 당황한다. “없으면 아무것도 없느니라. 다시 말해보아라.” 코딜리어는 간접적으로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저의 가슴을 혀끝에 얹을 수 없으니 불행할 따름이옵니다.” “자식 된 도리로 폐하를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리어왕은 분노한다. 코딜리어는 어여쁘고, 사랑스럽고, 애교 넘치게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어떤 수사학도 동원하지 않고, 그저 투박한 진심만을 실어 고백한다. 리어왕은 그 투박함에 놀라 그 속에 담긴 보석 같은 진심을 알아보지 못한다.

    코딜리어는 ‘사랑의 분량에 따라 영토를 배분하겠다’는 아버지의 어리석음과 ‘아버지만을 사랑한다’면서 실제로는 재산 분할에 더 관심이 많은 언니들의 탐욕을 질타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리어왕에게 이렇게 들리고 만다. ‘저는 아버지를 언니들만큼 사랑하진 않아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그런 사랑을, 저는 드릴 수 없어요.’ 리어왕은 코딜리어의 고백에 놀라 절규한다. “이제 아비로서의 부정과 혈육의 인연을 모두 끊고/ 지금부터 영원토록/ 너와 나는 서로 남남이 될 것이다.”

    코딜리어에게 청혼한 버건디 공작은 아무런 지참금이 없는, 이제 ‘공주’라고도 할 수 없는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리어왕은 역시 코딜리어에게 구애 중이던 또 다른 신랑감인 프랑스 왕에게, 아예 ‘다른 신부감을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버건디 공작과는 달리,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솔직하고 용감한 코딜리어에게 매력을 느낀다. “가난하기에 가장 부자인, 아름다운 코딜리어여!/ 버림받기에 가장 귀하고, 경멸받기에 가장 사랑스러운 이여!/ 그대와 그대의 미덕을 내가 지금 갖겠소.”

    ‘더 얻어낼 것 없는 존재’

    코딜리어가 쫓겨남과 동시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자, 리건은 쐐기를 박는다. “망령이 드신 거야. 하긴, 아버지는 지금껏 스스로의 처지를 알아차린 적이 없었지.” 리건의 독설은 잔인하지만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다. 리어왕은 지금까지 자신의 처지를 한 번도 객관화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영토와 재산을 버리고 나면, 그에겐 무엇이 남을까. 딸들은 언젠가는 모두 결혼해 자신들의 가정을 꾸릴 텐데, 그럼 딸들이 모두 떠나버린다면 그에겐 무엇이 남을까. 그는 ‘화려한 퇴장’을 꿈꾸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딸들은 영토와 재산을 물려받자마자 돌변해 아버지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가치관 속에서는 ‘아버지=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는 존재’가 돼버린다. 리어왕은 시종 100명과 함께 고너릴과 리건의 집을 번갈아가며 한 달씩 묵을 생각이었지만, 딸들은 아버지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왕이라는 이름’과 ‘시종 100명’이 언제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지도 않은 가상의 위험을 만들어 아버지를 ‘위험인물’로 낙인찍는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아버지를 문전박대한 두 딸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리어왕은 점점 미쳐간다.

    리어왕의 진짜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철저하게 밑바닥까지 밀어붙여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가 누구인지 리어왕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것은 그가 딸들에게 모든 시종까지 다 빼앗긴 이후에도 그림자처럼 리어왕을 따른 ‘바보 광대’였다.

    너무 늦은 깨달음

    바보광대는 겉으로는 ‘바보’이자 ‘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오이디푸스’의 현자 테레이아시스처럼 작품 속에서 가장 현명한 예언을 도맡는 인물이다. 바보 광대는 리어왕에게 속속들이 ‘벌거벗은 진실’만을 말한다. “딸이 얼굴을 찡그려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때 아저씨는 그럴듯한 사람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숫자도 덧붙지 않는 0에 불과하잖아. 나는 바보 광대이지만 아저씨는 아무것도 아니니 내가 아저씨보다 낫지.”

    리어왕은 폭풍우 몰아치는 춥고 황량한 밤에 딸들의 문전박대로 걸인 신세가 되고나서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살을 에는 추위와 처음 경험해보는 배고픔 속에서, 아무리 초라해도 잠시나마 폭풍우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움막을 찾는 나그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춥구나. 얘야, 움막이 어디 있느냐? 궁핍은 더러운 것을 귀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구나. 자, 움막으로 가자.”

    그는 왕좌와 재산과 딸들과 시종들이 모두 곁에 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묻게 된다. “여기 누구 과인을 아는 이 없는가? 이건 리어가 아니다. 하!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건 아니군.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

    그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걸인 신세가 돼서야 이 세상 모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풍우를 견디는/ 도처에 흩어진 불쌍한 벌거숭이들아,/ 머리 둘 곳도 없고 뱃가죽은 달라붙은 채/ 구멍 뚫린 낡은 넝마를 입고서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느냐? 아! 여태 이런 생각을 못했구나.”

    리어왕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 순간은 너무 늦어버렸다. 그의 불행을 시린 가슴으로 바라보는 우리 현대인에게도, 각종 보험과 상조업체에 ‘죽음의 관리’를 맡기기 이전에, ‘나는 과연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앞으로의 삶은 어때야 하는지’를 좀 더 아프게 성찰해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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