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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없는 나르시시즘의 끝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성찰 없는 나르시시즘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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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얻어낼 것 없는 존재’

코딜리어가 쫓겨남과 동시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자, 리건은 쐐기를 박는다. “망령이 드신 거야. 하긴, 아버지는 지금껏 스스로의 처지를 알아차린 적이 없었지.” 리건의 독설은 잔인하지만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다. 리어왕은 지금까지 자신의 처지를 한 번도 객관화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영토와 재산을 버리고 나면, 그에겐 무엇이 남을까. 딸들은 언젠가는 모두 결혼해 자신들의 가정을 꾸릴 텐데, 그럼 딸들이 모두 떠나버린다면 그에겐 무엇이 남을까. 그는 ‘화려한 퇴장’을 꿈꾸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딸들은 영토와 재산을 물려받자마자 돌변해 아버지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가치관 속에서는 ‘아버지=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는 존재’가 돼버린다. 리어왕은 시종 100명과 함께 고너릴과 리건의 집을 번갈아가며 한 달씩 묵을 생각이었지만, 딸들은 아버지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왕이라는 이름’과 ‘시종 100명’이 언제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지도 않은 가상의 위험을 만들어 아버지를 ‘위험인물’로 낙인찍는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아버지를 문전박대한 두 딸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리어왕은 점점 미쳐간다.

리어왕의 진짜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철저하게 밑바닥까지 밀어붙여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가 누구인지 리어왕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것은 그가 딸들에게 모든 시종까지 다 빼앗긴 이후에도 그림자처럼 리어왕을 따른 ‘바보 광대’였다.

너무 늦은 깨달음



바보광대는 겉으로는 ‘바보’이자 ‘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오이디푸스’의 현자 테레이아시스처럼 작품 속에서 가장 현명한 예언을 도맡는 인물이다. 바보 광대는 리어왕에게 속속들이 ‘벌거벗은 진실’만을 말한다. “딸이 얼굴을 찡그려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때 아저씨는 그럴듯한 사람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숫자도 덧붙지 않는 0에 불과하잖아. 나는 바보 광대이지만 아저씨는 아무것도 아니니 내가 아저씨보다 낫지.”

리어왕은 폭풍우 몰아치는 춥고 황량한 밤에 딸들의 문전박대로 걸인 신세가 되고나서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살을 에는 추위와 처음 경험해보는 배고픔 속에서, 아무리 초라해도 잠시나마 폭풍우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움막을 찾는 나그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춥구나. 얘야, 움막이 어디 있느냐? 궁핍은 더러운 것을 귀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구나. 자, 움막으로 가자.”

그는 왕좌와 재산과 딸들과 시종들이 모두 곁에 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묻게 된다. “여기 누구 과인을 아는 이 없는가? 이건 리어가 아니다. 하!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건 아니군.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

그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걸인 신세가 돼서야 이 세상 모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풍우를 견디는/ 도처에 흩어진 불쌍한 벌거숭이들아,/ 머리 둘 곳도 없고 뱃가죽은 달라붙은 채/ 구멍 뚫린 낡은 넝마를 입고서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느냐? 아! 여태 이런 생각을 못했구나.”

리어왕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 순간은 너무 늦어버렸다. 그의 불행을 시린 가슴으로 바라보는 우리 현대인에게도, 각종 보험과 상조업체에 ‘죽음의 관리’를 맡기기 이전에, ‘나는 과연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앞으로의 삶은 어때야 하는지’를 좀 더 아프게 성찰해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신동아 201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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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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