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그땐 희망이라도 있었지…” 저성장 세대의 우울한 항변

영화 ‘국제시장’과 세대갈등

  • 강유정 | 영화평론가, 강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5-01-22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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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첫 1000만 영화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 일부 평론가들의 비판적 평가에서 시작된 정치적 논쟁이 보수-진보 이념대결로 부풀려지고 세대갈등으로 비화했다.
    • 그런데 세대갈등의 본질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다.
    “그땐  희망이라도 있었지…” 저성장  세대의  우울한  항변

    말다툼하다가 애국가가 울리자 벌떡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덕수(황정민 분)와 영자(김윤진 분) 부부.

    2015년 첫 번째 1000만 관객 돌파 영화가 탄생했다. 그것도 1월에 말이다. 지난해 12월 17일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이다. ‘국제시장’은 개봉 15일 만에 500만을 넘겼고, 16일 만에 600만, 18일 만에 700만, 21일 만에 800만, 25일째 900만을 돌파했다.

    이런 흥행 속도는 2013년 1월 개봉해 첫 1000만 영화가 된 ‘7번방의 선물’이나 2013년 12월 개봉한 ‘변호인’보다 더 빠르다. 윤제균 감독 개인으로서는 50도 안 된 나이에 1000만 관객을 두 번이나 동원한 진기록의 보유자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다른 작품은 2009년작 ‘해운대’). 평생 한 번도 가능할까 말까 한 대기록을 두 번이나 세웠으니, 이는 운 이상의 뛰어난 대중적 감각 덕분이라고 해야만 할 듯싶다.

    분명 대한민국은 영화에 미쳐 있다. 2014년의 기록만 봐도 그렇다. 한 해 동안 10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영화가 무려 네 편이었다. ‘변호인’ ‘겨울왕국’에서 시작된 열풍은 ‘명량’을 거쳐 ‘인터스텔라’까지 이어졌다. ‘인터스텔라’의 대중적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국제시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우리나라 인구를 5000만으로 잡고 영화 관람 가능한 인구를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도 그럴 것이 2014년 한 해 동안 영화를 본 관객이 2억 명을 넘었으니 단순 계산을 해봐도 한 사람당 영화를 네 편 보았다는 이야기이고, 석 달에 한 편은 봤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영화는 대한민국을 이야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사상’이 됐다.

    1000만 영화는 가족영화인 경우가 많다. 기존에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대체로 그렇다. 12세 이상 관람가이거나 전체 관람가가 많다는 점도 그런 분석에 한몫한다. 1000만 영화라는 것은 국민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보았고, 입소문도 내고, 공감을 얻었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평론가와 대중의 온도 차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제시장’의 개봉 초기 이 영화가 화제가 됐던 방식 말이다. 영화 전문가들과 언론은 대체로 ‘국제시장’에 대해 “흥행은 할 것 같지만 그다지 훌륭한 영화는 아니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 세대에 주는 위로 혹은 면죄부”(별 셋 : 이은선, ‘매거진M’), “산업화 시대의 정치적 반동성을 탈색한 채 부르는 헌창”(별 셋 : 황진미, ‘씨네21’)….

    별점 통계를 내보면 대략 3점 정도로 수렴된다. 그렇게 나쁜 점수는 아니다. 하지만 20자평을 먼저 읽자면 이 영화는 별 두 개도 시원찮아 보인다. 거의 0점이거나 1점도 과분하게 보이는 데,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거의 치명적이리만치 형편없다는 평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에 대한 평론가와 대중의 온도 차가 극명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온도 차는 평론가 허지웅 씨의 “정신승리” “토가 나온다” 발언으로 더욱 벌어졌고, 일부 종합편성채널이 허씨를 “좌파 평론가”라고 낙인찍으면서 심각한 정치적 논쟁으로 번졌다.

    영화 개봉 초기 불거진 논란은 분명 사람들에게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 면이 있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점에서 ‘국제시장’은 대중적인 밀도가 높은 작품이기에 굳이 이런 논란이 없었어도 흥행에는 꽤 성공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도대체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정치적 논쟁을 일으켰느냐는 것이며, 그 정치적 논쟁이라는 것이 세대 간 논쟁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점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국제시장’이 과연 세대 간 논쟁과 세대 격차를 느끼게 할 만한 작품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국 문제는 세대인 셈이다.

    아버지 세대의 희생

    ‘씨네21’의 황정민 인터뷰를 보면 12세에 피란길에 올랐다는 구절이 있다. 한국의 나이 셈 법칙을 따르자면 덕수는 1939년생 아니면 1940년생이 될 것이다. 흥남철수 시절 12세인 덕수는 45년생 여동생 윤막순을 업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려다 동생을 놓치고 만다. 이에 이미 배에 올랐던 아버지는 막내를 찾기 위해 다시 하선한다. 배에서 내리기 전 아버지는 아직은 어린 덕수에게 자신의 두루마기를 벗어주며 “내가 없으면,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다. 넌 이 집의 장남이다”라며 어깨를 두드린다. 평생 ‘가장’이라는 이름이 따라붙은 덕수의 고달픈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다행히 덕수에게는 먼저 부산으로 피란 와 ‘꽃분이네’라는 가게를 차린 고모가 있다. 고모가 미리 터를 잡아놨기에, 덕수 가족은 부산에 내려와 아사하거나 동사하지 않고 삶의 터전을 일궈나간다. 잃어버린 여동생이나 소식이 불분명한 아버지보다 더 급한 것은 남은 자식들의 생계다. 그래서 장남 덕수는 초등학생인 10대 초반부터 생계를 꾸려나간다. 슈샤인보이로 구두를 닦고, 뭇매를 견디며 사수한 초콜릿을 동생들의 입에 넣어 준다.

    영화가 보여주는 덕수의 삶은 1970, 80년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경유한다. 26세의 덕수는 광부로 서독에 가고, 70년대 베트남전 때는 상사 직원으로 근무한다. 그리고 80년대, 피란민으로서 이산가족 찾기의 주인공으로 막내 여동생 막순과 재회한다.

    덕수가 살아온 60여 년의 삶은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흥남철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14년 현재 부산 남포동 국제시장에서 끝난다. 흥남철수, 독일, 베트남, 이산가족 찾기라는 네 가지 서사적 매듭을 골간으로 그 사이의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괄호에 넣어진다. 가난한 피란 가족의 장남으로서 가계를 꾸려나가는 경제 이야기가 전경이 될 뿐 이면에 감춰진 다른 이야기는 다룰 겨를이 없다. 아니,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국제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 세대의 희생’이며, 그 희생을 바탕으로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는 경제적 윤택함이다.

    자식들에 대한 무관심

    “그땐  희망이라도 있었지…” 저성장  세대의  우울한  항변

    베트남전에 돈 벌러 뛰어든 덕수(맨 앞).

    아버지 덕수는 “이 고생을 우리 자식이 아닌 우리가 겪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라고 말한다. 1966년 덕수가 서독 광부 계약기간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후 곧 아버지가 됐으니 그 자식 세대는 우리가 ‘386’세대라고 부르는 67년생쯤 될 것이다. 결국 67년 이후 태어난 우리는 폐허 위에서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 부의 기반을 마련한 부모 세대에게 감사를 표해야만 한다.

    덕수는 우리가 흔히 근대화 세대라고 부르는 1940년에서 1949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군사정권 아래에서 한일국교 정상화 과정도 보았고,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출산 억제정책, 반공의식 함양을 거쳤고, 학력 수준도 과거에 비해 높아진 세대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덕수는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만나왔던 근대화 세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는 장면도 없고, 5·16이나 4·19와 같은 정치적 연대기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온 과거의 인물들이 대개 정치사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면 덕수는 거의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치적 면모를 빼고 묘사된 인물이다.

    대신 그 부재를 채우는 것이 바로 경제적 희생의 면모다. 덕수는 오로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가족의 희망을 건사하기 위해 돈을 벌어온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포기한 선장의 꿈은 자신의 인생을 희생했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에서 세대 갈등과 세대격차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도 사실 이 경제적인 부분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자식들에 대한 덕수의 무관심이다. 영화에서 아들, 며느리, 딸은 거의 액세서리나 다름없다. 이름도 불리지 않은 채 몇 장면에서만 등장하는데, 그나마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 손자손녀를 맡기러 오는 장면에서다. 자식들은 여행에 부모를 모시고 가지 않는다. 빈손으로 찾아와 아이들을 봐달라고 떠맡기곤 자기들끼리 훌쩍 떠나버린다.

    이 장면만 보자면, 386세대 자식들은 염치도 없을 뿐 아니라 이기적이다. 아버지 속도 모르고 가게를 팔라고 짜증 내는 아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반면 아버지 덕수는 투덜거리지만 관대하고 너그럽다. 이미 자신이 할아버지가 됐음에도 아버지 이야기에 눈물을 흘릴 만큼 효자이기도 하다. 가게 안 판다고 고집을 부린 이유도 결국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과 효 때문인 것을 보면, 덕수는 지금의 노인 세대 혹은 장년 세대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다.

    아들들은 카메라 앞에 등장하거나 말할 기회조차 거의 없다. 영화는 오로지 덕수의 영화이며 자식들은 그의 성공을 증명하는 상징일 뿐이다. 시집가기 위해 떼쓰는 막내 여동생보다도 비중이 낮다.

    자기 이익만 찾는 자식들과 모든 것을 희생해서 가계를 일군 아버지는 영화 ‘국제시장’ 저변에 깔린 일종의 전제다. 이 전제를 넘어 차이가 갈등이 되는 원인도 바로 이 ‘경제적 부분’이다. 말하자면, 덕수에게는 내려와 비빌 언덕, 고모의 ‘꽃분이네’가 있었다면, 지금 젊은이들에겐 그런 게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의 불만은 적어도, 아버지 세대에게는 불모지라는 희망이라도 있었다는 점이다. 불모지가 어떻게 희망이 되느냐고? 불모지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 평등한 가난을 의미한다.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이 가난하고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 아무것도 없었기에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기, 그들은 그런 희망의 시기를 살았다.

    말하자면 그땐,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학교 선생이나 은행원이 될 수 있었고, 옷감을 잘 골라서 최고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으며, 영어 한두 마디만 해도 먹고살 수 있었고, 설탕을 팔다가 재벌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기회의 시대는 1998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유효했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을 참고 견디면 조금 더 나아질 ‘내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바로 그 과거의 가능성에 대해 질투를 느낀다. 영화에서 덕수는 “이 고생을 내 자식이 아닌 내가 겪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덕수의 고생은 ‘미래를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투자’로 받아들여진다. 즉, 젊은이들의 절망이 세대 논쟁의 핵심인 것이다.

    감사도 여유다. 덕수 세대가 한국의 경제적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국민연금의 혜택과 경제발전의 과실을 함께 맛보고, 노력한 땀의 결실을 볼 수 있었던 행복한 세대이기도 하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 중 하나는 ‘국제시장’을 둘러싼 세대 간 갈등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30대 중반 이상의 중년층이 영화에서 민주화운동을 다루지 않은 점, 즉 정치적 시각으로 비판한다면, 30대 중반 이하의 세대는 ‘희망의 부재’를 토로한다.

    이는 지금 한국 사회의 세대갈등이 단순히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의 격차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각한 수준의 분절과 분열임을 뜻한다.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 회원의 대부분이 젊은이들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를 영화로 볼 수 없는 시대

    이데올로기는 세대를 초월한 공통의 이념이자 적이었다. 우리는 과거 반공, 경제, 민주주의와 같은 큰 이념을 공유해왔고 때론 그것 때문에 싸웠다. 하지만 이제 이런 공통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더는 힘을 쓰지 못한다. 개인의 생존이 가장 우선시되는 지금,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공통의 관심사는 경쟁력을 높이는 스펙이 되지 못한다. 희망이나 낙관도 스펙의 일부로 관리되고 꾸며진다. 살아가기 팍팍한 저성장의 시대, 그 시대의 갈등이 영화 한 편에 대한 감상평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는 팍팍한 시대, 우리는 그런 불편한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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